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17)

#113

시작은 다가온 데뷔탕트와 기사 임명식이었다. 안 그래도 촉박한 일정인데 아카데미에서 며칠을 허비하느라 시간을 날렸다. 당장 급하게 파트너가 필요했다.

원래라면 엘리엇의 제안도 있으니 루시아를 찾아갈 셈이었지만…. 아카데미에서 그 둘이 함께 어울리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헬레나 일도 있고. 아직까지 조용하기는 했는데. 그게 루시아와 엘리엇이 친하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건지, 이제는 어릴 때의 짝사랑을 잊고 잘 지내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을 잠식시킬 생각이었지, 진짜 치정극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절친한 사람들인 경우 더욱 그랬다.

케일이 추려 둔 목록 중 누가 제일 나을까 고민만 깊어졌다. 그러던 중 루시아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아직 상대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겠느냐 묻는 얼굴이 당당했다.

루시아는 주목을 원했다. 아이센의 이름은 결코 부족하지 않으나 그녀의 위로 이미 형제들이 데뷔한 후였다.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상황이니 아무래도 관심도가 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데다, 속을 전부 까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가문, 키, 얼굴, 하다못해 글씨체까지 따져 가며 내 상대를 찾던 케일마저 루시아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벨은 자신이 고르고 싶었다며 잠깐 슬퍼했지만 오래 늘어져 있지는 않았다. 셋은 죽이 제법, 아니 아주 잘 맞았다. 케일이 컨셉을 설명하면 루시아는 요즘 유행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냈고, 아벨이 거기에 더불어 필요한 특수 효과를 늘어놓았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토론을 나누는지, 그 열기에 나나 레오는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저택을 오가자 우리 사이에 약혼설이 도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법 풋풋한 커플이 탄생했나 보다, 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소설의 억지력 탓일까. 상황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황태자가 연일 약혼을 미루는 것은 마음에 품은 정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과 모 백작가의 자제가 약혼을 앞두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소문은 각자,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두 소문이 함께 엉겨 붙어 불어나기 전까지 ‘모 백작가 자제’라는 게 나를 지칭하는 줄도 몰랐다. 사실 그런 단어는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모두가 소문 무성한 ‘모 백작가 자제’에 대해 떠드는 동안 누구라도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그게 에드윌이라던데요?’ 하는 말 하나만 던져도 곧장 반응이 올 텐데.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 정신없이 준비하던 나는 다급하게 달려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는 엘리엇에게 무슨 말이냐고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퍼즐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것들을 조합한 엘리엇은 눈썹을 비딱하게 올렸다.

그가 도출한 결과는 ‘황태자는 르웰린 에드윌에게 홀딱 반했고, 에드윌은 황태자의 정부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약혼을 하기는 하는데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다.’ 따위였다. 아직 에드윌의 이름이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고작 몇 달 전 지나간 이야기니 다시 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얘기를 듣는 동안 뒷목이 땡겼다. 살면서 이 정도로 혈압이 오를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갑작스럽게 피가 쏠렸다.

소문은 거짓과 진실을 적당히 뒤섞어 보기 좋게 조리됐다. 황태자를 견제하고자 하는 이에게, 에드윌의 적에게, 남의 얘기를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자극적이고 군침 도는 얘기가 없었다.

수도에 난 소문이 어린애들의 풋풋한 연애담에서 황태자가 낀 스펙타클한 염문설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직은 다들 황실의 눈치를 보는지 설마, 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안심하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딱히 소문의 진상이 궁금해 떠드는 게 아니라는 점이 더 골치 아팠다. 그냥 재밌고, 은밀해 보이니까.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님 말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십이다. 입에 담은 사람이 많을수록 발을 빼기 쉬웠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엘리엇이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한참 떠들어댄 결과 큰 소득은 없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갈 수 있었다. 단어 선택과 타이밍이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소문은 금방 퍼질 만큼 자극적이었지만, 그런 소문이 생길 만한 근거는 없었다. 꼭 누군가 일부러 뿌리고 간 것처럼 시작이 비어 있다.

