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왕의 초상화 옆, 불빛이 하나 더 들어온다. 긴 옷을 입은 현자는 호소하듯 왕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다.
[왕께서는 부디 슬픔으로 눈을 가리지 마소서.]
[왕자는 용맹한 기사였고, 내 사랑하는 첫째였으며, 왕국의 다음 통치권자가 될 몸이었소. 그는 내 심장처럼 소중한 존재였고, 나는 지금 슬픔으로 가슴이 가득 차고 애끓는데 내가 어찌 현명할 수 있겠소.]
곧 초상화는 세 개가 된다. 현자의 다음,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단호하게 말한다.
[지엄하신 폐하. 온 왕국이 함께 비통에 빠졌습니다. 이는 그저 애도할 일이 아니니, 폐하께서는 분노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제가 감히 부탁을 들어주시길 청합니다.]
[그대의 청이 무엇인가?]
[부디 제가 왕자의 죽음에 대해 밝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현자가 다급히 왕을 말리며 말했다.
[그것은 언젠가 필요한 일이나, 지금은 아닙니다. 왕국이 온통 혼란스러운데, 분별없이 분노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막연히 들쑤시는 것과 같으니. 왕께서는 현명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대는 나를 분별없는 사람이라 칭하는 것이오?]
[슬픔에 매달린 아버지 앞에서 죄를 읊는 것이 현명한 일이오?]
[그대에게 죽음이란 피치 못할 일에 불과할지 모르나, 많은 이들은 슬픔에서 분노하오. 하물며 자식의 죽음 앞에 평정을 찾는 이는 없소.]
[그 분노를 이용하지 말란 뜻이오.]
귀족과 현자가 대치하는 동안 왕은 입을 다문다.
나는 연극을 보며 난간에 기댔다.
장송곡이 울리고, 해가 저문 곳에 달이 하나 더 뜨면서 홀의 불이 전부 꺼졌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도 못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간신히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온 후에 다음으로 이동해야 할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통 어두운 와중에 한 곳에만 은은하게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빛을 따라가자 계단 끝, 난간 앞쪽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그곳에서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자, 곧 연극이 시작됐다.
시작하는 노래가 장송곡인 것부터 심상치 않다 싶더니. 연극의 배경은 왕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왕국이었다. 주연은 다섯.
각각 왕, 현자, 귀족, 기사, 노예를 그린 초상화는 불빛을 받으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말했다.
왕은 늙은 탓인지, 자식의 죽음 앞에 큰 실의에 빠진 탓인지 무력해 보였고, 발언권을 가진 건 그 옆의 현자와 귀족이었다.
그들은 한참 대립하다 왕의 한숨에 말을 멈췄다. 결국 현자가 뜻을 굽혀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했고, 귀족은 양보해 왕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십사 청했다.
처음부터 둘이 이런 방향을 노리고 대립하는 시늉을 한 것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옆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정면에 있는 나는 불이 꺼질 때마다 그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멈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우들끼리는 속마음을 들을 수 없어도, 관객에게는 허용되는 일종의 연극적 허용인 듯했다. 초상화들은 충분히 그들의 관계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었고, 나는 현자와 귀족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왕은 고심 끝에 허락을 내렸다.
[그대들의 지혜로운 고견에 따르겠소. 누가 왕자를 죽였는지 알아내시오.]
왕의 말이 끝나자 막이 끝났다는 듯 불이 모두 꺼지고, 커튼이 내려왔다. 이번 방의 문제는 ‘왕자를 죽인 범인을 찾으시오.’인 건가.
추리라곤 관련 만화나 영화 몇 개를 본 게 다인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온 거라곤 왕자가 죽었고, 모두 수상하다는 점뿐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바에 의하면 죽은 왕자는 똑똑하고, 용맹했다. 당연한 것처럼 왕국 모두가 왕자를 사랑했다.
권력을 두고 싸우는 귀족과 현자 입장에서는 그런 왕자가 거슬릴 수밖에 없다. 권력은 한정되어 있고, 차기 왕의 지지층이 탄탄하다면 자신들의 파이가 줄어드니까.
