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벼락
강의를 나름 여유롭게 배치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시험 기간만 되면 빠듯했다. 그래도 전공 두 개를 끝내고 나니 한숨은 돌렸다 싶었다.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얻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우는 칸막이가 없는 자리 하나를 겨우 잡아 열람실로 들어왔다.
앉아서 공부하다가 시간을 확인할 겸 핸드폰을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서에게 온 것으로, 요즘 대부분의 연락은 그와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디냐는 물음에 도서관이라고 답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서로 공부하느라 바빠 요즘에는 통 만나지를 못했다. 그래도 저번에는 자기 전에 한번 보자면서 집 앞으로 찾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부는 잘돼 가냐, 힘들다, 오늘은 뭘 했냐 같은 시답잖은 대화였다. 그래도 확실히 이서가 편해졌다. 어쩌면 요즘엔 가장…….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면서 청우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잠깐 사이에 오 분이 지나 있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책상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앞자리에 앉은 이서가 보였다. 청우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왔어?”
목소리를 죽여 묻자 이서가 씩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면서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영업 비밀’이라고 하는 게 읽혔다. 별게 다 비밀이다. 청우는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서가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함께 공부하자는 뜻 같아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책 한 페이지를 다 읽었을 때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드니 이서 옆에 한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이서를 향해 미소 지으며 딸기 우유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서가 우유를 손에 들고 흔들더니 눈을 찡긋하자 여자가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누구지? 아는 사람인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서가 청우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이서에게 준 것을 자신이 받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젓자 그는 포스트잇을 뜯어 거기에다 뭐라고 적은 뒤 우유에 붙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내미는데, 궁금한 마음에 차마 두 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먹어 ♡」
간결한 두 글자는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생각보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글씨를 잘 썼다. 또박또박 바른 것이 평소 이서의 모습과는 달랐다. 글씨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뒤에 붙은 하트를 늦게 발견했다. 청우는 이서를 흘금 보다가 포스트잇을 떼어 「너한테 준 거잖아.」라고 적은 뒤 건넸다.
이서가 내용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포스트잇에 뭐라고 적어 다시 돌려주었다.
「외간 여자가 준 걸 마실 순 없지 ㅠㅠ」
청우는 헛웃음을 흘렸다가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 입을 막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이서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머쓱하기도 하고, 더 해 봤자 의미 없는 실랑이가 될 것 같아 한숨을 삼키며 포스트잇을 떼어 책에다가 붙였다.
이서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졌다. 청우는 미간을 모으고 다시 공부에 몰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또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번엔 다른 여자가 다가와 이서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이서가 옆을 돌아보고는 여자의 손가락을 잡아채고선 웃었다.
외간 여자랑 잘만 노는데……. 청우는 다소 황당한 눈으로 이서를 지켜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많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 같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이성과의 스킨십도 참 스스럼없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은 제 착각이었던 걸까. 비를 피해 노천극장의 무대로 들어갔던 날, 이서의 얼굴이 돌연 가까워졌다.
순간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제 생각이 완전한 착각이라는 듯 곧바로 멀어진 이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도 그냥……. 그 정도의 거리는 이서에게 대수롭지 않았던 거겠지.
툭, 툭. 발을 건드리는 것에 눈을 들자 이서가 손가락을 들어 입가 근처에서 허공을 그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주름진 미간을 풀었다. 그가 안 마시느냐는 듯 딸기 우유를 콕콕 가리켜서 청우는 충동적으로 우유갑을 뜯은 뒤 벌컥 들이켰다. 목울대가 시원하게 흔들렸다. 우유를 다 마신 뒤 내려놓자 이서가 활짝 웃는 낯으로 손뼉을 맞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영락없이 휘둘린 꼴이다. 상대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무구한 낯으로 청우를 바라보던 이서가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나가자는 뜻 같아서 청우는 책을 덮고 일어났다.
바깥 공기를 쐬고 나니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아무래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도서관 밖은 잠시 여유를 누리러 나온 사람들로 수런거렸다. 청우는 기지개를 켜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거 먹을래?”
이서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넸다. 청우는 고맙다고 말하며 초콜릿을 까 입에 넣었다.
“단거 좋아해?”
“가끔 먹어. 좋아하는 건 아니고.”
“으음. 우리 시험 끝나는 날 놀러 갈까?”
“놀러?”
“응, 가까운 데 단풍 보러 가도 좋고, 바다라든지. 어디든.”
“그래.”
어디 갈지 생각해 봐야겠다며 이서가 밝은 낯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험이 끝나면 보통 본가에 내려가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거나 동기들과 어울리곤 했다. 논다고 해 봤자 다 비슷비슷했기에 이서와의 시간은 왠지 기대가 되었다.
바람을 충분히 쐬고 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을 때, 핸드폰에 메시지가 대량으로 와 있는 걸 발견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의 단체 대화방으로, 시험이 끝나면 만날 날을 투표하고 있었다. 표를 가장 많이 받은 날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대학교 시험 기간이 다 비슷한 데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인지라 몰표를 받은 듯싶었다.
청우는 그날 자신은 못 간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대화방을 살폈다. 산영 또한 그날 불참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험이 끝나면 항상 건과 만났으니……. 이번에도 그럴까. 잘되어 가고 있는지 요즘은 의도적으로 묻지 않아 상황을 잘 몰랐다. 하지만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잘되고 있는 거겠지. 다행이었다. 기억은 아직 되찾지 못했지만…….
딱, 손가락을 맞부딪치는 소리에 멍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자 이서가 양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귀여운 척을 하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리자 이서가 눈을 지그시 깜빡거리며 책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집중하라는 뜻 같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돌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청우는 웃음에서 피어난 기분 좋은 감정을 머금었다.
*
산영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옷을 골랐다. 건이 제게 사 준 옷들을 늘어놓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옷만 남겨 두고 다 집어넣었다.
시험 기간 마지막 날이었으나 저는 오늘 시험이 없었기에 여유로웠다. 건은 오전에 시험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산영은 침대 위에 앉아 핸드폰 메신저를 들여다봤다. 여전히 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오늘 만나는 게 맞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시험을 방해할까 봐 참기로 했다.
산영은 핸드폰을 쥔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건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지부진’이었다. 가까워질 만하면 멀어지고, 멀어질 만하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유가 뭘까. 곰곰 고민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한몫하는 듯싶었다. 건이 기억을 잃기 전에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만났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했다. 매일의 만남 또한 건의 배려이자 마음이었던 것이다.
산영은 엎드려서 보디 필로우를 끌어안았다. 문득 얼마 전의 다툼이 떠올랐다.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찾아온 동기와 함께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건이 제 손목을 끌어당겼다.
‘너 볼 때마다 저 새끼 손 타는데, 그게 취미야?’
성이 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산영은 당황했지만 조금 전까지 동기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침착하게 떠올려 보았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였고, 동기가 제 어깨를 툭 치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이 친구의 버릇과 같았다. 의심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며 볼 때마다 ‘손을 탄’ 적도 없었다.
기억을 잃은 건에게 드러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감정이 휙휙 오가는데 그 맥락을 읽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원래도 조금 변덕스럽고 욱하는 성질이 있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따라가기 쉽지 않았던 적은 드물었다.
‘건아. 정욱이는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 내가 맘에 안 든다는 새끼들 다 그냥 친구로 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거 두고만 볼까? 그러다 이청우 같은 새끼랑은 뒤에서 배도 맞추겠어. 아, 아니면 벌써 맞췄나?’
건이 산영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기고는 티셔츠를 들추려 들었다. 산영은 건의 태산 같은 몸을 황급하게 밀어 내며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건이 욕설을 짓씹더니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씨발, 울지 마. 네 눈물 좆같으니까.’
건은 기갈이 든 사람처럼 산영의 입술을 탐했다. 그의 품 안에서 산영은 안도했지만 그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한 혼란을 숨기려 들었고, 산영의 곁을 차단하고 통제하기를 원했다. 산영을 원하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의심했고, 가지고 싶지 않지만 남 주기는 싫은 것처럼 취급했다.
모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부족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살을 맞대고 가장 내밀한 감정의 속살을 비볐던 남자의 온도를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좋은 점도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였지만 사실은 힘들었다. 불안해질 때면 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기억을 잃었으니 혼란한 게 당연하다고. 기억을 잃은 건과 예전의 건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건과 만나는 일 년 반 동안 둘은 기쁨과 추억, 기억과 애정, 믿음과 성애 그 모든 것을 토대로 사랑이라는 성을 쌓았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 누가 있든 관계가 변치 않았고,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불안이 스며들 틈은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건에게는 사랑만이 남았다. 사랑했다는,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만이. 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만이. 그 사실을 주장하는 상대만이.
기둥이 와르르 무너진 사랑을 안아야 하는 사람은 건이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기다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정시가 되면서 탁상시계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온 산영은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라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연결음만이 끊임없이 들릴 뿐이었다.
예전에는 연락이 안 될 일이 거의 없었는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 버리고 나자 밀려오는 건 그리움과 막막함이었다. 핸드폰을 꼭 쥔 채로 멀거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황급히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으나 발신인은 건이 아닌 이서였다.
「산영아! ^^」
이서와는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었다. 오랜만에 온 메시지에 답장하려는 찰나였다. 그가 주소 하나를 보냈다. 호텔 로비 층에 자리한 카페를 가리키는 주소에 고개를 기울이는데, 이어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차건 오늘 여기 갔다는데 너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ㅠㅠ」
건이 오늘 호텔에 갔나? 약속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왜 나한테 가 봐야 한다고 그러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 산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이서야!!」
「근데 왜..?」
선약이 있어서 건이 자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미리 말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산영은 시무룩한 낯을 하고선 침대 밑으로 빠져나온 다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답장이 도착했다. 그걸 확인한 산영의 낯이 굳었다.
「찬희 누나 만난다는데」
「친구로서 차건이 후회할 짓 하는 건 말려야 하잖아」
「물론 너도 내 친구니까」
마지막으로 이서는 노란색 머리가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리는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오래전에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이름에 산영의 시선이 머물렀다. 찬희. 찬희…….
“아.”
어릴 적 건의 약혼자로 집안에서 점찍어 두었다고 했던 여성. 그 여성의 이름이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글자만 내려다보던 산영은 화면이 꺼지고 검은 액정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속이 울렁였다.
해가 졌다. 해가 점점 짧아지는 탓에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캄캄했다. 시험이 모두 끝났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불편한 소음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이서의 마지막 시험이 오후 늦게 있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전 시험을 보고 나서 낮잠을 잔 뒤 미뤄 두었던 집안일을 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니 딱 좋았다. 이서와는 이야기 끝에 인천으로 밤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가서 바다도 보고 조개구이도 먹고, 근처를 조금 산책하다가 돌아올 예정이었다. 바다는 오랜만이어서 기대감이 샘솟았다.
