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나이가 어린데 황실 기사단에 들어와서, 거기에 에드워드 스펠먼의 입김이 작용해서, 4황자의 어린 시절 놀이 친구라서, 바람 불면 휘청일 것처럼 마른 몸을 해서, 그런 주제에 검을 잘 휘둘러서, 레오폴드 에드윌의 동생이라서, 얌전 떨게 생긴 주제에 땀 흘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서, 르웰린 에드윌이라서.
한숨이 나왔다. 윈스턴의 적의는 날로 커져 가는데, 그 이유라는 것들은 저렇다. 그는 내 인생과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블로젯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열등감이지.’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보통 20대 중후반에서 서른이 되기 전에 임명받고, 그마저도 대단한 성과로 친다. 10대 끝자락에 들어왔으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터였다. 실력과 가문이 받쳐 주면 약간의 오만함도 미덕이다. 그렇게 제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는데 막상 관심은 성년이 채 되지도 않은 어린애가 가져갔다. 그런데 심지어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총 기사단장의 제자고, 또 심지어 직접 확인한 실력도 괜찮다.
블로젯도 어리지 않나 생각했지만 둘 중 하나를 열렬히 싫어해야 한다면 나 같아도 내 쪽을 싫어할 것 같았다. 블로젯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많아 보였으니까.
‘본인이 하는 게 질투라는 걸 인정할 수도 없지. 자존심 상하니까.’
그러면 나는 거기에 대고 ‘왜 그렇게 잘 알아?’ 하고 물었다. 블로젯은 담담하게 답했다.
‘나도 그럴 뻔해서.’
어린 시절, 제 형을 믿고 나대는 줄 알았던 어린애한테 검이 날아간 순간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굳이 설명해야 하냐며 투덜거렸다. 나는 머쓱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그 이후로 뒤끝 없이 굴기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렇게 상대의 적개심을 어떻게 부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윈스턴은 그냥 내가 뭘 해도 싫을 텐데.
좀 더 어릴 때였다면 몇 년은 함께 지낼 동료와 사이 나쁜 게 껄끄러워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시커먼 놈들 붙잡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에너지는 배로 드는데 성과는 고만고만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던 중 루이스를 만났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닿을 것처럼 피곤한 얼굴로 차를 내오던 루이스는 윈스턴의 이름을 듣더니 ‘엥?’ 했다.
‘루시아 따라다니던?’
그러니까, 단순히 열등감 같은 게 아니라 질투였던 거다. 연적에 대한.
그 전까지 윈스턴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나를 싫어해도 심드렁했던 마음이 갈라진다. 그 틈을 죄책감이 채운다. 사람 여럿 모이면 그중 하나쯤은 성격이 꼬이기 마련이니까, 하고 쉽게 넘겼던 기억이 빠르게 되감기 된다. 그전까지 함께 타오르던 호승심이 탁 끊어졌다.
엘리엇이 들었다간 또 저거 이상한 생각이나 한다고 실컷 잔소리를 들을 일이다. 그렇게 찔릴 만큼 쓸데없는 짓이긴 했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윈스턴의 시비를 피했다. 적당히 모른 척했고, 적당히 무시했다. 그게 더 윈스턴의 성질을 건드렸는지 처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무시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 이제는 대놓고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저걸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나머지 동기들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에버린과 메이빌 둘 다 성격이 무난했고, 블로젯은 ‘그’ 카일 베리넌과 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인내심 좋고 남을 잘 받아 주는 녀석으로 자랐다. 윈스턴이 씩씩거리며 지나간 뒤로 분홍 머리 에버린이 ‘재수 없긴 지가 더 없으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화는 안 내?”
팔짱을 낀 블로젯이 물었다. 제 일처럼 성질을 내는 에버린과 달리 블로젯은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우리는 저것보다 더한 녀석을 알고 있다. 10대 초반, 영악하기가 악마 같던 베리넌. 이미 더한 걸 보고 나자 저 정도는 무던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응.”
내 답에 블로젯은 그럼 말든가, 하는 반응이었지만 에버린은 투덜거렸다.
“한 소리 해 두는 게 나을 텐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잖아.”
“내가 화를 낸다고 쟤가 달라질까?”
고민하던 에버린이 말했다.
“아니… 겠지?”
