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좁은 곳은 곧 끝났다. 완전히 빠져나오자 내부는 처음처럼 다시 넓게 트였다. 복도와 달리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지만, 천장이 높고 넓어 답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천장에 빛이 일렁거렸는데, 햇빛처럼 밝게 보이던 아까와 달리 푸르스름하고 어두웠다.
주변을 살피던 나는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석상에 헛웃음을 지었다.
석상은 고개를 완전히 꺾고 나서야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내가 옆에 선다면 발등이나 넘을 수 있을까 싶었다. 두 개의 석상 모두 얼굴 부분이 부서져 있었는데, 한때 가장 높은 곳에 있었을 얼굴은 반이 갈라져 있었고, 떨어진 조각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각이 나 있었다.
각각 창과 책을 든 석상이 비스듬히 마주 보는 사이에 문이 있었다.
거대한 만큼 두껍고, 그만큼 무겁겠지. 나는 문과 석상, 천장을 차례로 훑었다. 우선 저게 정말 문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괜히 저걸 힘들게 열었는데 진짜 입구는 따로 있다는 식의 함정이라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의뭉스러운 현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 부분에는 나보다 피사 테콘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나을 테니까.
“저게 입구가 맞을까?”
“맞을 거야. 안쪽에서 마력도 느껴지고…. 음, 나이 든 마법사는 ‘문’은 반드시 열리고, 그 너머에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는 식으로 언어에 집착하니까….”
나는 석상을 가리켰다.
“저거, 마법으로 치울 수 있어?”
왼쪽에 있는 석상은 당장이라도 창을 바닥에 내리꽂을 것처럼 들고 있었고, 오른쪽에 있는 석상의 손이 향하는 각도도 예사롭지 않다. 뻔하다. 아무 대비 없이 저 문 가까이에 갔다간 창에 꿰여 죽거나, 아니, 정확히는 창에 깔려 죽거나 마법이 발동될 것이다.
세드릭의 말대로라면 피사 테콘도 저곳을 통해 드나들어야 한다. 뭔가 들어가는 방법이 있을 거다. 노인네가 힘으로 문을 열 수 있을 리 없으니, 그 방법은 마법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컸다.
고개를 기울이던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아니라고?”
이게 또 보상이 부족하다고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세드릭은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냐는 듯 슬픈 얼굴로 말했다.
“교장이 만든 게 아닌 거 같은데…. 되게, 낯설어.”
세드릭은 천천히 석상과 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에게 손을 붙잡힌 나는 함께 이끌려 갔다. 문에 다가갈수록 바닥에 물이 많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응. 요즘 쓰는 마법이 아니야.”
그가 문 근처에 있는 고대어를 읽더니 손을 뻗었다. 작은 구체의 빛이 손에서 퉁, 가볍게 떨어져 문으로 날아갔다. 벽처럼 거대한 문에 닿은 빛은 스며들더니 곧 좁은 틈새로 번졌다. 빛이 그린 작은 글자와 문양이 문을 넘어 더 위로, 아래로 뻗자 문 한쪽이 천천히 열렸다.
문을 여는 것부터 난관일 거라는 예측과 달리 지나치게 수월했다. 나는 미심쩍게 문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왜 문이 한쪽만 열렸는지 알 수 없었는데, 딱 반만큼만 통로가 있었다.
쿵!
갑작스럽게 울리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려던 세드릭이 보이지 않고, 거대한 창에 입구가 가로막혀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 아래 깔린 건 아니겠지. 나는 급하게 창 쪽으로 다가갔다. 아래로 삐져나온 옷이나, 피는 없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괜찮은 거야?”
그를 곱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돕기 위해 따라온 녀석이 크게 다치거나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나는 창에 손을 얹고 밀어냈다. 약간 기울기는 했으나 완전히 치울 수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정 안 되면 잘라낼 생각이었다.
“세드릭! 대답해!”
“…괜찮아.”
목소리는 멀쩡했다. 다행히 밑에 깔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긴장이 확 풀려 벽에 몸을 기댔다. 왜 한 번에 답을 안 하고 난리야.
“따로 들어가야 하는 거 같아. 음, 먼저 가면… 반대쪽으로 갈게.”
문 한쪽마다 갈 수 있는 길이 갈라져 있는 듯했다. 그러면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두 명까지라는 걸까. 힘을 합치겠다고 여럿이 왔어도 여기서 가로막혔겠다.
