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멍청하게 서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꺼내 보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이번에는 아무거나 차가운 것들을 외쳤다.
“눈. 얼음? 겨울?”
결정은 계속 줄어들었다.
울고 싶다, 진짜. 나는 머리를 쥐어짜는 느낌으로 끙끙거렸다. 불투명한 벽 너머 흐리게 비치는 세드릭의 인영이 비쳤다.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서 있는 걸 보면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라 기대할 뿐이었다.
첫 번째가 천장이었으니, 이번에는 바닥일지도 모른다. 투명한 바닥 아래로 뾰족한 암석이 비쳤다. 이게 깨지면서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다. 반드시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몰려오자 도리어 머리가 새하얘졌다.
숨이 거칠어질 때가 돼서야 내 입에서 입김이 나오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나는 늦게 방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옅게 서리가 깔리고, 벽은 얼어붙은 부분이 늘어나고 있었다. 결정이 줄어드는 동안 방이 얼어붙는 모양이다. 이래서 ‘얼어붙은 렝’이라는 건가?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한기가 몰려왔다. 차라리 추위에 정신이 팔리자 머리가 좀 식었다.
나는 너무 오래전에 머리에 넣어 가물거리는 상식을 떠올렸다.
“액체 질소. 아니, 그거 뭐야. 고체 헬륨?”
손톱만큼 남은 결정이 멈췄다. 안도감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이것은 태어난 뒤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인가?]
신발 안에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하필 소매까지 찢어져 살이 그대로 노출되자 팔뚝을 비비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아벨이 맞았다. 마법사들은 모두 괴팍하고 변태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양하게 사람 엿 먹이려 할 리가 없다.
추위에 떨던 나는 세드릭의 방 근처 바닥에는 유독 서리가 옅게 끼었다는 걸 확인했다. 색이 아직 드러난 곳을 의아하게 여기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을 녹이는 것은 새끼손톱만 한 불씨였다. 불은 꺼지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바닥을 녹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물은 꾸물거리며 무언가를 그렸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둥근 타원. 나는 세드릭이 답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움직이기 무섭게 얼고, 다시 녹아 흐르기를 반복하며 그려낸 것은 삐뚤빼뚤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알.”
세 번째 결정이 멈췄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답을 맞혔다는 것보다, 세드릭이 마법을 쓸 만큼 양호한 상태라는 것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남매는 서로를 잡아먹고 태어난다. 누나는 동생을, 동생은 누나를 삼킨다.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남매가 서로를 잡아먹는다니. 그건 또 무슨 고어야….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박았다.
당연히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만. 생물도 아니고. 삼켜지면서 삼킬 수 있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태어난다, 태어난다….
…남매?
무언가 머릿속을 스쳤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오누이 얘기가 떠올랐다. 호랑이에게 쫓기다 해와 달이 된 둘.
“낮과 밤?”
긴가민가했지만, 네 번째 결정도 멈췄다. 이제 마지막 문제였다. 나는 ‘설마 결정을 다섯 개 줘 놓고 문제가 더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을 눌렀다.
[세계에 속하나 속하지 않는 것.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이건 또 뭔데.
어떻게 보면 정말… 마법사다운 문제였다. 석상이 낸 문제 중 제일 철학적으로 느껴졌다. 두 개의 문제를 맞히며 조금 샘솟은 자신감이 바로 말라붙었다.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피던 나는 무언가 깨달았다.
이 세계에, 고체 헬륨이 있나?
마법이 과학을 대체하는 세계다. 비슷한 것이 있을 수는 있어도, 같은 단어로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상의 문제는 정해진 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 중에 답하는 게 아닐까.
가설은 썩 그럴듯했다. 나는 석상이 든 검을 바라보았다. 천장을 높이 찌르고 다시 가슴 앞으로 내려온 검은,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쏟아져 나갈 것 같았다.
세계에 속하되, 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나는 괜히 세드릭이 있는 방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에게 들리지는 않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나와… 같은 사람.”
마지막 결정이 멈췄다. 바닥이 흔들리는 감각에 몸을 일으켰다. 방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석상이 있는 단 아래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이 나왔다.
