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정이서(10)(3권) (9/16)

적우 3권

9. 정이서(10)

말렸다.

이서는 제자리에 발을 붙이고 서서 떠나가는 청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써늘한 바람이 몰아쳤으나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몸이 조용히 타오르는 듯했다. 기어코 끝을 내 버렸다는 사실이 와닿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잡고 싶은 충동에 손끝이 꿈틀거렸다.

청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제 꼴을 내려다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토록 모순적일 수가 있나. 눈 뜨고는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완전히 말려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상 청우가 제게 한 짓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분명 처음에는 이럴 의도가 없었다. 청우 마음의 끝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저와의 관계에서 찾아올 결말이 아니라.

이서는 욕설을 읊조리며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따라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해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공허한 눈이 빈 거리의 소실점에 닿았다.

얼마 안 되어 냉기가 살갗에 스며들었다. 이서는 한숨을 흘리고선 걸음을 돌렸다. 이게 맞는 걸 아는데, 맞는다고 해서 꼭 옳은 길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주희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궁금해 보이는 눈에 답해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갔다 왔어? 누구야?”

이서는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걸치고선 거실로 나왔다. 몸보다 한참 큰 옷을 입은 주희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제 옷을 빌려 입은 모양새였다.

“옷 갈아입어. 나가자.”

“어디 가는데?”

대꾸하기도 귀찮아 턱을 까딱이자 주희가 웬일로 토를 달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곧 입고 왔던 옷을 걸치고 나오면서 배를 문질렀다.

“밥 먹으러 가는 거지? 나 배고파. 아까는 네가 뭐 시킨 줄 알고 문 열었더니 웬 남자가……. 누구야? 잘생겼더라.”

“친구.”

“친구? 근데 왜 그렇게 갔대?”

어지간히 심심한지 주희는 질문을 와르르 쏟아 냈다. 차에 올라타 출발하는 동안 이서는 그의 질문에 하나도 답해 주지 않았다.

“개새끼. 사람 무시하고.”

주희는 재수 없다며 구시렁거렸지만 큰 타격은 받지 않은 듯 곧 콧노래를 부르며 창밖을 구경했다. 녹아내린 해가 검푸른 하늘에 빛 방울을 점점이 떨어뜨리고 있는 야경은 이서의 기분과는 달리 낭만적이었다.

불현듯 목 아래와 어깨 부근이 화끈했다. 청우의 손과 팔이 닿았던 부분이었다. 힘도 세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본다. 늘 단단하게 흐르거나 잔잔하게 끓고 있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되어 씁쓸할 뿐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호텔에 도착했다. 목적지를 알게 된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서를 돌아보았다.

“뭐야? 갑자기 웬 호텔? 여기서 먹어?”

차를 세운 뒤 내렸다. 이서는 프런트로 가 숙박 비용을 결제했다. 키를 받아 온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주희는 뒤늦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나 할 생각 없어. 그리고 할 거면 집에서 하면 되지, 뭘 호텔까지 와?”

“나도 할 생각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럼 대체 여기까지 왜 온 건지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해하던 주희는 방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방의 상태를 살폈다. 쾌적하고 야경도 괜찮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낯으로 침대에 앉자, 이서가 겉옷을 벗지도 않고 말했다.

“자고 가. 룸서비스는 알아서 시켜 먹고.”

“뭐?”

금방 떠나려는 태도에 주희는 인상을 구겼다. 그의 낯이 이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뭐야, 적선하냐? 내가 갈 데가 없지, 자존심이 없어?”

“적선을 하려면 더 가엾고 선한 사람한테 했겠지? 네가 아니라.”

이서는 주희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빈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을 꾸미지 않았다. 납득한 듯 주희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날 혼자 두고 가는데?”

“너 내 집에서 재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다고 모텔에 덜렁 놓고 갈 순 없잖아.”

“왜? 아까 걔 때문에? 화나 보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내가 너네 집에서 못 잘 이유라도 돼?”

“네가 내 집에서 꼭 자야 할 만한 대단한 이유라도 있나 보지?”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일침을 웃으면서 하니 더 얄미웠다. 주희는 이서를 노려보다가 몸을 뒤로 누였다.

“가지 마라. 나 오늘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난 네가 필요하고, 너도 혼자 있기 싫어 보이는데?”

“글쎄. 우린 서로한테 정답이 아니잖아.”

