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17)

#95

‘비밀을 만들면, 이름으로 부르게 해 주려고?’

‘애칭으로 부르게 해 줄게.’

그 말에 느슨하게 웃고 있던 세드릭 클라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함께 ‘나쁜 짓’을 하기 위해 바로 교장실로 이동했다. 꽤 묵직해 보일 정도로 두께감 있는 로브를 벗고, 벗어 둔 안경도 아무 데나 던져 버린 세드릭 클라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교장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문 앞의 엇갈린 검이 얌전히 검집에 꽂혀 있는 걸, 아니 정확히는 검집에 꽂혀 칭칭 묶인 걸 보며 “클로이네.” 했을 뿐이다.

루이스가 옆에서 들었다면 그것 보라고 소리를 지르며 기겁할 일이었다. 세드릭이 클로이의 중얼거림을 듣고 굳이 티 냈다는 얘기를 듣고 설마 싶었는데. 어쩌면 루이스의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성물을 보호하는 피사 테콘의 방은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했다. 거대한 천구의가 시선을 사로잡고 있기는 했지만, 으레 마법사의 방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아니었다. 마탑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마법사답지 않게 고급스럽고 깔끔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듯했다.

높은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과 은은하고 묵직한 향. 붉은빛이 도는 나무 책상과 가죽 소파는 언뜻 보아도 고급이었고, 바닥재마저 복도의 것과는 재질이 달랐다.

먼저 조치를 취해 두겠다고 했던 루이스의 말대로, 발걸음을 옮겨도 경보가 울리는 일은 없었다. 긴장감에 습관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린 채 교장실을 둘러보았다.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세드릭 클라인도 흥미가 동했는지 느릿하게 내부를 거닐었다.

“뭐가 필요해?”

“입구.”

“어디로 가는?”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벽에 붙은 채 움직이며 귀를 기울였다. 이래 봬도 청력은 꽤 쓸 만할 정도로 단련됐다. 특별한 재능은 아니었고, 스펠먼가 사유지였던 산을 구르며 터득했다. 3년 정도 됐을 때는 자주 접하는 발소리가 귀에 익어 적이라면 피해야 할 놈인지, 잡을 수 있는 놈인지 본능적으로 파악했고, 그것은 사냥을 할 때도 용이했다. 벽 너머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면 발소리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집중해 봐도 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두드려 보면 뭐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어디에 무슨 장치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움직일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게 검사의 방이라면 뒤져 보겠는데. 마법사의 방이라는 걸 의식하자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할지 짐작하는 게 어려웠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나는 루이스가 신호를 보내 주황색으로 변해 있는 반지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러던 중 작게 파닥거리는 소리가 기척에 잡혔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걸 잡아챘다.

몇 번 반항하듯 날갯짓하다 축 처진 것은 나비 모양으로 접힌 종이였다. 왜인지 익숙한 색의 머리카락이 더듬이 부분에 감겨 있었지만, 착각일 거다.

[안녕, 친구.

멀리서 연설 소리가 들리네. 아까는 괜찮았는데 슬슬 심장이 두근거려. 영감님 잘 붙잡을 수 있게 파이팅이라도 한 번 더 하고 올 걸 그랬지.

사실 네 머리카락을 좀 주웠어. 그게 있어야 너한테 반응해서 이게 날아가서…. 뽑은 게 효과가 좋긴 한데, 그러다 네가 눈이라도 뜨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서. 아무튼 뽑은 게 아니니 부디 용서 바람.

그놈과 함께 움직인다고 햇으니길게설명않을게 알아들을거야안되면그냥 보여줘

모쪼록조시ㅁ하!]

뒤로 갈수록 마음이 급해졌는지, 글씨체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실제로 마지막 줄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휘갈긴 채다. 나는 루이스가 남긴 쪽지를 들고 세드릭 클라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얌전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

글씨가 날아가는 판국에 그림이 제대로 보일 리는 없다. 그래도 일그러진 모양을 토대로 짐작하기로는 그랬다. 그나마 쪽지 중 그것에 제일 심혈을 기울인 듯 보였다. 이게 루이스가 보내려던 내용 중 제일 중요하다는 거겠지. 내가 기대 없이 중얼거리자 세드릭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이가 그래?”

“음.”

“많이 친한가 봐….”

나와 마주친 눈이 곧 아래를 향한다. 얼굴은 기가 죽은 듯 침울해 보이는데, 손은 망설임 없이 책장의 책을 기울여 뽑았다. 그에 푸른색 스파크가 타다닥, 튀다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높여 그를 다그칠 뻔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을 왜 건드려? 그러나 잔뜩 긴장해 어깨를 움츠린 것이 우스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별 모양으로 다섯 개의 점에 은폐 마법을 걸어 뒀다는 뜻 같아. 마침 좀… 이상한 곳이 있거든.”

