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17)

#108

킬라스는 오래된 가문이고, 자작 본인도 수완가로 제법 유명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으니,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까지 들이며 제법 노력해 본 모양이지만. 본인의 하반신에 문제가 있으니 될 턱이 없다.

결국 킬라스 자작은 먼 친척을 입양했는데, 그게 저 리젠 킬라스다. 검술 실력도 준수하고, 자작도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원하니 리젠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강직하고 신념 있는 그를 질시라도 한 걸까. 리젠 킬라스의 뒤로는 추잡한 소문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가 평민 출신이라는 내용이었다. 본인의 앞에서 떠들어대니 그 내용을 몰랐을 리 없지만, 리젠 킬라스는 직접 나서 반박하지 않았다. 아마 소문이 거짓이라면 잦아들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럴 리가. 소문은 점점 음험한 방향으로 부풀었을 뿐이다.

‘덕분에 이쪽은 일하기 쉬워졌지만.’

만약 리젠 킬라스의 입지가 저렇게 불안정하지 않았다면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가 에르켈의 호위를 맡을 수 있을 리 없다. 황족에게는 황실 기사단의 단원이 붙는 게 정석이라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보내 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리젠 킬라스는 가장 힘없는 황자에게 가라는 명령에 모욕을 느끼는 대신 충실히 임했다. 덕분에 엘리엇은 그가 에르켈의 호위를 맡았음을 확인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아카데미에 가있던 4황자 에르켈이 무언가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수도로 향한다.

이야기는 은근하고 느리게 퍼졌다. 미끼를 물 물고기는 많지만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이것이 미끼임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상대가 미끼를 진실이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가짜라도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대어가 낚였다.

‘설마 소공작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재수 없는 파리한 낯짝을 떠올리자 웃음이 실실 샌다. 지금쯤 만족스럽게 가문 마법사에게 가고 있을까. 그래 봤자 나올 건 없다만.

성물의 존재는 극비에 가까웠다. 아벨 에드윌과 세드릭 클라인을 통해서도 확인했으니 그건 확실하다. 설마하니 수에닐의 마법사가 그 둘보다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존재도 모르는 성물의 외형을 알 리는 만무하니, 그 모습을 본뜬 책이라고 해도 거리낌이 없다.

클라인과 루이스가 외형을 복제한 성물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이쪽에 하나, 루이스에게 하나, 르웰린이 하나, 세드릭 클라인이 자처해서 또 하나. 모두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수도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다.

그러니 오늘 체르시온 수에닐이 짐을 확인하고, 복제된 책을 가져간 것은 운이 좋았다. 상대는 성정이 예민하고 치밀한 인간이다. 의심이 남지 않을 때까지 샅샅이 뒤질 테고, 책이 평범한 마법서라는 걸 확인해 줄 것이다.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하려고 한다면 얼마든 구할 수 있는 책이라는 걸 확인한 수에닐은 그곳에 관심을 끊겠지.

나중에 의심 받느니 미리 걸려 버리자는 게 계획의 요지였다. 수에닐 같은 이들은 이미 흥미를 잃은 건 다시 찔러 보지 않을 테니까. 본인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다시 책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척 봐도 수상한 표지에 뭐라도 발견한 것 같았겠지만. 그래 봤자 뭐하겠어. ‘진짜’는 이미 수도에 가 있다.

*

아르비스를 출발한 열차는 한참을 달려 베센에 도착했다.

로즈는 빠진 짐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에는 사람이 많았다. 귀족들이 타고 내리는 곳은 그나마 덜하다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제국이 넓은 만큼 귀족의 성은 흔했다. 특등석 정도 되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2등석 정도만 돼도 무리에 휩쓸려 허튼 곳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로즈는 잠깐 저 앞쪽, 사람들에게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열차의 머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격 차이가 못해도 다섯 배는 날 텐데. 고작 몇 시간 편하게 앉아 오기 위해 그 돈을 쓸 수는 없었다.

딸의 데뷔탕트를 위해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무리했다. 뮈헬은 부유한 가문이 아니었다. 아주 가난해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치를 할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동남부 영지 대부분이 그렇듯 영지인들은 대다수 농민이었고, 영주에게는 이렇다 할 돈벌이가 없었다.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거는 것만으로 소소하게나마 이야기 거리가 되는 지역에서, 가문을 이어받지도 못할 딸을 위해 수도에 보내 준다는 건 깨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로즈는 투정 어린 세실과 마리아의 편지를 기차에서 내내 읽었다.

