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황성의 수호를 맡은 분이 성문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 현장에서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킬라스 경도 알고 계시죠? 며칠 전부터 성문을 지나는 모든 이의 짐을 확인하라는 권고가 내려왔습니다. 이걸, 참. 모두 웃으며 도우면 좋을 텐데. 다들 불쾌해하지 뭡니까. 아무래도 기사단이 와 있으면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 도움을 주러 왔습니다.”
“카힐름의 단장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단장.”
카힐름의 단장이라고 한다면 키시아르 테사다.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으나 그가 황태자의 사람이라는 것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권력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리젠 킬라스조차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황태자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하고 물을 정도로. 공작의 성을 가진 남자는 아주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단어를 곱씹었다.
“알고 계시겠죠. 워낙 귀가 밝은 분이니까요.”
능청스럽게 말한 수에닐이 마차에 다가갔다. 킬라스가 그 앞을 막아서자 수에닐이 기다렸다는 듯 경비의 권고문과는 다른 종이를 꺼냈다.
“킬라스 경. 아무리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한다 해도 본분은 챙겨야 할 게 아닙니까. 경의 주인이 마차 안에 탄 분입니까, 폐하입니까?”
황제가 직접 서명한 문서였다. 차마 황제의 뜻을 확인하고도 버티고 설 수는 없었다. 킬라스가 물러나자 수에닐은 커튼을 직접 걷었다.
“전하.”
4황자, 에르켈이 어설프게 웃었다. 감히 누가 직계 황족에게 눈치를 보게 만드느냐 하겠지만, 상대가 저 남자라면 가능하다.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진작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힘없는 황자와 제국 세 개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황권에 가까운 수에닐의 장남. 에르켈은 소공작에게 감히 불쾌하다는 티도 낼 수도 없었다.
그 대신 불쾌함을 드러낸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엘리엇 딜런이었다.
“소공작께서 기사의 본분을 따지시기에는 본인부터 무례하게 등장한 것 아닙니까.”
“딜런가 차남께서도 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기사라는 분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파악도 못 하시다니. 이른 은퇴라도 준비하십니까?”
“백작께서 차남의 이런 면을 알아야 할 텐데. 지금이라도 검을 들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본분과 도리를 따지기 좋아하는 걸 보면 기사가 적성인 듯합니다.”
“소공작과 달리 제 능력이 부족해 가문을 이어받는 것만으로 버거워서요.”
“그것도 그렇습니다.”
엘리엇의 입꼬리가 떨렸다. 그 모습을 즐기듯 훑은 수에닐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리온은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얼굴 빼고는 형님을 닮은 구석이 없으시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삐딱한 답에 수에닐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유쾌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웃음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가늘어진 녹색 눈이 마차 안을 훑었다.
“전하를 뵙고자 하는 마음이 커 미처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수에닐이 에르켈의 손을 끌어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엘리엇과 킬라스가 다급하게 움직였지만 움찔거리는 것에 그쳤다. 수에닐은 어디까지나 예의를 차리고 있는 중이다. 흠잡을 곳 없는 예법에 그들이 말릴 명분이 없었다.
“체르시온 수에닐이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건방짐을 지운 정중한 말투였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황자는 그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수에닐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카힐름의 부단장이 직접 성문까지 나와 도움을 주다니. 경이 이토록 아래를 굽어보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수도를 오래 비우셨으니 모르실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수에닐 경! 말투가…!”
“킬라스 경. 아직도 그리 멀뚱멀뚱 서 계시면 어떡합니까. 전하께서 어서 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우셔야지요. 짐을 모두 꺼내 주십시오.”
킬라스가 이를 악물었다. 제 출신을 생각하면 고위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거야 익숙한 일이라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었으나 체르시온 수에닐이 저렇게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자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황자께서 생각이 없어 저리 웃고만 계시는 게 아니지 않은가.
굴욕은 모두 제가 뒤집어쓴 것처럼 험악해진 얼굴의 킬라스가 마차의 짐칸을 열었다.
