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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별은 밤마다 뜨고 지네 (4/12)

4장. 별은 밤마다 뜨고 지네

나이란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새 연구소가 준비되었다. 카이얀은 모르는 곳이었다. 일주일의 준비 기간 동안 장비를 들여놓고 새 데이터를 쓸 준비도 마쳤다. 루크를 맡았던 기존 연구진들도 모두 불러 대기시켰다.

지난번 카이얀과 통화했을 때, 나이란은 매주 일요일마다 루크를 그의 집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국내에 머무는 3주 동안 그렇게 해 주겠다 했지만 말이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루크, 옷부터 벗어.”

연구소로 들어선 순간, 나이란이 멸균 장갑을 끼며 말했다. 잔뜩 굳은 얼굴이던 루크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루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일은 드물다. 나이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몇 달 사이, 어지간히도 망가진 모양이었다.

“뭐해, 벗으라니까.”

나이란은 루크를 잡아 캡슐이 있는 방으로 이끌었다. 루크는 그 방에서 주섬주섬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원래 연구소에서는 아무 것도 입지 않는다. 당연한 일인데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들어가.”

나이란이 가운을 입으며 캡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루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낯익은 물체였다. 제 키보다 조금 큰, 금속으로 만든 차갑고 좁은 공간.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 연구소 안에서 루크는 한기를 느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러나 루크는 복종하는 법을 배운 실험체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그러니까, 루크 씨만 쓰는 곳이에요. 여기서 옷 갈아입고, 중요한 걸 두거나, 어, 잠도 자고, 책을 보기도 하고, 혼자 생각하기도 하고.”

캡슐 안은 서늘했다. 루크는 카이얀이 처음 방을 만들어 줬을 때를 떠올렸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카이얀도 좀 어색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루크는 캡슐 문이 천천히 닫히는 것을 보며 계속 카이얀을 떠올렸다.

“여기서 실험을 하거나 그러진 않고, 그냥… 그냥 있는 곳이에요.”

카이얀은 방에 대해 그렇게 설명해 줬다. 방이 새로운 형식의 캡슐이냐고 물었을 때 카이얀은 분명 당황했다. 하지만 방이 생겨서 좋다고 말했을 땐, 카이얀도 좋다고 말해 줬다…….

“루크, 눈 뜨고 앞을 봐.”

나이란이 지시했다. 그 목소리도 장치를 통해 전해졌다. 건조한 지령에 루크는 정면을 보았다. 눈의 전체적인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였다.

“눈 깜빡거리지 마.”

루크는 노력했다. 금세 눈이 시큰거렸다. 힘을 준 눈꺼풀도 아파왔다. 눈이 몹시 따끔거렸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루크는 당황했고 나이란을 비롯한 다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큰일 났네. 약 끊은 지 너무 오래 지났어.”

연구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렸다. 나이란은 말없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루크는 자기가 조금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카이얀 앞에서 움츠러들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루크, 이리 나와 봐.”

나이란이 말하자 캡슐 문이 열렸다. 루크는 발가벗은 것이 어색하다 느끼며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나이란은 루크에게 다가갔다.

“손.”

루크가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이란이 들고 있던 빳빳한 종이 뭉치를 루크의 손 위에 올렸다. 모서리가 손바닥에 가게 올려놓은 후, 나이란은 지시했다.

“잡아. 가볍게.”

루크는 지시대로 종이를 잡았다. 나이란은 그대로 종이 뭉치를 쭉 잡아당겼다. 루크는 순간 손바닥이 다 베이는 것을 느꼈다.

“윽!”

루크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손바닥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이란이 탁 손목을 낚아챘다.

긴 상처에서 피가 방울져 배어났다. 나이란은 잠시 루크의 상처를 관찰하며 기다렸다. 회복되지 않는다. 나이란은 한숨을 참았다.

“형편없어. 회복 속도가 엉망이야.”

나이란은 루크를 놓아주었다. 손바닥은 여전히 심하게 욱신거렸지만, 루크는 이제 상처를 살펴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조금 멍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 일에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루크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각성제를 더 강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겠어. 약도 가져와. 루크, 다시 들어가고.”

건조하게 이어지는 지시를 들으며 루크는 걸음을 옮겼다. 귀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당연한 거야. 원래 이랬으니까. 그런데 왜 벌써부터 견디기가 어려운지, 아니, 이걸 왜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는지.

“홀로그램부터 시작하자. 루크 정보 갱신하고 시스템 재부팅 해.”

캡슐 문이 닫혔다. 나이란의 목소리와 연구원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카이얀을 생각했다.

내 청력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자기 탓인 것 같았다. 루크는 눈을 감았다.

* * *

연구소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앙 정부로부터 루크에 대한 실험 재개를 허가받긴 했으나 루크에 대한 보고서는 거짓으로 작성되었다. 루크가 본 적도 없는 실험 동의서가 날조되었고 이제껏 해 온 실험들의 내용도 상당 부분 바뀌어 문서화되었다.

밀리엄 장군을 비롯한 장성들은 수상한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앙 정부는 여전히 연구소를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연구소는 거의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사와 연구원들은 화려한 재기를 꿈꿨다. 형편없이 약해지긴 했으나 그래도 루크는 최고의 병기였다. 이번에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루크를 잠적시키면 정부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루크의 신체 상태를 다시 극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주사해.”

나이란이 루크에게 작은 주사기와 바늘을 내밀었다. 투명한 뭔가가 들어 있었다. 주사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크는, 고개를 들어 나이란을 보았다.

피로가 어린 얼굴. 장갑 낀 손. 색감이 옅은 금발은 단정히 하나로 묶어 위생 모자 안으로 감춘 채였다. 루크는 일단 주사기를 받았다. 차가웠다.

“캡슐로 들어가서… 알지?”

나이란은 곧장 물러나려 했다. 루크는 제 손에 들린 물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게 뭡니까?”

순간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윙윙거리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한참 이어졌다. 처음 들어 보는 소리인 것처럼 낯설었다. 루크는 그제야 문득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벽 가까이 서 있던 연구진들, 정면 유리벽을 통해 보이는 통제실 인력들. 루크는 그들이 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느꼈다.

루크는 재차 물었다.

“나이란 캠벨 박사님, 이게 뭡니까?”

이름이 불려서인지 나이란은 연구진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뭐든 무슨 상관이지?”

루크는 당혹했다. 그러다 자기가 그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식의 질문을 한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어릴 때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종종 그랬던 것 같기도……. 아니, 정말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캡슐로 들어가. 머리랑 손목에 장치 붙이고, 그 다음에 주사하고 눈 감아.”

나이란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저 평소의 그녀였다. 그래서 루크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늘 먹던 약이야.”

“다른 모양입니다.”

“형태를 바꾼 것뿐이야.”

“이유가 뭡니까?”

나이란은 참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명백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루크는 그제야 자기가 너무 많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카이얀은 서투르게나마 늘 질문에 대답해 주어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는 것은 예사였다. 하지만 캠벨 박사는 다를 것이다. 다른 연구원들도…….

“생각하지 마.”

나이란은 직접 루크를 캡슐 쪽으로 밀었다. 차가운 장갑의 감촉이 맨살에 닿는 것이 느껴져 루크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왜 저 장갑은 늘 차가울까, 따뜻한 손에 닿아 있을 텐데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지 마, 루크.”

나이란은 캡슐 문이 닫히는 걸 보며 다시 명령했다.

“그게 너한테 좋아.”

루크는 무의식에 이끌리듯 기계적인 동작으로 측정기를 제 머리와 손발에 부착했다. 여기로 온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홀로그램 속을 오가며 캡슐 안에 주로 있으려니, 시간 감각이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낮일까, 밤일까. 별이 떴을까…….

루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몽롱했다. 전에 베인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그 생경한 통증을 느끼며 루크는 방금 받은 주사기를 들어올렸다. 혈관을 찾는 일은 익숙하다. 루크는 바늘 마개를 뽑았다. 쭉, 가볍게 누름대를 눌렀다.

루크는 잠시 기다렸다. 약이 약간 차가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연구소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 차가웠다. 그래서 가끔 제 체온까지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 때가…….

다음 순간, 끔찍한 빛이 눈앞에 번쩍였다.

루크는 자기 몸 상태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빛이 번뜩하더니 갑자기 신경을 태우는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머리끝까지 다 타 버리는 것 같았다.

그 고통에 이성이 마비되었다. 팔다리가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머리로 열이 몰려 눈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감당할 수 없는 굉음이 귓속에서 폭발했다. 수천 개의 파이프가 머리통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루크는 서 있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비명이 터졌다. 좁은 캡슐 안을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손톱을 짧게 자른 상태라 금세 손끝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그 상처는 곧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루크의 몸에 붙어 있던 측정 장치들이 떨어져 나가고 연결된 전선이 끊어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쿵, 쿵, 통제할 수 없는 팔다리가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루크는 제 머리를 벽에 박으며 원통형 캡슐 속에서 날뛰었다. 그래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어요. 괜찮을 겁니다.”

온몸의 뼈가 꺾이는 고통 틈새로 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크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매달려 카이얀을 찾았다. 너무 아파서 아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물어, 물라고!”

그가 다그치는데, 아무리 애써도 카이얀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를 안으면 될 것 같은데. 붙들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매끈한 강화 유리에 매달려 헐떡이자 손이 미끄러지며 핏자국이 남았다. 점멸하는 시야, 루크는 본능적으로 제 오른팔을 물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고통은 격렬했고 끝날 기미조차 없었다. 버텨야 한다는 생각도 불가했다. 입에서 피가 터졌다. 혀를 잘못 깨문 탓이었다. 그마저도 금방 아물어 피 냄새만 남았다. 루크는 제 살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루크는 고통이 끝났다는 것도 모른 채 기절하고 말았다.

