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루이스가 남긴 쪽지가 세드릭의 손에서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새 모양이었다. 나풀거리던 나비보다 더 힘차게 파닥이며 떠오른 쪽지는 피사 테콘의 책장으로 날아가 부리로 책등을 찍었다.
그러자마자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점점 진동이 다가왔고, 곧 교장실 바닥에 원형이 여러 개 겹쳐 그려졌다. 나와 세드릭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파사삭, 튀는 소리와 함께 고대어가 간헐적으로 올라왔다. 우리가 선 곳은 거대한 마법진의 중앙이었다.
원형으로 그려진 선의 바깥쪽부터 바닥이 갈라졌다. 칸마다 왼쪽, 오른쪽으로 멋대로 비틀리던 바닥은 가운데로 올수록 더 깊게 내려갔다. 이대로 내가 선 곳까지 갑자기 훅 꺼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 달리 정확히 방의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여유 있게 설 만한 공간만 남겨 두고 바닥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약간의 바닥만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둡게 꺼진 아래를 살폈다. 눈앞이 아찔해질 것 같은 깊이였다. 정황상 저 아래로 뛰어내려야 하는 것 같은데. 윗부분은 매끈해 그대로 미끄러질 것처럼 생겼지만, 일정 구간을 지나면 암벽이 드러나 있었다. 발을 디디며 속도를 줄이면 다치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유 마법 따위는 눈을 감고도 해내는 마법사를 옆에 두고 내가 어두운 곳을 달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뭐 하냐는 의미로 세드릭을 바라보았고, 세드릭은 내 어깨에 양팔을 둘렀다.
“…뭐 하는 거야?”
“음… 고소 공포증.”
“고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얼이 빠졌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놈이 바닥이 꺼질 거라는 걸 알면서 그 위에 서?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만 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처럼 웃음을 뱉었다. 세드릭 자기 팔뚝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기울이며 불쌍한 척, 눈썹을 내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내려가다가 무서워서… 떨어지면 어떡해.”
그냥 떨어져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어쩌라는 거야?’ 하고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까마득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곳에 있는 함정은 마법사가 만든 것. 그 함정을 깨는 것 자체는 세드릭이 없대도 가능하겠지만, 성물을 가지고 나올 만큼 시간을 벌려면 그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 줄까?”
내 말에 세드릭이 본인의 양손을 내 목 뒤에서 겹치며 끌어왔다. 살살 미소를 짓자 세드릭의 볼에 보조개가 옅게 팼다.
“안아 줘.”
*
나는 결국 세드릭의 요청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나보다 키가 훌쩍 큰 녀석을 들고 뛰어내리기 위해서는 그의 무릎 뒤를 받쳐 완전히 안아 들어야 했다.
남자끼리 공주님 안기라니. 하다, 하다 이제…. 내가 자의적으로 남자를, 그것도 원작의 공 중 하나를 가뿐하게 안고 다닐 줄은 몰랐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에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산에서 험하게 구르다 보면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절벽을 올라야 하는 일은 흔했다.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내려가는 것은 훨씬 수월했다.
내가 아래를 살피며 발을 디딜 때마다 멈추자 세드릭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곧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이 떠올랐다. 덕분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도 벽을 구성한 암석의 색을 구분할 수 있었고, 헤매는 시간이 줄어들자 내려가는 것에 속도가 붙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으시다더니. 나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무서워서 마법도 못 쓰겠다고 하던 세드릭 클라인은 떨기는커녕 평온하게 안겨 있었다. 그 얼굴이 얄미워 괜히 건드려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무섭다면서?”
“무서워….”
세드릭은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내 가슴에 기댔다. 불빛 덕에 내리깐 속눈썹이 하얀 뺨에 그늘을 만들었다. 자세히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상황이 제 뜻대로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얌전한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깊은 낭떠러지라고 해도 결국 건물 몇 층짜리 높이에 불과했다. 오래지 않아 바닥이 가까워졌다. 나는 무릎을 숙여 가뿐하게 착지한 후, 찰싹 붙어 있는 세드릭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도 그가 여전히 목 뒤로 팔을 감고 있어 손수 떼어내야 했다.
