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얼마 없는 빛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찾아내느라 눈이 아플 정도로 안압이 높아졌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일이 많았던 탓일까.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산소가 부족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지금은 내가 우위지만,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간 곧장 패배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넝쿨 중에는 내 몸보다 두꺼운 것도 있었다. 그것들도 한두 개 베어내는 건 쉽다. 예리하게 날을 세운 칼 앞에서 넝쿨은 버터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하지만 곧 한계가 온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오래 대치하지 않기 위해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다 쓰기. 혹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오래 버티기.
이 괴생물의 크기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은 후자다.
천장과 바닥을 오가며 베어내던 것을 멈추고 최대한 자리에서 버티며 공격을 받았다.
감각에 의존해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베고, 벨 수도 없으면 팔로 쳐내기를 반복했다. 베어내면 잠시 주춤하다 그 뒤에서, 혹은 위에서 다음 것이 쏟아지듯 덮쳤다.
어느덧 한계는 찾아왔다. 느려진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넝쿨이 발목을 노렸다.
급하게 뒤로 물러났지만, 힘이 부족했다. 아차 하는 순간 발이 묶이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몸을 일으키며 버텼지만 상대는 끝없이 덤벼들었고, 점차 힘이 빠졌다.
“헉… 하, 시발.”
몸이 늘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넝쿨이 꾸물거리며 올라와 허리와 팔을 단단하게 묶었다. 고무줄처럼 가늘고 팽팽한 것이 검을 쥐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기까지 했다.
벌레처럼 손을 휘감는 것은 미끈미끈하고 끈적했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기름 냄새는 아닌데. 이 정체 모를 것에서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낯선 냄새가 났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그게 풀냄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냄새가 너무 진해서 곧바로 알아챌 수가 없었다. 불쾌감이 들 정도로 짙고, 축축한 풋내.
가느다란 것이 옷깃 사이를 헤치고 기어들었다. 늘어져 있던 몸이 퍼득거렸다. 느릿하고 끈덕진 감각. 그제야 이것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작에서 등장했으며, 내가 속으로 세드릭을 변태라고 부르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 그러니까, 이게, 그. 촉….
“미친….”
이게 여기서 왜 나오는데. 아카데미라고 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던 것인데. 설마 이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서 바로 떠올리지도 못했다. 언젠가 세드릭이 태연한 얼굴로 들고 오는 일이 있을지언정, 설마 지하 함정의 마지막에서 이런 게 튀어나올 줄이야.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쳐서 늘어지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다급히 손가락을 감는 것을 뜯어냈다.
“세드릭! 대답해!”
아카데미 지하 관문들은 마법사를 위해 만들어졌다. 세드릭이 나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나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먼저 통과해 지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연신 세드릭의 이름을 외쳤다.
이게 원작에 등장한 세드릭의 작품인지, 지하에 던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함정을 만든 누군가가 가져다 둔 것인지, 아니면 피사 테콘이 더해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처럼 하나하나 베는 것보다는 세드릭이 대단위 마법을 던지는 게 훨씬 빠를 거란 건 확실했다.
몸을 휘감는 것을 뜯어내며 고함을 질러대자 촉수가 화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다리에 이어 오른팔이 감겼다. 접히는 관절 부분을 먼저 낚아챈 넝쿨이 팔을 뒤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윽!”
힘을 주지 못하도록 손목을 꺾은 채 손목과 어깨가 닿도록 꽁꽁 동여매기까지 했다. 눈도 없는 주제에, 인체를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는 움직임이다.
다리에 이어 팔까지 제한되자, 발버둥이라도 치던 전과 달리 움직임이 단번에 줄어들었다. 팔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꽁꽁 싸맨 촉수는 만족했다는 듯 이번에는 자꾸 소리를 지르는 곳을 향해 넝쿨을 휘둘렀다.
찰싹, 긴 것이 뺨을 후려갈겼다. 고통이 크지는 않았지만, 살이 따끔거렸다. 그것이 몇 번 더 얼굴을 노리자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세드릭, 시발. 클라인….”
이따 보자며, 새끼야….
어디로 빠진 건지 보이지도 않는 세드릭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다. 저딴 걸 만들어 놓고 어딜 간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저런 걸 만들고 난리야.
몇 번 얼굴을 때리던 촉수가 이번에는 끝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미끈한 액체가 축축하게 남아 기분이 더러웠다. 눈썹 뼈, 코, 광대, 턱을 오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욕을 내뱉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느껴졌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느리게 쉬었다. 산에서 괴수를 사냥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사냥감보다 뛰어난 사냥꾼에 가까운 괴수들은 주변 인기척을 느끼는 능력이 뛰어났다. 자칫하면 관계가 역전될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다.