황태자가 아직도 약혼하지 않았다는 건 의외긴 했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원작이 발동됐으니 그가 르웰린을 사랑하는 건 기정 사실인 데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가 오늘, 내일 하는 상태에서 힘 있는 가문과 손잡고 곧 다가올 정쟁에 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지지만, 그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황제가 된 뒤에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측근에게 권력의 일부를 나눠 줘야 하는데, 황후의 가문이라면 그 요구 수준이 더할 테니까.

게다가 그 끝을 모르도록 아득한 자존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이루어낸 결과를 온전히 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과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지만, 황태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자신의 자리를 의심해 본 적 없을 그에게, 홀로 황좌를 차지하고 움켜쥐는 건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이다.

굳이 이런저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도 없다. 당장 케일만 봐도 알 수 있듯 결혼 시기가 늦춰지는 추세라 약혼이 조금 늦어지는 건 특별한 일에 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성물을 수도로 가져올 때와 마찬가지였다. 짐작 가는 곳이 너무 많아 짚기도 힘들었다. 엘리엇은 2황자 쪽을 짚었다. 그쪽이 이렇게 대담하게 일을 벌일 사람이었나? 차라리 아네트가 아니고? 그 말에 엘리엇은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며 ‘아마.’ 하고 답했다.

아네트라면 이렇게 추접스러운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거였다. 조금 더 확실하게, 완전히 상대의 목을 물어야 할 타이밍을 재고 있을 거라고. 괜한 발길질로 이목을 끌려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동물의 생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처럼 덤덤하게 덧붙었다.

그 전까지 아네트에 대해 의심을 품었지만, 황태자 앞에서 욕망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엘리엇의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아네트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크기는 거대하고 확실해서 보는 것만으로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였다. 원작의 내용대로 흘러간다면 그녀가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알면서도 덜컥 겁을 먹게 될 정도로.

그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불안은 이대로라면 곧 케일의 귀에도 이야기가 들어갈 거라는 점이었다. 소문이 음험한 방향으로 뻗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내 가족들이 알게 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그들은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애정을 주길 바랐고, 나는 그들이 그걸 해냈다고 믿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작과 케일이 후회하는 걸 본 이후로 마음이 불편했다. 그들은 나를 스펠먼에게 맡겨 두고 연락을 강행하지 않은 것, 그를 스승으로 붙이라는 황태자의 명을 거절하지 못한 것, 더 되돌려서는 황궁에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나는 내 아버지와 형제가 지나간 것을 곱씹으며 하지 못한 것과 하지 말았어야 할 것에 대해 늘어놓는 성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 그런 소문이 들어간다면 기사 서임은 개뿔. 케일은 차라리 나를 외국으로 보내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살다 오게 하거나, 약혼을 서두르려고 할지도 모른다. 형제들은 웬만한 일로 내게 무언가 강요하거나, 강제로 이행하는 법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깨달았을 테니 잠깐의 원망을 감내할 것이다.

매일같이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차라리 얼른 서임식 날이나 됐으면 좋겠다는 게 요즘의 바람이었다. 루시아에게 레이디에 대한 맹세를 하고 나면 소문은 또 그쪽으로 쏠릴 테니까.

“로라는 일을 잘하는 하녀지만, 입이 가볍거든. 조만간 ‘루시아 아이센이 르웰린 에드윌에게 홀딱 반해 어쩔 줄 몰라 하더라.’ 같은 소문이 나면 그 애 덕인 줄 알렴.”

나는 망설이다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일단 내 앞에 다가온 불을 끄는 게 급해 그녀와 손을 잡았으나, 루시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한창때의 귀족 영애에게 이런 류의 소문이 도움 될 리 없다. 괜히 친구의 혼삿길을 막는 건 아닌가 싶어 찝찝했다. 이러다 루시아가 ‘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기 힘들 거 같아. 네가 책임져 줄래?’ 한다면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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