* * *

“부작용이 너무 심합니다. 다시 만들어야겠는데요.”

그게 이번 각성제에 대한 연구진 전체의 평가였다.

당연히 ‘평소 먹는 약’이라던 나이란의 말은 거짓이었다. 평소 먹던 약은 그저 루크의 몸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루크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은 만큼, 짧은 기간 안에 신체 능력을 복구시킬 다른 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각성제였다.

“어차피 완력은 약으로 끌어올릴 수 있지만, 신경은 이 정도로 자극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고통이 너무 엄청난 것 같았습니다. 저대로라면 서 있는 것도 무리일 텐데, 적이 누군지는 구별해야 써먹을 거 아닙니까.”

회의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이란은, 그 박사의 말을 듣고 나서 처음으로 발언했다.

“전 루크를 전처럼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무슨 소립니까?”

“루크 상태가 이상한 거 보셨잖아요. 고통 때문에 적과 아군을 구별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본인 의지로 싸우지 않으려 든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젭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그들은 나이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루크에게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해 왔다. 불평 없이 실험을 견디게 하기 위해서기도 했고, 효율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서기도 했다.

그렇게 철저히 관리했는데도 루크는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오래 전 첫 임무 수행 때는 ‘표적이 평소와 다르다’는 이유로 겁에 질린 소년병을 쏘지 못하고 머뭇거린 적도 있었다.

“확실히 루크가 질문이 많아진 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을 겁니다.”

“아무리 늦어도 3주 뒤엔 루크를 르다크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 전까지 계속 저런 상태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캠벨 박사,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나이란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루크를 저대로 둬도 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는 이상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이상했다.

저건 루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이란이 침묵하자 상대는 계속 나이란을 다그쳤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면, 뭐 이제 와서 어떡하자는 겁니까? 애초에 루크를 그 되도 않는 선생 집으로 보낸 건 캠벨 박사 아니었습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우린 이미 중앙 정부 쪽에 루크를 노출시켰고,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하는 것보다 빨리 대책을 마련하는 게 먼접니다.”

나이란은 간신히 동의를 표했다. 사실 나이란도, 뭘 어떻게 해 보자는 건 아니었다. 그저 루크가 전처럼 그저 실험체에 군인이기만 한 것 같진 않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 것뿐이었다.

나이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도리가 없다. 이제 발을 뺄 곳 따윈 없으니 어떻게든 루크를 활용해 볼 수밖에.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 나이란을 비롯한 연구진은 안일한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루크가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때 나이란과 몇몇 박사들은 연구소와 연결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긴 통로를 달려야 했다. 몇몇은 욕설을 참지 못했다.

루크는 기절한 상태였다. 총으로 요령껏 다리를 쏜 것인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는 이 정도 부상으로 기절하진 않았는데, 확실히 신체 능력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일단 치료하는 게 우선이다 싶어 나이란은 의료팀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된 거죠?”

의료팀이 루크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박사들은 보안 요원으로부터 루크의 행동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보고는 간단했다.

루크가 문을 열고 나와 걷다가 비상구 쪽으로 갔는데, 루크를 통로에서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실험을 위해 이동한다고 생각했을 뿐. 루크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비상구에 접근했고, 보안 요원들에게 가로막혀 총에 맞았다.

“지금 요원 한 명의 턱뼈가 부러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잠깐 의식을 잃은 상태고요.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만.”

요원은 기절한 채 방치된 루크를 보며 그 말을 덧붙였다. 나이란은 한숨을 참았다. 그날의 회의는 밤을 새워 이어졌다.

* * *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루크는 결심했다.

여기서 나가자.

루크는 그제야 카이얀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루크가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옳았다. 루크는 정말 알 수 있었다.

이 고통은 옳지 않다. 루크는 자기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카이얀을 떠올렸다. 발작하고 나면, 카이얀은 자길 내쫓으려다가도 너그러워지곤 했다. 늘 있는 일이라고 했으니 마음 쓸 것 없다 했을 때 카이얀은 냉소하며 화를 냈다.

루크는 멍 하나 없는 제 몸을 보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신이 깨져 버릴 것 같은 통증을 겪었는데도 몸은 깨끗했다.

문득 지시에 따라 스스로 주사한 약에 생각이 미쳤다. 늘 먹던 것과 같은 약이라 했지만, 거짓말이었구나. 특별히 기만당했다는 느낌도 없었다.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출구까지 접근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너무 쉬워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도 루크를 잡지 않았다. 그들은 루크가 의지를 갖고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밖에 있을 때, 카이얀으로부터 비상구 표시를 배웠다. 루크는 빛나는 비상구 표시를 따라 걸었다. 뛰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루크가 간과한 게 있다면 출구 쪽의 보안팀이었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좋았을 것을, 보안 요원과 맞닥뜨리게 된 것도 예상 밖의 일인데 갑작스러운 질문까지 받자 혀가 굳어 버렸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던 요원은 넷이었는데, 그들과 싸우다가 사람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들리던 총성. 지독한 격통.

눈을 떴을 때, 루크는 의무실에 있었다.

캡슐이 만능인 것 같아도 치료는 그 안에서 할 수가 없었다. 루크는 자기만 이용하는 의무실 간이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왼쪽 다리가 욱신거렸지만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총알이야 잘 뺐을 것이고 치료도 거의 다 되었을 터다. 연구소는 언제나 이런 일에는 손이 빨랐다.

이번에는 무슨 약을 쓴 걸까.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캠벨 박사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문가 쪽 의자에 앉아 있던 나이란이 루크를 보았다.

“전 가겠습니다.”

루크는 나이란을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높이 난 작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이미 한낮이었다. 빛이 환했다. 쏟아지는 햇빛이 루크의 뺨에 하얗게 부서졌다.

“어디로?”

나이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루크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카이얀에게.”

“루크.”

“전 가겠습니다.”

루크는 반복했다. 평이한 어조였다. 그는 흥분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단 하나의 명확한 목표가 루크의 의식을 깨우고 있었다. 루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이란을 보았다. 짙푸른 눈에는 졸음기도 통증도 없었다. 나이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갈 수 없어.”

“어떻게든 갈 겁니다.”

“우리가 보내 줘도, 넌 갈 수 없어.”

루크는 나이란을 보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근심이 드리워진 얼굴.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던가. 루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나이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갑자기 두려움이 일었다.

“일어나.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루크는 일어났다.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도, 너무 쉬워서 오히려 불안했다. 왜 이렇게 뭔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지 모를 노릇이다. 루크는 조금 절뚝이며 나이란의 뒤를 따라갔다. 연구소 통로를 걷는 동안 사람들은 루크와 나이란을 흘끗거렸지만 특별히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움에 가슴이 뻐근했다. 산책 삼아 카이얀과 시내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오던, 그 아침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차는 준비되어 있었다. 루크는 나이란과 함께 차에 올랐다. 나이란은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모든 일이 너무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루크는 어리둥절했다. 나이란이 이렇게 쉽게 카이얀에게 데려다줄 리가 없다는 건 루크도 알고 있었다. 루크는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보며 애써 불안감을 달랬다.

이렇게 차에 앉아 가고 있으니, 처음 카이얀의 집으로 가던 그날 같았다.

그 차 안에서 루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카이얀 로스터드라는 학자가 있고, 앞으로 잠시 동안 그를 상관으로 모시게 될 거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평소와 같은 임무는 아니었지만 루크는 덤덤했다.

그날이야말로 바로 운명의 날이었는데, 그때는 전혀 몰랐다. 처음 카이얀을 만난 날을 생각하자, 불안감이 가시고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대가 밀려왔다.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다. 아마 연구소가 자기의 쓸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어떻든 좋았다. 카이얀에게 갈 수만 있다면. 다시 카이얀에게 가겠다는 결심, 카이얀을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이야말로 루크의 버팀목이었다.

“거의 다 왔어.”

나이란이 무감하게 말했다. 루크도 알고 있었다. 익숙한 거리. 눈에 익은 가로수들. 늘어선 단독주택들. 가을 햇빛에 빛나는 잔디. 카이얀과 함께 걷던 길.

마침내 루크는 카이얀의 집을 발견했다.

천천히 차가 멈추었다.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루크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나이란은 따라오지 않았다.

카이얀과 함께 들어서던 정원에 들어선 순간, 루크는 감당 못 할 정도의 행복감이 자길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다듬었던 나무. 잔디 깎는 법을 알려 주던 카이얀. 햇빛이 아른거리던 그 입술. 책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 손가락…….

루크는 삶에 노크하는 기분으로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루크는 약간 당황했다. 어떤 얼굴로 카이얀을 봐야 하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깨어나자마자 달려와 몰골이 엉망인 것 같기도 했다. 카이얀은 개의치 않겠지만, 그래도…….

“누구세요?”

루크는 얼어붙었다.

모르는 사람. 낯선 얼굴. 그걸 인지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나온 사람은 심지어 남자도 아니었다.

“카이얀은 어디 있습니까?”

엉겁결에 뱉은 말이었다. 상대는 조금 당황한 것인지 말이 없다가, 조금 인상을 썼다.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루크의 말을 이해 못한 탓이었다.

“저희 이사 온 지 꽤 됐는데요.”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이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3년 전에 이사 왔는데요? 혹시 그 전에 살던 사람인가요?”