친척이자 오랜 친구인 둘은 로즈의 아버지인 뮈헬 남작의 너그러움과, 오빠 사무엘의 애정에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로즈도 그 둘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로즈가 수도에서 데뷔를 하게 된 것은 사무엘과 결혼한 베로니카 덕이 컸다.

수도의 부르주아였던 베로니카는 반대를 무릅쓰고 지방 작은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했다. 아카데미에서 눈 맞아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더라니. 파격적인 스캔들에 로즈가 영지를 떠나는 열차를 탈 때까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베로니카는 감히 뮈헬에서 거절할 수 없는 지참금을 가져왔고, 어떻게 평민과 피를 섞을 수 있느냐 노성을 토하던 숙부는 입을 다물고 돌아갔다.

로즈는 처음 베로니카를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은 갓 피어난 장미처럼 흰 피부 위에서 흔들렸고, 푸른 눈은 긴 속눈썹 아래 당당하게 반짝였다. 그뿐인가. 가늘고 우아한 목을 감싼 스카프는 만지는 것이 황송할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고, 날씬하게 허리를 조인 드레스는 수도의 유행 따위는 모르는 로즈의 눈에도 맵시 있었다.

맙소사. 저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사무엘과 결혼한다고?

로즈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결례인 것을 알면서도 사무엘과 베로니카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이목을 끈 둘의 결혼식은 원래 소소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결혼 허락을 받은 후, 베로니카는 자신의 꿈은 소중한 사람과 소소하게 식을 올리는 거였다며 즐거운 얼굴로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게 뮈헬의 자존심을 위한 배려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베로니카의 얼굴만 봐도 행복하다는 듯 웃는 사무엘조차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뮈헬은 그녀의 배려를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몇 대째 내려오는 베일을 쓰고, 드레스를 고쳐 입을 예정이었다. 전통을 따지자면 이쪽이 새로 옷을 만드는 것보다 명분이 있겠으나, 수도에 있는 베로니카의 가족들에게는 헌 옷을 고쳐 입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곧바로 수도에서 재단사와 상인들이 무리로 베센을 찾아왔다.

베로니카의 아버지가 거절하면 자신이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가겠다는 편지를 보내자 베로니카도 별수 없이 두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이런 건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영지에서 살다 주변 귀족과 결혼하면 앞으로도 보기 힘들겠지. 로즈는 길게 끌리는 드레스 위로 촘촘하게 박혀 빛을 받을 때마다 빛나는 작은 보석과, 베로니카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진주 장식을 보며 확신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기는 했으나 덕분에 가문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사무엘의 결혼이 끝나자 아버지는 다른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로즈의 데뷔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베로니카의 도움을 얻었다곤 해도 화려한 결혼식 덕분에 주변에 위신을 세운 차였다. 간신히 주목을 얻은 이때, 딸의 데뷔가 평범하다면 분명 얘기가 나올 것이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무리하고픈 마음도 컸다.

그렇게 로즈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앞두고 아버지와 사무엘, 베로니카가 머리를 맞댔다.

그 모습을 보며 로즈는 그냥 얌전히 웃었을 뿐이다. 그래 봤자 자신의 미래는 뻔했다. 수도나 로베누스, 아무튼 돈과 힘이 있는 지역에서는 아카데미에 보내기도 한다지만 먼 이야기다. 동남부에서 대부분의 영애들은 적당히 선생을 불러 글과 노래, 수를 배운 후 비슷한 수준의 가문에 시집가는 것으로 10대를 끝냈다.

로즈 또한 자신도 가진 것 중 제일 화려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고 근처에서 데뷔를 한 후 적당히 나이와 조건이 맞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는 순응할 수 있었다.

로즈는 자신이 평범하다는 걸 알았다. 사무엘은 로즈의 파란 눈을 보며 바다 같다고 칭찬했고, 베로니카도 옆에서 거들며 코끝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뺨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그들의 말을 모두 그대로 믿어 버릴 수도 없는 게 아닌가.

자신의 갈색 머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고, 색 짙은 벽안도 동남부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다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하기는 민망했다. 로즈에게 바람이 있다면 그저 사무엘처럼 다정한 남자를 만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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