까만 눈이 교장실을 훑는다. 시선이 잠깐씩 멈추는 곳이 얼추 다섯 개 정도였다.

“…앞으로는 말하고 뽑아.”

“응….”

그렇게 피사 테콘의 마법을 ‘파괴하지 않고, 풀기만 하기 위해’ 세드릭 클라인이 작업을 시작했다.

꼬인 실을 잘라 버리는 건 쉽지만, 푸는 건 어렵다. 만약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고 해도 피사 테콘이 당장 방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을 셈이었다. 언젠가 성물이 사라진 걸 알아채겠지만, 이왕이면 시간을 끌 수 있으면 좋으니까.

그렇게 네 번째 마법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약발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진 것인지, 마지막 마법을 앞두고 강짜를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태껏 잘해 놓고 삐친 세드릭 클라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칭찬해 달라고 해서 칭찬해 줘, 그걸로 모자라서 박수도 쳐 줘. 더 이상 뭘 해 달라는 거야.

하지만 마지막 하나를 남겨 둔 세드릭도 강짜를 부렸다.

다섯 번째 마법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듯 입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돌려 버린 모습에 가까이 다가갔다.

뺨에 손을 얹어 돌린 고개를 다시 바로잡았다. 손바닥에 감긴 뺨이 생각보다 말랑하고 차졌다. 세드릭은 나름대로 버텼지만,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 마수와 맞서던 내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점이 그의 심기를 더 거슬렀는지 이번에는 눈을 피하는 걸로 대신했다.

툭툭,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쪽을 보라고 채근하자 눈을 내리깐 채 눈동자만 굴린다. 가까이에서 본 속눈썹이 광대에 그늘을 만들 만큼 길고 섬세했다. 말없이 얼굴만 가까이하자 곧 까만 눈을 덮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색 옅은 입술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달싹거렸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

“엘리엇.”

“…….”

“엘리엇이라고 불러야지.”

계속 모른 척할 거면 나도 거기에 맞춰서 굴 거고, 결국 네가 도움을 주는 건 ‘르웰린 에드윌’이 아니라 ‘엘리엇 딜런’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몇 번 쓰다듬었다.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보다 성의 없는 손길에도 세드릭 클라인은 윤기 흐르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한껏 부끄러운 척을 했다.

“…엘리엇.”

“잘했어. 대단하다는 거 빈말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어?”

자세는 아까와 비슷한데 내용은 다르다. 세드릭이 내 손바닥에 자기 뺨을 들이대며 비볐다. 개보다는 고양이 같다. 나는 달착지근한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 훌륭한 예시가 있으니 따라 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황태자 특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눈을 맞췄다.

“그런데 중간에 멈추면, 지금까지 어쨌든 다 소용없는 거잖아. 열심히, 잘했으니 됐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열심히 해 줄 거지? 속살거림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자마자 미련 없이 손을 뗐다. 따라오듯 아쉬움이 잔뜩 담긴 시선이 들러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건 아껴서 사용해야지, 자주 해 줘 봤자 더한 걸 기대하게 만들 뿐이었다.

*

세드릭 클라인은 얌전히 마지막 봉인을 해제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을 바짝 긴장시켰으나 이번에도 짧은 스파크가 일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조용한 교장실을 찬찬히 훑은 나는 세드릭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함정이 더 있다고 말하지 않아서 한참 헤매게 만든 후, 내가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느냐 물으면 그제야 ‘물어보지 않길래.’ 하고 앙큼을 떨고도 남을 놈이었다. 내가 본인을 의심스럽게 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드릭은 딴청을 피우며 루이스가 남겨 둔 쪽지만 만지작거렸다.

“애칭을 부르려면 나쁜 짓을 더 해야 해?”

“응. 한참.”

내 말에 세드릭은 교장실 한가운데에 섰다. 나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다 옆으로 갔다. 하얗고 멍한 얼굴 덕에 유약해 보이는 세드릭마저 나보다 키가 반 뼘 이상 차이 날 정도로 컸다. 나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그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길고 두께감 있는 옷 덕에 몸이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밖으로 빠져나온 손목과 목, 다리도 마른 편이었다. 그래도 골격이 큰 편인지, 아니면 아벨처럼 방 안에 박혀 연구만 한 건 아닌지 볼품없지 않았다.

“하고 나면 내 애칭도 불러 줄 거야?”

“그건 봐서.”

나는 여유를 가장하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얼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라고 세드릭을 재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닦인 감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얌전 떨고 있는 세드릭은 내가 급해 죽겠다는 티를 내면 그게 재미있다고 더 시간을 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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