루크는 고개만 저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얼마나 됐냐는 물음에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연구소는 대체로 밝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실험이 계속될 때는 캡슐에만 있었으니까.

덜컥 두려움이 일었다. 그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버린 거면 어떡하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몇 년이 훌쩍 흘렀다면. 그래서 카이얀도 기다리다 지쳐 떠나 버린 거라면?

“안에… 안으로, 들어가 봐도 됩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는데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여보, 무슨 일이야?”

“아니, 사람을 찾는 것 같아. 들어오시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여자가 루크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루크는 미련이 남아 미적거렸다. 두 사람이 현관을 가로막고 있어 억지로 밀치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무어라 지지부진한 대화가 몇 마디 오가고, 탁,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빛이 눈부셨다.

루크는 길을 잃은 채 서 있었다.

탕탕,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카이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시 선 채로 기다렸다. 같은 얼굴의 같은 사람들.

다시 한번 문이 닫힌 후에야, 깨달았다.

평생 이 문을 두드려도 카이얀이 나올 일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올 것도 같은데, 될 것도 같은데. 문이 닫히고 열릴 때마다 같은 기대감이 같은 무게로 루크를 짓눌렀다. 나중에는 문도 열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모든 것이 다 똑같은데.

루크는 현관을 벗어나 뛰었다. 거리로 나갔다. 주택가는 한산했다. 드물게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루크는 득달같이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었다가, 당신인가 싶다가, 당신일 것이었다가…….

당신이어야만 하는데,2)

다 타인이었다.

혼자였다.

* * *

“카이얀은 없어.”

연구소로 돌아가는 길, 나이란이 꺼낸 첫 마디였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루크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없었어. 우리가 만들어 낸 거야.”

루크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얀이 없을 리 없다. 그 모든 생생하던 감각들. 감정들. 설레던, 죄이던 마음들. 알 수 없는 카이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울렁이고 욱신거리던 날들. 그게 다 홀로그램이었을 리가, 그게 다 거짓말이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루크는 자기 안의 속삭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집에 카이얀이 없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 만약 나이란의 말이 진실이라면?

“말이 안 되잖아. 실험체에, 그렇게 괴물 같은 군인을 받아들여 준다는 게.”

나이란의 목소리였는데, 자기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모를 노릇이었다.

“카이얀은 원래 우리가 만든 홀로그램이었어. 인공지능이라, 네 호르몬에 반응해서 지나치게 사람처럼 되어 버린 건 문제지만…….”

거짓말.

루크는 부인했다.

다 거짓말이다. 진짜일 리 없어. 카이얀이 가짜라니. 그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니. 그저 시스템을 파기하면 사라져 버리는 홀로그램일 뿐이라니.

“다시 확인해 봐도 돼. 몇 번이든.”

나이란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신호 때문에 멈춰 섰을 때, 나이란은 엷은 한숨을 내쉬고 루크를 보았다.

“그냥 역할극인데 네가 이 정도로 몰입할 정도일 줄은 몰랐어.”

“카이얀은 가짜가 아닙니다.”

루크는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나 어딘지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다. 나이란은 힘주어 말했다.

“납득할 때까지 와 봐도 돼.”

“그게 다 가짜였을 리가 없습니다.”

나이란이 피로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출발했다.

루크는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꾸, 낯선 사람만 모습을 보이던 그 문만 떠올랐다. 함께 가꿨던 정원도… 어쩐지, 기억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던 것도 같다.

루크는 어느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구역감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루크, 힘들겠지만 잊어버려.”

나이란은 아주 드물게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로하는 듯했다. 낯설어서 루크는 눈을 깜빡였다.

나이란이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힘들겠지만’이라니? 연구소의 그 누구도, 루크에게 힘드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루크의 고통에 귀 기울여 준 사람은 카이얀뿐이었다.

“카이얀은 없어.”

그 모든 날들이 다 가짜였을 리가 없었다.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믿을 수 없어.

* * *

연구소로 돌아온 후, 루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연구진이 그에 동의했다. 루크는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루크는 이틀 간격으로 탈주를 시도했다. 보안이 강화되고 비상구가 폐쇄되었다. 나이란은 루크를 앞에 앉혀 놓고 실험에 제대로 응하기만 하면 원할 때 그곳에 데려다줄 테니 협조하라고 타일렀다. 루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카이얀은 가짜야. 원래 존재하지도 않던 사람이라고!”

루크가 세 번째로 탈주를 시도했다가 붙잡혔을 때 나이란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답지 않게 예민해져 있었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구진들은 루크를 캡슐에 묶어 두려 했지만 나이란은 반대했다. 양껏 날뛰어 봐야 현실을 납득한단 이유에서였다. 그녀가 연구진을 설득하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루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번엔 루크 혼자 나가게 둬요.”

결국 나이란은 계획을 바꾸었다. 온갖 변수를 감수하고, 루크가 지칠 때까지 돌아보게 하자는 거였다. 원래 막으면 막을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법. 나이란은 보안팀에게 연락해 길을 열어 두게 했다.

루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에도 탈주를 시도한 루크는 키가 꽂힌 차를 쉽게 훔쳤다. 카이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길은 외워 버린 후였다.

이정표를 따라 엑셀을 밟았다. 신호 체계를 배웠지만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로에는 이상할 정도로 차들이 적었다.

카이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번엔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루크는 차 안에서, 낯선 사람들이 카이얀의 집에서 나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갈 곳이 남아 있었다. 루크는 그대로 차를 돌렸다.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달아나서 이리로 와야 합니다.”

카이얀과 약속한 장소가 있었다. 어쩌면 카이얀은 미리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 캠벨 박사와 함께 나왔을 때 집으로 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루크는 카이얀과의 만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카이얀은 거기 있을 것이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루크는 믿었다.

마지막 날, 집에 돌아오며 루크는 길을 외웠다. 카이얀이 지도까지 펼쳐 보여 주며 도로명과 번호를 외우게 했다. 차가 없으면 대충 훔쳐도 된다는 말까지 덧붙여 주며,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리로 와야 한다고 거듭 말해 주었다.

루크는 그때 외웠던 도로명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클레이튼, 버넷, 메리디언, 선벨리, 노갈, 알람브라, 오클리…….

루크는 인적 드문 도로를 달렸다. 클레이튼 도로부터 찾으면 되는데, 도무지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제 눈이 어두워 표지판을 지나쳐 버렸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루크는 기억을 더듬어 도로를 찾으려고 했지만 길들은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럴 리 없어.

“카이얀은 원래 우리가 만든 홀로그램이었어.”

모든 것이 다 홀로그램이었다는 걸까. 그 집, 시내, 함께 걷던 길, 도로까지 전부? 갈 길 모르고 그저 빙빙 돌기만 하다가 루크는 낯선 길목에 차를 멈추었다.

한동안 가만히 있었더니,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루크는 그 느리고 비현실적인 박동을 느꼈다.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카이얀이 없는 세상에서, 영원토록 그를 찾아 헤맬 것이 두려웠다. 그가 없다는 것이, 그걸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카이얀이 사라진 세계에서, 별들은 곧 얼굴을 감추었고 루크는 차를 몰아 연구소로 돌아왔다. 돌아갈 곳이 사라지자 제 자리는 거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만족시키면, 카이얀을 다시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 홀로그램이라도, 가짜라도, 상관없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사들은 돌아온 루크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다른 말없이 루크를 의무실로 데려갔다.

“카이얀의 데이터는 파기했어. 네가 잘 협조하면, 다시 만들어서 보여 줄게.”

나이란은 그런 말로 스스로 돌아온 루크를 달랬다.

나이란이 나간 후, 의무실에 혼자 남은 루크는 가슴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카이얀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곁에 없었다.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는 없었다. 그와 약속한 장소조차 모조리 허상이었다.

“나는 루크 씨가 더 많은 걸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 말고 다른 것들을요.”

연구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카이얀이 그렇게 말했다.

“나랑 해 봅시다. 운전도 배우고, 별도 보러 가고, 버스도 타 보고, 여행도 가고, 그러자고요.”

그 말에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뭐가 어떻든 좋았다. 카이얀은 종종 그가 주는 선물이나 작은 물건들이 루크를 감동시킨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해였다. 카이얀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다 의미 없는 모래더미 같은 거였다.

당신이 내게 가장 큰 선물이었는데.

루크는 혼자 남은 세계에서 침대 난간을 잡고 울었다. 다른 손으로 눈을 꾹 눌렀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눈물 때문에 시트에 온통 달빛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한때 카이얀을 붙들었던 손이 너무 허전해서 루크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무어라도 안고 있고 싶었는데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루크는 어쩔 줄 모르고 가슴팍에 손을 모으다가 발작하고 말았다.

연구진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발작이 멎기를 기다렸다. 그 밤 이후 루크는 도망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루크는 르다크로 파병되었다.

* * *

루크가 떠나고 나서 카이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그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걸 알고 있었다. 더는 나이란을 믿지 않는다. 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거야말로 못 믿을 소리다. 카이얀은 루크가 언제든 도망쳐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비는 빠를수록 좋았다.

“그쪽 사람들한테 얘기 좀 해 줘. 혹시 모르니까.”

앞뒤 사정을 잘 설명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부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그문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그 사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 루크가 도망쳐 오면 숨겨 주라 얘기하겠다고 약속하고, 지그문은 다른 말을 덧붙였다.

- 차라리 네가 여기 와 있지 그래? 방 많아.

“안 돼. 난 여기 있어야 돼.”

카이얀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그문은 더 권하지 않았다.