시험이 곧 끝날 때가 되었다. 연신 시간을 확인하는데, 핸드폰 화면이 전화 수신 창으로 바뀌었다. 발신인은 산영이었다. 이 시간에 왜……. 건과 함께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한 기색으로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청우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한바탕 울고 난 듯한 코맹맹이 소리.
“무슨 일 있어?”
[청우야, 너 여기 안 와?]
“어딘데.”
[나 여기 희정이랑 우중이랑 소은이랑 같이 있어.]
흐트러진 웃음소리 뒤로 어수선한 소음이 들렸다. 산영이 언급한 이들은 전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오늘 모임에 산영은 불참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 가서 이렇게 잔뜩 취한 걸까. 산영의 주량이 약하긴 하지만 시간도 늦지 않았는데 벌써 취했다는 건 초장부터 달렸다는 뜻이었다. 주변에서는 말리지 않은 건가? 청우는 심각한 낯으로 입을 뗐다.
“옆에 애들 없어? 애들 좀 바꿔 줘.”
[응? 없어……. 청우야, 나 힘들어.]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술도 즐기지 않는 산영이 취해서 울 정도라면 분명…….
[나, 건이랑…….]
“차건이랑?”
[건이가 너무 미워.]
“……무슨 일 있었어?”
[후우…….]
깊은 한숨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싸웠나? 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혹은……. 헤어졌나?
그럴 리 없다. 청우는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의 부스러기를 내리누르며 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그의 낯빛이 안 좋아졌다.
[여보세요?]
“어, 양희정.”
[응. 왜?]
“옆에 산영이 있어?”
[산영이 화장실 갔는데?]
“하아……. 애 많이 취했던데.”
[응, 뭔 일 있어? 울고 온 것 같더라.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산영이 건과 만난다는 사실은 그의 친구 중 유일하게 청우만 알고 있었다. 설령 다른 친구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산영이라면 애먼 친구들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을 테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매만졌다.
“좀 챙겨 줘라. 혼자 두지 말고.”
[어어, 응.]
“어디서 모였어?”
[여기 바오밥. 오게?]
입을 떼는 순간 클랙슨이 울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이서의 차가 서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떴다. 이내 차에서 내린 이서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어. 일단 끊자.”
청우는 전화를 끊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덜컹였다. 현관을 나오자 차에 기대서 있던 이서가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다고 말하려는데, 이서의 얼굴을 보자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오늘의 일정을 짜며 은근히 들떠 있던 낯이 떠올랐다. 시험을 끝내고 나온 뒤 가벼웠던 발걸음이 미련을 남겼다.
말없이 가만하게 있자, 이서가 팔을 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청우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왜 그래?”
“야, 미안한데……. 오늘 약속 다음으로 미룰 수 있을까?”
“왜?”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의아한 낯에 곧 염려가 스몄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일 순위. 서로에게 일 순위가 되자고 했다. 그러나 산영이 취했고, 울었다.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곁을 지켜 줄 사람 또한 자신뿐이었다.
“뭐 안 좋은 일이야?”
이서가 또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도 이해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산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산영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이서의 낯이 설핏 굳었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
“차건이랑…….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많이 취하고 울었나 봐. 그래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걸 왜 네가 가?”
“어?”
“왜 네가 가야 하는데?”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니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는 듯했다. 청우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본가 쪽 술집에 있는데, 애 좀 챙겨 줘야 돼.”
“혼자래?”
“아니, 혼자는 아닌데…….”
“그럼 옆에 있는 사람들이 챙겨 주겠지.”
“걔네는 산영이 사정을 몰라.”
“꼭 사정을 알아야 챙겨 줄 수 있어? 산영이 친구는 너밖에 없는 거야?”
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입꼬리 끝에는 빈정거리는 기색이 매달렸다. 마음은 급한데 대화가 통하지 않자 답답해졌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고……. 이번엔 심각한 것 같아서 그래.”
“심각? 청우야, 뻔하지. 차건이 헛짓거리했고, 산영이가 상처받았겠지. 그러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화해할 테고.”
“…….”
“그리고 차건이랑 싸웠으면 걔랑 해결할 일 아니야? 주소 불러. 내가 차건 보낼게.”
이서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듯한 태도에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이별했을 수도 있고, 산영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는데 건을 부르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듯했다.
“산영일 아프게 한 애를 불러서 뭘 하는데.”
“으음……. 청우야.”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은 이서가 뒤로 물러나 차에 기대더니 팔짱을 꼈다. 그는 꼭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로 청우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청우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구석에 몰린 기분을 느꼈다.
“넌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게 뭔 소리냐.”
“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이때다 싶어 그 자리 가로채기라도 하게?”
“뭐?”
“아니 그렇잖아. 나를 아프게 하는 애인과의 위기. 그때 자신을 유일하게 위로해 준, 고마운 친구. 크, 이럴 때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는 거지.”
이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과장된 감탄을 흘렸다. 전혀 품어 본 적 없는 생각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벌리자 울컥했다. 그가 이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삼류 로맨스 소설 같다. 그치.”
“뭐라는 거야.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고……. 산영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걔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나뿐이니까, 애가 많이 취했으니까 걱정돼서 가 보겠다는데 이게 이렇게 비꼴 일이야? 당일에 약속 취소하는 건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누가 친구야.”
이서가 차에서 등을 떼며 조소를 흘렸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는 것만 같았다. 청우는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속으로 다른 마음 품어 놓고 친구라는 명분으로 이것저것 다 하려는 건 욕심이지, 우정이 아니라.”
목이 멨다. 이서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랬다. 그러나 늘 홀로 품어 왔던 감정을, 제 모순을 누군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할퀸 것은 처음이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에 가슴이 들끓었다.
이서의 말을 곱씹는 동안 청우의 기가 한풀 죽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산영이 전화로 자신을 찾았고, 자신은 가야 했다. 청우는 저를 관통하는 이서의 눈을 마주했다.
“너도……. 알 거 아냐. 쉽지 않아.”
한숨을 내쉬듯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서의 말이 맞는 건 알지만, 발길을 한 번에 끊어 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 한 번만…….”
“아니, 모르겠는데.”
이서가 청우의 동질감을 단번에 베어 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잘빠진 손가락이 청우의 어깨를 쿡 찔렀다.
“걜 지금 못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
“마음을 끊으라는 것도 아니고 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라는 건데.”
이서의 손가락이 어깨 부근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손길이 지나치게 불편했다. 미간을 좁힌 채 손가락을 내려다보는데, 이서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징징대지 마. 고작 전화 한 통에 달려갈 수밖에 없게 마음을 학습시킨 건 넌데 왜 널 연민해.”
눈을 들었다. 자신을 직시하는 눈빛이 언뜻 차가워서 청우는 멈칫했다. 웃음으로 무장한 눈이 비로소 한 꺼풀 벗겨진 것만 같았다. 마치 저것이 이서의 본심인 양.
어째서 이서의 말보다 그것이 더……. 아픈지 모르겠다. 청우의 눈이 갈 길을 잃고 떨어졌다. 들끓던 가슴이 푹 퍼져 무기력하게 녹아내렸다.
청우는 제 어깨에 닿은 손가락을 쥐고, 천천히 떼어 낸 뒤에 뒷걸음질을 쳤다. 차마 그의 눈을 다시 마주할 수가 없어 그대로 돌아섰다. 이서에게서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졌으나 그는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멀어지는 거리가 그림자와 같이 발밑에 꿰매진 듯했다. 발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청우는 심란한 낯으로 들어서 친구들을 찾았다. 구석진 자리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그리로 향했다.
“어? 청우!”
“오, 진짜 왔네?”
친구들이 청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청우는 가까이 다가가 테이블을 훑었다. 산영은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어, 앉아.”
“아니. 산영이 데려다주고.”
산영에게 가려고 하자 그 옆에 앉아 있던 희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는 꽤 엄한 얼굴로 빈 잔을 내밀었다.
“일단 좀 앉지? 오랜만인데 산영이만 챙길 거야?”
더는 누군가와 실랑이할 기력이 없었다. 청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 잔을 받았다. 희정이 소주를 따라 주어서, 그는 친구들을 따라 건배를 한 뒤 술잔을 비웠다.
“너 학교에 있다 바로 온 거야?”
“어. 집이었어.”
“산영이 무슨 일이길래?”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냥 전화받고 온 거야.”
희정이 미심쩍은 눈으로 청우의 얼굴을 훑었다. 청우는 그 눈을 피해 산영을 돌아보았다.
“많이 마셨어?”
“응, 걱정하지 마. 너 오기 전에 우리랑 마시면서 기분 풀었으니까.”
“……그래. 그럼 나 산영이 데려다주고 다시 올게.”
“이따가 끝나고 같이 나가면 되지.”
“애 잠은 편하게 재워야지.”
“너 아직도 그래?”
다소 황당한 기색이 어린 물음에 청우의 손끝이 굳었다. 오늘 하루 쌓였던 피로가 질문 하나에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너 그거 과보호야. 산영이 성인이잖아. 술 마시다 잠드는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청우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벼르고 있던 눈치였다. 희정은 늘 직설적이었고 필요할 때는 상대방이 불편해할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그 말이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약속 있어서 못 온다면서, 그거 깨고 온 거야? 뭐 얼마나 심각한 일이길래? 내가 볼 땐 산영이 괜찮았어. 여기까지 와서 술 마실 정도면 정신은 있는 거지.”
산영에 대한 제 마음을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러니 순수한 우정이라 보기에도 과하다는 뜻일 테다.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던 이서의 말이, 눈빛이 다시금 떠올랐다. 고개를 떨군 채 술잔을 만지작거리는데 듣고만 있던 소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청우 너 혹시……. 그때 일 아직도 신경 써?”
“……그때 일?”
“왜, 산영이 체육 창고 끌려갔던 때.”
아. 청우는 머릿속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기억을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 다가와 춘추복과 하복을 입은 학생들이 뒤섞인 어느 날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른 반 친구에게 빌린 체육복을 돌려주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산영이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이 하교를 하는 데다 다른 반에 들렀다 온다고 말해 두었으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연락을 했지만 진동 소리는 산영의 책상 서랍에서 울렸다. 핸드폰을 두고 어디 간 걸까. 빈 교실에 앉아 기다렸으나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산영의 집에 전화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핸드폰만 두고 말없이 사라진 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청우는 화장실이나 매점을 살폈다가 결국 학교 밖으로 나왔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주변 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을 서성거리다가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산영과 함께 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산영의 집에 다시 전화를 걸까 했으나 계속 그를 찾으면 괜한 걱정을 끼칠까 그러지도 못했다. 애초에 산영이 집에 도착했다면 제게 연락을 해 줬을 것이다.
