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17)

#105

불쌍한 척은.

저렇게 구는 건 내가 어떤 모습에 약한지 뻔히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안쓰럽기는커녕 가증스러워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게 본성을 숨기고 연기하고 있는 세드릭 클라인보다 더 웃긴 건, 저게 연기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넘어가는 나였다.

예쁘장한 얼굴이 흐느낌도 없이 눈물만 조용히 흘리는 걸 보니 이성 쪽이 승기를 잡았다. 씨씨가 세드릭 클라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게 좀 전도 아니고. 오래전에 알았으니 이미 화는 충분히 식었으면서. 다 알고도 그에게 도움을 청했으면서 이제 와 잘못을 따지는 것도 웃기지 않나? 사과도 들었고.

어떻게든 그에게 우호적으로 흘러가는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정도로 얼굴에 약했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세드릭을 받아 주는 것까지야 대단치도 않은 일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곤란하다.

오히려 넷 중 제일 호감이었던 디멘시온에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얼굴로 치면 황태자가 제일 압도적이기도 하고. 수도에서 황태자와 마주쳤을 때도 잠깐 넋을 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화가 식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얼굴을 가지고 왜 저러냐고 짜증이 나면 났지.

세드릭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달라붙었다. 아직 젖은 뺨과 눈이 보였다. 그 올망졸망한 눈을 찝찝하게 보다가 볼을 잡아당겼다. 젖살이 남아 있을 시기는 아니라 그렇게 말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멍청해 보였다.

“아파….”

“짜증 나네.”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었다. 내 말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울이는 세드릭을 보며 확신했다. 저 태도. 저게 문제다. 자각하지 못했는데, 내가 저렇게 약한 척,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약한 모양이었다.

자괴감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안심했다. 솔직히 저런 걸 세드릭이나 하지…. 나머지 셋은 절대 저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테니까.

“됐어.”

“린.”

바로 살아난 세드릭이 대뜸 애칭을 외쳤다.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수작을 부리려는 얼굴을 밀어냈다.

“그건 아직이고.”

포기하지 않고 다가온 팔이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허리를 꽁꽁 감쌌다.

누구를 탓하냐. 염병…. 탓할 거면 공이 넷이나 되는 스펙터클 BL 소설에 빙의한 내 기구한 운명을 탓해야 했다. 한숨을 삼키는 사이 몸이 떠올랐다.

21. 성물의 행방

지하에서 올라온 후. 미리 정해 둔 대로 에이든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반지를 통해 신호를 미리 받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경계하던 얼굴은 나를 확인하고 밝아졌다.

루이스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깐깐한 마탑주를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지. 내내 가슴 졸이고 있었을 그를 이해하며 마주 안았다.

“네가 해낼 줄 알았어!”

내가 등을 토닥이자 루이스가 한 번 더 와락 내 머리를 안았다. 가만히 두면 뺨에 입이라도 맞출 기세였다. 그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거기까지는 좀 그랬다.

하지만 내가 루이스에게 뽀뽀는 좀 그렇다고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말 그대로 펄쩍 뛸 듯이 놀란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고 입만 벙긋거렸다.

놀란 것도 이해한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안심해도 된다고 달랬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루이스의 눈은 오직 내 뒤. 방까지 따라온 세드릭 클라인에게 꽂혀 있었다.

“엘리엇, 내 뺨 좀 쳐 줄래?”

“어렵지는 않은데, 지금 보이는 게 환상이길 바라고 그러는 거라면 큰 효과는 없을 거다.”

“그럼 눈 좀 가려 줄래?”

“네가 눈을 감아. 멍청아.”

세드릭을 보고 정신을 못 차리던 루이스는 뒤늦게 자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저렇게 질색하는 모습을 보자 죄책감이 늘었다. 역시 떼어 놓고 오는 게 맞는 건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존재만으로 루이스를 물러나게 만든 장본인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사이 면역이라도 생긴 걸까. 이 정도는 고양이 같고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엘리엇의 표정을 보자 아닌 것 같았다. 남들 보기에 괜찮지 않은 모양이다.

“떨어져, 클라인.”

“으응….”

답은 ‘응.’이라고 해 놓고 왜 하는 짓은 ‘싫어.’일까. 오히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루이스는 손가락을 벌려 그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에 찬 시선이 세드릭의 얼굴을 떠나 내 허리로 향했고, 곧 못 볼 걸 봤다는 듯 찌푸려졌다.