방이 얼어 가던 것도 멈췄다. 동시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방을 묶어 두던 마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둘러 세드릭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기둥은 여전히 단단하게 박혀 있었지만, 그 사이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얼음 조각들을 뜯어내자 깨진 천장 파편들 사이에 서 있는 세드릭이 보였다.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세드릭을 보며 안도했다. 힘이 쭉 빠졌다.
“다친 데 없어?”
“응, 별로.”
그의 눈꺼풀 쪽에 상처가 나 있었다. 눈썹부터 눈꺼풀 위를 긁은 것은 다행히 생채기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보호막을 제때 펼쳐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세드릭은 문제를 잘 맞혀 주었는데, 정작 그를 데려온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세드릭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괜찮아.”
차라리 아까처럼 삐진 티를 내고, 어리숙하게 굴면 잠깐 예쁘다, 잘한다 해 주면 될 텐데. 갑자기 이렇게 어른스럽게 구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기 힘들었다. 세드릭이 기둥 사이로 나온 내 손을 잡았다. 마법은 체온처럼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세드릭은 그대로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 근처로 끌어갔다. 차가운 뺨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래도 나는 네가 칭찬해 주는 게 더 좋은 거 같아.”
아카데미에 도착해 세드릭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오래 묵은 화가 있었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만큼 배신감을 느꼈다. 실제로 만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거짓말로 모자라 계속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버티는 게 얄미웠다. 꿍해진 마음에 선을 긋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또 완전히 미워하기 힘들었다. 나는 비 맞은 어린 짐승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바짝 세웠던 경계가 느슨해졌다.
“그래, 알겠어.”
세드릭이 웃으며 손바닥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조금 봐주면 왜 정도를 모를까. 나는 입을 찰싹 때려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손을 빼냈다.
방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앞에 놓인 길도 두 갈래였다. 내 것은 앞으로 향했고, 세드릭의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세드릭은 마법으로 바닥에 어지럽게 늘어진 파편들을 옆으로 쓸어냈다.
앞에 놓인 복도는 이전과 달리 매우 좁고, 조금 낮았다. 간격마다 횃불이 놓여 있었는데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복도를 보고 망설이다 계단 앞에 선 세드릭을 향해 말했다.
“조심해서 와라.”
세드릭이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답했다.
“응. 이따 봐.”
20. 다섯 개의 초상화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갈림길이 나오는 데다, 경사도 달라졌다. 그 와중에 어둡기까지 해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결국 검으로 일정 거리마다 흔적을 남겼다. 하얗게 긁힌 부분을 보며 걸어온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을 판단하며 헤맨 끝에 간신히 나가는 문을 찾았다.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좁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눈이 아플 만큼 강한 빛이 나왔다.
어둠 속에 있다 나오자마자 마주친 빛에 눈이 시렸다. 팔로 눈을 가리고 적응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고 나온 곳은 긴 회랑이었다. 옅은 상아색으로 이루어진 회랑은 마법으로 노화를 막은 이전의 구조물과 달리 세월에 쓸려 나가 장식이 마모되어 있었다. 기둥에서 뻗어 나온 갈래가 천장에서 만나 교차하는 곳마다 등처럼 생긴 것이 달려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회랑은 수도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회랑의 주변은 정원이었다. 정숙한 분위기의 건축물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색의 꽃과 나무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잎, 스치는 바람과 꽃 냄새. 햇빛처럼 쏟아지는 빛은 오팔처럼 오묘한 색을 띠고 있어 정원은 요정이 사는 곳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눈 위에 손을 얹어 빛을 가리며 아득해서 보이지 않는 정원 너머를 살폈다. 강한 빛에 숨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틀 같은 것이 보였다. 회랑과 정원을 가둔 거대한 유리 온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어둡고 좁은 길에서 헤맬 때보다 더 긴장됐다. 금방 저 아름다운 광경을 찢으며 무언가 나타날 것 같아 통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반짝이는 나비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보면서도 어깨가 뻣뻣하게 올라갔다.
석상처럼 문제라도 내주는 건 양반이지. 보통 함정이라고 하면 예고도 없이 침입자를 덮치는 게 정석이니까. 지금까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게 신기한 거지, 앞으로 뭐가 나온대도 놀랍지 않았다.
제일 예민해진 것은 귀였다. 아까부터 들리던 소리가 거슬리며 귀를 간지럽혔다. 한 번 의식하자 무시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