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17)

#112

루시아는 그런 시선을 눈치챘으면서도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나를 보며 가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키느라 살짝 깨문 입술과 혈색이 돈 뺨. 마찬가지 이유로 움츠린 어깨와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이 떨리는 모습. 속내를 모르고 본다면 퍽 수줍은 것으로 비칠 만도 했다.

평소 자신의 아가씨가 얼마나 우아한 사람인지 아는 하녀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간신히 평정을 붙들고 있는 얼굴 아래 흥분이 내비쳤다. 지금쯤 저 머릿속에는 루시아와 나를 한 쌍으로 엮은 러브스토리가 펼쳐지고 있지 않을까.

그걸 못 본 척 넘겨야 하는 건 루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저렇게 연기를 해 준다면, 나는 함께 장단을 맞추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차마 함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낯 뜨거운 플러팅을 던질 수는 없었다. 노력은 했지만 힘들었다.

결국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는 거였다. 다행히 그건 내게 어렵지 않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속이 불편했다. 긴장한 손이 습관적으로 컵을 찾았다. 따끈한 온도가 전해지자 바짝 일어난 신경이 누그러졌다.

하녀의 귀에 들어간 그 소문부터, 우리를 보며 오해하도록 부추기는 상황까지. 모두 의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연하게 구는 것도 어려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혼기를 앞둔 남녀의 스캔들이다.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이러다 소문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폭풍 속에 작은 배를 띄운 심정이다.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나면 어느새 내 약지에는 약혼반지가 빛나고 있을지도. 가능성이 낮지 않아 더 두려웠다.

“다과를 더 준비할까요?”

내가 민망해하는 동안 모른 척 자신의 웃음만 삼키고 있던 루시아가 그제야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하녀를 물렸다.

“됐어. 나가 봐, 로라. 부르기 전까지 들어올 필요 없어.”

“네, 아가씨.”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완전히 복도를 지나는 소리를 확인한 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녀는 밖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사실에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떠들어줄 것이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을 타고 커져 곧 소문이 되겠지.

“뭘 그렇게 긴장하니? 바짝 굳어선.”

루시아가 놀리듯 말했다.

“연인을 두고 나와 만나고 있느라 불안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루시아가 소리 높여 웃었다. 후작가의 두꺼운 응접실 문을 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

나는 한숨만 푹 쉬었다. 루시아와 손잡으니 든든하긴 한데, 속이 복잡하다. 이게 맞는 방향인지 감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성물의 운반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루이스와 세드릭이 성물을 복제하고, 모두가 나눠 가진 후 흩어져 수도로 향했다. 루이스는 열차를 통해서, 나는 아벨과 함께 게이트를 타고, 에르켈과 엘리엇은 마차를 타고 수도의 성문을 넘었다.

에르켈과 엘리엇의 마차 앞에 수에닐 소공작이 나타났다는 말에는 가슴이 철렁했다. 명색이 수에닐인데. 혹시라도 그가 복제품의 확인을 맡긴 마법사가 성물의 외형을 알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나중에 성물을 갖고 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들키려던 생각이긴 했지만 설마 수에닐이 직접 나올 줄은.

레오가 말한 바에 의하면 체르시온 수에닐은 속 좁기가 제국에서 제일가는 쫌생이였고, 다른 사람 화를 돋우는 재능이 탁월한 인간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레오의 말을 전부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웬만하면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레오가 짜증스럽게 ‘싫은 인간’이라는 평을 내릴 정도면 수에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혹시 수에닐이 피사 테콘이라도 부르는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을 하며 불안에 떨던 우리는 소공작이 직접 에르켈을 찾아와 성물의 겉모습을 복제한 마도서를 돌려줬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갑자기 소공작이 나타나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에르켈과 엘리엇 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수월하게 수도에 도착했다.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기로 한 나는 짐을 확인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벨이 ‘그딴 게 필요하다고 우기는 놈이 누구냐?’ 하고 펄펄 날뛴 덕에 흐지부지 넘어갔다.

루이스는 졸업 기념으로 관광이라도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고급 호텔에 머무르며 유유자적 관광하는 도련님처럼 지내면서 트랩을 꼼꼼하게 설치해 뒀다.

초반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루이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투덜거렸다. 오긴 오는 건가? 트랩을 너무 열심히 설치했나? 경계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미 왔다가 갔는데 감지를 못한 건가?

