소설리스트

93화 (93/117)

#93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인사나 하자고 온 거 맞아.”

엘리엇이 시큰둥하게 답하며 내 재킷을 정리했다. 조금의 틀어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신중하게 넥타이를 가운데에 맞추고, 구겨진 칼라를 편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네 형은?”

이거 때문에 왔구나.

“마탑에. 급한 의뢰가 생겼다더라.”

“잘됐네.”

엘리엇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나는 그 ‘급한 의뢰’가 딜런의 이름으로 왔다는 것에 내 재산의 절반도 걸 수 있었다.

“네가 준비한 마법사는?”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했다. 피사 테콘은 아카데미 교장이기 이전에 마탑주였다. 그가 만들어 둔 장치가 있다면, 분명 마법으로 된 무언가일 텐데. 마법사 없이 무작정 내려가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였다.

목숨을 걸기는 했어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는 친구들이 머리를 맞댔다.

루이스는 교장을 붙잡는 걸 에르켈이 하고, 자신이 따라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고, 엘리엇은 지금이라도 입 무겁고 실력 좋은 마법사를 매수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모두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었다. 결국 아벨 얘기가 나왔다. 루이스는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솔직히 그게 제일 낫긴 해서….” 했다. 맞는 말이다. 아벨의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었다. 당장 엘리엇이 가문의 힘을 동원해서 급하게 데려올 수 있는 마법사보다도 그가 나을 것이다.

내가 함께 가 달라고 한다면 그가 거절할 리도 없고. 아벨은 내가 아카데미 교장실 지하로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황성 지하로 가고 싶다고 해도 군말 없이 따라올 테니까.

하지만 가족들 살려 보겠다고 분투하는 중에, 그를 끌어들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게다가, 내게는 더 편한 선택지가 있었다. 재능과 실력을 갖춘 마법사, 함께 지하로 내려갈 거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내게 빚진 게 있는 사람.

나는 세드릭 클라인의 이름을 꺼냈다. 아카데미 수석, 천재, 차기 마탑주. 여기까지만 두고 봐도 내가 그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물며 내가 수도를 떠나 있는 5년간 꾸준히 연락을 했던 걸 보면. 수도에 도착한 후 ‘씨씨’에게서 최근까지 편지가 와 있는 걸 보고 얼마나 기가 찼는지 모른다.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루이스가 기겁했다. 비명을 틀어막던 그는 한참 후 졸도할 것 같이 허옇게 뜬 얼굴로 “진심이야?” 했다. 엘리엇도 영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다행히 세드릭 클라인과 씨씨의 연결점을 아는 에르켈이 그들을 달랬다.

“걱정 말라니까.”

자신 있는 말투에 엘리엇이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엘리엇을 보며 아까부터 삼켜 둔 의문을 꺼냈다.

“근데 너, 혹시… 루시아를….”

“아니.”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한다. 엘리엇이 내게 그녀의 파트너를 제안한 건 둘째 치더라도, 엘리엇의 태도에서 로맨스를 찾아보기는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그 마음마저 이용하려 들 수도 있지 않나? 평소 행실을 생각해 보면 꽤 그럴듯한 가설이다.

내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걸 알았는지 그가 기껏 정리한 타이를 쥐어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말했다.

“요즘 내가 모르는 새에 로맨스 소설 읽기가 유행이라도 해?”

“뭐?”

“자꾸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몸이라도 풀어 둬.”

할 말을 마친 엘리엇이 떨어졌다. 뒤에 서 있던 루시아는 우리 대화를 듣지 않고 있다는 티를 내며 딴청을 피우는 중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답을 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것만 확인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둘에게 인사했다.

“그럼, 이따 보자.”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와 함께 멀어졌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달아올랐다.

*

잠입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당당함이다.

나는 가슴을 쭉 펴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 걸었다. 몇 년 동안 걸어 다녔던 복도에서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녀석은 어딘가 구린 놈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별개라,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움찔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움직임이 크지 않아 쉽게 눈치채지는 못하겠지만, 눈썰미가 좋다면 내가 어색함에 삐걱거리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볼 때도 느꼈지만. 처음 걸쳐보는 교복은 생각보다 더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다. 학부와 학년이 다르면 서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아 얼굴을 모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꾸 혹시나, 싶어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어차피 축제를 맞아 학생들도 교복을 벗어 던졌는데, 꼭 교복을 입어야 했던 걸까.