그 장소로 가라고 말하긴 했지만, 루크의 무의식에 가장 강하게 남은 장소는 이곳일 것이다. 길을 외우게 했고 운전도 가르쳐 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이 집으로 올 수도 있었다. 그랬을 때 이 집이 비어 있으면, 루크가 얼마나 놀라고 절망할 것인가.

빈 집 앞에서 문만 두드리고 있을 루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 카이얀은 이 집을 지킬 생각이었다.

-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없어. 고마워.”

- 인사는 됐는데… 너 되게 불안해 보여.

카이얀은 주저했다. 지그문에게 털어놓을까. 그와 머독에게 이야기하고 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루크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끊자.”

-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통화를 마치고 난 후 카이얀은 조금 몽롱한 기분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쩐지 진정이 되질 않아 내내 서서 통화한 참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아침이 밝아 오는 게 낯설었다. 어제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득 별다른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차에 오른 루크가 떠올랐다. 이렇게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니다. 카이얀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밀리엄 장군님, 접니다.”

- 안 그래도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네.

과연 관록이라는 것인지, 그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그와 루크를 미리 접촉시킨 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나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화로 나눌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편한 시간 말씀하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밀리엄 장군은 카이얀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만나자고 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마침 내일 시간이 빈다고 말해 주었다.

돌이켜 보면 자기가 먼저 장군에게 만남을 청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이얀은 기운이 쭉 빠진 것 같아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가장 급한 일은 처리한 것 같다.

카이얀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침실로 가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전혀 자지 못한 탓에 몸이 무거웠다. 문득 루크에게 자기 휴대폰 번호도 외우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밀리엄 장군과 만났을 때, 카이얀은 빙빙 돌려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카이얀은 10년 전부터 내내 짐처럼 갖고 다녔던 카드를 밀리엄 장군 앞으로 죽 밀어 놓았다. 어릴 땐, 이런 일을 참 여러 번 했더란다. 살아가는 데 유산이 모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밀리엄 장군은 그때마다 거절했고 카이얀도 나이가 차고부턴 되돌려 주는 걸 포기했다. 그러나 지금, 카이얀은 다시 그 일을 시도하고 있었다. 치기 어린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실수로 사용한 것도 환불시켰으니, 전혀 손대지 않은 겁니다.”

밀리엄 장군은 곤란한 얼굴이었다. 왜 또 뜬금없이 이걸 돌려주나 싶을 것이다. 이 카드는 참 문제의 물건이었다. 둘 사이에선 이미 지겨운 화제이기도 했다.

“이게 단순 호의가 아니라 위로금 겸 보상금이었다는 거 압니다. 돌려드릴 테니,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 군인 때문인가?”

밀리엄 장군은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카이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중앙 정부는 사바튼 연구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네. 르다크 내전 상황이, 영 좋질 않았거든. 그들은 그 루크라는 군인이 종전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네. 기록을 보니 이전에도 상당히 활약했더군.”

“르다크 내전이 그렇게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인 줄 몰랐군요. 자국 전쟁도 아니질 않습니까.”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비꼬았다. 밀리엄 장군은 쓰게 웃었다.

“르다크 내전은 문제가 아닐세. 중요한 건 사바튼 연구소를 후원하던 라투르 정권 쪽 장성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거야. 그들은 르다크 내전을 기회로 사바튼 연구소의 실험을 재개시키려고 하는 거고.”

카이얀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밀리엄 장군은 꽤 간단한 문제라는 듯 얘기했지만, 저 말처럼 쉬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정치적 문제와 이리저리 얽힌 이해관계, 미묘한 알력 다툼이 희미하게 그려졌다.

“지금의 중앙 정부는 라투르 정권 시기에 행해진 비밀스럽고 불법적인 실험들에 꽤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까?”

“물론 현 정권의 노선은 확실하네.”

밀리엄 장군의 대답은 분명했다. 카이얀은 문득 그가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루크라는 군인의 실험 보고서에는 문제가 없었어. 동의서도 있었고, 비인간적인 실험도 아니었고…….”

“거짓말인 걸 아실 겁니다.”

카이얀은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에 비해 밀리엄 장군의 대답은 아주 태연하고 평온했다.

“알고 있는 건 소용이 없어.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아는 걸 증명하는 게 중요한 걸세. 한 번 불시에 감사(勘査)를 했지만 나온 게 없었어. 그들이 기록을 조작하고 문제가 될 것들을 파기했으니 우리로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괜찮은 제안이었거든.”

분명 루크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증명할 방법을 찾아내 주십시오. 저는 그 사람을 되찾을 겁니다.”

밀리엄 장군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카이얀이 내민 검은 카드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카이얀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현 정권의 노선 때문에라도, 사바튼 연구소의 실험에 대해 알아볼 필요는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곳이라 제대로 조사할 방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일 뿐.

“장군님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이번 일이 해결되는 데 힘써 주신다면 저는 지금까지 그랬듯 과거의 일에 대해 평생 입을 다물 겁니다. 그러면 저와 연락을 지속하면서 감시할 필요도 없을 거고요.”

“난…….”

밀리엄 장군은 약간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난 자넬 감시한 게 아닐세. 자네 부모님과는 인연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자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적절한 단어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이얀으로서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예민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는데 방금은 전혀 자기답지 않았다.

밀리엄 장군이 감시를 목적으로 자기와 만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심으론 그런 추측도 했던가. 카이얀은 저조차도 예상치 못하고 범한 실례에 당혹했다가 결국 정직하게 사과했다.

“특별히 장군님이 절 감시했단 얘긴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좀 예민해져 있어서…….”

결국 카이얀은 그날 밀리엄 장군으로부터 약속을 받아 냈다. 사바튼 연구소가 루크에게 어떤 반인권적인 실험을 했는지 알아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밀리엄 장군과 헤어진 후, 원하는 말을 들었는데도 카이얀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밀리엄 장군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사실상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도 없는데, 순전히 그 본인의 죄책감과 책임감만으로 이제껏 카이얀에게 마음을 기울여 준 사람이었다.

양친이 교단에 있을 때 필수 과목에서 잠시 배운 적이 있고 그 이후로도 연락을 지속했다고는 들었지만, 더 이상 특별할 것 없이 그뿐이었다.

당시 밀리엄 장군이 지휘하던 군인들이 살인을 저질렀다곤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책임을 질 필요는 없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밀리엄 장군은 가까운 곳에 남아 카이얀을 살폈고, 불편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연락을 해 왔다.

카이얀은 차에 시동을 걸고 가만히 있다가 등받이로 축 늘어졌다.

“아, 정말.”

카이얀은 탄식처럼 내뱉었다. 정말로 경솔하게 굴었다. 이성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밀리엄 장군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연구소를 의심하면서도 막지 못한 그에게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되게 불안해 보여.”

지그문의 말이 떠올랐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고 운전대를 잡았다. 전화 한 통 했을 뿐인데 지그문은 정확히 보았다.

루크의 부재가 카이얀을 뒤흔들었다. 루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카이얀을 조급하게 했다. 카이얀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양친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후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느껴 본 일이 있던가.

카이얀은 되도록 평소처럼 지내려 애썼다. 루크의 방에 가는 일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사실 루크가 방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 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벽에 뭔가가 붙었다 떨어진 자국이 보였다. 저게 뭐였더라, 하다가 문득 방향제였지 하는 생각이 났다. 루크의 감각이 예민하다는 걸 알게 된 후 그가 괴로울까 봐 방향제를 떼어 냈던 것이다. 루크와 함께 살 때는 발견조차 못 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새삼스럽게 그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한다.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어.’

카이얀은 거기서 생각을 그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돌이켜 보면 루크와는 정말 많은 것들을 했다. 부모님과 하지 못했던 것들을 루크와 했고, 친구들과는 하지 않았던 것들도 루크와 했다. 카이얀은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다친 날, 루크는 자기가 카이얀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너무 진지한 얼굴이라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재밌지 않았다.

어떻게 그 사람이 카이얀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좋다’는 말이 뭔지도 모르고, 성욕이 발작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좀 더 마음을 기울이고 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하는데.

만나지 못하게 되니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특별히 루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카이얀은 몇 군데 도움을 청할 곳을 더 떠올렸지만 루크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상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주일 후 카이얀은 나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에 통화했을 때, 나이란은 분명 일주일에 한 번씩 루크를 카이얀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이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카이얀은 화도 나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예전 연구소가 있던 자리까지 차를 몰았지만 그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연구소가 있던 자리는 아예 공사판이 되어 있었다. 이 또한 예상한 바였기에 카이얀은 미련 없이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별 연락 없었어?”

카이얀은 지그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귀찮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요즘은 매일같이 그에게 전화해 같은 것을 묻고 있었다. 지그문은 번거로운 기색 없이 꼬박꼬박 연락받은 일 없다고 말해 주었다.

- 좀 기다려 봐. 아직 시간 얼마 안 지났잖아.

“알아. 그냥 불안해서 그래.”

- 누군지는 몰라도 네가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목을 맬 줄 몰랐네.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하는 소린 줄은 알지만 카이얀은 웃음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초조했다. 이런다고 뭔가 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카이얀은 벽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마.”

- 그래, 그래. 나중에 누군지 얼굴이나 보여 줘라.

“너희한테 보여 줄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 머독도 걱정하던데, 걔하곤 연락 하냐?

“딱히, 요즘 영 여유가 없네.”

- 그래 보여.

싱거운 대화가 오갔다. 잠시의 침묵 후 카이얀이 말했다.