“뭐 누구한테 정답이 될 생각은 있어? 없잖아. 그냥 오답끼리 위안하면 안 돼?”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서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주희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정답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오답으로만 존재하며 또 다른 오답들과 적당히 마음을 맞추며 살았다. 그러나 여기서 주희와 하룻밤을 보내거나 제 집에서 재우면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이킬 생각도 없으면서, 정작 청우는 원하지 않고 알지도 못할 여지를 남겨 두는 건 겁쟁이 같은 행동이었다.

“내가 있으면 안 외로워? 마이너스끼리 더해 봤자 마이너스밖에 더 되나. 적당히 놀다 들어가.”

더는 말씨름할 기운도 없었다. 이서는 대충 손을 내젓고 뒤돌아섰다. 뒤에서 혀를 내밀고 애처럼 약 올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차를 타고 밖으로 나오자 밤을 밤으로 두지 않는 인공적인 빛들이 길을 안내했다. 산란하는 빛이 머리를 더 어지럽게 했다. 지나치는 배기음마저 신경에 거슬릴 정도니 확실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 이런 게 싫었다. 감정이 일상을 지배하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없게 하는 것. 그러나 제가 진실한 존재로 실재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책임을 돌리고 싶은 것뿐이겠지.

어느새 익숙한 거리에 도착했다. 청우의 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이서는 시동을 끄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들어간 모양인지 불이 켜져 있었다.

핸들에 손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실은 내가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하니 만나 보자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후에는. 또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의 연속일 테다. 어차피 청우 또한 한껏 꾸며 낸 제 모습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청우 앞에서 유독 자신을 많이 꺼내 보이긴 했지만……. 사실 청우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계속 좋아해 줄 거라는 헛된 믿음이 들었다. 위험한 생각이다.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하지 않는 게 옳았다. 자신과는 달리 이청우라는 사람은 거짓 연애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든 진심으로 부딪쳐 오니 자신도 나자빠질 수밖에.

처음 그의 마음을 눈치챘을 때는 솔직히 탐이 났다. 산영에게 올곧게 쏟아졌던 사랑이 방향을 달리하여 제게 왔으니 욕심이 안 날 수가 있나. 그와는 달리 영악하고 속물적인 자신은 청우가 내뿜는 빛을 받아먹으며 그가 원하는 사랑에 적당히 부응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적당한 연애, 적당한 사랑.

그런데 지금 꼴을 보라지. 이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시동을 걸었다. 여기서 더 청우를 흔들어서는 안 됐다. 그는 아직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듯하니 그대로 덮어 두는 것이 나았다. 너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고 그저 혼동한 것뿐이라고 매도하면서. 그렇게 상처를 주면서.

부정이 얼마나 갈까. 청우를 마음에 두고 나서야 이서는 제 치기와 오만을 후회했다. 그러나 뒤늦은 것은 언제나 큰 폭풍을 달고 오기 마련이었다.

이마가 따끈따끈했다. 이서는 손으로 제 이마와 뺨, 목덜미를 차례로 만져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가사를 도맡은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는데, 아주머니가 뒤를 돌아보더니 흠칫했다.

“어우, 깜짝이야. 이서 왜. 뭐 줄까?”

“……아니요.”

“과일 깎아 놓은 거 냉장고에 있으니까 꺼내 먹고. 아줌마는 이제 가 볼게?”

“네……. 안녕히 가세요.”

자신이 아픈 것 같다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은 착각일 수도 있고, 집안일로 바쁜 아주머니를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서는 아주머니를 배웅하고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동동 흔들면서 다시 제 얼굴 곳곳을 만져 보았다. 뜨끈하게 느껴졌는데 제 손이 따뜻한 듯도 싶었다. 이서는 한숨을 내쉬다가 약이 보관된 서랍장으로 갔다. 서랍 안에는 많은 약이 있었다. 진통제와 해열제, 소화제, 연고와 반창고들.

감기일까? 이서는 무슨 약을 먹어야 할지 몰라 약상자를 한참이나 뒤적거렸다. 하지만 약까지 먹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다. 잘못된 약을 먹어서 더 아플까 봐 걱정도 됐다. 일단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 시. 누구든 곧 올 시간이었다.