세드릭은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중요한 게 있는데 왜 얕은 데 두지….”
듣지 못한 척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려오는 길은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 거칠었는데, 도착한 아래는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켰다.
상아색 바닥은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닦여 있었고, 거대한 기둥들은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길고 넓은 길 양옆에는 수로가 있었고, 그곳에는 물 대신 금속처럼 보이는 은회색의 불투명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세드릭에게 불빛을 꺼 달라고 요청했다. 작은 불빛들이 타는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만들어낸 조명이 꺼져도 내부는 여전히 밝았다.
고개를 들면 천장에서 일렁거리며 비추는 빛무리가 보였다. 높은 천장 근처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빛은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생물들이 모여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천이 펄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또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려온 깊이를 생각해 보면 햇빛이 닿을 리 없으니, 가짜겠지만.
저것을 만든 목적이 신성한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었다면 성공이다. 세심한 조각 하나 없이도 내부는 웅장한 신전처럼 보였다. 공을 많이 들였겠다는 감상 이후, 과연 이걸 누가, 왜 만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려오기 전까지 아래층 또한 피사 테콘이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아니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지 상태는 좋았지만, 건물에서는 딱 잡아 말하기 힘든 세월이 느껴졌다. 이건 최근에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다.
양식 또한 오래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식 없는 거대한 기둥이 넓은 천장을 받치고, 천장에 거대한 타일을 깐 것처럼 같은 규격의 그림을 이은 양식은 황성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고대, 신화 시대에나 쓰였다는 뜻이다.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성물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내가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연신 옆에서 깔짝거리던 세드릭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용의 신전을 따라 했나 봐.”
“용의, 신전?”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인상을 썼다. 안타깝게도 떠나 있는 5년간 검에만 죽어라 매달린 탓에, 내 지식은 10대 초반 급하게 욱여넣은 것에 멈춰 있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그가 손가락을 뻗어 천장을 가리켰다.
“응… 갈라의 신전.”
그가 가리킨 곳에는 창을 든 남자가 손을 뻗고 있었는데, 색이 같은 돌을 조각해 둔 것이라 쉽게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천장에서 뻗어 나온 빛이 그의 후광처럼 비쳤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살폈고, 오래지 않아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구름에 쌓여 하늘을 가르며 빛과 함께 나타난 신. 천공신 갈라다.
“보헨데메르?”
제국에는 국교가 없지만, 그와 비슷하게 여겨지는 종교는 있었다. 첫째로는 제국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며 친숙한 태양신 야캅이다. 야캅을 기리는 태양제가 황제의 탄신일과 함께 진행될 정도이니, 그 위세에 대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둘째가 신들의 왕 갈라다.
‘시작’의 일곱 자식 중 하나인 갈라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하는 자’라고 불리며 농사, 심판, 날씨를 비롯해 아무튼 좋다는 건 다 주관하는 신이다. 덕분에 신화의 시대를 지나, 이제 이름마저 잊힌 신이 많은 상황에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신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신 중 하나였다. 제국에서도 갈라를 존중해 그를 모시는 최고 사제를 후작에 준하게 대우했다.
보헨데메르 신전은 그런 갈라의 최고 신전이었다. 일반적으로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 세드릭이 ‘용의 신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위상을 가진 곳이라면 그 정도는 돼야겠지.
“응.”
끼이익.
세드릭이 보헨데메르 신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에 대해 말해 주던 중 어디선가 찢어지는 것처럼 날카롭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하더니 곧 가까워졌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게 빨랐다.
캬악!
엄청난 속도로 오던 것을 베자 갈라진 것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퍼드덕거리는 날개는 새까맸고, 몸체에 비해 컸다. 까마귀 정도 크기인 것은 새의 부리를 가졌는데, 특이하게 날개는 박쥐처럼 피막이었다. 갈라진 면은 그저 까맣고, 피도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짜 생물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낸 것인 듯했다.
갑자기 뭔가 튀어나올 줄은 몰라 당황했지만 대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곧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몸이 갈라지고도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앓는 소리를 내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갓 태어난 것처럼 여리던 날개는 곧 원래 있던 것처럼 단단하게 커졌고, 곧이어 두 마리의 새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