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17)

#114

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더는 안 될 것 같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곤란한 건 내 쪽인데도 뭔가 엄청난 걸 잊은 사람처럼 이유 없이 불안해 앉은 자리를 의미 없이 들썩였다.

루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찻잔을 들었다.

“물론. 요즘처럼 하루하루 즐거울 때가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느라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야.”

빈말은 아닌지 그 말을 하는 창백한 뺨에 붉은 기가 돌았다.

우선적으로 택한 건 맞불 작전이었다. 여지도 주지 않을 만큼, 완벽한 연인으로 포장하자는 제안은 루시아가 먼저 꺼냈다. 모두 끝나면 핑계는 성격 차이로 할까? 거침없는 말에 나는 잠깐 눈만 끔뻑였다.

루시아는 제국에서, 그것도 꽤나 보수적인 수도에서 태어난 귀족 영애 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대담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은 당장 꼽아 보래도 몇 없다. 한 손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손가락이 남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엘리엇과는 정말 친구 사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엘리엇도 연애와는 거리가 먼 녀석인데, 루시아는 더했다. 둘 사이에 사랑이 피어나는 건 내가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것보다 더 현실성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너무 걱정 마. 나도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니까.”

“…그게 뭔데?”

“미리 말해 주면 의미가 없잖아. 재미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시아는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도 루시아 쪽으로 몸을 기댔다. 뺨이 맞붙을 정도로 가깝게 붙은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가 나를 노려보면 구해 줄 거지?”

또 뭐라고. 나는 설마, 하며 힘없이 웃었다.

***

서임식은 황성 중앙 홀에서 진행됐다.

가운데에는 길게 붉은 융단이 깔리고, 황실 기사단은 둘로 갈라져 마주 보고 섰다. 기사들의 검으로 이루어진 길을 걸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임식은 오래된 전통이었다.

예복을 입고 검을 찬 채 엄숙한 얼굴을 한 기사들 뒤로는 귀빈들이 있었다. 서임을 받는 기사의 가족, 혹은 넓은 홀이 거의 꽉 차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힘을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황실 기사단은 입단이 확정된다고 해도 바로 들어갈 수 없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다가 1년에 한 번, 학교에 입학하듯 동기들과 함께 서임식을 치른다. 단장 네 명 모두의 동의가 있거나, 황명이 내려올 경우 특례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지만 전시가 아닌 이상 아주 드물었다.

따지자면 제국의 사관 학교 입학식 같은 거였다.

기사단 특성상 구성원들은 대부분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특별하길 바랐다. 황실 기사단의 인원이 적을수록, 서임식이 웅장할수록, 더 높은 귀족이 축하할수록 새로운 기사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런 행사는 당사자를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의 가문을 위한 거였다. 귀족들은 황실 기사단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위해 기꺼이 지원했고, 황실에서는 그들의 눈에 찰 만한 규모의 쇼를 벌여 준다. 겸사겸사 직계의 충성 맹세도 받는다. 서로 잃을 것 없는 거래이니 관계는 끈끈해졌다.

내 옆에 있는 동기들은 그 거래의 대가이자 주체다. 나는 스물이 채 안 되는 젊은 귀족들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임식이 끝나면 넷으로 갈라질 것이다. 한번 배정되면 소속을 바꾸는 일은 아주 드물다. 그래 봤자 세, 네 명 정도를 제외하면 한동안 얼굴 볼 일도 없는 녀석들에게 신경을 쓰느니 내 할 일을 하는 게 낫다.

당일이 되면 긴장해서 실수라도 하는 게 아닐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딱히 기사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게 아니었던 탓도 있고, 이것도 그냥 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기도 했다.

나는 내 옆에 선 동기들처럼 바짝 얼어 있는 대신 홀에 선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단장들이었다. 네 명의 단장은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내가 속하게 될 룩베론의 단장은 이전에 봤을 때의 장난기를 지우고 단호한 얼굴로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위에서 흔들리는 검은 천에는 룩베론을 상징하는 붉은 말이 그려져 있었다.

레오 옆의 땅딸막한 칸딜하스 단장, 깃발을 들고도 우아해 보이는 비시온의 단장, 선명하게 날 세운 검처럼 날카로운 카힐름의 키시아르 테사.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엘리엇이 신나게 씹고 간 부단장 체르시온 수에닐.

수도 권력층의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특별한 날인 만큼 태양신 야캅의 최고 사제도 함께 했다. 국교가 없다고 하면서도 대우하는 걸 보면 거의 교황 취급이다. 하기야 황족이 태양신의 핏줄이라고 우겨대며 그들의 특별함을 내세우고 있으니, 야캅의 사제들을 특별 대우하는 건 당연했다.

