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17)

#97

얼굴이 없던 쪽에서는 꾸물거리며 얼굴이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자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저게, 뭐야?”

“엘리엇.”

내 옆에 붙은 세드릭을 반사적으로 뒤에 세우고 앞을 지키듯 막자, 그가 나를 부르며 소매를 잡았다. 순간 엘리엇 이름이 왜 나오나 했던 나는 내가 그에게 댄 것이 엘리엇의 이름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말해.”

세드릭을 옆에 두고도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까마귀와 박쥐를 합쳐 둔 것처럼 생긴 새가 다시 날아들까 검을 들었다.

“에네로는 하나의 마법석을 갈아서 나온 가루로 만든 유기체라….”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신경을 긁어대는 울음소리가 멀리서,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나는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거대한 괴수를 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모처럼 손에 땀이 났다. 내 뒤로 바짝 붙은 세드릭이 마저 속삭였다.

“단체로 움직여.”

말보다는 행동이 빨랐다. 나는 뒤돌아 세드릭의 허리를 낚아채고 그대로 복도를 달렸다. 세드릭은 얌전히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가 뭔가 했는지,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눈앞을 지나가기 무섭게 검은 새들이 달려들었다.

*

살면서 새를 무서워해 본 적은 없었다. 인간보다 큰 괴수종이라면 모를까, 까마귀 정도야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수십을 넘어 족히 백 마리는 되는 새 떼가 단체로 나를 향해 달려든다면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캬악!

“이, 미친!”

나는 또다시 깨진 보호막으로 부리를 들이민 에네로를 검등으로 쳐냈다. 베면 시간이 지난 후 갈라진 만큼 숫자가 늘어나니 함부로 검을 휘둘러댈 수 없었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세드릭의 보호막 정도였는데, 몇 겹을 견고하게 쌓을 여유를 주지 않으니 빠르게 한 겹을 둘러 시간을 버는 게 다였다.

정신없는 상황에 무언 마법을 포기한 세드릭은 연신 마법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언 마법보다는 단어를 내뱉는 게, 단어보다는 문장을 내뱉을 때 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처음에는 무언으로 보호막을 두르고, 그다음은 ‘벽’ 정도나 외치던 세드릭은 이제 기도문처럼 들리는 긴 문장을 읊고 있었다.

차마 보호막을 쳐 주고 있는 그에게 자신의 발로 달리라고 할 수 없어 그를 둘러업은 채 달렸다. 그보다 무거운 걸 달고 훈련한 적도 많아 딱히 어렵지는 않았으나 달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 이외에 다른 행동을 취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숫자라도 좀 줄어들면 상대를 해 보겠는데, 넓은 복도에는 저것들을 따돌릴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다.

에네로가 부리를 크게 벌리며 팔을 물었다. 붉은 눈은 살아 있는 생물의 것이 아닌 듯했다. 팔을 휘두르는데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덕에 결국 검 손잡이로 머리를 쳐서 떨어뜨려야 했다. 다행히 살점까지 뜯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옷은 멀쩡하지 못했다. 휑하게 드러난 팔뚝으로 피가 흘렀다.

“언제까지 달려야 하는데! 저걸 없앨 방법이 없어?”

“견고한 벽이… 에네로는 시전자의 마법을 차단하기 전까지 죽지 않아. 벽이 우리의 적을 가로막고….”

불퉁한 목소리를 낼 때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기력이 없다시피 하던 세드릭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무언 마법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던 것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분한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학부생인 그가 마탑주의 마법을 간단히 파훼하기는 힘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위에 있던 봉인은 간단히 풀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은 어차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다리가 끌리지 않게 고쳐 안으며 다시 힘을 냈다. 세드릭은 긴 주문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일회성 보호막을 만들었다.

보호막이 깨지고, 내가 검을 휘둘러 에네로를 쳐내면 바로 새로운 보호막이 들어온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앞을 막는 것들만 자동차 와이퍼처럼 쳐냈다. 그리고 드디어 세드릭이 주문을 완성했다.

“…가로막아, 넘지 못하게 되리라.”

강한 힘이 몸을 앞으로 죽 밀어냈다. 곧바로 뒤를 돌아 다가올 적들을 노려보았지만, 에네로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다가오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안간힘을 다해 달려들고 있는지 머리를 박고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자 기가 질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리는 내 위에 얌전히 올라탄 세드릭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번에는 칭찬해 주지 않고 넘어가기 힘들어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어린 짐승처럼 내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잘했어?”

“잘했어.”

“그럼….”