“손 좀 떼, 세드릭.”

친구 둘이 경악하는 걸 보자 에르켈의 반응은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세드릭이 나를 속였다고 화를 냈는데. 이제 와서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상당히 민망한 일이었다. 자각과 함께 수치가 몰려왔다.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뗄 생각으로 손목을 꽉 붙잡자 그제야 세드릭이 팔을 풀었다. 나는 어깨에 기댄 머리를 밀어내고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여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세드릭의 모습에 귀신을 본 것처럼 질려 가던 루이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성물을 받은 루이스는 곧장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얘도 마법사는 마법사구나.

그러나 루이스의 학구열은 오래가지 못했다. 끼어든 세드릭이 루이스가 든 성물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아?”

“뭐, 뭐, 뭐야. 저리 가.”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너보다는 내가 낫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 루이스? 그, 그렇게 말을 더듬으면 주문 효율이 올라가는 거야?”

“르웰린!”

기겁한 루이스가 내게 매달렸다. 세드릭은 내 눈치를 보며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궁금해서.”

아직 루이스가 내게 본인에 대한 소문을 말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위경련이 올 것 같다고 배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루이스를 달래며 말했다.

“세드릭. 괜히 애 괴롭히지 마.”

“괴롭힌 거 아닌데….”

세드릭은 우등생답게 자신이 익힌 것을 쉽게 잊지 않았고, 활용할 줄 알았다. 이미 자신의 약한 척이 효과 있다는 걸 확인한 그는 또 처연한 얼굴을 앞세웠다. 바람 불면 날아갈 낙엽처럼 아슬해 보였다.

속에 시커먼 게 들어찼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안타까워질 지경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벽에 기댄 루이스는 그걸 보고 토할 것 같은 목소리로 “혹시 르웰린이 지하에 세드릭 클라인을 버리고 온 건 아닐까? 저거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또 홀랑 넘어갈 뻔했지만, 옆에서 친구들이 미친 거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상황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이성을 부여잡고 단호하게 잘라내자 침울해진 세드릭이 루이스를 향해 턱짓했다.

“본뜨게?”

“어? 어어….”

세드릭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나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자진해서 루이스를 도울 테니, 그게 끝나면 칭찬해 달라는 암묵의 제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세드릭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그의 뒤로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성질을 알면서도 귀여워 보일 리가 없는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엇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저걸 왜 달고 와?”

“따라온다는데 어떻게 해.”

실컷 도움은 받아 놓고. 따라오겠다는 세드릭을 무 자르듯 잘라낼 수는 없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목숨을 걸어 준 건 고맙다. 하지만 이제 네 할 일은 끝났으니 돌아가라. 뭐 그럴 수는 없잖아.”

“오늘 고생했다. 피곤했을 테니 가서 쉬어라. 도움은 잊지 않겠다. 대가는 어떻게 해 주겠다. 둘러대든 잘라내든 할 수 있었잖아.”

엘리엇은 어림없다는 듯 내 변명을 받아쳤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이 정론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이지. 차마 거기에 대고 ‘쟤가 약한 척 굴면 어쩔 수 없는걸.’ 따위의 대답을 들이댈 수는 없었다.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냉랭한 반응일 테니까.

내 반응을 본 엘리엇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이마를 툭 쳤다.

“전하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거.”

“뭐?”

“네 형들이 왜 그렇게 유난인지 알 거 같다.”

내가 그렇게 여지를 주고 다니는 게 문제를 키운다는 뜻이었다. 반발이 목 끝까지 차오르기는 했지만 차마 뱉을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실컷 홀린 모습을 보여 줘 놓고 아니라고 해 봤자 믿음을 주기보다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라는 인상만 강화될 것이다.

에르켈은 그 옆에서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옆에 사람이 없었다면 진작 터져 나온 웃음에 배를 붙잡고 소파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옛날 옛적, 내가 씨씨가 여자애인 줄 알고 갈팡질팡하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한참 비웃겠지. 그나마 엘리엇이 세드릭 클라인과 씨씨를 연결하지 못해 다행이었다.

“그냥, 쟤가 좀 특이한 거야. 내가 언제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내 말에 엘리엇이 질색하며 답했다.

“제발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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