이서는 방으로 들어가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이 잘 갔기에 독서를 즐겨 했고, 벌써 이 방 안에 있는 책들은 다 섭렵했다. 새로운 책을 읽고 싶었지만 사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물론 부모님께 책을 더 갖고 싶다고 말하면 흔쾌히 구해 주겠지만, 먼저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색했다.

하도 읽어서 외우고 있는 다음 문장을 읊조렸다. 이서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서양 고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어 개정한 책이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서는 책 속에서 연극적인 어조로 감정적인 대사를 쏟아 내는 인물들을 좋아했다. 솔직하게 무언가를 강렬히 욕망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문장은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슬슬 눈이 무거워졌다. 잠이 쏟아진다기보다는 몸 위를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했다. 숨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서는 다시 제 이마를 만져 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은 아픈 거라고 혹은 아프지 않은 거라고 확실히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부모님은 언제 오실까. 둘 다 워낙 바쁜 분이라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숨을 폭 내쉴 때였다. 열어 둔 방문 너머로 도어 록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가 걸음을 살금살금 옮겼다.

“다녀오셨어요.”

“어, 이서 아직 안 잤어?”

“네.”

어머니가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물을 마시는 어머니를 보며 이서는 고민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아픈 것 같다고? 약을 같이 골라 달라고?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네. 소시지 먹었어요.”

“잘했네. 늦었으니까 이제 들어가 자. 엄만 연우한테 가 봐야 돼.”

옷자락 밑에서 꿈틀대던 손가락이 멎었다. 연우.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제 동생. 세상의 빛을 받자마자 인큐베이터란 곳에 들어가야 했던 가엾은 아이.

동생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며 행복에 겨워하던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단어를 모두 끌어 담은 낯이었다. 어머니는 막달에 가까워지며 병원에 입원했고, 연우를 낳고 나서는 조리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연우는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그 시기의 어둠과 공백 또한 생생하다. 이서는 그때부터 한 발자국 물러난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모든 상황이 원만하게 마무리되기만을 바랐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 불편한 옷을 갈아입고 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가다 순간 머리를 찌르는 통증이 스쳐 이서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듣지 못한 듯 바삐 신발을 신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떼며 얼른 따라붙었다.

“언제 오세요?”

“글쎄, 모르겠네. 기다리지 말고 어서 자.”

“네.”

어머니가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성큼 옮겨, 어머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작은 손은 이내 미끄러져 큰 손과 맞닿았다. 어머니의 손바닥과 맞붙으니 자신이 뜨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알아주지 않을까. 무언가 좋은 해결책을 내려 줄지도 모른다. 기대를 안고 고개를 들자, 어머니가 안타까운 낯으로 웃으며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미안. 그래도 연우가 아프니까 이해 좀 해 줘. 알았지?”

그가 이서의 손을 토닥이고는 문밖으로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잡고 있었던 어머니의 손이 꼭 신기루 같았다. 흔적도 없이 흘러내린 모래알이나.

이서는 돌아서서 넓디넓은 거실을 눈에 담았다. 창 너머로 반짝이는 야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에 잠긴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듯해 막막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빛들은 닿을 수 없는 등대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떼 서랍장에서 감기약 하나를 꺼냈다. 동생은 자신보다 더, 항상 아픈데 열이 좀 난다고 해서 칭얼거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약 한 알을 먹고 나서 방으로 돌아갔다.

불 꺼진 방 안, 이불을 턱 끝까지 덮은 이서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맞는 어둠에는 이제 슬슬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육원에서는 같은 방을 여럿이 썼고,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장난을 치다가 잠들곤 했다. 다른 애들이 다 잠들어 있을 때는 문가에 붙은 야광 별을 보았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지 오래였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이서는 나중에 야광 별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그 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마다 이서는 침대 밖을 기어 나가 약 한 알씩을 먹고 돌아왔다. 더워서 살결이 타 버릴 것 같았지만 이불이 저를 지켜 주는 갑옷이라도 되는 양 몸을 꽁꽁 감쌌다. 혼몽한 정신으로 동생이 얼른 나아서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랄 때쯤, 머릿속 한편으로 희미한 속삭임이 울렸다. 그러지 못할 바엔 영영 떠나 버리라고.

껍질이 벗겨진 나쁜 생각은 지독하도록 달큼한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는 어린아이의 마음 한구석을 쉽게도 질식시켰다. 이서는 그 껍질을 도로 감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도록.

