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17)

#109

평생 자신의 영지를 벗어난 적 없는 로즈 또래 남자애들은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제발 그들이 철이 들기를.

어릴 때는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꿈꾼 적도 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외모에, 내게만 다정한 남자. 가문도, 본인의 능력도 빼어난 그가 제게만 다정한 꿈을.

하지만 열여덟이면 벌써 성인이 다 됐는걸. 그런 꿈을 꾸기에는 너무 커 버렸다.

그즈음, 뮈헬에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먼 친척인 로즈의 데뷔탕트를 도와주고 싶다는 편지는 이미 여러 통 받았다. 문제는 그 위에 찍힌 인장이었다. 우아한 필체로 쓰인 것은 분명 아이센 후작 부인의 서명이었고, 선명하게 찍힌 것은 아이센의 문장이었다.

맙소사.

로즈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이런, 맙소사!

뮈헬과 아이센은 가계도를 한참 타고 올라가야 겨우 이어지는 먼 친척이었다. 수도의 대귀족과 가느다란 연이나마 이어지는 것이 뮈헬에게는 영광이라고 할 정도로 두 가문의 격차는 명확했다.

아이센의 편지에 영지가 온통 뒤집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그때는 정말로, 정말로 꿈만 같아 베로니카의 도움이 없었다면 답장을 보낼 정신을 챙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짐을 꾸리고, 열차를 구하고, 또 베센에서 수도까지 가는 마차를 구하는 데 꼬박 열흘이 걸렸다.

수도에서 데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로즈는 사는 동안 수도에 발을 디딜 일 자체가 없을 줄 알았다.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잠에서 깨면 평소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사무엘이 찾아와 ‘또 늦잠이구나, 로즈.’ 하고 웃는 평범한 아침.

“와아….”

주변에서 매번 야무지다는 소리를 들어온 로즈였지만, 플랫폼을 벗어나 역 내부에 진입하자 탄성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신축한 베센 역은 동부의 것과는 양식이 달랐다.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났고, 바닥에 구두가 닿아 울리는 소리조차 새로웠다. 로즈는 잠깐 몽롱한 얼굴로 높은 천정과 벽화, 기둥에 섬세하게 새겨진 조각 따위를 훑어보았다. 아르비스도 처음 봤을 때는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그조차 감히 베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기야. 섹텔까지 가는 비용과 베센까지 가는 비용이 거의 두 배 차이였는데.

본래 동부에서 이어지는 열차의 마지막 역인 섹텔과 신규역인 베센은 거리가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문제는 한 발자국 걷는 거리만큼의 땅으로도 금을 산다는 어마어마한 서부의 땅값이었다.

알음알음 전해 듣기로는 딜런가에서 그중 대부분을 투자했다고 하던데. 정확히 얼마나 되는 금액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라면 1년을 채우기도 전에 원금을 벌어들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확실히 수도와 가깝다는 것이 실감났다. 로즈는 가방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괜히 품에 넣어둔 종이들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이센의 인장이 찍힌 편지, 베로니카가 써 준 소개장.

아이센에서 연락을 받고, 당장은 기뻤다. 향기 나는 편지를 끌어안고 방방 뛰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 걱정이 밀려왔다.

평생 연락이 닿을 일도 없던 아이센에서, 마침 로즈가 데뷔를 할 때가 된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도와주겠다 선뜻 도움을 주는 건 단순한 호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끝날 겨를이 없었다. 사무엘도 걱정을 감추지 못하며 마지막까지 로즈에게 ‘혹여 무리할 일이 생기거든 뒷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며 당부했다.

설사 정말 무리한 일을 요구한대도 그걸 거절할 힘이 없겠지만, 말이라도 고마워 로즈는 눈이 찡했다. 베로니카도. 그녀라고 한들 수도의 인기 재단사에게 소개장을 써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얼굴을 본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남편의 여동생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출구 근처에 선 로즈는 훌쩍이며 마차를 타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살폈다.