*
복도는 길지 않았다. 나는 곧 정사각형 모양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정사각형 두 개가 대칭으로 붙어있는 형태였다. 방의 벽과 바닥은 투명했지만 깜깜해서 밖을 볼 수는 없었다. 그나마 바닥에 드문드문 암석이 비쳤다.
두 방 사이에는 넓은 간격으로 창처럼 가늘고 긴 기둥이 서 있고, 방의 정면에는 양손으로 검을 든 석상이 있었다. 이번 석상은 문밖을 지키고 선 것들과 달리 사람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기둥 근처로 다가가 보았지만, 역시나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에 막힌 듯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모서리마다 기웃거려도 아무것도 발동되지 않았다. 방은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세드릭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평소 피사 테콘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내려온 것일까.
오래지 않아 세드릭이 방에 들어왔다. 그는 깨나 신경질적인 태도로 옷을 털어내다가, 나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
그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웅웅거리는 소리만 나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드릭은 뭘 하든 행동이 느릿하고 움직임이 적었다. 그가 입술을 벙긋거리는 모양을 읽어내기 힘들었다. 입과 귀를 한 번씩 가리키고 두 팔을 교차해 엑스 자를 만들자 그도 사태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고민하던 그는 곧 방법을 찾았다는 듯 불꽃을 쏘아냈다. 야심차게 공중을 가르며 글자를 그리는 불꽃에 감탄하며 마법이 역시 쓸 데가 많다고 감탄한 것도 잠시. 세드릭의 글자는 ‘이거 부술….’에서 멈췄다. 불꽃은 산소가 사라진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세드릭이 이번에는 얼음을 띄웠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금속, 전기, 나무. 온갖 마법이 세드릭의 손에서 튀어나왔으나 결과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허 웃었다. 마탑주 영감. 허술해 보이는 얼굴로 다니더니. 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 불가?’
최대한 단어만 사용해 입 모양을 바르게 하려 노력하자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하게 처진 어깨와 달리 얼굴에는 은근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에네로부터 문, 그리고 이 방까지.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 심통이 날 만도 했다.
[누가 신성한 곳을 침범하려 드느냐.]
드디어 작동하기 시작한 석상이 말을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는 방을 울리며 한층 위압적으로 들렸다. 석상은 절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을 고쳐 쥐었다. 약한 불빛에도 번뜩이는 검은 당장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멋대로 들어왔으나 지나갈 수 없고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몽매한 침입자들은 얼어붙은 렝에서 죽으리라.
다시 빛을 보지 못하리라.]
분명 석상은 하나인데 소리는 양쪽에서 울렸다. 천둥처럼 우르릉거리는 소리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현명한 자
이치를 알고 답할 수 있는 자
답을 찾아내는 자는
길을 나아가리라.]
나와 세드릭이 있는 방에 각각 다섯 개의 결정이 떠올랐다. 나는 내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떠 있는 결정을 보며 대충 룰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핑크스처럼 저 석상이 문제를 내고, 그걸 맞추면 지나갈 수 있는 형식인 모양이다.
굳이 두 명을 갈라놓고 소리까지 차단해 둔 건 상의하지 말고 각자 답을 맞히라는 거고.
몸을 쓰면 썼지 머리를 쓸 줄은 몰랐는데. 나는 문제가 나오기 전부터 피가 말랐다. 마법사만 풀 수 있는 문제 따위가 나오면 그대로 아웃이다. 설마하니 피사 테콘이 그 정도로 양심이 없을까 싶었지만, 이쯤 되면 그걸 기대하는 게 더 어려울 거 같기도 했다.
[이것은 누구나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인가?]
다행히 석상이 꺼낸 문제는 어려운 수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뜻 답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세드릭의 반응을 살피며 머리를 뜯었다. 저쪽은 뭐라고 쉽게 답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그가 힌트를 주려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두 방 사이가 서리 낀 것처럼 불투명하게 변했다.
내가 발만 구르는 사이 결정 하나가 점점 크기를 줄였다. 심지어 시간제한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결정은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부터 가속이 붙어 빠르게 작아졌다. 결국 입도 제대로 벙긋해 보지 못하고 결정이 사라졌다.
석상이 진동하더니 칼을 위로 치켜들었다. 무언가 다가오겠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난 것은 내가 있는 방이 아니었다.
세드릭이 서 있던 방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깨지는 것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만약 그의 보호막이 조금만 더 빨리 사라졌다면, 그대로 거기 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답을 모르겠다고 발만 동동 구르면 내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상대가 위험해진다니. 꽤 악질이었다.
석상은 기다리지 않고 다음 문제를 냈다.
[가장 차가운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