눈을 뜨자마자 두통이 찾아왔다. 잠을 통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잠들었을 때 꾼 꿈이 이런 것이라니, 헛웃음만 나왔다. 이서는 무거운 머리를 손으로 짓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다가 침대를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니 정신이 조금 깨어났다. 귀찮아서 밥은 건너뛸까 하는 중에 건에게 전화가 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연락한다고 핀잔을 주기에는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여보세요.”

[야. 집이냐?]

“응.”

[나와.]

본론만 말하고 전화가 뚝 끊겼다. 싸가지 없는 자식. 보나 마나 산영을 만나기 전 시간이 남아 잠시 때우려는 게 분명했다. 나오라고 하는 장소는 그와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일 테다. 바람을 맞힐까 생각하다가 혼자 있기보다는 상대가 건이라도 둘이 있는 게 나을 듯해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싸늘한 바람을 맞다 보니 패딩에 달린 모자를 씌워 주던 손길이 떠올랐다.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 괜히 머리칼을 흩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카페 안에는 건이 이미 와 앉아 있었다.

배를 채울 겸 제 몫의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늘 그렇듯 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인사가 없었고, 건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핸드폰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샌드위치와 커피가 이서의 앞에 놓였을 때야 그가 입을 열었다.

“야. 너 김상태 결혼식 갈 거냐?”

“글쎄. 가겠지?”

“축의금 네가 좀 가져가.”

“직접 전해.”

“귀찮아.”

저렇게 막사는 것도 능력이다 싶었다. 이서는 가게 되면 전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화창한 창밖을 응시하며 입 안에 든 것을 씹는데 건의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그가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훑어보았다. 이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 눈 그렇게 안 떠도 좆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청우랑 잘돼 가냐?”

커피 잔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할 뻔했으나 자연스레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홀린 거냐, 가지고 노는 거냐?”

후자로 나온 질문에 이서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렇게 여겨져도 어쩔 수 없음을 앎에도 건이 저런 식으로 청우를 언급하는 것은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갖고 논다고 놀아지는 애도 아니고, 네가 남자랑 붙어먹는다고 해서 남들도 그러는 건 아니야.”

“너 네가 이청우 어떤 눈으로 봤는지 모르지?”

이서는 입을 다물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대답을 미루며 태연하게 샌드위치를 먹자 건이 의기양양한 눈을 하고 코웃음을 쳤다.

“지랄 말고 빨리 붙어먹어. 그래야 그 새끼가 허튼 생각 안 할 거 아니야.”

“왜.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불안해?”

“불안했던 적 없어. 내내 거슬렸는데 치울 수 있을 때 치우지 못하면 등신이지.”

“산영이를 단속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눈치 개나 줬다고 그게 면죄부가 되진 않잖아.”

산영을 언급하는 말에 건의 눈에 날이 섰다. 하여튼 듣기 싫은 말을 참는 재주는 전혀 없다니까. 이서는 얄미운 미소를 입에 걸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으로 무장한 속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서는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다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청우가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을 때, 이성적으로는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혼자 남겨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돌아올 테지만 그 순간에는 버림을 받고 마는. 아주 오랜만에 그 기분을 뒤집어썼을 때,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바랜 감정이 그동안 벼려 왔던 날을 세우고 달려들었을 때, 손끝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듯했다.

아주 긴 길을 돌고 돌아 원점.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침닉하는 몸. 사랑에 수반되는 음습한 조각들. 누구도 버리지 않았는데 버려졌다고 느끼는 어리석은 자신.

도망치려고 무수히 노력했는데, 도와주겠다고 오지랖을 부리다가 덩달아 빠져 버렸다. 어리석은 선택은 객관을 가장하여 늘 이성보다 앞서 달리곤 했다. 안일하게 있었으니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서는 손끝에 남은 듯한 감각까지 털어 내고는 커피 잔을 비웠다.

본가는 강남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로, 외관은 깔끔하고 미적이었지만 들어서면 어쩐지 질리는 감이 있었다. 어릴 때는 이보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살았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고 어머니가 앵커직에서 물러나 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곳이었으나 반갑다는 감상은 전혀 없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이곳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혼자 나가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질 터였다. 본가의 존재가, 의무적으로 찾아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언젠가부터 족쇄처럼 느껴졌다.

“왔어?”

문이 열리고 조연이 이서를 반겼다.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며 이서는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잘 지내셨죠?”

