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17)

#111

“저쪽은?”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자신을 향했다. 로즈는 입꼬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올리며 웃었다. 거기에 온 신경을 쓰느라 소개하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는 못 했지만, 미소 자체는 썩 쓸 만하게 나온 것 같았다.

“뮈헬 영애야. 아이센의 초대를 받았다고 하던데.”

“뮈헬?”

아이센이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벌린 입술과 구른 눈동자의 사랑스러움이 지나칠 지경이다. 에드윌의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에 로즈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호흡이 필요하다. 수도의 귀족들은 모두 이런가? 이성의 한편은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고 비웃었지만, 잘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둘을 만나고 나니 혹시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님은 내가 안내할 테니 들어가 봐. 아이센의 모든 여자들이 너를 기다리느라 어수선하거든. 나도 예외는 아니기도 하고.”

에드윌은 난감한 듯 눈썹을 살짝 내리며 웃다가, 로즈에게 눈인사했다. 아이센과 에드윌은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아하게 헤어졌다.

“이따 얘기 좀 해.”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로즈가 급한 마음에 루시아 아이센의 뒤에 바짝 붙은 덕에 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괜히 연인 사이에 끼인 느낌에 민망해진 로즈는 얌전히 복도를 걸으면서도 내내 망설였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은가? 아니면, 뭐라도 떠들어 보는 게 나을까? 괜히 주제를 잘못 골랐다간 멍청한 인상을 줄지도. 하지만 이미 엉망인 첫인상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 제 연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초라한 여자애라니. 화를 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차를 보내 줄 걸 그랬네요.”

어쩌면 이미 화가 난 걸지도.

로즈는 숨을 길게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뱉기를 네 번쯤 반복한 후에야 간신히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쓸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괜찮다니. 뭐가?

“짐을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하여간, 치안에 신경 쓴다고는 해도 영 엉망이라니까.”

“아… 그, 네, 네.”

그 얘기를 하는 거였구나. 혀를 깨물 뻔한 로즈는 급하게 긍정했다.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자 하루 종일 삐걱거리며 어긋나는 기분이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다짐하자마자 소매치기를 만난 것부터?

*

로즈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루시아 아이센은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덕분에 로즈가 사용할 방에 도착할 즈음에는 말을 놓을 수 있었다. 동갑인 데다, 친척인데 서로를 높여 말하는 것도 우습지 않냐는 이유였다. ‘감히?’ 하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임은 알 수 있다.

“그대로는 쉬고 있으래도 앉지 못하고 서성일 게 뻔한데.”

성큼 다가온 루시아 아이센이 로즈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서슴없이 거리를 좁힌 것에 한 번, 손을 뻗어오는 것에 또 한 번 놀란 로즈가 올라간 어깨를 내리지도 못하고 굳었다. 귀 옆에 작은 웃음이 터졌다.

“옷은 바로 준비될 거야. 의자가 더러워지는 거야 괜찮지만, 그대로는 어머니를 뵈러 갈 수도 없을 테니까.”

확실히. 이대로 후작 부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에드윌 앞에서도 부끄러웠던 구두와 치마는, 아이센 후작 부인 앞에서는 더 부끄러운 것이 될 테니까. 로즈가 고개만 끄덕이자 아이센이 허리에서 느리게 손을 뗐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완전한 봄은 아닌데. 루시아에게서 나는 좋은 꽃 냄새를 맡고 있으니 봄의 한복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세실이라면 두 손을 맞잡고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으로 ‘동화 속 요정 같아….’ 하고 중얼거렸겠지만, 다행히 로즈는 그런 류의 책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만 “다행히 나와 체격이 비슷해서 새로 맞출 필요는 없겠고.”라는 말에 반응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르웰린도 센스가 없지. 경비대를 보낼 정신은 있어도 새 옷을 사 줄 생각은 못 했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에드윌이 정말 그런 센스와 친절을 발휘해 새 옷이라도 사 줬다면 로즈는 황송해서 정말 창문에 머리라도 박았을 것이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아이센의 얼굴도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르고. 자신의 연인, 어쩌면 약혼자로 보이는 사람이 낯선 여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 즐기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내, 내가?”

켕기는 게 있는 로즈가 화들짝 놀라면 루시아는 진정하라는 듯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소곤거렸다.

“놀라운 일도 아니지. 어릴 때부터 얼굴을 봐 온 나도 가끔 르웰린을 보면서 감탄하거든. 처음 본 사람들이 입을 벌리는 것도 당연해.”

