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경비는 성문을 지나오는 마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일하기 싫은 거야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은 정말 심각했다. 이게 다 며칠 전 내려온 규정 강화 권고문 탓이다. 할 일을 할 뿐인데 귀족들은 모욕을 당했다며 화를 냈다. 이러다 일자리가 간당간당한 게 문제가 아니라, 모가지가 간당간당하겠다. 경비는 진지하게 이직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깐 멈춰 주십시오.”
경비가 성문을 지난 마차를 세웠다.
본체부터 마감재까지 모두 고급. 수도 경비로 성문을 지키며 수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확인하는 것이 업이다. 경비는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 그것의 재질까지 추려낼 수 있었다. 검은색의 마차에는 문장은 붙어 있지 않았으나 도리어 그 탓에 마차 안에 탄 사람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가 지나가는 것만으로 이목을 끌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안에 타고 있다는 거다.
“갑자기 뭐요?”
“짐을 확인해야 하니 모두 꺼내 주시오.”
경비의 말에 마부가 어깨까지 움츠리며 놀랐다.
“미친 거요?”
마부는 안에 있는 게 누구인 줄 알고 그러냐는 타박을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와락 일그러지는 얼굴과 마차 쪽을 불안하게 흘끔거리는 모습으로 그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다. 경비 또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규정대로 하는 거요.”
마부와 말씨름을 해 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욕을 들을까. 검을 들고 휘두르려 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어서 욕이나 먹고, 짐을 확인한 후 마차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자리가 걸린 건 저쪽도 마찬가지. 마부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경비에게 맞섰다.
신분으로 따진다면 저쪽보다 한참은 높은데. 마부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저자의 태도는 마차 안에 탄 자신의 주인에게서 나오지만, 자신은 그렇게 뻣뻣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 뒷배가 없었다.
다행히 말다툼이 길어지기 전. 마차를 열고 짧게 자른 머리의 남자가 나왔다. 단단하고 큰 체격이 옷 밖으로도 드러날 정도였다.
‘살벌하게도 생겼구만.’
“무슨 일입니까?”
한 대 맞으면 정신도 못 차릴 것만큼 위협적인 주먹을 지닌 남자였다. 경비는 남자의 질문을 듣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마차의 주인은 아닌 듯했고, 호위인 모양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남색 머리를 가진 남자는 헛기침을 하는 경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자가 허튼 곳에서 일할 리는 없으니. 주인은 분명 높은 귀족이다. 긴장감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수도 성문을 지나는 모든 마차의 짐을 확인해야 합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경비는 아까부터 자꾸 치미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저 여유로운 태도가 단순히 마차 안, 그의 주인에게서 나오는 걸까?
경비의 태도가 마부를 대할 때와 달리 누그러졌다. 어쨌든 저쪽은 주인과 함께 안에 타는 신분. 괜히 ‘경비가 주인을 모욕했다.’ 운운했다간 피를 보는 건 자신뿐이었다. 바로 옆에 권력이 있는 저쪽과 달리, 경비가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 봤자 경비대장이었다. 신분의 고저야 둘째 치고. 그 대장이 온전히 경비의 편을 들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이벌. 위쪽에 까이냐, 여기서 까이냐 차이지.’
경비는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며 상대의 묵직함을 따라 했다.
“규정대로 진행할 뿐. 예외는 없습니다.”
경비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일그러졌다.
성문을 지나가는 마차의 짐을 확인한다는 규정이 이전부터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에 불과했다. 웬만한 귀족 가문의 문장으로도 성문은 멈추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저 앞에 대고 규정이 존재한다고 하는 건 결국 ‘네 신분으로는 성문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갑작스럽게 규정 강화 권고가 내려온 이유는 모른다. 저 위, 아득한 곳에서 다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거기까지는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말단만 고생하는 게 문제지.’
하여간 괜한 풍랑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조용하고 얌전히, 평범하게 사는 게 목표인 경비에게는 작금의 상황이 온통 껄끄러웠다.
경비는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 검을 빼 들 것 같은 남자를 보며 급하게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갑작스럽게 내려와 성문을 복잡하게 만든 권고문이다. 한참 성을 내던 귀족들도 공식 문서를 보면 한 수 접어 주곤 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남자는 그것을 낚아채듯 가져가 읽었다. 검만 잡았을 것처럼 생겨서 글을 읽을 줄 안다니. 심상치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이 경비의 발바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이거 진짜… 잘못 걸린 거 아니야?’