어쩐지 조바심이 들어 동네의 번화가까지 둘러보고 산영의 집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확인한 뒤에 학교로 돌아왔다. 정문을 넘었을 때 같은 반 반장과 마주쳤다. 반장은 학교에서 마련해 준 특별반 자습실에서 야간 자습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너 혹시 산영이 못 봤어?’
‘이산영? 걔를 왜 나한테 찾아? 너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
‘아닌데.’
‘어? 네가 산영이 불렀잖아.’
‘……내가 불렀다고?’
‘응. 뒷마당으로 바로 오라고……. 경수가 그렇게 말해서 갔는데.’
등줄기가 싸해졌다. 자신은 경수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고, 그때 뒷마당에 있지도 않았다. 청우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학교 별관 뒷마당 구석, 건물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작은 창고 하나가 있었다. 예전에는 체육 수업 때 사용할 물품들을 보관했으나 지금은 그냥 잡동사니들을 넣어 두는 데였다. 그런데도 모두 체육 창고라고 불렀다.
산영이 거기 있다고 직감이 말했다. 경수는 반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산영이 말려 주었던 그 애였다. 그의 뒤에 그 새끼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일 이후로 산영을 호시탐탐 노렸으나 자신이 있어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못마땅해하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
‘산영아? 산영아!’
창고 가까이 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꺼운 철문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청우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안도와 분노, 걱정이 밀려왔다. 청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근처에 놓인 짱돌을 들어 자물쇠를 내리쳤다. 경비실에 가서 공구를 빌린다든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던 산영과 마주했다. 산영은 무려 다섯 시간 가까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녀석이 혼자 불안과 공포를 안은 채 버텨야 했던 것이다. 그 뒤로 산영은 폐소 공포증까지 생기고 말았다. 다행히 지금은 나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산영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엿 먹이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들은 심심찮게 시비를 걸어 왔고, 자신을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큰 사고를 칠 일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새끼들을 마구 패고 싶었으나 산영과 친구들이 극구 말려 어쩔 수가 없었다. 학교에 말해 보았지만 사건은 축소되어 그들이 반을 옮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때부터 청우는 산영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까지 그들이 또 산영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됐으니까.
“그건…….”
그러나 그건 어느새 잊고 있던 일이었다.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으면 굳이 떠올리지 않을 만큼.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거 네 탓 아닌 거 알고 있잖아. 게네 이제 이 동네에 있지도 않고.”
“내 탓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제 말이 비루한 변명처럼 들렸다. 사실은 제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일과 지금의 일은 달랐다. 그로 인한 부채감 때문에 산영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쟨 산영이 챙기는 거 거의 습관이야.”
우중이 노가리를 질겅이며 던진 말에 청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짝사랑도 습관이니까.’
온화했던 목소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꽤 무거운 추를 달고 있었던 듯하다. 자신은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사랑에서 비롯한 미련스러운 행동이라 여겼는데 타인은 습관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은 이미 부식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 형태만이 남은 것일까. 형태만 남은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물을 주었다가 그늘로 덮었다가 빛을 쬐었다가…….
청우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으면 하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했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차라리 사랑인 줄 알았던 미련이자 습관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그래서 온전히 순수한 우정으로 돌아가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기를. 이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 못지않게 우리도 산영이 아끼고 챙긴다 이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오랜만에 근황이나 좀 나누자.”
희정이 청우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청우는 술을 단번에 비웠다. 오늘따라 소주에서 쓴맛이 심하게 났다. 알코올 향이 콧속을 아프게 찔렀다.
시끌벅적한 곳에서도 여전히 잠을 청하고 있는 산영에게 흘러갔던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길로 눈을 돌리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소주가 넘어간 목구멍이 얼얼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어리석고 한심하게 보였겠지. 하긴 그라면 누군가를 짝사랑했더라도 이렇게 미련하게 굴지는 않았을 테다. 청우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적당히 녹아드는 척하며 후회를 머금었다.
이제 끝인 걸까? 아무리 진짜는 아니라 하나 사귀는 사이였다. 애인을 두고 그렇게 오는 사람은 없을 테다. 밤바다……. 좋을 것 같았는데.
“야, 야. 왜 이렇게 달리냐.”
친구들의 만류에도 청우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어차피 주량이 세서 쉽게 취하기도 힘들었다.
어느새 자정에 가까워지면서 하나둘씩 취하고, 슬슬 이야깃거리도 떨어졌다.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청우는 조금씩 취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야, 이제 갈까?”
“그럴까? 나이 들었나. 존나 힘들다.”
“가자, 가자. 다음에 또 자리 만들자고.”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청우는 산영을 챙겼다. 친구들이 떠나고 산영을 근처 편의점 의자에 앉혔다. 그를 깨우려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핸드폰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산영이 뒤척이면서 핸드폰이 떨어지려고 해 손을 뻗었다.
「♡건이♡」
청우는 발신인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상단 바에는 부재중 전화 표시가 있었다. 바를 내려 확인하니 몇백 통에 가까운 부재중 전화가 쌓인 채였다. 그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일로 산영의 입에서 ‘밉다’는 말까지 나오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산영을 간절히 찾고 있다. 이서의 말이 옳았다. 결국엔 소강될 일이었다. 산영에게 친구의 위로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절실했던 건 연인이었을 테다.
“산영아. 산영아.”
“응……? 어? 청우야?”
“일어나. 걸을 수 있겠어?”
“응…….”
산영이 하품을 흘리며 눈을 끔뻑였다. 청우는 그를 부축해 도로까지 나간 뒤에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산영은 다시 잠들었다. 택시 기사가 껌을 씹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리고, 그 외에는 고요한 차 안에서 청우는 지나치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깨 위에 얹힌 무게는 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이 저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깊숙한 곳에서 갑옷을 꽁꽁 두르고 있던 마음이 너절하게 벗겨져 쓰라렸다. 생각해 보면 산영이 자신을 아프게 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감정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벗어날 노력을 진실로 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서 제 처지를 연민하고 자괴했다. 이서의 말이 틀린 데가 없었다.
어느덧 산영의 집 앞에 다다랐다. 택시 요금을 결제한 뒤 차에서 내리자마자 성난 발소리가 들렸다.
“너 씨발, 뭐야.”
성큼 다가온 건이 청우가 받치고 있는 산영을 빼앗아 품에 안았다. 이글이글한 눈에는 명백한 질투가 존재했다. 애정에서 태어난 마음일 테다. 기억을 잃었어도 건은 다시 산영을 사랑하게 된 거다.
산영에게 감정을 품은 채로 가장 친한 친구로서 곁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욕심이고 꿈일 뿐이다. 이 마음을 가진 자신은 건과 산영 사이에서 그저 악역일 수밖에 없었다.
“기억났어? 산영이네 집.”
“말 돌리지 마, 새끼야. 너 얘랑 뭐 했어.”
“뭘 한 건 너겠지.”
청우는 덤덤하게 건을 마주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쳤다. 취기로 코가 매웠고, 머리통은 무거워 쓰러져 자고 싶었다.
“뭘 했길래 생전 술도 안 마시는 애를 만취하게 해.”
“그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지. 주제넘지 마.”
“그럼 내가 주제를 넘게 하지 마. 기억 잃은 게 유세 떨 일이냐?”
가슴을 차갑게 찌르던 이서의 목소리와 말투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청우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미소로 무장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담금질이 필요할 뿐이다.
건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기억을 잃은 그는 단번에 제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건 또한 자신이 어떤 눈으로 산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도 분명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이기는 했으니까. 왜 지금처럼 저지하고 강하게 나오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차건. 너 자신 있어?”
“뭐?”
“넌 기억도 추억도 뭣도 없고. 난 산영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육 년간의 시간까지 다 알고 있는데.”
“…….”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방치해도 되겠냐?”
자신이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어그러질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건은 더욱 불타오를 테고, 자신은 견제를 받겠지. 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까지는 산영에게 다가가기 힘들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이 새끼가…….”
건이 청우의 멱살을 잡고 바짝 붙었다. 주먹을 들어 올리는 순간, 건의 품 안에서 산영이 칭얼거리며 눈을 떴다.
“응……?”
건이 입술을 짓씹더니 주먹을 내리고 산영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쉬이, 다시 잠들라고 흘린 목소리에는 명백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청우는 피로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며 이마를 쓸었다.
건은 산영을 들어 안고는 청우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건과 산영을 태운 차가 출발했다.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청우는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늦게 취기가 뭉텅이로 올라왔다. 알코올 섞인 숨을 내뿜으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일어났다. 제 집은 여기서 멀지 않았다. 불어오는 찬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기에 집에는 조용히 들어가야 했다. 신발을 현관에 조심스레 벗을 때,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왔다. 고개를 든 청우는 청아와 눈이 마주쳤다.
“오빠?”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니 청아가 안방을 건너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청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연락도 없이 왔어?”
“그냥. 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그 정도로 늦은 시간은 아니거든?”
청우는 청아가 들고 있는 잔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잔 바닥에 커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너 커피……!”
“아, 조용히 해!”
“너 커피를 왜 마셔.”
“아, 그냥 조금 마신 거야. 잔소리 좀 그만해. 오랜만인데 할 게 잔소리밖에 없냐.”
청아가 입술을 비죽이더니 주방으로 가 컵을 물로 헹궜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며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청아는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지금이야 어릴 때보다 훨씬 건강해졌지만…….
“청아야.”
“응?”
“내가 지나치냐?”
무덤덤하게 던진 물음에 청아가 뒤를 돌아보더니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그러나 곧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뭐야. 삐쳤냐?”
“하아…….”
“오빠가 걱정해 주시는 거 알죠. 감사하죠. 저도 그냥 하는 말이니까 삐치지 말고 들어가 주무세요. 어우, 술 냄새.”
청아가 청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 꺼진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청우는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은 뒤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와 침대 위에 누웠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처럼 눈이 무거웠고, 어서 잠을 자야 이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깨어 있고 싶었다.
하루가 지나치게 길었다. 이마 위에 팔을 올리고 어둠에 물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도 야광 별이나 달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자, 가슴이 물을 먹은 듯 울렁거렸다. 청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과를 해야 했다. 약속을 무책임하게 깨 버린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였는데, 변명 같은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고 말았다. 이서와의 관계를 이렇게 끊고 싶지 않았다. 그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굳이 가짜 연인 행세가 아니더라도, 그를 되도록 오래 알고 싶었다.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청우는 시간을 확인하고 메신저로 방향을 돌렸다. 메신저에 들어가자 친구 목록이 떴는데, 이서의 이름이 상단에 있었다.