만약 도망칠 일이 생겼을 때, 얼굴만 가리면 상대가 학생이라고 착각할 거라는 장점을 생각해 보면 이게 맞기는 한데.

나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이미 좀 전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있어 방향을 틀었는데, 이번에는 여럿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복도를 걷는 발소리와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하기에 다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다들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축제를 즐기는데 왜 아직도 실내에 박혀 있는 걸까. 최대한 사람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돌아가느라 스트레스가 쌓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틀었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무리보다는 한 명과 마주치는 게 낫겠지.

기다시피 느린 속도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최대한 표정을 지우며 담담하게 걸었다.

곧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상대가 왜 그렇게 느리게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살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는 큰 짐과 함께였다. 두 팔을 벌려도 다 껴안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 버거워 보였고, 그 위로 비슷한 상자가 두 개 더 올라가 있었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지 흘러내리려는 걸 무릎으로 받쳐가며 걸으려니 속도가 날 수 없었다.

마침 얼굴까지 가려 앞을 볼 여유도 없어 보이니 잘 됐다고 지나가려 했다. 기다렸다는 듯 상자가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떨어지려는 상자 옆을 짚어 주었다.

“어, 아…!”

다행히 상자를 따라 비틀거리던 발도 중심을 잡았다. 반으로 묶어 장식한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아, 감사합니다.”

“…….”

“저기.”

넘어질 뻔한 학생은 고개를 상자 너머로 기울였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뭐지. 분명 누가 있었는데.

*

심장이 벌렁거려 튀어나올 뻔했다.

가려져 보이지 않던 머리카락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서 열린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한 사람 무게를 감당하게 된 나무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복도까지 들릴 정도는 아니었는지 갸웃거리던 여학생은 눈치채지 못했다.

창 너머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앙증맞고 귀여운 얼굴. 누구인지 떠올리기 위해 고민해야 했던 루시아와 달리,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어릴 때 그대로였다. 하마터면 헬레나와 마주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예쁘게 차려입었으면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어야지. 아무리 아카데미가 잠시 성을 내려놓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한다고 한들 겉치레다. 스왈튼가 여식에게 짐을 옮기라고 시킬 만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머리보다 몸이 빠르게 반응해서 다행이었다. 두껍고 단단한 가지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숨을 골랐다. 하필 직전에 루시아와 엘리엇이 함께 있는 걸 보고 헬레나를 생각한 탓일까. 만약 헬레나와 마주쳤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엘라. 이렇게 마주치다니 정말 기쁘다. 그동안 잘 지냈지?’ 정도? 그래 봤자 헬레나가 ‘그 교복은 뭐야?’ 한다면 빠져나갈 틈이 없다.

축제에 찾아온 엘리엇, 그와 함께 움직이는 루시아, 교복을 입고 수상하게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나. 도중에 자리를 비운 황자. 오래 걸리지 않아 뭔가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챌 텐데.

나는 장거리를 최고 속도로 달린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헬레나가 복도를 완전히 지나가고 나면 창틀로 뛰어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때,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를 까만 눈과 마주쳤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익숙한 동시에 낯설었다. ‘그 녀석’이었다.

기숙사와 마주 보는 본관 서쪽은 테라스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형태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바로 아래층에도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나는 상대의 입이 벌어지는 걸 보며 테라스로 뛰어내렸다.

훤칠하게 큰 키와 싸늘해 보이는 얼굴에 내가 알던 씨씨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독 까만 탓에 순해 보이던 눈 정도가 간신히 그때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세드릭 클라인의 입을 틀어막으며 넘어뜨렸다. 다른 곳은 쓸데없어져도 오늘 꼭 필요한 머리는 다치지 않게 목 뒤를 받친 채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세드릭 클라인은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누워 눈만 깜빡였다. 나는 몇 번인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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