나는 그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머리를 끌어왔다. 하얀 이마는 힘들게 도망친 후에도 보송보송했다. 그곳에 입 맞추는 시간은 짧았지만, 동시에 시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입을 맞춰 놓고 밀쳐내지 않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이건 그냥 벽이다. 이건 그냥 벽이고, 무생물이다. 이마에 입 맞추는 정도는 가족 간에도 흔히 할 수 있는 친분의 표시니 괜찮다.

그런데 좋아할 줄 알았던 세드릭의 반응은 생각과 달랐다. 미묘하게 내려간 입꼬리와 힘이 들어간 눈썹. 뭐가 또 마땅치 않아 보이는 반응에 울컥할 뻔했다. 눈 딱 감고 입술까지 내줬더니.

“그 반응은 뭐야?”

“아니, 그냥.”

표정을 갈무리하고 평소의 맹한 얼굴로 돌아온 세드릭이 말했다.

“다른 데서도 자주 칭찬해?”

그러니까…. 질투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속으로 ‘정말 가지가지….’ 하는 말을 삼킨 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아니.”

내 말에 바로 반짝거리며 밝아진 얼굴이 웃겼다. 나는 그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일일이 칭찬 안 해 줘도 알아서 잘하더라고.”

입을 다문 세드릭이 조용히 따라왔다.

*

복도를 한참 달렸더니 끝에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넓은 광장 같은 복도는 어느 순간부터 급격하게 좁아졌다. 신전을 연상시키던 공간이 끝나면서 어느새 암석으로 뒤덮인 곳이 나왔다. 천장은 암석에 먹히듯 끊겼고, 내부는 어두워졌다. 세드릭은 다시 반딧불 같은 불빛을 켰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던 바닥은 군데군데 깨져 발을 디딜 곳을 골라야 했다. 그 정도야 문제될 게 없었으나, 암석이 갈수록 낮아져 허리를 숙여야 했다. 폭도 매우 좁아 두 사람이 한 번에 통과할 수 없었다. 내가 앞장서고, 세드릭이 뒤를 따라왔다. 멀리서 들리던 에네로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걸 대신하듯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처럼 소리가 크게 울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일일이 어깨가 움찔거렸다. 퀴퀴하고 비린 냄새도 가까워졌다. 제대로 된 관문이 나오기도 전에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으니, 앞으로도 뭐가 나올지 모른다.

나는 습기로 미끌거리는 바닥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위협이 가깝다는 생각에 저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호흡이 느려졌다. 검을 잡고 싶었지만 세드릭이 맞잡은 손을 통 놔주지 않아 오른손을 포기해야 했다. 왼손으로도 검은 뽑을 수 있다지만, 반응 속도에 차이가 날 텐데. 아쉬움은 있지만 이번에는 이 녀석도 긴장하고 있겠지 싶어 내버려 두었다.

갈수록 이게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몸을 구기다시피 쭈그려 좁은 부분을 통과하고 있는데 세드릭이 힘주어 손을 잡았다.

“…엘리엇.”

“말해.”

그는 용건을 말하는 대신 잡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쪽을 봐 달라는 거다. 나는 입김을 불어 앞머리를 날리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친해졌는데, 상냥하게 말해야지.”

혹시 젊은 나이에 마탑주가 될 정도의 재능을 얻기 위해서는 양심을 팔아야 하나? 나는 세드릭 클라인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가 바라는 대로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니? 급한 용건이 갑자기 샘솟기라도 한 거니?”

내가 돌아보기만 기다렸다는 듯 세드릭은 대꾸하지 않고 내 이마에 손을 댔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엄지손가락이 느릿하게 내 이마를 문질렀다. 몸을 숙이고 있는 탓에 비슷한 눈높이에 있는 세드릭의 얼굴은 어떠한 사심도 없다는 듯 고아했다.

곧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갑고 이질적인 기운이 몸을 덮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그가 내게 마법을 사용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좋은 거야.”

“보호 마법?”

“응.”

세드릭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올라갔다. 아까 남들은 알아서 잘한다는 말이 효과가 제법 큰 모양이었다. 요청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긴박한 상황도 아닌데 알아서 마법까지 걸다니.

물론 그가 한 마법에 단순히 보호하는 기능만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나는 무려 친형제가 건 위치 추적 마법도 겪어 본 사람이었다.

“하는 김에 뭐, 다른 것도 같이 하고?”

그 말에 세드릭은 미친놈답게 예쁘게 웃었다. 그러니까, 예쁘기는 정말 예뻤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은 접히면서 만들어내는 모양새는 처연해 보였고, 그 처연함은 사람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겸사겸사….”

목소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만큼 작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조심스럽다고 느낄 정도였다. 가증스럽기는. 나는 대충 감사를 표하고 다시 돌아섰다. 세드릭이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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