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오.”
그는 꽤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저런 표정이야?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다시 하하 웃는다. 조금 전보다 약간 머쓱한 웃음이었다.
“아니. 네가 내 이름을 알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이번에는 나도 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웃기지 않아도 괜히 분위기 가라앉지 않게 웃어야 할 때가 있었다.
“메이빌을 알아? 그럼 나는?”
이번에는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핑크색 머리를 한 녀석이었다. 제국의 신비란. 색 섞이지 않은 적발이나 금발을 볼 때도 신기하긴 하지만, 하늘색이나 분홍색처럼 원래라면 염색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머리색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저렇게 확 튀는 요소를 가진 사람은 잊는 게 더 어렵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르윈 에버린.”
오오, 소리를 내며 감탄한 에버린은 뭐가 좋다고 웃어댔다. 온 몸으로 웃느라 내 팔까지 때렸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데,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단장이 깃발을 한 손으로 드는 거 봤냐, 신기하다. 부단장은 좀 무서운데 그래도 기대된다. 룩베론 분위기가 편한 것 같아 다행이다. 내가 그의 가문이 뭘 하는지,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지 않았더라도 짐작할 수 있었겠다 싶을 만큼 사랑만 받고 자란 외동 티가 났다. 루이스보다 말이 빠른 사람은 처음 봤다.
“저쪽도 너 아는 거 같던데.”
“여기서 에드윌을 모르는 사람이 더 적지 않을까?”
“하긴, 유우명 인사지.”
먼 친척 관계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에버린과 메이빌이 떠드는 동안 나를 알고 있다는 쪽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선명한 빨간 머리였다.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색에 고개가 기울었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에버린의 분홍 머리만큼은 아니어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이었다. 기억을 헤매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세스 블로젯이다.”
“블로젯?”
그제야 어린 시절에 봤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로베누스에서 만난 꼬맹이 블로젯이었다.
어릴 때도 덩치가 좋던 녀석은 훌쩍 자라 있었다. 막연히 그가 자라면 그의 삼촌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빨간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때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팔을 툭 건드렸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블로젯은 머쓱하게 눈썹을 긁었다.
“너야말로. 네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것 같긴 했는데, 칸딜하스로 갈 줄 알았다.”
칸딜하스에는 당장 에드윌의 차남이 부단장으로 있는 데다, 어릴 때부터 얼굴을 알고 지낸 사람들도 많았다. 간다면 편한 생활이 보장됐을 거다. 스펠먼의 이름을 업고 들어온 지금도 무난하고 무탈하겠지만, 그곳의 특혜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겠지.
나도 이 빌어먹을 장르 탈출 계획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다. 어쩌면 원작의 르웰린은 칸딜하스 소속이었을지도 모르고.
“그게 뭐 마음대로 되나.”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갈 수 있는 처지에 시침을 떼려니 낯이 두꺼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을 돌렸다. 뒤쪽에서 에버린과 메이빌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보였다.
“잘 지냈지?”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
이건 이미 많이 들어서 양심에 가책도 없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엘리엇에게 편지도 보내지 못했는데 뭐. 그런데도 나는 “미안하다. 당시에 경황없이 떠나느라….” 하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행히 블로젯은 어린 시절부터 사사로운 일에 감정 쏟지 않는 쿨한 녀석이었고, 내 사과 같은 변명에도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다음 나온 말은 좀 의외였다.
“카일도 걱정했다.”
“…카일? 카일 베리넌?”
블로젯이 아는 카일이 또 있나? 이 녀석이 이 상황에서 꺼낼 만한 카일이 베리넌 말고 또 있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길지 않았던 로베누스 생활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카일은 베리넌뿐이었다. 블로젯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천사처럼 화사하게 웃던, 악마 같은 녀석이 떠오르자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그 녀석이랑, 잘 지내나 봐.”
“수도에 오기 전까지는 계속.”
그는 잠깐 고민하다 덧붙였다.
“꽤 친한 편이지.”
솔직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물론 베리넌이 잘 좀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래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블로젯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둘이 잘 지내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그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베리넌은 본인이 받은 상처를 이유로 남에게 상처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놈이었고, 블로젯은 그걸 받아 줄 만큼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싸우고 난 어린애 둘 붙여 놓고 선생님이 ‘이제 둘이 손잡아, 화해하는 거야. 둘이 친구예요.’ 해 봤자 둘이 진짜로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기대하지도 않은 이야기에 흥미가 생기자 자연히 희미해져 가는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이 생겼다.