“계속 심란해서 이것저것 집중이 안 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뭐하면서 시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잠도 안 오고 입맛도 없고, 그 사람하고 관련된 것만 눈에 들어와.”

누구에게라도 좀 말하고 싶었다. 평소 감추면 감췄지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털어놓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너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 너 몇 달 전부터 좀 이상했어.

카이얀은 그저 픽 웃었다.

“그래?”

- 좀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더니 이렇게 되는구나.

“‘이렇게’가 어떻게 되는 건데?”

- 이상하게 됐다고.

“원래 이상했다며.”

- 더 이상해졌단 거지. 그 사람 걱정도 좋은데 네 걱정부터 해라.

카이얀은 그냥 웃고 넘어갔다. 자기가 이상해진 건 물론 낯설지만 지금은 거기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상해졌다니 그거야 별수 없는 거고 루크 일부터 해결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끊자.”

- 잠은 자라.

대강 대답하고 통화를 끝낸 후 카이얀은 억지로 자려고 해 봤다. 하지만 루크와 함께 누웠던 그 침대 위에서, 카이얀은 잠들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연구실로 갔다. 이 책 저 책을 들춰 보며 집중하려 해 봐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괜히 어지러운 책상도 맘에 들지 않아 한밤중에 괜히 정리를 시작하는데, 어딘지 익숙한 표지가 보였다.

세계 신화 모음.

카이얀은 잠시 그게 왜 여기 내려와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곧 가슴께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파라락, 가볍게 책장을 넘긴다. 나르키소스 책장이 꾹 접혀 있었다. 서재를 걷다가 루크가 생각나 이 책을 빼고, 그날 거울 얘기를 했던 게 떠올라 이 이야기를 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모퉁이를 접었던 그 책이었다.

카이얀은 책을 내려놓았다. 연구실 안에 우뚝 서서 카이얀은 갈 바를 몰랐다. 문득 울리는 목소리.

“사랑하고 있습니다.”

간결하게 건네지던 고백. 대답도 바라지 않고 그저 전한 것으로 흡족해하던 아이 같은 사랑이 있었다. 그 무구함 앞에 혼자 잠 못 이루던 밤. 답하지 못할 마음에 그저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이라 짐작하고 말았다.

카이얀은 펼쳐진 책을 내려다보며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 말이 이렇게 단단한 책갈피로 남을 줄 몰랐다. 몰라서 외면했다. 이제는 깨닫는다.

사랑이었구나.

내 집에서, 그 남자는 진짜로 사랑을 했구나.

* * *

카이얀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밀리엄 장군은 부모 된 마음으로 카이얀을 지켜봐 왔다. 제 부대 군인들이 저지른 일인 만큼 책임감도 느꼈고 카이얀 부모와의 인연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열일곱 살의 카이얀이 별다른 주위의 도움 없이 유산을 운용하고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모의 기일마다 함께 식사하자는 연락을 보냈고 카이얀은 스무 살을 넘기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밀리엄 장군은 카이얀이 대학을 졸업하고, 온갖 대회에서 수상하고, 매스컴에 얼굴이 알려지는 과정을 눈에 담았다.

그가 보기에 카이얀은 여전히 부모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사고 직후처럼 슬퍼하진 않았으나, 카이얀은 지극히 제한된 인간관계만을 맺었으며 연애도 오래 하지 못했고 사람에 대한 경계도 지나쳤다. 사랑받고 자란 유년 덕택에 심성이 선하고 마음도 여렸지만 도통 새 사람을 제 안에 들일 줄 몰랐다.

그래서 루크와 함께 있는 카이얀을 처음 봤을 땐 깜짝 놀랐다. 카이얀이 누구와 함께 산다니, 결혼이나 할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카이얀은 태연했고 루크에게 마음을 기대고 있었다. 멋모르는 아이처럼 카이얀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저 남자의 어디가 카이얀을 자극한 것일까, 그는 남몰래 궁금해하곤 했다.

밀리엄 장군은 카이얀이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그래야 제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아버지 된 마음으로 그런 바람을 갖기도 했다. 때문에 카이얀이 루크에 대한 부탁을 했을 때, 밀리엄 장군은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건 다하는 거고, 어려운 건 어려운 거였다. 중요한 증거를 꽁꽁 싸매고 어둠 속으로 숨겨 버린 데다가 정치 세력의 은밀한 후원까지 받고 있는 연구소를 파헤치는 건, 관록도 권력도 가진 4성 장군으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시 인력을 붙이고 감사를 강화했지만 건진 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을 보내고 루크는 결국 르다크로 파병되었다. 외부 전쟁 상황이 잠잠할 때는 숨소리도 죽이더니, 군사력 보강이 필요해지자 냉큼 혐의 못 벗은 연구소부터 들고 나오는 몇몇의 작태가 보기 싫었다.

꼭 카이얀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 전쟁이 길어지자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무기 개발에 힘써야 한다던 라투르 정권 인사들이 ‘그러게 내가 뭐랬어?’ 하며 군부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시기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다지만 속이 뒤틀리는 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봤자 퇴진 정권 주제에. 르다크 내전 4차 파병군과 함께 루크가 출국했다는 보고를 받은 날, 밀리엄 장군은 독한 술을 땄다.

“장군님, 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르다크 내전 4차 파병으로부터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파병된 군인 중 하나가 돌아왔습니다. 사바튼 연구소로 갔다고 합니다.”

일반 군인이라면 연구소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밀리엄 장군은 얼굴을 굳힌 채 보고를 들었다. 몇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니 결론은 하나였다.

루크가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

* * *

보고를 받았을 때 나이란은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주사하기 전에 꼭 시간 확인하랬잖아! 각성제가 무슨 영양제인 줄 알아? 가뜩이나 시간 없어서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는데 과용하면 다 망한다고! 접전지도 아니고 기지에서 발작하게 만들다니 미쳤어?”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이란이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다른 연구진들도 뒷수습에 바빴다. 나이란은 씩씩대다가 당장 기기를 점검하러 갔다.

루크가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나이란은 참았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는 말에도 참았다. 그러나 지나친 각성제 투여 때문인 것 같다는 보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루크의 각성제는 당연히 위험한 약물이었다. 인간에게서 인간 이상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안전할 리 없다. 장기간 복용하면 신체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뿐더러 개발 기간이 짧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농도와 투여 시간을 조절하는 게 최선인데, 그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못해 보름 만에 쩔쩔매며 전화하는 꼴이라니.

루크가 이송되어 왔을 때 나이란은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아예 몸속에서 핏줄이 터졌는지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본래 피부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장 캡슐로 넣어 놔. 어떤 상태인지부터 확인해야겠어.”

나이란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같이 갔어야 했다. 루크를 전쟁터로 보내 놓고, 여기서 연구를 계속해 좀 더 안전한 각성제를 보내려고 한 게 실수였다.

“멍청이들.”

나이란은 욕설을 뱉었다. 온 연구진이 각성제 밸런스 조절에 매달리는 와중에 세상에서 가장 초보적인 실수나 하다니. 얼마나 큰소리를 쳤는데, 겨우 보름 만에 최대 전력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돌려보내다니!

현지로 가져간 장비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루크는 거의 전신 마비 상태였다. 뇌에 문제나 안 생겼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내출혈이라도 일어난 건 아니겠지……. 검사에는 시간이 걸리니 나이란을 비롯한 연구진들은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루크는 긴 꿈을 꾸고 있었다.

루크는 자기가 날고 있는 걸 알았다. 비행기나 헬기에 탄 것도 아닌데, 날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날아서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루크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싶었지만 곧 개의치 않게 되었다. 어떻든 하늘을 나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았다.

전투에 나가기 직전 각성제를 주사받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각성제는 점차 나아져 처음처럼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도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날 수 있는 성분이라도 추가된 것일까?

‘카이얀.’

그 이름이 떠올라서 루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아서 어딜 가고 싶으냐고 하면 생각나는 건 당연히 하나뿐이다.

루크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에 와 봤던 전투 지역 같기도 했다. 어딘진 모르겠지만 제 나라 안에서 싸운 적은 없으니 아마 여기도 외국일 것이다.

카이얀에게 어떻게 가지?

두려움이 루크의 마음을 잠식했다. 막막하게 펼쳐진 고원. 이상했다. 시신 한 구 보이지 않는다. 잿더미가 쌓인 듯한, 끝없는 땅. 해 없는 하늘이 어슴푸레했다. 구름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루크는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한참을 헤맸다.

추위도 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몸이 좀 떨리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한참 헤맸던 게 기억났다. 카이얀과 약속한 장소로 갈 수가 없어서, 얼마나 애가 탔던가.

나이란은 그가 가짜라고 했다……. 정말 그는 가짜였나, 그저 훈련이었을 뿐인가……. 루크는 정치나 연구소의 입장에 대해 전혀 몰랐으므로 그게 어쩌면 훈련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게 북극성입니다. 거의 동전 크기로 보이죠? 워낙 멀리 있어서 그런 겁니다.”

당신은 아는가, 당신이 내게서 얼마나 멀었는지. 별처럼 빛나는 당신,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데도 어쩌면 그렇게도 멀었는지.

“하지만 밝고, 분명하죠. 바다에선 저걸 보고 길을 찾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고.”

루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루크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땅을 전부 뒤덮은 재가 회오리치듯 쓸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루크는 깨달았다.

나는 갈 수 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따뜻한 별에 카이얀이 살고 있으리라. 정원을 손질하다 문득 울타리에 기대서 밖을 바라보는, 그 옆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릴까.

루크는 궁금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생각하는가.

