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17)

#104

쿵, 쿵, 쿵. 넝쿨이 부딪치며 빠르게 안쪽으로 물러났다. 소란이 멀어졌다. 다 사라진 건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허리를 감쌌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엘리엇! 엘리엇, 나야.”

“…세드릭?”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아직도 시큰거리며 시야가 어찔했다.

내가 쳐내려고 든 팔꿈치를 내리자 세드릭이 내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별다른 거부가 없는 걸 확인한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헐떡이는 숨소리를 듣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올라왔다.

그를 밀쳐내려는 손을 막은 건 죄책감이었다. 지하 관문의 난이도는 생각보다 높고, 위험했다. 하마터면 세드릭도 죽을 뻔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세드릭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그를 밀어낼 수 없게 만들었다.

세드릭은 눈치 빠르게 약한 척을 했다. 보란 듯 얼굴을 보여 주는 그의 눈썹이 축 처졌다. 하얀 뺨을 긁고 지나간 상처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사실 상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얕은 생채기였다만, 무시하기에는 제법 길었다.

“상처는 어쩌다 났어.”

“철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쫓아왔어….”

세드릭이 짧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검이랑 창을 휘두르는데, 갑옷과 방패에 마법 저항을 걸어 뒀는지 공격하면 튕겼어.”

나는 세드릭이 지나온 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혀를 찼다. 차라리 둘의 문제가 바뀌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쪽은 초상화 문제를 풀다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하마터면 참수를 당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마 석상의 문제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초상화도 지나갈 수 없지 않았을까.

2막에서 현자가 되자마자 귀족과 함께 기사를 몰아갔다. 범인에 대한 힌트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를 무대로 끌어 올렸다는 건, 진범을 찾으라는 게 아니라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라는 뜻이라고 확신했던 탓이다. 다행히 귀족은 왕자의 측근이었던 기사를 못마땅하게 보는 듯했고, 거기에 말을 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분위기가 기사를 향해 불리하게 잡히며 2막이 마무리됐는데, 다시 커튼이 올라가며 3막이 시작되자 내가 맡은 배역이 달라졌다. 왼쪽의 귀족과, 오른쪽의 노예를 확인한 순간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연극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상, 그리고 내가 다음으로 맡을 배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다른 초상화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 해도 마땅한 돌파구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혹시 답이 없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간신히 3막에서 살아남았다. 처형을 앞두고 고뇌하는 기사인 척 시간을 끌자 막이 내렸다. 기사 다음은 노예였다.

나는 초조하게 처형을 당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가 죽으면 연극도 끝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다음에는 제일 만만한 노예가 죽음으로 몰리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끄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노예의 초상화 위로 불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대사를 뱉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조마조마하게 기사의 처형식을 바라보며, 이번 막이 무사히 넘어가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기사의 처형과 동시에 초상화가 쩍, 갈라졌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기사 초상화 위쪽의 불빛이 꺼졌다. 이 연극이 끝나기 전까지 저게 다시 켜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지금껏 지나온 문제들을 되짚었다. 마법사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현자는 단어에 의미를 담고,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더라도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답이라면 허용한다.

내가 그렇게 믿으면. 액체 질소가 없고, 나와 에르켈이 빙의자인 걸 모르는 세계에서도 그걸 정답으로 판결 내리는 세계라면.

나는 4막의 마지막, 노예 위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왕을 향해 호소했다.

왕자는 비탄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이곳에 범인은 없다. 왕께서는 부디 현명하게 판단하여 그의 슬픔을 잠들게 해 달라.

어쨌든 결말이 나면 연극이 끝나는 시스템이었는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커튼이 위로 천천히 올라가며 조명이 켜졌다. 초상화가 누군가 만들어 둔 프로그램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었다면 무리였겠지. 그들이 꺼내는 레퍼토리가 비교적 단순했다. 그렇게 공간을 빠져나오자 홀에는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안내음이 친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걸 믿고 뛰어내렸다가 촉수를 만났지만. 이리저리 휘감아 올라오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저건… 뭐야.”

“음.”

줄줄 이야기하던 세드릭이 눈을 굴렸다.