“둘이 친해질 줄은 몰랐어. 너 베리넌 싫어했잖아.”
“걔도 나 싫어했으니까.”
“성격은 좀 물러졌나 보네.”
“아니. 여전히 악마 새끼 같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아연했다. 가볍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동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도시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건 한 사람이었으니까.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골목, 그곳에서 어린 왕처럼 군림하던 소년.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놓게 만들던 다정함.
그러고 보니 루크도 수도에 있겠구나, 하는 데에 생각이 닿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
네 개의 황실 기사단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놀랄 정도로 달랐다. 좋게 말하면 각자 개성이 뚜렷했고, 솔직히 말하면 천방지축이었다.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의 길만을 갔다.
칸딜하스는 과연 레오가 부단장을 할 만한 곳이었다. 남의 일에 관심 없고, 그런 주제에 관심 있는 것은 죽도록 파고드는 성향. 제멋대로에 오만한 구석도 있긴 한데 굳이 성질을 들춰 본다면 열혈. 제임스는 레오를 보며 어휴, 하고 고개를 젓긴 해도 말리지 않았고, 다른 단원들도 비슷했다.
부단장 때문에 만성 두통과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단장도 그 감투를 쓰기 전까지는 비슷했다고 하니까. 저러다 단장이 은퇴하고 누군가 단장 자리에 앉으면 지금처럼 바람 같은 자유로움은 내려놓고 단원들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쉴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시온의 이미지는 딱 ‘귀족 도련님들’이었다. 좀 더 까놓고 말하면 존나 젠체하는 놈들이었다. 어차피 따지고 보면 다들 귀족 도련님, 아가씨들이니 어느 곳인들 그러지 않겠냐만 유독 ‘저 녀석 검만큼 무거운 건 검만 들어 봤겠구나.’ 싶은 인간들만 모여 있었다.
나는 해초 같은 초록 머리를 멋들어지게 정리하고 다니는 비시온의 단장을 떠올렸다. 그나마 그쪽은 연륜 덕인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었지. 아직 어린 기사들은 그 목이 얼마나 빳빳한지 보고 있으면 담이 올 것 같았다.
카힐름은…. 나는 검은 용 깃발에서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는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었다. 키시아르 테사를 보면 황태자가 떠올라서 속이 불편했고, 수에닐 소공작의 의미 모를 미소를 보면 불쾌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내게는 카힐름이 딱 그 정도였다. 하나가 싫으면 다른 것도 밉게 보인다는데. 둘이나 싫으니 다른 단원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쪽은 통째로 걸렀다.
남은 건 룩베론인데. 이렇게 말하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 소속 편을 드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룩베론이 넷 중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한 번 더 소속을 고를 기회가 온다고 해도 룩베론을 택할 정도로.
에너지 넘치지만 그게 사람에게 부담될 정도가 아니라 적당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밝았다. 괜히 말을 곱씹으며 안 좋은 쪽으로 해석할 것 같은 카힐름이나, 거들먹거리는 비시온보다는 가끔 이게 기사들인지, 용병인지 헷갈릴 정도로 괄괄하지만 쾌활한 룩베론이 훨씬 낫다.
하지만 제일 낫다는 게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룩베론에도 싫은 사람은 있었다.
“재수 없게….”
들으라는 듯 인상을 확 찌푸리고 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고픈 말을 삼켰다. 본인이 어깨를 치고 갔으면서 재수 없다는 말을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함께 룩베론에 들어온 동기 중 하나인 제레미 윈스턴이었다. 첫날, 같이 가서 친목을 도모하라는 말에 평생 집에서 제일 잘난 자식으로 살다 처음으로 말단이 된 녀석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술집으로 향했다. 윈스턴만 빼고.
제레미 윈스턴은 룩베론보다는 비시온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심기가 상하면 상하는 대로 곧장 불쾌한 얼굴을 해 보인다는 점이 그랬다. 서로를 허물없이 대하는 룩베론의 기사들도, 얄팍하게 보이는 단장의 권위도. 모두 윈스턴의 심기를 상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윈스턴이 제일 싫어하는 게 르웰린 에드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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