하지만 초조함도 잠시. 여행의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흔적이 노골적으로 변했다. 트랩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깨져 있었고, 그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래도 루이스는 상대가 짐을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확신했다. 마법으로 봉인해 둔 짐에 해제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게 증거였다. 이 정도로 흔적 없이 짐을 열려면 자신보다 훨씬 실력 좋은 마법사여야 하는데, 그 정도의 실력자였으면 애초에 트랩에 걸릴 리도 없다는 거다. 고작 아카데미 졸업생의 짐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확인하려 들 필요도 없고.

물론 그렇게 확신에 차 있던 루이스도 수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짐을 확인하라는 황명이 내려올 정도로 에르켈이 경계를 받았으며, 수에닐 소공작이 직접 나타나 복제품을 가져갔다는 말에는 잠깐 당황했다.

세드릭도 성물의 복제품을 받았지만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우울하게 아카데미에 조금 더 남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교장이 발명품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나. 안 그래도 너무 한 번에 움직이는 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세드릭까지 움직이는 건 피하자고 말하려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에이든은 가족 여행을 핑계로 서부로 향했다. 아카데미에서 책이라곤 검술서밖에 펼 일이 없었던 그가 뜬금없이 마도서를 들고 다닌다면 오히려 수상하다는 의견에 따라 그는 우리 중 유일하게 복제 성물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침울해했다.

나는 애 달래는 일에 자신이 없고, 엘리엇과 세드릭은 달래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선 것은 루이스와 에르켈이었다. 둘은 최선을 다해 에이든을 다독였다. 네가 맡은 임무가 결코 쉽지 않다,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말로 해결된 건 아니었다. 에이든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데, 자신은 배를 타고 바다나 돌아볼 거라며 자책했다. 결국 에르켈이 그에게 서쪽 바다에서 유명한 함장인 라일라 유스티아를 확인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서야 반짝 살아났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굳이 먼 바다에 나가 있는 라일라 유스티아를 누군가 끌어들이려 할 리 없건만. 아무튼 에이든이 신나서 갔으니 그걸로 됐다.

결국 수에닐 소공작 외에는 직접 복제된 성물을 확인한 사람이 없었다. 성물은 걸리지 않았고, 복제된 외형만 확인받아 통과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큰 쾌거다.

나는 얼마 전까지 내 목에 걸어 둔 목걸이를 생각하며 웃었다. 진짜 성물은 축소해 목걸이 안에 넣어 두었다. 거기에 추가로 시전자가 입력한 암호를 알아내지 못하면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품고 있는 물체가 필요했다. 루이스는 반지를 비롯한 물건들을 만드느라 웬만한 재료를 탕진한 상태였다.

방 안에 마법사가 둘인데, 하나는 못한다고 하니 하나가 남는다. 모두의 시선이 세드릭에게 향했다. 자신도 발명품을 출품하느라 그 정도로 마력이 남은 물건은 갖고 있는 게 없고, 있다고 해도 투자받은 연구비라 어디에 사용했는지 남겨야 한다고 하는 세드릭을 보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

질 좋은 보석은 마력을 머금는 성질이 있었다. 저 녀석이 내가 준 목걸이를 자주 차고 다녔다면, 그 안에도 마력이 제법 쌓였을 것이다.

두 손으로 목걸이를 꽉 잡고 이건 안 된다고 징징거리는 걸 어르고 달래 빼냈다. 일이 끝나면 돌려주겠다, 더 좋은 걸로 사 주겠다 한참을 설득한 끝에 세드릭이 직접 마법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세드릭이 ‘르웰린이 나한테 청혼한 거잖아….’ 하고 훌쩍이는 바람에 주변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소소한 해프닝이었다. 엘리엇이 나를 미친놈 보듯 하기는 했지만, 정말 소소했다.

지금은 루이스가 목걸이를 넘겨받았다. 그는 책의 봉인을 풀겠다고 집에 틀어박혔다. 에르켈이 말하길 성물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하니, 책의 봉인을 푼다면 다른 것들의 행방을 찾기도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좋았다. 큰 첫걸음을 뗐다는 마음에 가슴이 부풀었다. 금방이라도 봉인을 푸는 데 성공하고, 나머지 성물을 모아 이 빌어먹을 소설을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대감은 내려놓으라는 듯,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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