수에닐은 턱짓으로 경비를 불러 짐칸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마차 안도 확인해야 하는데, 제가 들어갈까요?”
“본인의 무례가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일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지 않겠습니까?”
황자는 잠시 말을 골랐다. 도를 넘는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인지,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얌전히 웃고 있을 것인지. 수에닐은 즐거운 마음으로 상대의 선택을 기다렸다.
“경이 원하는 대로.”
4황자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반응이었다. 수에닐은 조금 전까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식어 버리는 걸 느꼈다.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왜인지 김이 샜다. 시끄러운 이들과 어울리기에 조금은 더 재미있게 해 줄 거라 기대했는데.
저렇게 유약하니 권력이란 것과 거리가 먼 거다. 그 유약함이 황자의 목숨을 성인이 되도록 이어 주었으니 현명한 선택이겠다만.
황자의 것이라고 하기에 단출한 짐이었다. 상황을 가까이에서 본 경비는 이 중 제일 발언권이 큰 게 수에닐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트집 잡힐 일이 있을까 열심히 짐을 뒤졌으나 흥미로운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보내야 하나?
수에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엇 딜런이 인상을 쓰며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예리한 눈길은 그의 반응에서 초조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깨무는 입술, 불안하게 힘이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하는 손, 바짝 긴장한 허벅지.
조금 더 캐내면 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어….”
“무슨 일이지?”
경비가 난감한 목소리를 흘리자 수에닐이 날카롭게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쉰 것에 모두의 시선이 몰리자 경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떨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 그게….”
떨기만 하는 경비를 밀쳐낸 수에닐은 직접 그가 만지고 있던 짐 가방에 손을 댔다. 그리고 곧 경비가 왜 의아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가방에 비해 짐이 적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내부가 작았다. 위화감을 느낀 수에닐은 테두리부터 천천히 더듬어갔다. 곧 달칵, 소리가 나며 숨겨져 있던 내부가 열렸다.
안쪽에는 단단하고 납작한 것이 들어 있었다. 틈을 벌려 그것을 꺼낸 수에닐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찾았다.
검은 책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아마 마법으로 봉인도 해 놨겠지. 마법사가 없는 이상 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에닐은 시침을 떼며 황자에게 물었다.
“내용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평범한 마도서일 뿐인데. 경의 시간을 너무 쏟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군.”
“마법을 배우지도 않은 분이 마도서를 가지고 있는 게 평범하지는 않지요.”
엘리엇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성문 검사를 모두 이렇게 하면 지나가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겁니까?”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걱정 마시죠.”
“그런 것치고 소공작께서는 이 마차에만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 몸이 한 개뿐이라 한 번에 한 개의 마차만 확인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여러 일을 한 번에 해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둘 사이의 언성이 높아지기 전 에르켈이 엘리엇을 말렸다. 엘리엇이 간신히 분을 삭이고 입을 다물었다.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어. 경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감사합니다, 전하. 과연 태양의 핏줄다운 아량이십니다. 그런데….”
수에닐이 책을 들고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책을 봉한 자물쇠는 힘주어 움직여도 덜컥거리기만 할 뿐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흠 없이 열려면 마법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가져가 보여 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확인이 끝나면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
에르켈의 말에 수에닐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재수 없는 새끼.”
웃으며 인사하는 수에닐의 모습이 멀어지자마자 엘리엇이 욕을 뱉었다.
“엘리엇.”
“죄송합니다, 전하.”
“수에닐 경은…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니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엘리엇은 지나칠 정도로 온건한 에르켈의 말에 순순히 답하며 건너편에 앉은 기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카데미에서 수도까지 올라오며 내내 별 표정도 없던 얼굴에는 침통함이 가득했다.
리젠 킬라스. 엘리엇이 손가락으로 허벅지 위를 두드렸다. 저 강직한 기사는 제법 이용할 가치가 있다. 자신이 화를 못 이겨 소공작에게 맞서는 머저리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