손수건을 꺼내기 위해 한 손을 품에 넣은 탓일까. 아니면 주변에 잠깐 정신을 팔린 탓일까. 로즈는 뭔가 옆을 치고 지나간 후에야 손이 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거기 서!”

저기에 뭐가 들었는데!

*

살면서 이렇게 달려 본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

숨이 찬 지는 오래됐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굽이 낮다곤 해도 딱딱한 구두를 신고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평생 조신한 몸가짐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귀족 영애가, 손수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달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로즈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줬다.

당장 중요한 편지야 품에 챙겼다지만, 귀중품을 모두 안고 다닐 수는 없었다. 옷가지와 신발 정도는 포기한다고 쳐도 돈과 어음이 모두 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젠장! 저걸 잡지 못하면 수중에는 당장 수도로 갈 마차 비용조차 없었다.

“망하알….”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거기 서라고 외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기야 서란다고 설 놈이면 애초에 소매치기를 하지도 않았겠지.

거리는 좁혀질 줄 몰랐다. 아니, 이미 손 닿을 수 없이 멀리 벌어졌다.

왜 하필, 그 순간에. 하필 나한테.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울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사무엘과 베로니카, 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다. 초상화로만 남은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엄마, 죄송해요. 이 꼴로 어떻게 아이센까지 가죠? 거기서 왜 넋을 놨는지. 베로니카가 조심하라고 여러 번 일러 줬는데.

이러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꺄악!”

골목을 돌 힘도 남지 않았는데 속도는 줄이지 못한 로즈의 몸이 그대로 휘청거렸다. 이제 하다하다 입은 옷마저 더러워지겠구나. 세게 부딪힐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무언가 몸을 낚아챘다.

단단하게 허리를 감은 것이 누군가의 팔이고, 자신이 그 사람의 품 안에 기댔다는 걸 인지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로즈는 골목에 꼴사납게 나뒹구는 대신 누군가에게 안겨 있다는 걸 깨닫고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자마자 품에서 벗어나려 팔을 밀어냈다. 감사 인사가 먼저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너무 당황해서 그런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뺨을 식힌 로즈가 뒤늦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자신을 감싼 상대를 확인한 순간, 로즈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잊었다.

숨이 멎을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멍하게 벌어진 입이 닫힐 줄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세상에.

넋이 나가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멍청하게 ‘세상에….’만 연발하고 있었을 테니까.

옅은 금색의 머리카락은 가볍게 흔들렸고, 드러난 이마는 하얬다. 매끈한 뺨은 상아를 조각한 것처럼 매끈하고 차가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어깨와 등에 닿은 품도 단단했다.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로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곳은 역시, 눈이다.

예술학 공부를 열심히 해 볼걸…. 자신의 지식이 짧은 탓인지, 아는 것 중 상대의 눈 색을 빗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와인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푸르고. 언젠가 한 번 본 보라색 사파이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세계에 빠진 로즈를 보며 남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쁜 것보다도,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쯤 되면 정신을 차렸어야 하는데. 로즈는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가 ‘어쩜…. 찌푸린 얼굴도 저렇게 잘 어울리지?’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남자는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굳어 있는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은 남자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로즈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자신이 마차에 오르는 줄도 몰랐다.

“경비대를 불러. 소매치기다.”

“예, 도련님.”

도련님이라니. 사무엘을 칭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지. 정말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호칭이다. 로즈의 표정이 또 잠깐 흐릿해졌다. 아니,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닌데. 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건 맞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한 울림이었으니까.

조금 또렷해지나 싶더니 다시 멍해진 로즈를 본 남자가 말했다.

“조금 늦는다고 연락 넣고. 의사에게 보여야 할 것 같아.”

의사? 의사….

턱 걸리는 단어를 곱씹던 로즈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저건. 상당히 예의를 차리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로즈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었다.

“아니, 아니요!”

부정하려는 마음이 앞서 저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비명처럼 들리는 것을 내뱉은 로즈가 입을 가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이래서야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도 없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울을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알 수 있었다. 심각할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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