그날 꿈에서 루크는 북극성까지 날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분명한 별까지. 거기까지 평생을 날아간다면 그도 좋으리라. 거기에도 당신이 없다는 걸 확인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고단한 길을 날아가리라.

* * *

루크는 도무지 눈을 뜨지 못했다. 연구진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각성제 때문에 이 난리가 났으니 의식을 되찾게 하기 위해 또 약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사 결과, 루크는 온몸의 균형이 망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눈을 뜨지 못하는 건 확실히 이상한 점이었다.

“차라리 파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어차피 이번 전쟁에 다시 내보내기도 글렀고, 다음번에도 쓸모가 있을지…….”

몇몇 연구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이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이란은 그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우린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루크를 죽였다간 수습이 어려워질 겁니다.”

이런 멍청한 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니. 나이란은 할 말이 없었다. 루크의 상태가 나빠지고 일이 꼬이면서 연구소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일부는 이미 연구 데이터를 다 얻었으니 루크를 파기하고 다른 실험체를 만드는 게 효율적이라 여겼다. 나이란과 다른 연구자들은, 루크도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며 현 정권이 연구소의 약점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고 반박했다.

나이란은 그날도 루크를 찾았다.

루크는 또 다른 실험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장치들을 주렁주렁 단 채였다. 기계에 둘러싸인 루크는 일견 정말 기계 장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루크는 사흘째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긴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더 정밀한 검사를 위해 이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루크가 이제껏 복용해 온 약과 주사한 약물이 모두 모여 있는 곳으로, 성분 분석을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루크가 정신을 차려야 실제 실험이 가능하겠지만 이번에는 실수가 없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루크.”

나이란은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시간이 지나며 몸은 안정을 찾아가는데,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정말 정신적인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란은 과학자였다. 그녀는 신이 빚었다는 인간의 몸을 다른 박사들과 함께 임의대로 변화시켜 왔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의지라거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호르몬 작용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크가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게 단속해 온 것도 호르몬으로 인한 변수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나이란은 이런 상황에서 대처법을 찾지 못했다. 다시 홀로그램으로 루크를 속이려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널 카이얀에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모든 걸 망쳤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말 물류 창고에 가둬 두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나이란은 루크가 영영 눈을 뜨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짐작은 옳았다. 루크는 그 후로도 며칠간 의식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나이란과 연구진은 호르몬 자극제와 가벼운 전기 충격을 사용해 루크를 깨우기로 결심했다.

연구진이 맹신하는 과학의 힘은 과연 위대한 것이라, 루크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러나 루크는 오래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가물가물 흐린 눈으로 주위에 둘러선 연구진과 온갖 기계와 하얀 천장과 조명 같은 것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아,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았는데……. 하고 루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 연구진과 루크의 소리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루크를 깨우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나이란은 최후의 수단으로 홀로그램을 다시 사용했으나 소용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루크는 본인의 의식 속에 침잠해 있는 듯했다.

루크는 간혹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루크는 웬일로 주위가 조용한 것을 느꼈다. 거추장스러운 기계 장치들은 여전했지만 곁에 있는 건 나이란 하나였다.

“루크.”

루크가 의식을 찾았다 다시 잃었다 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연구진으로서도 피곤한 노릇이었다. 나이란은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루크를 불렀다.

“카이얀…….”

또, 그 소리였다. 나이란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루크는 또 카이얀을 찾고 있었다. 그러더니 루크는 부질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려 했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는데도, 루크는 벽 너머로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란은 이를 갈았다. 이쯤 되니 카이얀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어서 나이란은 금세 그 생각을 집어치웠다.

“말했잖아. 협조하면 카이얀을 계속 만나게 해 준다고.”

루크는 누운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밤인지 낮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환한 방. 루크는 연약해진 마음에 불이 붙는 걸 느꼈다.

“왜 그랬습니까?”

듣기 싫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너무 오래 입을 열지 않아서인지 입안이 바짝 마른 채였다.

“왜…….”

“뭘 묻고 있는 거야?”

나이란은 혹시라도 루크가 다시 정신을 놓을까 싶어 전전긍긍 되물었다. 기회인 것 같았다. 나이란은 연구진을 호출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루크가 다시 잠들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루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나이란은 직감적으로 루크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카이얀을 죽인 겁니까.”

내가 돌아갈 곳이었는데. 내가 사랑한 사람인데. 유일하게 내게 뭔가 원해도 좋다고 말해 준 사람인데.

얼마나 좋아했는데…….

“난 카이얀을 죽이지 않았어.”

나이란은 바로 부인했다. 홀로그램으로 루크를 속이긴 했으나, 어떻든 나이란이 카이얀을 죽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거짓말.”

그 말을 한 순간 루크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카이얀을 죽였어.

루크의 정신은 엉망이었다. 이성이 날아가고 발작 같은 착란이 시작되었다. 온갖 기계를 몸에 달고 고통스럽게 말라 죽어 가는 카이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흩어지는 마지막 날숨. 감기는 눈꺼풀. 하얗게 질린 얼굴. 이따금 그도 발작했을까, 이 사람이 붙잡았을 때 카이얀도 고통스러워한 건 아닐까.

근거 없는 장면이 루크를 붙잡았다. 루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계 장치가 철그럭거리며 따라왔다. 나이란은 루크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카이얀이 당신 때문에…….”

루크는 증오를 몰랐다.

적에 대한 기본적인 적의조차 없었다. 임무니까 죽이는 것뿐이었다. 이제껏 루크는 증오를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루크는 나이란이 ‘끔찍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목을 꺾어 버릴 수만 있다면.

내가 지켜 준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들이 그 평화로운 집에서 카이얀을 쫓아냈는데도 지키지 못했다.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호숫가가……. 모든 것들로부터 그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그날의 약속이…….

죽여 버리자.

루크 안에서, 결심이 섰다.

죽여 버리자.

“잠깐…….”

나이란은 빛 아래서 루크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 한 번도, 루크에게서 이런 걸 느낀 적이 없었다.

“당신이 카이얀을 죽였습니다.”

루크는 기계적으로 되뇌었다. 그가 자기 팔에 연결된 기계 장치를 뜯어냈다. 핏줄에 연결하지 않고 그저 물려 둔 것이라 장치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루크는 침대 아래로 내려오며 기괴한 촉수처럼 들러붙은 것들을 다 떼어 버렸다.

나이란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섰다. 루크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지금 바로 달려가서 문가의 비상 버튼을 누르고 복도로 도망치면…….

그러나 루크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이란이 다시 물러나는 순간 루크는 엄청난 속도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잡자마자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약물이 든 철제 선반 쪽으로 나이란을 내팽개쳤다.

나이란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선반이 덜컹, 하고 벽에 부딪치며 약병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강화유리라 깨지진 않았다. 나이란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다 작은 병을 짚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루크는 곧바로 움직였다. 휘청이는 나이란의 어깨를 붙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우더니 바로 선반 쪽에 밀쳤다. 등허리와 머리로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에 나이란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나이란은 루크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았다. 전장에서의 루크는 표적을 벽에 밀치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바로 목을 꺾었을 것이다.

“무섭지?”

나이란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루크는 여전히 나이란의 어깨를 붙든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넌 반평생을 박사들과 지냈어. 죽이는 게 쉬울 줄 알아?”

나이란은 어떻게든 틈을 찾아 루크를 떨쳐 내려 했다. 그러나 루크는 나이란을 놓지 않았다. 루크는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는 결국 나이란을 바닥으로 밀어 버렸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루크는 철제 선반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다. 이제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짓이었는지 알고 있다. 루크는 처음으로 자기가 연구소에서 대단히 불운하게 지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부당한 일이었다. 루크는 넘어진 채 선반에 나뒹구는 약병들을 바라보았다.

죽일 수가 없었다.

나이란의 말이 옳았다. 좋든 싫든 루크는 저들과 반평생을 함께했다. 그러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크가 군인이라는 걸 명확히 인지한 후, 카이얀은 한동안 그를 꺼렸다. 눈에 띌 정도로 그를 피해서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카이얀은 사람 죽이는 자를 멀리한다.

“카이얀은 원래 우리가 만든 홀로그램이었어.”

카이얀이 정말 가짜였다 해도, 어떻게 그가 경멸하는 짓을 하겠는가. 그러다 그가 받아 주지 않으면.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평생 만날 수 없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카이얀을 죽여 버렸는데…….

“만져 봐요.”

루크는 차가운 철제 선반을 붙든 채,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는 꿈도 아니고, 가짜도 아닙니다.”

당신의 몸은 따뜻했다. 당신은 꺼리지 않고 내 몸에 손을 댔다. 그 체온이 가짜였는가, 이제 와서는 확신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루크는 나이란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으나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따뜻하죠?”

루크는 나이란이 문가를 향해 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상벨이라도 누를 모양이었다. 루크는 멍한 얼굴로 나이란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무의식적으로 약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장 최근 것.

루크는 알 수 있었다.

작은 병을 하나 들어 올렸는데, 그래 놓고도 자기가 왜 이걸 들었는지 몰랐다. 마시는 약이 아니라, 주사하는 것이다. 루크는 이끌리듯 주사기를 찾았다. 바늘. 어디에 있지.

“루크.”

몸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 채 나이란이 루크를 불렀다. 조금만 더 가면 비상벨을 누를 수 있는데, 루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하는 거야?”