「생일인 친구
정이서」
청우는 눈을 껌뻑이다가 날짜를 확인했다. 자정이 지났으니 토요일인 오늘이……. 이서의 생일이었다.
만일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을 넘겼으면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이서는 제게 생일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으나 어쩌면 오늘 말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청우는 멍하니 이서의 이름 세 글자를 응시하다가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집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으나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가 튼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자 술이 점점 깨는 듯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두 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서도 잠들었을 텐데…….
하지만 차를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이유 없이 목이 말랐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매만졌다.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게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대도 불편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팽팽한 무언가가 엄습했다.
택시가 천천히 멈춰 섰다. 주소를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딱 한 번 와 봤던 곳이라 주변이 낯설었다. 청우는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자신이 빈손임을 깨달았다. 이 시간에, 이 근처에 선물을 살 만한 곳은 없었다.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케이크라면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오피스텔 근처 베이커리와 카페를 검색했으나 모두 영업시간이 지나 있었다. 청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지도를 조금 더 넓게 펼쳐 다른 곳을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아.”
이십사 시간 영업하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시험 기간에 학생들이 종종 이용하는 곳으로, 청우도 알고 있는 카페였다. 도보로는 이십오 분 거리, 차를 타고 가면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청우는 황급히 큰길로 나왔으나 한산한 도로에는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 발을 구르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택시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청우를 지나쳤다.
길가에서 택시를 잡으려다가는 시간을 허비할 것 같았다. 청우는 콜택시 업체에 전화를 걸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되었다. 연결음은 들뛰어 대는 성마른 마음과는 달리 태평하게 이어지기만 했다. 결국 전화를 끊고 본격적으로 뛰었다. 새벽 특유의 써늘하고 고요한 공기가 청우의 뺨을 스쳤다.
조금도 쉬지 않고 달린 덕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으나 카페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잔뜩 차오르고 목이 매워 아프기까지 했다. 무릎을 짚은 채 헐떡거리며 고인 타액을 삼키고는 허리를 세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시험이 끝난 탓인지 카페 안은 사람이 거의 없어 고요했다. 청우는 카운터 옆에 진열된 냉장고로 향했다가 안이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물었다.
“케이크…… 없나요?”
“오늘 케이크는 다 나갔어요.”
“아……. 뭐 다른 거, 빵이라든지 그런 것도 없나요?”
“네, 디저트류는 다 품절이에요. 죄송해요.”
허탈한 낯으로 직원을 바라보다가 알겠다고 중얼거리듯 말하고선 카페를 나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숨을 거칠게 흘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더 늦으면 이서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던 시선이 새벽에도 밝게 빛나고 있는 편의점의 간판으로 가닿았다.
청우는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움직여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냉장고에는 케이크가 없었다. 편의점이 작아 물건이 별로 없는 듯싶었다. 바로 나와 이번에는 주변에 있는 편의점을 검색했다. 다행이라면 한국에는 편의점이 한 블록마다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다음에 들른, 그다음에 들른 편의점에도 케이크가 없자 청우는 좌절하고 말았다. 고작 케이크인데…….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한참 전에 예약해 놓은 케이크도 아니고, 편의점 조각 케이크일 뿐인데 이것 하나 못 들고 간다는 사실에 침울해졌다.
이서가 깨어 있을까. 케이크를 사 간다고 해도 이서는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고민하며 의무적으로 걷던 청우의 눈에 또 하나의 편의점이 보였다. 한 번만 더 들어가 보자. 청우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곧장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정말 다행히도, 냉장고에는 케이크가 있었다.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치즈 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로 질이 나름 좋아 보였다. 두 개를 계산하고 나와 들고 있는 봉지를 내려다보다가 다른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우유 케이크를 하나 건질 수 있었다. 봉지에 든 케이크가 세 개가 되자 그나마 든든해졌다.
편의점을 찾느라 이서의 오피스텔 쪽으로 향한 덕에 택시를 타는 것보다 걸어가는 게 더 빠를 듯했다. 걸음을 서둘러 오피스텔 입구에 도착한 청우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온 것도 예의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청우는 지극히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오래갈 거라고 예상했으나 이서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응.]
평온한 목소리. 막 잠에서 깬 것도 아닌 듯했다. 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던지라 청우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여보세요?]
“어……. 안 잤냐?”
[응, 원래 늦게 자는 편. 왜?]
불과 몇 시간 전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눈도 그럴까. 그 순간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아 봉지를 쥔 손을 꿈지럭댔다.
[음……. 이 시간에 왜 전화를 걸었을까.]
“…….”
[첫째. 나한테 미안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손을 꽉 쥐었다가 펴자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이서가 말을 이었다.
[둘째. 우리 집 앞이라.]
“어떻게 알았어?”
[창밖을 보는데 누가 덩그러니 서 있길래. 너인가 했는데 진짜 너였어?]
청우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이서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청우는 귀에서 핸드폰을 잠시 뗐다가 붙였다.
[올라와. 날 추워.]
“……올라가도 돼?”
[그럼. 난 너한텐 항상 열린 문이야.]
항상 열린 문. 가벼운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그가 위에 있고, 자신은 아래에 있기 때문일까. 청우는 가슴을 문지르며 전화를 끊고는 걸음을 뗐다.
오피스텔 안은 아주 고요했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몸도 함께 위로 빨리는 기분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에 애꿎은 봉지만 쥐어뜯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밖으로 한 걸음 내뻗자 문이 열리고 이서의 얼굴이 보였다. 이서가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청우는 차오른 숨을 내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이기 때문인지 간접 조명등만 켠 집 안은 아늑했다.
“앉아. 뭐 마실래?”
“아니, 괜찮아.”
소파에 앉자 이서가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소파를 유려하게 두드렸다. 청우는 그 손길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입을 뗐다.
“미안하다. 오늘 약속 그렇게 깬 거.”
이서의 눈이 제게로 굴러왔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심상한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해 혀로 입술을 축인 뒤에 테이블 위에 둔 봉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생일 축하해. 너 오늘 생일이라고 떠서…….”
편의점표 작은 케이크 세 개를 옹기종기 담은 봉지가 문득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서가 봉지 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이내 붉어진 청우의 귀 끝에 가닿았다.
이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청우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서와 눈을 마주하자 그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영이……. 차건이 찾아왔길래 보내 줬어. 내가 보내 준 건 아니고 걔가 데려간 거지만 아무튼…….”
이서의 눈이 제 얼굴을 훑었다. 그 눈은 미소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냉담하게 자신을 까발리지도 않았다. 그저 주의를 기울일 뿐이었다.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청우는 몸을 소파 위로 늘어뜨렸다.
“걔한테 자신 있냐고, 계속 그렇게 굴면 내가 빼앗을 것처럼 말했어.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더라. 충격받아서 기억 다시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진 않던데. 뭐, 그냥 그랬다고.”
혼자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뒤늦게 머쓱했다.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서의 낯빛을 살폈다.
“……화났냐?”
화가 났더라도 기분이 좀 풀렸으면 했다. 자신은 누군가의 화를 풀어 주는 데 영 재능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서는 여전히 말없이, 속도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정적을 견디기가 어려워 목덜미가 다시금 빳빳해지려 할 때, 이서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나한테 미안해서 이 새벽에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케이크까지 들고?”
새벽 세 시는 좀 심하긴 했지. 뒤늦게 상황이 객관적으로 들어왔다. 만일 술기운에 잠식되지 않았더라면 이 시간에 여기까지 들이닥치지는 못했을 거다. 멋쩍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경쾌한 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귀엽다.”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청우가 눈가를 구기는 순간, 이서의 얼굴이 돌연 가까워졌다. 멍청하게 눈만 껌뻑이는 사이 입술이 닿았다. 보드라운 것이 꾸욱 눌리는 감촉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서가 입술을 벌리고 제 윗입술을 머금는 순간, 청우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퍽, 꽤 둔탁한 소리 끝에 이서의 몸이 밀려나며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이서가 눈가를 구기며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아야…….”
“아. 괜찮냐? 미안, 나도 모르게, 아니…….”
놀라서 밀친다는 게 생각보다 세게 때려 버리고 말았다. 청우는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으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빠진 턱을 맞추려는 사람처럼 턱을 잡은 채로 양옆으로 움직이는 걸 보자 덜컥 걱정이 들어 양손으로 이서의 뺨을 쥐었다.
“괜찮아? 미안하다. 하…….”
어쩔 줄을 모르고 이서의 얼굴만 살피고 있는데, 턱에서 손을 떼어 낸 이서의 눈에 웃음기가 돌았다. 괜찮은가 싶어 안심할 찰나였다. 이서가 또다시 입술을 들이밀며 이번에는 청우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몸이 움찔 튀었으나 이번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목을 쥔 힘은 약했고, 밀어 내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청우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입술이 다시 닿은 순간 든 생각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 생각이 불러온 충격이 청우를 무장 해제시켰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이서가 쪼듯이 입을 맞추었다. 살짝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이 감질났다. 따뜻한 숨결이 입가에 닿을 때마다 감은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이서가 청우의 입술을 머금고 가볍게 빨았다. 청우는 숨을 색색 내쉬며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집중했다.
손목을 잡고 있던 이서의 손이 위로 올라와 청우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와 동시에 벌어진 입술 새로 혀가 들어왔다. 생각지 못한 침입에 몸이 들썩이는 순간 이서의 손끝이 살결을 부드럽게 쓸었다. 가만가만 만져 주는 손길에 청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더 벌렸다.
살덩이가 혀끝을 장난스레 툭툭 건드렸다. 아랫니를 핥으며 혀 밑을 파고드는 움직임에 복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만둬야 하지 않느냐고, 밀어 내야 하지 않겠냐고 이성이 속살거렸으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서의 온기는 지나치게 따뜻했고, 평소처럼 톡 튀지 않고 포근하게 와닿는 향이 제 몸을 부드럽게 속박했다.
이서가 고개를 꺾으면서 혀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청우의 몸은 점점 밀려 소파에 등이 닿았다. 뾰족하게 선 혀끝이 입천장을 훑었다. 몸이 잘게 떨리며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를 씹을 때나 제 혀가 닿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던 곳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청우는 연신 어깨를 움칫거렸다.
혀가 입 안을 헤집는 동안 청우는 그저 소극적으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깊게 들어온 혀가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탐색하다가 때로는 거칠게 파고들었다. 고인 타액을 꼴깍 삼키며 숨이 차오를 때면 이서는 느릿하게 물러났다. 능숙한 강약 조절에 청우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입술이 맞닿은 상태에서 숨을 편하게 쉬는 법을 터득했다.