미리 정해 둔 순서대로 길게 이어진 융단을 따라 걸었다. 내 순서는 네 번째였다. 나는 다른 곳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미동도 없이 선 제국 최고의 기사들, 웅장한 분위기, 자신들을 보기 위해 모인 귀빈. 모든 것이 압박이 되었는지 앞에 걷는 어깨들이 모두 잔뜩 굳어 있었다.

길의 끝에는 황태자가 있다. 홀로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황제를 대신해 나온 그는 홀의 상단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었다.

빛이 깨져 들어오며 금발 위에 흩어졌다. 후광처럼 보이는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마 일생에 한 번. 기사 작위를 받는 서임식에서 저런 성스러운 장면을 보면 감정적으로 북받치긴 하겠다. 특히 이전까지 저 외모를 본 적 없다면 효과가 더 크겠지.

앞서서 언약한 이들이 미리 지정한 상대에게 맹세하는 과정이 끝나고, 드디어 사제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우연히 마주친 이후. 그와 마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성년이 된 지도 몇 년인데. 약혼은 왜 안 하는 걸까. 생각의 흐름은 나를 소문까지 끌고 갔다. 추접스러운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긴장에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이러다 황태자가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굴었다간 내용에 살이 붙겠지. 그러고 보면 저번에 만난, 잠깐의 재회로도 얘기가 나왔지. 이 순간을 위해 긴장을 미뤄 둔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조마조마하게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등을 찌르는 시선이 약하게 느껴졌다. 모두의 관심이 몰리는 상황과 관계인데 시선이 흩어졌을 리는 없고, 눈앞에 신경 쓸 게 있으니 다른 쪽은 비교적 덜하게 됐다.

다행히 황태자는 미소 한 점 없었다. 잠깐 마주친 붉은 눈은 다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감정 없이 서늘했다. 딱히 그가 나를 보고 웃어 주기를 바란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졌다.

천천히 황태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 어깨 위에 검이 내려왔다.

“그대에게 용맹해질 것을 명하고, 정의로워질 것을 명하며, 무고한 이들을 보호할 것을 명하니.”

“금화로 이루어진 보상을 경멸하며,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모든 이들의 안녕을 위해 싸우고, 정당한 권위에 순종하겠습니다. 함부로 모욕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며,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하겠습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미리 받은 맹세문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나는 황제를 대신해 황태자가 내린 검을 받아 한쪽으로 다가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갈라지듯 물러서고, 그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시아가 수줍을 미소를 띤 채 손을 뻗었다.

황제에게 바치는 언약은 말 그대로 주군에 대해 충성을 바치며, 순종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그와 반대로 레이디에 대한 맹세는 약자를 보호하며, 그를 위해 명예를 바칠 것을 약속한다.

대부분의 기사가 일생에 한 번 거행하는 만큼 의미가 특별했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한쪽으로 내린 루시아는 아름다웠다. 드레스를 미리 보긴 했지만 실제로 입은 걸 보니 예상보다 더했다. 드레스에는 옅게 색이 들어갔지만, 전체적으로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였다. 내 감상을 들은 루시아는 한참 웃었다.

‘그 정도 센스는 있구나?’

네가 그걸 알아볼 정도면 목적은 달성하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상했다. 그러니까, 모두가 저 드레스를 보고 그렇게 느끼게 하겠다는 얘기였다. 준비한 게 있다더니 이거였구나 싶어 하하 웃었다. 루시아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웬만한 담력으로는 그녀 옆에 있지 못할 테니 심장이 튼튼한 사람이 좋겠다. 엘리엇 같은.

하얀 레이스 장갑까지 빼먹지 않고 낀 손을 잡았다.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제 검은 당신을 위해 쓰일 것입니다. 부디 제 이름이 당신을 위해 쓰이게 하고, 제 명예가 당신의 아래 놓이게 하십시오.”

“허락합니다.”

손등 위에 입을 맞추자 작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모르긴 몰라도 긍정적인 내용일 거라 믿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삼자대면이니, 황태자의 정부니 하는 얘기가 떠돌면 또 뒷목이 당길 것 같았다.

가슴에 달아 둔 장미를 루시아에게 건네는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 끝났어야 하는데, 루시아는 일어나는 내 손을 놓지 않고 끌어당겼다. 세지도 않은 힘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일어난 일이라 잠깐 휘청이며 그녀가 당기는 대로 몸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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