루크는 주사기에 약을 채웠다. 누름대를 쭉 당기자 약이 찼다. 루크는 능숙하게 혈관을 찾았다. 처음에는 지독한 고통만을 선사했던 약이지만, 실험을 거듭하는 동안 점차 나아졌다. 루크는 본능적으로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카이얀의 목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루크는 약물이 혈관을 태워 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뜨거웠다. 몸이 엉망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 수 있다.

“루크, 그만해!”

루크가 덤덤한 얼굴로 두 번째 약물을 주사했을 때 나이란이 악을 썼다. 루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약병을 하나 더 땄다. 그러나 몸이 견디질 못했다. 루크는 병을 떨어뜨렸다. 투명한 약이 바닥에 흘렀다.

루크가 비틀, 선반을 짚었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머릿속을 채우는 듯하다. 선반이 뒤로 밀리며 나는 소리가 고막을 터뜨려 버릴 것 같다. 눈이 타들어 간다. 그러나 루크는 느낄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충만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린 만날 겁니다.”

루크는 뛰었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루크는 자기가 머리나 심장에 총알을 맞지 않는 이상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귀청을 찢을 듯한 사이렌 소리를 뚫고 루크는 달렸다.

그는 길을 알았다. 비상구로는 갈 수 없다. 루크는 나는 듯이 복도를 지나쳤다.

루크는 모퉁이를 돌아 식당으로 달렸다. 연구원과 박사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연구소 중심과는 긴 통로로 연결된 곳이었다. 루크는 제가 어떻게 거길 아는지 몰랐다. 그러나 루크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보안이 가장 소홀한 곳이기도 했다.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세상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돼, 잡아!”

누군가의 비명소리. 루크는 제 뒤에서 울리는 총성을 들었다. 총성이 사이렌 소리와 섞이자 그대로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제 발소리조차 쿵쿵 울렸다.

“우린 만날 겁니다.”

어깨와 무릎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통증 같았다. 움직이는 데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루크는 고통을 잊고 무작정 달렸다. 조용하고 어두운 식당을.

가지런한 식탁 사이를 달리는 동안 총성이 점차 멀어졌다. 저들이 루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식당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가슴팍을 밀치듯 달려들었다. 바깥 세계의 강렬한 감각. 루크는 모든 것이 실제인,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그의 세상을 가로질러 뛰었다. 다리에 날개라도 달린 것 같았다.

루크는 본능처럼 달렸다.

환각처럼 곁을 스치는 무수한 불빛들. 별빛들. 루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실제 지리와 똑같은 홀로그램 속을 헤매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루크는 근방 지도를 환하게 펼쳐 놓은 것처럼 길을 찾아냈다. 그의 감각과 직관은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

달리면서, 루크는 제 왼팔의 살을 쥐어뜯었다. 피부가 벗겨져 나가면서 안에 심었던 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전장에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심어 둔 장치였다.

거치적거려.

특별히 계산이 있어서 뜯어낸 건 아니었다. 감각이 예민해지자 본래의 몸이 아니었던, 몸에 심어 둔 이물질이 거슬렸을 뿐.

루크는 계속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루크는 낯익은 길섶에 나뒹굴었다. 구르듯 쓰러지며 루크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슬이 내린 것인지 잔디가 축축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어느 도로 중 하나였다.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밤은 어두웠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좀 쉬다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다리로 걸어서 카이얀에게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을 잊을 리가 없다.

거짓된 세계, 이제껏 끌려 다니기만 했던 그 세계에서 오직 그만이 진실하였다.

흔들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거짓말들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늘에는 여전히, 별들이 무수하고 선명하였다. 루크는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끝에서 제 안에 카이얀이 뜨는 것을 보았다.

* * *

카이얀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액자를 받는 중이었다.

연녹색 액자였다. 카이얀은 루크 방에 못을 박을까 말까 하다가, 다른 물건들처럼 서재 구석에 보관하기로 했다. 카이얀의 서재에는 이런 식으로 산 물건들이 하나씩 쌓여 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도 있고, 직접 나가서 산 것도 있었다. 이렇게 물건을 사는 것은 요즘 카이얀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루크 방에 놓으면 좋겠다 싶은 작은 책꽂이를 주문했다.

그 안에 채워 넣을 책을 고르려고 서재를 돌아다니다가 그냥 서점으로 나갔다. 다음은 서랍장이었고, 루크의 방이 넓은 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작은 소품들로 눈을 돌렸다.

루크가 떠난 뒤 몇 주가 지나자, 카이얀은 평소처럼 지내려고 애썼다. 기다리는 것도 요령이다. 매일 르다크 관련 기사를 확인하고, 부질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긴 했지만 카이얀은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카이얀은 도저히 어디 먼 여행을 간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루크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루크는 한가롭게 여행을 간 게 아니었으니까.

그 사이, 날씨는 많이 쌀쌀해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 카이얀은 날씨가 부쩍 추워진 것을 느끼며 르다크는 어떤가 생각하곤 했다. 모든 것이 루크와 연결되어 보였으므로 카이얀은 편히 지내기가 어려웠다.

- 카이얀.

그래서 지그문에게 전화가 왔을 때, 카이얀은 거의 반쯤 펄쩍 뛰었다.

“왜? 무슨 일이야? 왔어?”

지그문은 아주 잠깐 사이를 두었다. 사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공백이었지만, 카이얀은 선고라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 왔대. 가 봐야겠더라.

“하.”

카이얀은 전신에 힘이 쭉 빠져 소파에 주저앉을 뻔했다. 카이얀은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차키를 찾기 시작했다.

“상태 어떻대? 지금 바로 갈게.”

- 야, 좀 기다려. 내가 머독한테 연락했거든? 너 너무 흥분해서 운전 못해.

스피커 모드로 바꾼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카이얀은 재킷에 한쪽 팔을 끼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늘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려니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이얀은 자동차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몰라 신경질이 났다. 어제 밖에 나갔다 왔다가 잠깐 어디 둔 것 같기도 하고…….

“머독 올 때까지 못 기다려.”

- 한 시간쯤 전에 했으니까 금방 너희 집 도착할 거야.

“나한테 먼저 했어야지!”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휴대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예민하게 굴었다는 걸 알았지만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내가 열쇠를 어디 뒀지?

- 너 지금 운전하면 사고나. 좀 기다렸다가 머독한테 운전시켜서 가.

흘끗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였다. 번화가를 지날 일이 없으니 차가 막히진 않겠지만 초조해지는 건 별수 없었다.

“알았어. 일단 나 열쇠 좀 찾아야 돼. 상태 어떻대? 어디 안 다쳤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다른 걸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혹시 다쳤나. 심한 실험을 당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르다크 4차 파병이 이뤄졌다는 건 뉴스에서 봤다.

그때 같이 갔다고 생각하고 오래 걸리겠지 싶었는데 왜 벌써… 밀리엄 장군도 그렇다고 말했는데…….

- 나도 직접 보진 않아서 모르는데, 상태가 좀 그런가 봐.

“좀 그렇다고? 좀 그런 게 어떤 건데?”

카이얀은 추궁하듯 물었다. 지그문은 자기도 얘기만 들어서 잘 모른다며, 직접 가 보는 게 좋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파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게다가 다쳤다니.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걸까? 그래도 거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걸 보면 심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아, 도대체가.”

이 망할 열쇠는 어디 있는 거야? 카이얀은 전화를 끊은 후에도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했다. 연구실 물건을 하나씩 다 뒤집었다가, 혹시 차에 꽂아 놓고 왔나 싶어 허둥지둥 차고로 가 봤지만 거기도 없었다. 그렇게 허둥대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머독이 도착했다.

“야, 타.”

머독은 가타부타 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반갑긴 오랜만이었다. 인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서 카이얀은 일단 차에 올라탔다.

“기다리라니까 왜 차고에 있었어?”

“열쇠를 못 찾아서. 혹시 차에 꽂아 놨나 했지.”

카이얀은 조수석에 앉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키야 언제든 찾아야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길 알아?”

“대강? 너 도로 이름은 알 테니까 불러 봐. 지그문 사업장 쪽이지?”

“응.”

머독은 시동도 안 끈 상태였다. 그대로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카이얀은 휴대폰을 확인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갑자기 카이얀이 욕설을 뱉자 머독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뭐야? 왜 그래?”

“아니야. 열쇠가 주머니에 있어서.”

카이얀이 곧 폭발할 것처럼 보이지만 않았다면 머독은 낄낄대고 웃었을 것이다. 카이얀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를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대강 다시 집어넣었다.

“너 좀 쉬는 게 좋겠다. 안 좋아 보여.”

“일단 도착해야 쉴 수 있을 것 같아. 뭐 지그문한테서 들은 얘기 없어?”

“난 그 사람이 너희 집에 살던 하숙생이라는 것밖에 몰라. 최대한 빨리 가 보라고 해서 온 거야.”

“일은.”

어련히 제 일 알아서 해 두고 왔을까 싶긴 했지만, 카이얀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머독은 급한 일 없었다고 하며 속도를 높였다.

“야, 뭐 좀 물어보자.”

조용한 차 안,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머독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테러리스트랑 사귀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뭐?”

카이얀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머독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떤 사람이기에 병원에도 못 데려가고 지그문 사업장에나 숨겨 둬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냥 사정이 있는 거라고.”

“연애 사업 좀 평탄하게 할 순 없냐.”

그렇게 말하며 머독은 씩 웃었다. 카이얀은 나도 그러고 싶었다며 대강 맞장구치고 대화를 그만두었다. 초조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머독 덕에 긴장이 좀 풀린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사귀는 거 아니야.”

“알았어.”

“농담이 아니고, 진짜 사귀는 거 아니라고.”

“알았다니깐.”