“빛을 싫어하거든. 켜 두면 근처에 오지 않을 거야.”

어깨가 탁 내려갔다. 내가 아직도 바짝 긴장한 채 검을 들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검을 든 팔에 힘을 풀었다.

그사이 빛은 줄어들어 내부를 밝히는 정도에 멈춰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최하층은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맥이 풀렸다. 드디어 이 개고생의 끝이 오는구나.

아마도 마지막 층. 촉수인지 뭔지가 도망치고 나서 드러난 지하 바닥은 습하고, 질척거렸다. 돌바닥 위에 오래 쌓인 흙이 물기를 머금어 걸을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 뒤로 세드릭이 바짝 붙어왔다.

세드릭이 띄운 빛이 내부를 밝게 비춘 덕에 성물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 걷지 않아 제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제단이라니. 척 봐도 수상했다.

그 위에는 금속으로 장식된 검은 책이 놓여 있었다.

“응. 괜찮아.”

푸른빛이 제단과 책 위를 지나갔다. 세드릭은 환상, 함정 발동 따위의 마법이 걸려있지 않음을 여러 번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냉큼 책을 집었다. 자물쇠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부수려면 부술 수는 있겠지만, 굳이 여기서 해야 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세드릭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을 보면서도 그게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옆으로 바짝 붙어 다시 허리를 노렸다. 촉수에도 감겨 봤는데 사람 팔이면 양반이다 싶어 내버려 두자 그가 실실 웃었다.

“위로 올라갈까?”

고소 공포증은 어디 가고.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날아오를 것처럼 신난 목소리였다. 어린애처럼 쉽게 기뻐하는 것을 보자 괜히 나까지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웃음이 뚝 멈췄다. 세드릭의 셔츠 사이로 비죽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엘리엇.”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자 이상했는지 세드릭이 나를 불렀지만, 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보석. 형태는 달라졌지만, 나는 저게 원래 어디에 달려있었던 건지 알고 있다.

입꼬리는 비죽 올라가는데, 머리는 차가워졌다.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어쨌든 세드릭이 나를 도와 죽을 위기를 겪은 건 맞지 않냐는 이성과, 눈앞에서 쟤가 나를 가지고 논 증거를 보니까 열 받는 걸 어쩌라는 거냐는 감정이 치열하게 다퉜다.

세드릭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나 아니야.”

“뭐가 아닌데?”

“저거. 내가 만든 거 아니야.”

그러시겠지. 내가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세드릭의 눈썹이 더 처졌다.

내가 촉수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랬으면 처음부터 뭐라고 했겠지.

세드릭이야 영문을 모를 테니 어리둥절한 것도 이해한다. 이해는 한다. 억울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애절한 얼굴이다.

“진짠데….”

“그래?”

회심의 연기가 안 먹힌다는 걸 깨달은 세드릭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누가… 뭐라고 했어?”

해석하자면 ‘루이스가 나에 대해 험담을 했어?’ 정도가 되겠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너 유명하던데.”

“…….”

“성격 더럽고 남 깔보기로.”

“아닌데….”

입술이 비죽거렸다. 저 모습만 보면 정말 억울하고 무해해 보였다. 글쎄. 세드릭이라면 펄쩍 뛰던 루이스가 저걸 봤다간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나, 안 그래.”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성큼 다가서자 세드릭의 몸이 잠깐 흠칫거렸다. 그래도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셔츠 사이로 빠져나온 목걸이를 낚아챘다.

“나한테 거짓말만 하는데.”

목걸이 줄은 힘없이 끊어졌다. 손톱 크기의 보라색 보석. 눈을 닮은 보석을 선물하면 청혼의 의미라는 엘리자베스 룩스틸의 말과 함께 그때의 불쾌감이 올라왔다.

“르웰린.”

세드릭이 급하게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가져가 놓고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부산스럽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의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저것도 연기일까. 만약 그렇다면 세드릭은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울 게 아니라 당장 배우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르웰린….”

“…….”

내가 답하지 않자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아래로 처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였다.

“잘못했어.”

“…….”

“내가 잘못했어…. 르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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