이서가 청우의 목덜미를 느긋하게 지분거리며 혀끝을 맞대고 진득하게 비벼 댔다. 살덩이가 짓눌린 채로 마찰할 때마다 배 속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제 몸에 있는지도 몰랐던 곳이 들뜨고 튀어 댔다. 거듭 문질러진 입술이 부풀어 오른 것만 같았다. 온기와 감촉이 보다 선명하게 돋아 신경을 건드렸다.
“흣…….”
이서의 혀가 고인 타액을 건져 내듯 젖은 입 안으로 꽂힐 때 목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우의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어, 몸이 다시금 떨렸다. 이서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등허리를 쓸었다. 그 손길에 자극을 감지하는 모든 기관이 그곳으로 달려든 것만 같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끝까지 내려온 이서의 손이 티셔츠를 들추고 맨살을 매만졌다. 손끝이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가는 순간 그 움직임을 따라 전기가 튀는 듯했다. 청우는 눈을 번쩍 뜨고 이서를 밀어 냈다.
“하아, 하…….”
차오른 숨을 내던지듯이 뱉으며 이서를 보았다. 이서의 입술이 젖어서 윤기가 흘렀다. 반쯤 내리뜬 눈은 여운에 젖은 것처럼 흐릿했으나 이내 눈꺼풀이 위로 완전히 들리며 선명한 빛을 냈다. 가리키는 곳이 명확한, 욕망으로 반짝거리는 눈이 청우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이서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청우의 쪽으로 기울였다. 청우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 고개를 움츠리며 이서를 주시했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한 손을 뻗어 청우의 가슴을 짚었다. 그의 손끝이 닿자 날뛰는 박동을 자각할 수 있었다.
고인 타액을 삼키는 사이 이서의 손이 천천히, 걸음을 내뻗듯 아래로 반 뼘씩 내려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단단한 복부에 다다른 손가락이 이내 바지에 걸렸다. 청우가 이서의 손목을 잡아채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청우야.”
“…….”
“우리 확, 사고 쳐 버릴까?”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예상치 못하게 달려들어 고꾸라지게 하는 일이어야 했다. 선언하고 저지르는 일을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고의였다. 서로의 의사가 명백하게 섞인.
이서의 혀가 입꼬리를 타고 나와 윗입술을 훑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혀. 제 입 안에서 유려하게 유영하던 살덩이. 그의 움직임이 입 안 여린 살 곳곳에 각인된 듯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턱 끝이 떨렸다.
“내가 너 다른 생각 못 하게 해 줄게. 저지르면, 까맣게 잊을 수 있을 거야.”
너한테 필요한 건 그거잖아. 이서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다정하고 야릇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타고 내려왔다. 잘게 잘게 잘린 음절은 이미 껍질이 벗겨져 너덜거리는 속살을 보듬으며 유혹했다.
그의 말대로 저질러 버리면, 이 지리멸렬한 감정을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치 않는 기만과 지긋지긋한 자괴와 소중한 추억을 청승으로 바꿔 놓는 후회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내가…….”
목이 잠겼다. 청우는 눈가를 찡그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동안 이서의 흰 손가락은 바지의 버클을 만지작거렸다. 살에 닿지도 않았는데 움직임을 눈으로 담는 것만으로도 발끝이 찌릿해졌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발기 직전의 노골적인 반응.
“내가 여기서 지금 너랑 자면, 너한테 도망가는 건데. 그게 맞냐?”
탁한 목소리에서 갈등과 자괴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이서와 자는 일은 사실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간 길에는 뭐 좋은 게 있을까. 이렇게 해서 산영을 완전히 끊어 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 걸까.
흔들리는 청우의 눈을 다갈색 시선이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붙잡았다. 이서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도망 좀 치면 안 돼?”
“…….”
“쳐. 가끔은 그래도 돼.”
별것 아닌 고민이라는 듯이, 이서는 명쾌하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짓눌리던 무언가가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망가면 다른 길이 있을 뿐이야. 그 길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육 년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길. 아니, 있는지도 몰랐던 길.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와 설렘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운 박동이었다. 그것이 청우를 붙잡고 한편으로는 부추겼다. 붙잡히고 싶지 않기에 이성의 만류는 오히려 동기가 되었다. 청우는 눈을 내리깔고, 이서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이번에는 입술이 꽤 거칠게 부딪쳤다. 그 사이로 이서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동적으로 이서를 받았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이서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를 건드리고, 혀끝을 비벼 보고, 입천장을 핥았다. 처음 하는 행위였기에 이서만큼 능숙할 수는 없었지만 힘으로 밀어붙인 탓에 이서의 몸이 뒤로 밀렸다.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손길에 청우는 힘을 빼고 그의 입 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이내 이서가 청우의 움직임에 화답했다. 살덩이가 동시에 얽혀 나긋하게 비벼지자 이전보다 더한 쾌감이 솟아 아래를 저릿하게 했다. 가랑이 사이 압박감이 심해졌다. 딱딱해진 성기가 답답하다며 아우성을 칠 때 이서가 고개를 뒤로 물리고 청우의 어깨를 밀었다.
“침대로 가자.”
청우는 고개를 돌려 문틈 너머 불이 꺼진 방 안을 보았다.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을 거다. 달아오르는 몸과는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은 생각을 하는데, 눈앞으로 손이 내밀렸다. 이서를 닮은, 이서의 손.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훑어보다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둘은 침실로 향했다. 이서는 불을 켠 뒤 청우를 침대로 밀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고 나자 기어코 실감이 났다. 이서가 매일 밤 덮고 잠드는 이불이 바로 아래에 있었다. 청우는 괜스레 이불을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긴장했어?”
이서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청우는 입가를 굳힌 채로 이서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남자도 된다고 했었지. 그래서 저와 달리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편견이겠지만 경험은 많을 것 같았다.
이서는 침대 위에 무릎을 걸친 뒤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청우는 살짝 경직된 채로 이서의 상반신을 훑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늘씬해 보이던 몸에 탄탄한 근육이 옹골지게 붙어 있었다. 이서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팔뚝에서부터 이어지는 선이 꿈틀거렸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중탕에만 가도 볼 수 있는 게 남자의 몸인데, 이상하게 이서의 몸은 다르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되었기 때문일까.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말없이 쳐다만 보자 이서가 웃으면서 다가와 청우의 손을 가져갔다. 손이 이서의 가슴에 얹혔다. 이서는 청우를 내려다보며 그의 손으로 제 살결을 쓰다듬게 했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생생했다. 만져지는 건 이서인데 자극을 받는 건 자신인 듯했다. 손이 왼쪽으로 향하면서 중지와 약지 사이에 돌기가 걸렸다.
청우는 눈을 올려 이서를 보았다. 이서가 눈을 가늘게 휘며 청우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 유두가 비벼졌다. 청우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죽진 않았네. 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겠다.”
이서가 눈짓으로 청우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청우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점퍼와 함께 티셔츠를 휙 벗어 버렸다. 이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제 상반신을 샅샅이 훑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성애의 대상이 된다는 건 퍽 낯설고 기묘한 일이었다.
“청우야. 너 이 몸을 여태껏 썩히고 있었다니 정말 안타깝다.”
“뭔 소리야.”
“네 몸 끝내준다는 뜻.”
몸 좋다는 칭찬을 심심찮게 듣기는 했지만 이서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입가를 실룩이자 이서가 소리 내어 짧게 웃더니 청우의 위로 올라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이서의 입술이 닿았다.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더니 이내 잘근잘근 깨문다. 아릿하면서도 미묘하게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숨이 거칠어졌다.
이서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쪽쪽 소리를 내며 가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다가 유두를 단번에 머금었다.
“야, 거긴…….”
고개를 숙이자마자 눈을 치켜뜬 이서와 마주쳤다. 연붉은 입술에 젖꼭지를 가둔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피했다. 곧 저속한 소리와 함께 이서의 입 안으로 유두가 빨려 들어갔다. 혀로 돌기를 지그시 누르고 입술로는 유륜을 머금은 채로 살살 비빈다. 처음에는 그저 불편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 덩어리진 쾌감이 쑥 올라왔다.
“읏…….”
이서의 손이 올라와 다른 쪽의 유두를 굴렸다. 남의 손은커녕 본인 손도 타 본 적 없는 곳이 희롱당하고 있었다. 이서가 제 가슴을 빨면서 만지고 있다는 사실과 점점 쾌감이 느껴진다는 자각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청우는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이서의 목덜미를 쥐어 당겼다.
“그만…… 해.”
“왜? 바짝 섰는데.”
이서가 엄지로 단단해진 유두를 튕겼다. 청우는 움찔 튀어 오르려는 몸을 누르며 굳은 낯으로 이서의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이서가 씩 웃으며 딸려가 주었다.
“무드 없게. 본론 전엔 서론이 있어야지.”
“넌 서론이 길잖아.”
“나도 사람 봐 가면서 조절해. 왜. 벌써 터질 것 같아?”
청우가 눈가를 구기자 이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쾌하게 웃으며 바지를 벗었다. 그러고 나서 청우의 허리춤에 손을 댔다.
청우는 이서의 속옷 위로 드러난 두둑한 실루엣을 훑다가 마른침을 삼키고 버클을 풀었다. 바지를 벗고 나자 둘 다 속옷 차림이 되었다. 먼저 손을 뻗은 건 이서였다. 이서가 속옷 위로 청우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낯선 손길에 복부가 꽉 조여졌다.
“하…….”
저도 모르게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처럼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졌다. 아래에 닿은 낯선 손길은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마른 목을 축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자 이서가 청우의 손을 가져가 제 아래에다 댔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자 두둑한 살 기둥이 쥐였다. 청우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초행길을 탐색하듯 조심스럽고 서툰 움직임에 이서가 웃음을 흘렸다.
“나 이렇게 투박한 손길에 꼴릴 줄은 몰랐네.”
“……너나 나나 다를 게 뭔데.”
퉁명스럽게 되받아치자 이서가 눈썹을 까딱이며 청우의 드로어즈를 잡아당겼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이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살 기둥을 손끝으로 훑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쾌감에 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좋지?”
“…….”
“아무래도 우리 청우는 아래가 더 솔직한 스타일인가 보다.”
쿠퍼액으로 젖은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자 성기가 마치 대답하듯 끄떡였다.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이서를 보자 울컥해 청우도 곧장 그의 속옷을 벗겼다.
곧게 선 성기는 붉은 기가 돌았고 색이 깨끗했다. 그러면서도 핏줄이 도드라진 것이 평균을 훨씬 웃도는 크기와 더해져 은근한 위압감을 주었다. 이서의 성기를 보니 특별히 좋거나 동하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돌아설 곳이 없어서가 아닐까. 도망친 곳에서 또 도망을 갈 곳 따위는 없었다.