왕자의 측근이었던 기사의 배신도 생각할 수 있고, 마지막 목격자라는 노예 또한 수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왕은…. 솔직히 자식 잃은 부모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질투한 경우도 꽤 많으니 완전히 제쳐 두기는 어렵다. 권력에 집착하면 자신의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조차 거부하는 일도 있으니까.
다음 막을 보면 감이 오겠지. 편한 마음으로 집중하려 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야.”
내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커튼이 내려오더니, 곧 앞에 네모난 틀이 생겼다. 납작하고 투박한 것을 만지던 나는 반대편을 만져 보고서야 이게 초상화를 담은 액자 틀의 뒷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놀라 틀 밖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초상화 문제는 단순히 연극을 관람하며 범인을 찾는 게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초상화의 시스템을 제대로 깨달았다. 1막은 관객으로, 그 다음은 배우로 참여하는 거였다. 내가 허둥대는 사이 커튼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 왕과 귀족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2막에서는 내가 ‘현자’ 역할인 모양이었다.
*
루이스는 애써 웃으며 진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교장을 붙잡고 질문 세례를 퍼붓기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질문을 꾸며낼 수 있었지만, 과연 현자는 현자.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한 문제에도 교장은 웃으며 답을 주었다. 차마 걸고넘어질 수도 없을 만큼 명쾌한 답에 도리어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결국 준비했던 레퍼토리는 금세 동났다. 루이스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허허 웃던 교장도 슬슬 의아해했다. 말은 안 하지만 그 표정이 ‘명색이 아카데미 차석이라는 학생이 이런 것도….’ 하는 의미라는 건 알겠다.
루이스는 울고 싶었다. 신입생도 이런 건 안 물어보겠다. 자존심이 갈라지다 못해 가루처럼 휘날렸다. 스스로가 둘도 없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나?”
“아뇨, 아뇨! 교수님, 아직 이해가 안 됐는데요!”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이 좀 박살 난다고 해서 물러날 수 없었다. 친구들의 얼굴과 성물, 차갑고 더럽고 벌레 많은 감옥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건 친구들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루이스는 아직 감옥에 갈 준비는 안 됐다. 아직 창창한 나이다. 햇빛 한번 못 보고 말라 죽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루이스는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피 이제 졸업이다. 여기서 멍청이로 낙인찍힌다 해도 성적표는 자신이 뛰어난 인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시간을 끄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자네가 좀 더… 음.”
교장은 고개를 작게 저으면서도 질문하는 학생을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이다. 교장이 시간을 확인하는 텀이 짧아지고 있었다.
‘르웰린, 빨리 좀. 제발.’
초조한 손이 반지를 매만졌다. 혹시 신호가 왔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까. 기대를 가지고 확인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물론 직접 성물을 찾는 일이 제일 어렵다는 건 알았다. 제 친구는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었고, 그에 비하면 교장 앞에서 멍청한 척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내던지고 매달리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교장은 자리를 피하고 싶어 했다. 이대로 그가 자신의 방에 도착한다면, 누군가 들어왔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미리 가서 함정을 해제했던 루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세드릭 클라인, 그 녀석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당대 최고 마법사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교수님!”
다리라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여차하면 바닥에 달라붙도록 만드는 아이템이라도 쓸 생각으로 교장을 끌어안으려던 차, 루이스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이센 양. 이쪽은?”
교장이 루시아를 반기며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오늘 하루 아카데미를 휘젓고 다닌 사업가를 교장이 몰라볼 리 없으니, 시침을 떼고 있는 거였다. 엘리엇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엘리엇 딜런입니다.”
그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려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눈물도 흘릴 뻔했다. 이제 글렀다 싶은 순간이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친구들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교장도 다시 허허 웃는 얼굴로 돌아와 둘을 반겼다. 그들은 근황 얘기, 축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끌었다.
엘리엇이 한참 아카데미 얘기를 떠들면, 소재가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루시아가 옆에서 마탑으로 주제를 돌렸다. 눈길조차 주고받지 않는데, 미리 짜고 오기라도 한 듯 완벽한 역할 분담이었다. 루이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런 게 천생연분이라는 건가 봐.
함께 아카데미에 다녔으니 루시아가 말을 잘하는 거야 알았는데, 실제로 본 ‘딜런가 차기 가주’로서의 엘리엇은 기대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