모든 정황이 상대의 신분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경비의 머릿속에 몇 개 가문이 스쳤다. 하나같이 최악이라 그중 하나를 고르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곳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글자 하나라도 놓칠까 빳빳한 권고문이 구겨지도록 잡고 살펴본 남자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마차로 다가갔다.
창문이 느리게 열렸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커튼을 모두 걷지 않은 탓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만 드러난 턱으로 상대가 대단히 젊은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도련님.”
남자가 창문에 바짝 붙어 속삭인 탓에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었다. 침만 삼키고 있던 경비는 남자가 부르자 그제야 마차에 다가갈 수 있었다.
“짐을 확인해야 한다고?”
가까이에서 확인한 마차 주인은 예상보다 더 젊었다. 아니, 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말이 어울렸다.
옅은 회색 눈이 어두운 곳에서 냉랭하게 빛났다.
“그, 규정이….”
경비는 쩔쩔매며 사정을 설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에게 매달리고 ‘절대 제 뜻이 아닙니다!’ 외치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만.”
안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미성이었다. 그제야 마차에 탄 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경비가 자기도 모르게 창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쏘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호위인 듯한 남색 머리가 경계하며 경비를 밀어냈다.
‘얼굴도 못 봤는데 유난은.’
대체 저 사람이 누구기에 저렇게까지 가시를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저들의 반응만 보면 자신이 무슨 죽을죄라도 진 기분이었다. 결정권은 모자를 쓴 쪽이 아니라 제일 안에 있는 저쪽에 있는 듯한데. 이제 막 성인이나 됐을까 싶은 나이.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는 지위. 무언가 떠오를랑 말랑했다. 왠지 그 위화감을 깨닫는 순간 큰 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비는 곧 원치 않은 방향으로 상대의 신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하게 둬.”
“전하.”
커튼이 창문을 덮으며 뒷말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나온 호칭만은 경비의 귀에 똑똑히 꽂혔다. 절로 침이 넘어갔다. 아니, 목이 바짝 말랐다.
전하라니. 지금 마차에 탄 게 직계 황족이라는 뜻이 아닌가. 자신이 누구의 앞을 막아선 것인지 알게 된 경비가 벌벌 떨며 호위를 바라보았다. 안에 있는 게 황자면, 저 호위의 신분은 뭘까. 당연히 기사다. 검을 든다고 모두 같은 위치가 아니다. 저쪽은 황가와 제국을 수호하는 황실 기사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건 경비 대장이 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쪽에 까이는 게 낫지.
그는 한쪽 눈썹을 든 채 검 손잡이 위에 손을 대고 있었다. 허튼 소리를 했다간 당장 뽑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이들을 빨리 보내야 했다. 자신이 자리를 이탈할 수는 없으니, 그냥 최대한 빠르게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 그냥 지나, 가시면….”
그러나 상황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지.”
뒤에서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불쑥 나타났다.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는 대단한 미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늘게 웃고 있는 녹색 눈에 온기라곤 없었다. 황실과 카힐름의 문장이 새겨진 기사단 정복을 입은 남자는 마차와 경비를 느긋하게 훑어보았다. 싸늘한 눈길을 받자 경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린 남자가 남색 머리의 호위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아마 본인도 같은 지위일 호위가 마지못해 알은척했다.
“수에닐 경.”
“아, 리젠.”
“저희가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닐 텐데요. 친밀해야 할 상황도 아니고.”
“딱딱하게 굴기는. 저는 리젠이, 이런. 이번 건 실수였습니다. 킬라스 경. 경께서 워낙 편안하게 입으셨기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줄 알고 그만. 만약 그렇다면 제가 킬라스 경께 말을 높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딱딱한 답에 수에닐이라고 불린 남자가 웃었다. 경비는 연신 목을 더듬었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까딱 잘못했다간 목 위에 머리가 붙어 있지 못할 수도 있다.
수에닐이 어떤 가문인가.
저 멀리 북쪽 디멘시온을 제외한다면 수에닐만큼 황권에 가까운 가문은 없다. 군사도, 역사도 대공 쪽이 앞선다지만 디멘시온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니, 수도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공작을 훨씬 두려워했다. 평민부터 귀족, 어쩌면 황족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