“만져 줘.”
이서의 목소리에 평소에는 느낄 수 없던 색이 어려 있었다. 청우는 그를 일별하고는 드러난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선단부터 뿌리 끝까지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이 생생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 제 손바닥인지 그의 성기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꽤 기분 좋은 낯을 하고 있었고, 청우는 조금 더 빠르게 그의 것을 흔들었다.
둘은 말없이 서로의 성기를 만져 주었다. 이서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청우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제 손에서 꿈틀거리는, 열기 어린 좆에서 투명한 액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이서의 손끝은 섬세하게 움직였다. 부푼 귀두를 손가락으로 긁다가 살 기둥을 쥐어짜듯 흔들고, 올라붙은 음낭을 슬며시 두드리며 곳곳에 열감을 남겼다. 제 손으로 쥐고 흔들 때와는 다른 자극에 청우는 달뜬 숨을 내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성감이 완만하게 상승할 때 이서가 돌연 손을 떼어 냈다. 아쉬움의 탄식을 흘리는 순간, 그가 청우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헤드에 기댄 몸이 미끄러져 매트리스 위로 바짝 붙었다. 이서는 청우의 몸에 제 몸을 겹쳤다. 우뚝 선 두 성기가 맞닿는 순간, 묵직한 무게와 함께 적나라한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청우야.”
이서가 청우의 머리 양옆을 손으로 짚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청우의 귓불을 물었다가 놓았다.
“너 여기 왜 이렇게 빨개졌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도망치길 잘했지? 기분이…….”
이서가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단단하게 부푼 귀두가 살 기둥을 노골적으로 훑고 올라갔다. 번뜩 스친 쾌감에 청우는 일순 고개를 젖혔다.
“죽여주잖아.”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얼굴 위로 야광 별과 엽서, 포스터가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입술이 맞닿으며 시야가 가려졌다. 이서가 청우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몸을 움직였다.
천장의 야광 별, 낯선 이불의 촉감, 어디서 흘러들어 온 건지 모를 희미한 향.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의 침실에서 강렬한 감각에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숨소리와 낮은 신음, 성기가 스치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파도가 되었다. 청우는 어느 순간부터 그 너울에 잠식되었다.
“하, 읏…….”
“나 봐야지. 너랑 지금, 흣, 살 비비고 있는 게 누군지 똑바로 봐.”
흩뿌려진 쾌락의 안개로 얼룩진 머릿속에 이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파고들어 이성의 끈을 잡아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저와 살을 맞대고 있는 사람이 정이서라는 사실이 거친 열락을 가져와 청우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청우가 저도 모르게 이서의 팔뚝을 붙잡자, 이서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는 더욱 사납게 허리를 흔들었다. 이서의 것이 청우의 성기를 사정없이 긁었다. 동시에 퍼지는 쾌감에 둘의 입에서 신음이 흩어져 나왔다.
이제는 어떤 상념도 파고들 수가 없었다. 청우는 이서와의 원초적 행위에 집중했다. 그저 서로의 은밀한 곳을 맞대고 비비며 쾌락을 얻는 그 행위에. 이서와 닿으면 닿을수록 온몸이 즐겁도록 저릿해졌다. 그렇기에 그와 더 닿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으읏, 음, 흣.”
“후우, 아…….”
이서의 낯이 변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쾌감이 어느 순간부터 제어할 수 없이 솟아올라 배 안에서 마구 소용돌이쳤다. 청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더, 더……. 입 속으로 그렇게 외치다가 순간 허리께를 강타한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청우의 것에서 짙은 정액이 터져 나왔다.
“하, 윽…….”
허리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청우의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이서는 완전한 열락에 잠긴 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몇 번 튕기다가 그의 허벅지에 귀두를 비볐다. 이윽고 이서에게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며 허벅지가 뜨끈해졌다. 청우는 눈을 떴다. 거친 숨을 내쉬며 흥분에 젖은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문득 후련해졌다. 이것이 부도덕한 일탈이 아니라 유의미한 탈출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품지 않은 사람과 살을 맞대고 체액을 나누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서의 말은 늘 틀리지 않았다. 도망친 곳에는 길이 있었고, 어떤 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이서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서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자 청우는 자연스레 그와 혀를 얽었다. 조금 더 진득하고 농밀하게 살덩이가 비벼졌다. 따뜻한 숨 덩어리가 함께 얽혀 뜨겁게 문드러졌다.
“봐. 아무 생각도 안 나지.”
입술이 떨어진 뒤에 이서가 청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이서의 눈이 지닌 색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청우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의 손이 청우의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그가 손가락을 넓게 벌려 청우의 가슴을 쥔 뒤 부드럽게 주물렀다. 아직 사정의 여운에 잠겨 있는지라 피부가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손길에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입술이 몸 곳곳에 내려앉았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것이 살을 머금는 느낌이 좋았다. 편히 누워서 천장에 붙은 엽서의 그림들을 보는데, 이서가 이불로 청우의 몸에 묻은 것들을 대충 닦아 내더니 그의 다리를 벌렸다.
허벅지가 벌어지자 청우는 움칫하며 다리를 좁히려 했으나 그 사이에 이서가 자리를 잡았다. 은근한 미소가 어린 낯으로 아래를 응시하기에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딜 봐.”
“너 여기 되게 귀엽게 생겼다.”
“너도 달린 걸 무슨…….”
“그러니까. 이게 예쁘게 보일 줄은 나도 몰랐지.”
이서가 입꼬리를 혀로 핥으며 연붉은빛이 도는 청우의 음낭을 손끝으로 굴렸다. 은근한 자극에 허벅지가 다시 벌어졌다. 그 순간 살을 끈덕지게 문지르던 엄지가 아래로 내려가 회음을 긁었다.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곳에서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이내 손가락이 다물린 구멍을 훑는 순간 청우는 숨을 들이켜며 이서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이서의 시선이 위로 흘러왔다. 그는 말없이 오직 시선만으로도 유혹의 언어를 보낼 줄 알았다. 슬그머니 접힌 눈이 어서 벌리라고 소곤거렸다.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고, 이서의 입술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쩌면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끝까지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밑이냐?”
청우는 무뚝뚝한 낯을 가장해서 물었다. 솔직히 이서가 깔릴 거라고는 딱히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는 깔려 본 적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밑으로 가야 한다는 건데…….
“그야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이서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깔끔하게 잘린 문장에 청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이렇게 한 침대 위에 올라올 일이 없었다면 아마 밑을 쓰는 일은 평생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터였다. 죽어도 안 된다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청우의 고민을 눈치챈 듯, 이서가 눈을 더 가늘게 접으며 손끝을 흔들었다. 아래를 자극하는 손길에 청우는 흠칫 떨며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서가 다른 손을 들어 청우의 성기를 가볍게 훑었다.
“네 처음은 남겨 둬야지. 나중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려면.”
의도적으로 속삭이듯 내는 목소리를 듣고 청우는 미간을 구겼다.
“삽입만 안 하면 순결 지키는 거라는 개소리를 너 같은 애가 하는 거였냐?”
청우의 일침에 이서가 일순 멈칫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키득대면서 청우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응. 나 개소리하는 개새끼잖아.”
이서는 입질하듯 청우의 목덜미와 어깨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진짜 개라도 된 것처럼 뺨을 마구 비벼 댔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틀자 이서가 웃는 낯을 들고는 청우의 턱을 가볍게 씹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장난기 어린 눈이 반짝였다. 그 눈을 보자 순간, 뭐든 상관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알아 두면 좋지 않겠어?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느낌을, 감각을 네가 먼저 경험해 보면……. 더 잘해 줄 수 있을걸.”
궤변이었다. 그러나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둘 다 달렸고, 둘 다 넣을 곳이 있는데 자신만 넣겠다고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산영을 완전히 떨치고 나면 남자를 만나게 될까. 아니면 여자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 씨발, 청우야……. 그냥 넣고 싶어.”
침묵이 길어지자 이서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가 발기한 것을 청우의 다리에 대고 느릿하게 문질렀다. 여유롭게 주절대던 낯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자 배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듯했다. 아래가 저릿하게 단단해져 왔다. 청우는 이를 악물면서 이서를 노려보듯 응시하다가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아래를 힐긋 본 이서의 낯이 얄궂은 웃음으로 물들었다.
“엎드려. 그게 더 편할 거야.”
엎드리라는 말이 차라리 반가웠다. 청우가 엎드리자 이서가 그 위로 몸을 겹치며 입술을 내렸다. 넓은 어깨와 굴곡이 진 어깨뼈, 근육으로 인해 드리운 음영 곳곳에 입술을 맞추며 식은 몸을 다시 데웠다.
이서의 손이 부지런히 청우의 몸을 오갔다. 둥글게 솟은 엉덩이를 쥐어짤 것처럼 주무르다가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윽고 손가락이 잔털 없이 깨끗한 회음을 문지를 때 청우는 탁한 숨을 터뜨렸다.
진득한 애무 끝에 이서가 몸을 일으켜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협탁 서랍에서 나온 건 젤과 콘돔이었다. 준비되었다는 느낌이 풀풀 풍겨 청우는 홀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곧 뚜껑을 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것이 엉덩이 골로 떨어져 몸을 움찔 떨었다. 손가락이 젤이 떨어진 곳을 짚더니 이내 아래로 주욱 내려갔다. 둔덕 사이 다물린 틈에 손끝이 닿아 청우는 이마를 손등에 묻었다.
이서는 청우 자신도 알지 못한 미지의 곳을 몇 번이나 파헤쳤다. 삽입의 순간이 다가오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심란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긴장감으로 손등에 이마를 비비다가 문득 떠오른 것에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그럼 너도 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응?”
“사랑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느낌. 너도 느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괜한 심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서의 말꼬리를 붙잡자 그가 생각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굴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꺾었다.
“괜찮아. 사랑할 일 없으니까.”
……뭐? 이서의 대답을 곱씹는 순간, 손가락이 틈을 가르고 들어왔다.
아래가 벌어지는 생경한 감각에 청우는 굳은 채로 이불을 바르쥐었다. 이어서 젤과 함께 손가락이 끝까지 쑥 삽입됐다. 숨을 덜컥 들이켜자 이서가 웃으면서 청우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힘 빼. 힘 들어가면 더 어려워.”
“느낌이 너무 이상한데…….”
이서의 손이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위로 올라가 등허리 곳곳을 매만졌다. 청우는 의식적으로 힘을 뺐다. 그러자 들어온 손가락이 곧 한 바퀴 돌며 내벽을 쓸었다. 배 속을 누군가가 헤집는 느낌이 선명해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은 안쪽을 꾹꾹 눌렀다가 손끝으로 긁었다가 탐색하듯 이리저리 미끄러졌다. 반쯤 발기한 채로 있던 성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제라도 그냥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젤이 엉덩이 위로 후드득 떨어지며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아…….”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손가락이 아래를 늘리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청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등에 이마를 비볐다.