“그, 그래?”

다행히 에드윌의 얼굴이 자신에게만 엄청난 건 아닌 모양이다. 루시아의 심미안에도 감탄스러울 정도라니.

로즈는 화려했다는 기억만 뚜렷한 에드윌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흐릿했다. 인상이 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아까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없자 여기저기 뭉그러뜨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런 얼굴로 위기의 순간에 등장해 도움을 주다니. 꼭 소설 속에나 나올 운명적인 만남 같잖니?”

그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부를 법하긴 했다. 평생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수도에서의 데뷔. 꿈꾸는 기분으로 올라오자 만난 소매치기. 그리고 그 위기의 상황에서 도움을 준 남자.

화려한 연회장에서 만났다고 해도 두근거렸겠지만, 확실히 저쪽이 더 운명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느새 문 쪽에는 하녀가 여럿 서 있었다. 루시아가 손짓하자 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손에는 한가득 옷과 장신구, 신발을 들고. 슬쩍 훑어만 봐도 고급스러운 것들이다. 하기야 아이센에서 나오는 거라면 찻잔 하나로도 로즈가 타고 온 기차의 특등석 티켓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센은 말을 잇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건가? 내 남자에게 손대지 말라는 경고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가뿐한 얼굴이지 않나. 루시아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듯 경쾌했지만, 에드윌과 로즈 사이에 선을 긋고 있었다. 절로 고개가 갸우뚱할 일이다.

“네가 정 그와의 소설 같은 연애를 꿈꾸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기를 바랄게. 네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충고야.”

“그, 그건….”

“뮈헬과 에드윌의 차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니까 기분 나빠하지 마. 물론 가당키나 하겠냐만. 에드윌에서는 그 애의 선택을 존중할 테고, 남작께서 너를 많이 아끼시니 어떻게든 지참금을 마련하시겠지. 성에 차지 않는 거야 당연한 일이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겠지.”

로즈의 얼굴이 푹 수그려졌다. 뺨뿐 아니라 어깨까지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루시아 앞에서 낱낱이 제 속마음이 드러난 것도, 신분차를 잠시 제쳐 뒀다는 것도.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 같았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풋풋한 연정으로 넣어 두고 데뷔에 집중하는 게 좋아. 네 연적께서는 질투가 많으시니.”

연적이라니? 의아함이 떠오른 로즈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 루시아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제국에서 제일 신성한 이름을 가진 분이 에드윌가 막내를 특별히 아낀다는 건 수도에서 대단한 비밀도 아니거든.”

로즈는 벌어지려는 입을 급하게 막았다. 화, 황가의…. 기민하게 굴러간 머리가 황가 가계도를 떠올렸다.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역시 제국 유일의 황녀였다. 그녀가 아름다운 것이라면 보석이든, 그림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즐기며 곁에 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다. 확실히 에드윌은 어떤 보석에도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남자였다.

루시아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로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웃음소리였다.

“황녀께서는 자비로우시지. 제 연인의 연애 정도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

수도 귀족들이란.

로즈는 통 이해하기 힘든 연애관을 애써 받아들이며 루시아가 주는 힌트를 주웠다. 황족, 그 중에서 황녀를 제외하고, 가장 신성한….

그제야 루시아가 말하는 ‘연적’이 누구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까 덜컥 겁이 난 로즈는 입을 틀어막았다.

*

제국의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아이센 후작가의 응접실.

차를 따르는 하녀의 손길은 오랜 시간 숙련되어 군더더기가 없었다.

쪼르륵, 차오르는 찻물 위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빛이 퍼지며 일렁였다.

암암리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딜런, 수에닐과 함께 제국에서 제일가는 재력을 보유한 아이센이라는 말이 진실은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하다는 건 확실했다. 실제로 그 명맥을 오래 이어 온 가문답게 제국의 손꼽히는 명문가였으니까.

평소라면 자신이 일하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당했을 하녀는 영 부산스러운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몇 번인가 마주치며 얼굴을 익힌 하녀의 행동을 바라보며 표정 관리에 힘썼다.

귀한 아가씨를 옆에서 직접 모시고, 차를 따를 정도로 직급이 높은 하녀다. 자신의 주인과 손님을 대접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저들의 긍지다. 그런데 지금, 하녀는 루시아에게 가는 눈길을 멈추지 못했다. 이미 자신이 흘끔거리는 것이 조심스러운 수준을 넘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 정도라면, 저택의 다른 사용인들의 반응은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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