머독은 ‘얘가 왜 이래?’ 하는 얼굴로 흘끗 카이얀을 보더니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카이얀은 머독이 길을 물을 때마다 간단히 방향을 알려 주며 조급한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혹시라도 지그문에게 또 전화가 올까 싶어 휴대폰을 단단히 붙든 채였다.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카이얀은 화들짝 놀라 번호부터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밀리엄 장군일까. 그 번호는 아닌데. 혹시 몰라 카이얀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카이얀!

나이란의 목소리였다.

얘는 도대체 번호가 몇 개야?

카이얀은 울컥 짜증부터 치밀었다. 지금 시점에 나이란이 할 말이야 안 봐도 뻔했다.

카이얀은 대꾸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꺼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루크야 이미 지그문의 사업장에 도착한 것 같으니 급한 상황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얀은 지그문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머독 휴대폰으로 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후 제 휴대폰을 껐다.

“전화는 왜 꺼?”

“아. 그냥 쓸데없는 전화 오면 정신 사나워서.”

어쩌면 추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카이얀은 혹시 몰라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했다. 그게 일반인인 카이얀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카이얀은 금세 루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애당초 그리 멀진 않은 곳이었다.

늦은 오후였다. 지그문의 사업장이 서서히 불을 켜기 시작할 때였다. 카이얀은 머독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지역에 있는 지그문의 사업장은 빌딩 형식이 아니었다. 3층 건물이 모여 있는 풍경이었다. 카이얀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세련되게 꾸민 내부, 어두운 불빛이 복도에 걸려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안내원과 카이얀, 머독의 발소리를 모두 감춰 주었다.

카이얀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걸었다.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어요. 사장님이 당부하시기도 했고 해서 바로 데려오긴 했는데, 찾으시는 사람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좀 다친 것 같아서 치료는 해 뒀어요.”

카이얀은 긴장 때문에 등에 땀이 찰 지경이었다. 마침내 1층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멈춰 섰을 때, 몸은 이미 축축했다. 안내원이 열쇠로 문을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카이얀은 반쯤 뛰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루크가 있었다.

흰 침대 위, 정신을 잃은 채.

취침등만 켠 상태라 안은 어둑했다. 이 사람이 맞다고,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한 모양이다. 안내원과 머독이 사라지고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카이얀은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시선을 루크에게 고정한 채 머뭇머뭇 걸음을 뗐다.

잘 믿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침대까지 걸어갔다. 루크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닦아 주었을 게 분명한데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마치 시체 같았다.

카이얀은 순간 소름이 끼쳐 움직임을 멈추었다. 10년 전, 부모님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바로 그때의 기분이었다. 카이얀은 한참 후 루크의 가슴팍이 느리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루크 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부르고, 루크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카이얀은 루크의 몸을 덮은 시트를 치웠다. 그리고 경악하고 말았다.

루크의 몸은 끔찍했다. 왼쪽 어깨와 무릎에 붕대를 감은 채였는데, 흰 붕대 위로 피가 아직도 엷게 스미고 있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다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카이얀은 질겁해서 어디에 손을 대야 하는지, 손을 대도 괜찮은 것인지 몰라 허둥댔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카이얀은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상황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대체 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부터 치밀었다. 왜 루크가 이렇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나. 연구소는 도대체 왜 사람을 이렇게 다루나. 왜 좀 더 빨리 오지 못했을까. 이 사람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부모의 죽음 앞에 침묵해야 했을 때 이후로, 이렇게 무력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태가 되기 싫어서 관계를 좁히고 많은 것을 뿌리치며 살았다. 그다지 반짝이진 않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삶이라며 만족하고 살았는데…….

처음 겪었던 루크의 백지 같은 무지를 떠올린다. 일생을 고통 속에 살고도, 절망이나 원망을 모르던 그 말간 얼굴을. 그가 발작할 때마다 어떻게 해 줘야 할지를 몰라 괴로웠다. 아무 것도 못하고 루크를 보내야 했을 때도.

당신 앞에서 나는 늘 미숙하다.

이토록 서툰 내가 어떻게 당신을 깨우겠는가. 어떻게 당신의 고통에 닿겠는가…….

카이얀은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통증을 느낄까 싶어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취침등 불빛이 카이얀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방 안은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카이얀은 계속 루크의 호흡을 확인했다.

카이얀은 자기가 지독한 신열에 시달릴 때, 루크가 내내 곁에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픈 사람을 멀쩡한 몸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도 참 고역이었다. 이런 일을 루크가 어떻게 해냈을까 싶었다.

빨리 눈을 뜨면 좋겠다. 날 보면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잠든 얼굴 말고 좀 더 기쁜 얼굴을 보여 줬으면.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채 가시지 않은 불안 탓에, 기다림이 유독 버거울 것 같았다.

* * *

루크를 언덕까지 이끈 건 무의식이었다.

도저히 카이얀의 집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고, 또 몇 번이고 외면당했던 그 집이었다. 약속된 장소로 이어진 낯익은 길목을 인지한 순간 루크가 갈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루크는 한참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걸 알지 못했다. 그는 거의 인식도 못한 상태로 기듯이 움직였다. 몸은 한계였다. 그러나 루크는 한계에 대해 잘 몰랐다.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는 움직여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정말 죽어갈 때조차도 자기가 죽어 가는 줄 몰랐다.

가뜩이나 인적 드문 외곽도로였다. 루크는 자기가 얼마나 왔는지 몰랐고, 헤아려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루크는 그답게 걸었고, 쓰러지면 일어섰다가, 못 일어설 것 같으면 잠시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리길 반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언덕에 다다랐을 때는, 다시 북극성이 멀고 분명한 밤이었다.

루크는 카이얀과 자기가 함께 앉아 있던 자리까지 기어올랐다. 이게 현실이었다. 바로 지금이 현실이었다. 루크는 마음속의 모든 불안이 일시에 걷히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불안이 사라지자마자 신체의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루크는 알 수 없었다. 그 다음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루크는 아까 총에 맞은 곳이 끔찍할 만큼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각성제라는 것이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키기에 총에 맞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었나 보다. 루크는 그저 그러려니, 통증을 감내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카이얀.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어떤 이름도, 장소도, 루크에게는 무의미했다. 카이얀이 너무 간절해 그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못 만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고 했으니 만나리라.

카이얀.

그 이름을 주문처럼 부르다가, 다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통증도 옅어졌다. 루크는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들었다. 지그문의 직원들이 쓰러진 루크를 발견해 안으로 옮긴 건 천운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고요히 눈을 감은 채였다.

깨어났을 때, 빛이 느껴졌다. 흐린 빛이었다. 귀가 조금 멍멍했다. 몸이 무거웠다. 손발이 부은 느낌이었다. 루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카이얀이 보였다.

그의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 셔츠 단추가 두 개 풀려 있었다. 불빛이 만드는 그림자가 카이얀의 몸 곳곳에 고여 있었다. 바닥에 앉아 침대 옆 서랍장에 기댄 채, 반쯤 선잠에 든 모습이었다.

너무 거대해서, 안도라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안도감이 온몸을 평안하게 했다. 루크는 심호흡 하는 것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가짜가 아니었어. 카이얀이 옳았어. 그가 여기 내 옆에, 이렇게 여전한 모습으로…….

루크가 손을 뻗었다.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손이 카이얀의 어깨에 닿았다. 감촉. 손의 감각이 무디긴 했으나 분명히 카이얀에게 닿았다. 다른 사람이 사는 그의 집 앞에서 계속 문을 두드렸던 일들이 다 아득한 꿈결처럼 멀어지는 듯했다. 지난 일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카이얀이 움찔하더니, 곧 눈을 떴다. 루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탓에 루크의 손이 길을 잃었다. 카이얀은 혹시 통증이라도 있을까 놀라서 얼른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카이얀이 입술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안 들려.

상관없어서 루크는 그냥 웃었다. 카이얀이, 제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카이얀이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하고… 그를 안 이래로 가장 가까운 듯싶었다. 제 손을 단단히 쥐고 있는 손은 차가웠다.

카이얀은 계속 뭐라고 말했다. 루크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도 않고,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루크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입모양으로 몇 마디 정도는 잡아챌 수 있었다.

〔루크 씨.〕

카이얀이 침묵으로 말했다.

〔말 좀 해 봐요. 목이 아파요? 목소리가 안 나옵니까?〕

이토록 초조해하는 그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쁜 생각인 것 같지만 루크는 기뻤다. 카이얀이 이렇게 자기를 걱정하는 게,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켜 준 게, 당연한 듯 약속을 지켜 준 게, 전부 다 기뻤다.

〔루크 씨… 왜…….〕

루크는 깜짝 놀랐다.

카이얀의 녹색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카이얀은 참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으나 금세 눈이 붉어졌다. 루크는 손을 움직여 카이얀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카이얀이 고개를 돌리고 제 입술을 짓이겼다. 얼굴을 보이기 싫은 것 같았다.

루크는 가만히 카이얀의 손목을 붙잡았다. 목소리가 어떨지 자신은 없었지만, 루크는 입을 열어 말했다.

“입을 맞춰 주십시오.”

유일한 당신. 떠나지 않는 별.

이제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그러면 저는 좋아질 겁니다.”

울지 말라고 한 이야기인데, 카이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쏟아졌다. 카이얀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젖은 입술로 루크에게 키스했다. 몇 번이고,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에 루크의 뺨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이얀이 떨리는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맞댄 채로 무어라 말했는데 루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이얀은 더 울었다. 아무래도 제게 달래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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