“아직도 이상해?”
“어.”
“그런 것치고 너무 잘 먹는데?”
“…….”
“소리 봐. 맛있는 소리 난다. 그치.”
손가락이 쑥 빠졌다가 끝까지 치고 들어오며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벽을 강하게 찔러 오는 손길에 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물감이 대단했다.
이서의 말에 청우는 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검지와 중지가 삽입될 때마다 나머지 손가락이 엉덩이에 툭툭 부딪히는 소리나 손가락이 벌어졌다가 오므라지며 살을 늘릴 때면 나는 찌걱거리는 소리. 맛있는 소리라고 하니 꼭 무언가를 먹으며 쩝쩝대는 것처럼 들리는 듯싶기도 했다. 소리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청우의 귀 끝이 붉게 물들자 이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그의 귓바퀴를 핥아 올렸다. 갑작스러운 애무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즐겁게 휜 눈과 마주쳤다. 이서의 눈이 유난히 따뜻하게 자신을 쬐는 듯해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서가 제 관자놀이에 입술을 쪼자 순간 몸이 편하게 늘어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 하나가 더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읏.”
이번에는 진짜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손가락을 넣었나 싶었다. 세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가 내벽을 질금질금 쑤셨다. 배 속이 얼얼한 것 같았다.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갔을 때, 이서가 청우의 귀를 핥으며 속삭였다.
“엉덩이 들어 봐.”
그가 어떻게든 해 줄 것 같았다.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순순히 들자 이서의 손이 청우의 성기를 쥐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말랑해진 청우의 것을 느릿하게 훑으며 구멍 안을 조금 더 빠르게 찔러 올렸다.
앞을 만지는 손길은 느린데도 능숙해서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쉽게 발기를 유도했다. 앞은 슬금슬금 반응이 오는데 뒤는 여전히 불편하고 얼얼했다. 두 가지의 다른 감각이 배 속에서 교차하며 청우는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손끝이 귀두의 틈을 파내는 순간, 구멍 안을 쑤시는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 박히면서 엉덩이가 바짝 조여들었다. 배가 쑥 꺼지는 느낌에 청우는 숨을 헉 들이켜며 눈을 깜빡였다. 귓가에서 이서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청우야. 너 조일 때 되게 예쁜데……. 네가 못 봐서 아쉽네.”
뭐가 예쁘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타박할 만큼의 정신이 없었다. 배 속은 연신 쑤셔지고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은 모든 신경을 쉴 틈 없이 압박했다.
“하아, 흣…….”
고조되는 성감에 눈가를 찡그릴 때 손가락이 다시 한번 내벽에 퍽 처박혔다.
“아!”
순간 배 안이 번쩍인 듯했다. 청우는 침대 위에 머리를 비볐다. 이어서 손끝이 똑같은 지점을 쿡쿡 짓쳤다. 조금 전 느꼈던 것이 착각이었던 양, 별 느낌이 들지 않아 안심할 찰나 뒤늦게 덩어리진 쾌감이 울컥 올라왔다.
“아, 흐.”
“지금도 이상해?”
이서가 청우의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청우는 입을 벌린 채 숨을 색색 내쉬며 몸을 잠식하는 생소한 전율을 감내했다. 세 손가락이 속살을 벌린 틈을 타고 네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지금 헤집는 손가락만으로도 벅찬데 하나가 더 들어올 줄은 몰랐다. 네 손가락이 구멍 안에서 휙휙 돌자 아래에서는 아예 물소리가 났다. 청우는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야, 아, 잠깐. 이거, 이거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서 어떡하지, 응?”
얄밉도록 나긋나긋한 목소리. 이서가 청우의 귀와 목덜미 이곳저곳에 입술을 맞추었다. 청우는 입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몸이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몸뚱이가 점점 가벼워져서 공중으로 붕 뜰 것 같은 느낌. 허벅지에 힘줄이 서고, 종아리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마침내 끝에 다다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구멍이 조였다가 풀어지고, 이서가 손에 쥔 성기는 까딱였다. 다가오는 절정에 청우의 눈이 질끈 감길 때였다. 돌연 모든 손이 안에서 빠져나갔다. 한풀 죽은 쾌감에 청우가 아쉬운 신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참아.”
이서가 입꼬리를 혀로 핥으며 완전히 서서 배까지 붙은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청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가 순식간에 비어 버린 곳을 어서 채워 주기를.
준비를 끝내고 다가온 이서가 청우를 보고선 씩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청우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성기로 그의 엉덩이를 탁탁 내리쳤다. 청우는 움찔거리며 입술을 물었다. 대체 저런 짓은 왜 하나 싶어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미끄러져 내려온 좆이 입구에 닿았다.
성기가 천천히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청우는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숨을 억, 들이켰다. 마치 주먹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고 중간에 걸린 것처럼 정지했다.
그의 것을 볼 때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 안에 들어올 크기가 아니었다. 이 이상 들어오면 찢어질 것 같았다. 청우는 입술을 잘게 떨며 이서를 슬쩍 돌아보았다.
“정이서. 야, 안 들어가.”
“아니야. 들어가.”
이서가 산뜻하게 딱 잘라 말하더니 청우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들고는 허리를 퍽, 밀었다. 굵은 살 기둥이 좁은 속살을 세차게 뚫고 들어오며 청우의 몸이 덜컹 밀렸다.
“윽…….”
청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많이 아프지는 않았으나 버거웠다. 너덜너덜해진 게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움직이면 찢어질 게 분명했다. 청우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손을 더듬더듬 돌려 뒤로 가져갔다. 손끝에 이서의 허벅지가 닿았으나 이서가 웃으면서 손목을 잡아 청우의 허리 위로 눌렀다. 그 탓에 청우는 엉덩이만 위로 솟은 채로 무너졌다.
“자기야, 나 오래 참았어.”
얄궂은 목소리를 끝으로 이서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배 속에서 마찰하는 성기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서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먹이 배 속을 헤집는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청우는 억억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침대에 이마를 비벼 댔다.
“청우야, 하, 힘 빼 봐. 너무 씹잖아.”
“씨, 발…….”
“응, 힘들어?”
이서가 몸을 낮추면서 성기가 끝까지, 더 깊숙이 쳐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힘을 주니 구멍이 성기를 꽉 물었고, 동시에 이서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귓가에 혀가 닿았다. 이서가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았다. 연골을 짓누르는 혀가 이상한 자극을 주어 몸이 잘게 떨렸다. 곧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성기를 쥐었다. 달아올라 있던 좆이 기다렸다는 듯 예민하게 반응했다.
“흐읏.”
성기를 위아래로 훑는 박자와 비슷하게 이서의 좆이 속살을 파고들었다. 꽉 다물린 안 때문에 빠질 때는 느릿하게 빠지던 것이 삽입될 때는 주저 없이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손끝보다 뭉툭한 것이 내벽을 깊게 쑤셨다. 살 기둥은 오갈 때마다 구멍을 연신 긁어 대니 자극과 압박으로 쉴 새가 없었다.
아래에 감각이 점차 없어지는 듯했다. 좆이 늘리는 대로 늘어난 구멍은 얼얼했고, 이서의 손이 희롱하는 성기는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이서가 청우의 귓불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온몸이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청우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청우야, 씨발……. 좋다.”
이서의 목소리가 열기로 탁해졌다. 그가 허리를 뒤로 부드럽게 물렸다가, 청우의 귓불을 콱 깨물며 좆을 깊게 처박았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 튀었다.
“하윽! 어, 윽…….”
청우가 허리를 바짝 휘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서의 웃음소리가 멀게 들렸다. 이서가 몸을 세우고선 청우의 몸을 꽉 붙들고는 허리를 움직였다. 속살을 부드럽게 찔러 올리는 일정한 움직임에 안쪽에서부터 화한 쾌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느긋하던 움직임에 이내 속도가 붙었다. 살과 살이 붙었다가 떨어지며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흐, 읏, 아!”
“후우……. 응, 한 번 더 씹어 봐.”
이서가 허리를 비틀 듯이 돌리면서 단단한 좆이 구멍에 파묻힌 채로 둥글게 마찰했다. 성기를 촘촘하게 문 입구가 순간 뻐끔거리며 꽉 조여들었다. 이서는 청우의 엉덩이를 우악스레 주무르며 허리 짓을 했다.
“아, 아흣, 아!”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근육이 꿈틀대는 등허리를 이서가 매만졌고, 작은 손길도 큰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좆이 안을 때릴 때마다 온몸을 결박당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고, 밧줄에 피부가 쓸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쾌락은 견딜 수 없는 통증처럼 다가왔다. 몸의 이상 반응보다 마냥 아프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주먹을 쥔 채 몸을 세차게 덮치는 전율에 잘게 떨고 있자, 이서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허리 아래는 사납게 안을 짓치면서도 얼굴에 닿은 입술은 보드라웠다. 그 감촉에 청우는 저도 모르게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틀었다. 이서가 달뜬 숨을 내쉬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뜨겁게 내리꽂혔다. 웃음기가 얼추 남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열락으로 물든 얼굴이 청우의 눈길을 빼앗았다. 이서는 미간을 찡긋하며 입술 새로 나오는 신음을 참지 않고 흘렸다. 그는 스스로가 느끼는 쾌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청우는 그 순간 그와 자신이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무형의 것에 붙잡혔던 몸이 자유로워졌다. 어떤 것도 통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윽, 흐읏, 아! 아!”
청우는 끓는 신음을 남김없이 내뱉으며 손을 뒤로 돌려 이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끌려온 이서가 청우의 얼굴에 입술을 붙이며 아래를 거칠게 쑤셨다.
이서의 달아오른 살결을 손끝으로 긁었다. 그 손길에 이서가 자극을 받은 듯 더욱 거친 신음을 흘렸다.
구멍은 이제 적당히 무르녹아 성기를 차지게 물었다. 좆이 안을 퉁퉁 두드릴 때마다 눈이 절로 감겼다. 손끝과 발끝이 굽어 들었다. 몸이 잘게 잘게 나뉘어 흩어진 끝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서의 혀가 귓속을 파고든 순간,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구멍이 강하게 수축하며 좆을 씹었고, 그와 동시에 청우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흐으으, 읏…….”
“청우야, 하, 으음.”
구멍이 저 혼자서 길을 좁혔다가 넓히며 이서의 성기를 애무했다. 몸 안에 이서의 좆이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청우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청우는 사정의 여운에 젖어 손끝만 꿈틀거렸다. 떨림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이서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치운 뒤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읏, 야……!”