다행히 아카데미 지하에 사는 촉수가 스펠먼가 사유지 괴수들만큼 본능이 뛰어난 건 아닌지, 촉수는 내 호흡을 찾아내지 못하고 얼굴만 연신 더듬었다.
툭, 툭 머리를 치던 촉수가 예고 없이 허리까지 올라와 강하게 조였다.
“억….”
내장이 조이는 느낌. 자연스럽게 토하듯 숨이 터져 나왔다. 틈을 노리지 않고 촉수가 입으로 들어왔다.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의 것은 이로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서 다른 것들이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가 겉에 박히기는 했지만, 끊어낼 만큼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햄스터도 아니고…. 입 안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끝이겠지, 싶으면 한계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새로운 것이 틈을 벌렸다. 처음에는 불쾌감이 컸지만 점점 공포가 차올랐다. 이러다 입이 찢어지든, 턱이 빠지든 하겠다.
다행히 촉수는 내 입을 벌려 죽일 생각은 없는지 곧 빠져나갔다. 한계까지 벌어져 있던 입에서 빠져나간 통에 하마터면 이가 뽑히는 줄 알았다.
“웩, 엑. 컥….”
헛구역질을 하며 입 안에 남은 액체를 뱉었다. 침과 섞인 점액질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부분 뱉었지만 일부는 삼켰다는 게 찝찝했다.
지친 몸이 기진맥진하게 늘어졌다. 여전히 어두운 데다 머리까지 핑 돌아서 내가 보는 곳이 천장이 맞는지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뒷일은 모른 척하고 그냥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와중에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검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다리를 잡히며 놓친 검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떨어져 있는 검을 쥐기 위해 발버둥을 치자 쉽게 놔주지 않겠다는 듯 파고드는 힘이 더 억세졌다. 이러다 다리가 하나로 붙어 버리겠다. 이를 악물고 힘을 주고 한 팔로 기었다.
넝쿨은 나를 가지고 놀기라도 하는 듯 내가 기어서 검까지 움직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가, 검에 손이 닿을 만하면 몸을 아래로 죽 끌어내렸다.
“악, 좀…!”
세 번쯤 반복하자 몸이 지치는 건 둘째로 치고 성질이 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헐떡이자 넝쿨은 더 해 보라는 듯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인간도 아니고 동물인지 식물인지도 모를 괴물한테…. 모멸감과 수치심이 뒤섞여 속이 끓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건 확실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현재 상태부터 다시 파악했다. 발끝에 힘을 주자 까딱일 수 있었다. 완전히 묶인 허벅지와 무릎에 비해 종아리 아래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묶인 왼팔도 그렇게 뻑뻑하지 않았다.
보채는 듯 다시 허리를 찰싹 때리는 걸 무시하고 다시 기었다. 지금까지 세 번. 검을 향해 손을 뻗고, 넝쿨이 잡아당기는 타이밍은 비슷했다.
넝쿨이 당기기 직전 몸을 굴려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몇 센티나 될 이동이었지만, 검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익숙하게 손에 감기는 손잡이를 확인하고 곧바로 다가오는 것부터 벴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몸놀림이 아까와는 달라졌다. 어디에서 뭐가 다가오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직접 입력되는 기분이다. 몸을 휘감은 것부터 갈라내고, 일어섰다.
한참 사냥감을 가지고 놀다 놓치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상대가 몸을 잔뜩 부풀렸다. 꿀렁거리며 호스처럼 생긴 몸이 무언가를 이동시켰다. 물소리.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곧 뭔가 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 효과 없는 물을 이런 상황에 꺼내지 않을 테니, 맞으면 위험한 종류의 것일 확률이 높았다. 완전히 모아 토해내기 전에 입구를 틀어막거나, 이동 통로를 베어내야 했다.
“후우….”
혼란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잘 보이지 않는 시야는 방해만 된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물이 모이는 곳, 곧 뱉어낼 곳. 노려야 할 곳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강한 빛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당장 튀어 나갔을 것이다.
“읏…!”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강한 빛에 공격당하기를 오늘만 두 번째였다. 그나마 눈을 감고 있던 게 다행이다.
끼에에엑!
거대한 것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난리를 쳤다. 멀리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던 지하에 괴물이 난동을 피우자 집중하기 어려웠다. 눈을 가늘게 떠 가며 상태를 파악했지만, 여전히 빛이 너무 강해 잘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