그것 봐.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에버린은 “그런가?” 하다가 곧 웃었다. 내가 그를 편하게 느끼는 부분이었다. 생각이 깊지 않다. 쓸데없이 파고들며 속에 쌓아 두는 대신 바로바로 화를 내고, 좋아하고, 투덜거리다가 털어 버린다.
“내버려 둬. 저러다 말겠지.”
사실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러다 내가 루시아와 계약을 끝내더라도 묵은 앙금이 풀릴 리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제 뭐 어떤가 싶었다. 굳이 윈스턴이 아니어도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문제는 많았다. 사이가 좋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성물, 황태자, 원작, 수도 어딘가에 있을 루크,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모를 디멘시온. 마음은 급한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뭐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다.
결국 내가 생각한 건 은퇴다. 원작을 잘 틀고 나면, 꼭 은퇴해야지. 기사 같은 거 오래하지 않을 테니 윈스턴과 사이가 좋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다. 한참 쉬면서 돈이나 탕진하자. 목표는 막연하고 평범했다. 굳이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을 만큼 선례가 많다. 다행히 가족들이 원하는 것과도 닿아 있으니 모두 환영할 것이다.
***
정말로 그렇게, 조용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이미 이목을 끌만큼 끌어놓고 이런 말 하기는 웃기지만, 당장의 소란이 지나갈 때까지는 무리에 섞여 눈에 튀지도 않게 지내려고 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돌리면 황태자를 만나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매일 각오만 다시 다졌다. 여지를 주기 위함이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튀어나왔지만, 아무튼 정리하자면 그랬다. 그런 주제에 진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굴어서, 황권에 집중해야 할 그가 다른 곳에도 욕심내도록. 그렇게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에르켈은 어색하게 웃으며 ‘거창해 보이는데 별거 아냐. 펠은 음, 네가 그냥 눈앞에 알짱거리기만 해도 좋아할 거야.’ 했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쌈박질은 내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흠….”
매일 호탕하게 웃던 세르이어스의 얼굴이 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내뱉는 한숨은 무겁다. 그 무게만큼 고개가 내려갔다. 열기가 식고 나자 민망함과 후회가 몰려왔다. 좀만 더 참을걸, 시발.
얻어맞은 뺨과 찢어진 입가가 아렸다. 나보다 더 엉망이 된 상대에게서 앓는 소리가 짧게 튀어나왔다.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윈스턴은 눈에서 불이 켜질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속으로 욕이나 중얼거렸다.
사건의 발단은 가벼웠다.
여느 때처럼 윈스턴이 시비를 걸었다. 이제 일상처럼 자리 잡은 일이었다.
‘얼쩡거리지 말고 비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하는 말임에도 에버린은 본인에게 한 말처럼 성질을 냈고, 메이빌은 하하, 사람 좋게 웃다가 하품을 했다. 블로젯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도 틀에 박힌 것처럼 매일 똑같이 이어지는 일상이다.
그러나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줄 알았던 것은 사실 눈밭 위를 구르고 있었다. 눈 위를 구르며 몸집을 불렸다.
겉으로 평화롭고 모두 친근해 보이는 룩베론에도 속 꼬인 녀석들은 있었다. 누군가를 물어뜯어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놈들. 원래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게 친해지기 쉽다고. 윈스턴은 그들과 쉽게 어울렸다.
무리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은근하게 누군가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와중에 대놓고 날 세우는 윈스턴이 있으니 옆에서 말을 덧붙이는 거야 쉬웠다. 그들 보기에도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녀석이 대뜸 자신들과 같은 위치로 올라온 게 상당히 아니꼬웠으니까.
딱히 실력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당장 검을 맞대면 그들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오만하지만 사실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한 동료들의 실력은 감히 디멘시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이 결과에 승복한다면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고 해도 그들은 이를 갈며 적의를 더 불태우겠지. 그렇다면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몇 마디 모욕적인 말이 덧붙자 메이빌과 블로젯도 불이 붙었다. 에버린은 이미 메이빌에게 허리를 붙잡힌 채 똑같은 수준의 욕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스러웠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멀뚱하게 눈만 깜빡이는 나를 본 윈스턴이 대놓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따위로 굴면서 피해 가려고? 뻔뻔하기가 끝이 없구나. 하기야, 그러니까 더러운 소문이 퍼지는 줄도 모르고 자리를 꿰찬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