“걱정 마. 네 안에, 하, 싸 줄 테니까…….”
성기가 강약 조절 없이 연신 세차게 내벽을 찔렀다. 한차례 사정으로 예민해진 곳에 찌릿한 물을 흘려보내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저릿저릿 울었다. 청우는 흐느끼며 이마로 매트리스를 쿵, 찍었다.
“너도 느껴지지? 더 쫀득해져서, 씨발……. 아, 청우야.”
흐무러진 구멍이 수축하며 좆을 주물렀다. 이서의 신음이 목을 긁고 터져 나왔다. 그가 청우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허리 짓 했다.
쾌감이 한계를 지나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선으로 향했다. 청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좆이 그의 안을 세차게 치받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청우는 이불을 바르쥐었다가, 놓았다가, 손끝으로 긁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흐, 그만, 아, 윽!”
“응, 이제 끝났어.”
이서가 청우를 어르듯 말해 놓고는 쉬지 않고 허리를 흔들었다. 언제 끝나는데, 씨발. 청우의 입에서 문장이 엉망으로 흩어져 나왔다. 성기가 한 지점에 콱 파고들더니 떨어지지 않고 잘게 비벼 댔다. 청우는 입을 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으, 흐윽…….”
“하, 씹.”
이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성기가 빠지기 전까지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청우의 몸을 잡아당겨 제 좆을 가장 깊숙한 곳에 묻었다. 이서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자극은 연신 소용돌이치며 복부 안쪽을 때려 댔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뚝 떨어졌다. 이서가 청우의 허리를 놓는 순간 몸이 무너졌다.
성기가 자연스레 빠졌다. 이서가 후련한 숨을 내쉬며 엎드린 채 혼자 떠는 청우의 귓가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청우는 몸을 움츠리며 이를 악물었다. 세차게 일던 바람이 점차 잦아지는 게 느껴졌다. 성기가 이불에 스치는 것마저 따갑게 느껴져, 청우는 몸을 옆으로 돌려 허리를 말았다.
웃음소리가 들려 힘없이 눈을 들자, 이서가 청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야단났다. 그치.”
자세한 설명이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이서를 올려다보던 청우는 순간 울컥해서 인상을 찡그렸다. 야단나게 만든 게 누군데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말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봐, 섭섭하게.”
“…….”
“잠자리 후에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더 크게 상처받는다?”
가증스러운 목소리. 청우는 이서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가 쿡쿡 웃으며 청우의 위로 몸을 겹치고는 그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장난기가 어리긴 했지만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눈이 왠지 어색했다.
“어디 불편한 덴 없어?”
“어…….”
이서가 손을 내려 청우의 허벅지를 주물러 주었다. 마사지 같은 담백한 손길을 오히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만하자고 할 땐 그만두지도 않더니 끝나고 나서 여기저기 살피는 눈길이 영 서먹하게 느껴졌다.
구겨지고 더러워진 이불을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이 점차 안쪽으로 들어왔다. 손끝이 끈적하게 사타구니를 쓸어내리는 순간 청우는 이서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해.”
“더 쉴래?”
“쉰다고? 또 하자고?”
청우의 물음이 오히려 놀랍다는 듯 이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손목을 꺾어 청우의 손을 쥐었다.
“한 번은 접촉 사고잖아. 우리가 칠 건 대형 사고 아니었어?”
이서가 고개를 기울여 청우의 코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청우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여기서 더 할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서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다른 손으로 청우의 배를 어루만졌다. 청우는 머뭇거리다가 이서의 손을 꽉 쥐었다.
“야, 진짜 못 해.”
“엄살은.”
“다음에…….”
“…….”
“다음에 더 하면 되잖아.”
머리를 거르지 않고 내뱉은 말에 이서의 손이 주춤했다. 이내 그의 낯이 웃음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럴까?”
이서가 아쉬움이 남은 듯 청우의 배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다가온 입술에 청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맞물린 입술 새로 혀가 들어왔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달콤하다는 감상이 떠오르는 키스였다. 부드럽고 포근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우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할 일 다 하고 나서 어색하게 느끼는 것도 웃겼지만, 이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이내 청우의 뺨을 지분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싶지? 물 받아 줄게.”
이서는 침대를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좇던 청우는 이서의 오른쪽 어깨에 타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 세 마리였는데, 점차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듯싶었다. 이서와 잘 어울리면서도 무슨 의미로 한 건지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가 밖으로 나왔다. 다가오는 그의 성기가 여전히 발기한 채로 흔들리고 있어 시선을 위로 올려야 했다.
“자, 일어나시죠.”
이서가 내민 양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가자 욕조에 물이 받아져 있는 게 보였다.
“씻을 때 저기 선반에 있는 거 쓰면 되고, 새 칫솔은 여기.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그럼 씻고 나와.”
이서가 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조금 전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실감이 났다. 청우는 눈을 감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는 되지 않는다. 조금 취했고 어느 정도 분위기에 휩쓸린 감은 있지만, 후회할 거였다면 이런 큰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둘은 이미 연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거기다 몸까지 섞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이 통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둘 다 이 관계가 거짓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이서를 좋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혹은 진실과 어울리게 그저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끝을 내야 하나? 이 관계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지?
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남자랑 자 본 적이 있어서 이런 일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사실 제가 그에게 성욕을 느꼈다는 것부터가 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조금의 호감으로…….
‘내가 널 좋아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럴 일 없어.’
문득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들었던 말 또한. 무슨 뜻일까. 심란해져서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허리가 찌릿했다. 몸이 뒤늦게 아우성을 쳐서 생각을 그만두고 욕조로 들어갔다.
조금 뜨겁다고 느껴질 만한 온도였으나 지금의 제게는 딱이었다. 청우는 턱 끝까지 몸을 담근 뒤에 늘어졌다. 뜨끈한 물을 얼굴에 퍼붓고 머리칼을 적셨다. 아래가 아직 벌어져 있는 느낌이라 불편했다.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더듬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하려면 더 할 수는 있었다. 그랬다가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못 하겠다고 한 것뿐이다. 처음이라 그런가? 자극이 지나치게 심했다. 청우는 손끝으로 배를 만지작거렸다. 거의 여기까지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생각하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너무 정신이 없어 미처 따지지 못했지만,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이내 제 몸을 어루만지던 손길이나 귓가에 닿았던 입술이 떠오르자 온몸을 긁고 싶어졌다. 청우는 물속에 얼굴까지 잠수했다가 나와 얼른 씻었다.
다 씻고 나서 나가려고 보니까 옷이 없었다. 문을 슬쩍 열자 앞에 잘 개어진 옷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속옷 없이 입어야 하는 게 어색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덩치가 비슷한 덕에 옷은 아주 잘 맞았다.
침대 위는 어느새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침실 밖으로 나가자 주방에서 물을 따르는 이서가 보였다. 인기척에 이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마실래?”
이서가 내민 잔을 보자 급격히 목이 말랐다. 청우는 물 잔을 건네받아 목을 축였다. 적당히 마시고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물을 마시는 모습을 이서가 빤히 보는 바람에 잔을 다 비우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잔을 가져갔다.
정말 맨정신인 상태에서 그를 다시 마주하자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목덜미를 긁적이며 멀뚱히 서 있자 이서가 물었다.
“배 안 고파?”
딱히 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힘을 많이 쓴 탓일까.
이서가 케이크를 가져와 식탁으로 옮겼다. 이제 보니 식탁 위에 놓인 화병이 눈에 띄었다. 마른 꽃이었는데, 색의 조합이……. 자신이 연극 공연 때 선물한 꽃인 듯했다.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 잘 말려 보관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화병에서 시선을 겨우 떼어 내며 자리에 앉았다.
밝은 조명 아래서 보자 작은 케이크들이 왠지 조잡해 보였다. 이서가 포크 두 개를 들고 앉더니 청우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나 먹여 줘.”
치즈 케이크의 포장을 뜯던 청우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굳었다. 닭살 돋는 말을 하고 나서도 태연한 이서의 낯과 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너 손 있잖아.”
“나 생일인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태도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청우는 망설이다가 그래, 생일인데 못 해 줄 것도 없다 싶어 포크로 케이크를 작게 자른 뒤 내밀었다. 이서가 눈을 슬쩍 접으며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 속의 물기 어린 혀에 눈길이 갔다. 이내 입이 닫히고 포크 위 케이크가 사라졌다.
청우는 시선을 돌리고 포크를 다시 이서에게 건넨 뒤에 새 포크로 케이크를 먹었다. 다행히 이서는 또 먹여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뭐 갖고 싶은 거 없냐?”
“음? 없어, 괜찮아.”
“그래도 생일인데 말해 봐.”
“그럼 자고 가.”
포크를 든 손이 멈칫했다. 이서가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내 침대에서.”
어차피 자고 갈 생각이었다. 이 꼴로 택시에 탈 수는 없고, 이 새벽에 데려다 달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한 침대에서 잘 생각까지는 하지도 못했지만……. 청우는 일견 무뚝뚝해 보이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서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술 많이 마셨어?”
“조금. 지금은 다 깼어.”
“혼자 마신 거야?”
“아니,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넌 왜 안 자고 있었냐.”
“원래 늦게 자.”
불면증이 있나. 청우는 반들반들한 얼굴을 살피다가 이서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시선을 거뒀다.
“너 어깨에 타투 있던데.”
“응, 예쁘지.”
“어. 무슨 뜻이야?”
“뜻 같은 거 없어. 그냥 한 거야. 친구 중에 타투이스트가 있는데, 연습하고 싶다고 해서 내 몸 빌려줬지.”
연습용으로 제 몸을 빌려줬다는 게 대단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까. 앞으로 새를 보면 이서가 떠오를 것 같았다.
둘은 케이크 하나를 다 먹은 뒤에 일어났다. 양치를 하고 나오자 이서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진짜 옆에 누워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는데 이서가 이쪽을 향해 돌아눕더니 제 옆을 두드렸다. 천천히 걸어가자 그가 씩 웃었다.
“아쉽다. 못 걸었어야 했는데.”
“……뭐?”
미간을 찌푸리자 이서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빙글거리며 침대 위를 계속 쳤다. 청우는 한숨을 흘리고는 그의 옆으로 가 누웠다. 이서가 리모컨으로 불을 끈 뒤에 청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잘 자.”
이서의 작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퍼졌다. 곁에 닿은 온기, 몸에 얹힌 무게. 자신을 차갑게 응시하던 시선과 비교되자 안심이 되었다. 청우는 편안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금방 수마에 잡혔다.
다음 권에서 계속
각주
1) Celine Sciamma,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