“그럼. 우리 아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왔다 갔다 해요. 잘 챙겨 먹고 다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거실로 발을 들이자 불투명한 주방 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제가 온다고 아마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쁠 것이다.

“아버지는요?”

“응, 서재에. 뭐 좀 보고 계셔.”

“인사하고 나올게요.”

서재의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열자 회색빛 머리칼을 잘 빗어 넘긴 호준이 서류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왔어요.”

“어, 그래.”

아버지의 시선이 정확히 제 머리와 귀, 옷차림으로 향하는 것을 가만히 느끼다가 그 눈에 채 숨기지 못한 못마땅함이 어렸을 때쯤 걸음을 떼 가까이 다가갔다.

“바쁘세요?”

“잠깐 봐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네, 천천히 보고 나오세요.”

“너는…….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

“하하, 어머니랑 똑같은 소리 하시네요. 오늘 좀 큰 옷을 입고 와서 그런가 봐요.”

답을 하고 나자 자연스레 정적이 찾아왔다. 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호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내렸다.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시선을 확인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식사 때 맞춰서 나오세요.”

아들을 불편해하는 아버지를 위해 이서는 서재를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조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그가 이서의 얼굴을 살폈다.

“학교는 좀 어때. 불편한 건 없어?”

“똑같죠, 뭐. 과제에 치여 살고 있긴 해요.”

“그래, 힘들겠다. 방학 때는……. 방학 때도 거기 있을 생각이야?”

“그렇겠죠? 이래저래 할 일이 많으니까요.”

“응, 그렇지.”

아쉬움을 삼키며 제 눈치를 보는 어머니를 마주할 때면 다양한 감상이 들었다. 그 안에 긍정적인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늘 알면서 모르는 척, 내민 손을 악의 없이 거절해 왔다. 거기서 그들이 느낄 감정은 배제했고 한때는 즐기기까지 했다.

곧 식사가 마련되었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에서 나온 호준과 함께 세 가족은 식탁 앞에 앉았다.

“얼른 먹어, 이서야.”

“네. 잘 먹겠습니다.”

반찬은 정갈하고 담백했다. 주의를 기울이면 제가 저번 식사 때 잘 먹었던 음식들이 다시 배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나서 맛있다는 감상을 말하자 조연이 기뻐하며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식탁 위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서로의 근황이나 친척들의 이슈 같은 것을 나누었다. 꼭 할 필요도 없지만 해서는 안 될 것도 없는 보통의 이야기들.

“참, 상태 결혼식 때 같이 갈래? 전날 자고 여기서 나가면 좋겠는데.”

“글쎄요, 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바빠서요.”

미소를 띤 조연의 낯에 금이 갔다. 그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했지만, 어떤 제안을 할 때마다 일관되게 빠져나가는 이서의 말을 순순히 믿지는 않을 터였다. 덩달아 호준의 입가도 굳었다.

여전하구나. 이서는 다시금 쌓였던 의문의 탑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렇듯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확인했다. 이서에게는 그들이 주는 것이 의미 없었다. 물질적인 무언가도, 세심한 배려와 같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도. 오로지 그들이 상처를 받아야 안심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과도 같았다.

무너진 탑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쌓였다. 이들이 자신을 견디는 이유가 그들의 양심과 명성 혹은 사람 된 도리이기 때문인지, 혹은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탓인지 자꾸만 가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날이 선 화살은 빙 돌아 자신을 겨누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이서는 생각하곤 했다.

이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나. 좋은 옷과 음식, 집, 책부터 학업까지 전혀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그로 인해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 단지 사랑에 공백이 있었을 뿐인데, 그것을 이유로 비수를 꽂으며 매번 마음을 확인했다.

“너는 그, 머리랑 귀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사내자식이 꼴이…….”

“여보.”

심기가 불편해진 호준의 일갈을 조연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가로막았다. 조연은 이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이서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첫 거절의 순간을 기억한다. 동생을 완전히 보내 준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조용하고 침울한 식사 자리에서 이서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첼로 그만두려고요.’

‘첼로? 갑자기 왜?’

‘그냥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거든요.’

빙긋 미소 짓는 이서를 두 사람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사를 똑똑히 밝힌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순간 그들의 표정을 보며 저열한 희열을 느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자신뿐이고, 이서는 제 존재 자체가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니 자신은 검은 머리 짐승이었다.

불편한 식사 자리가 끝이 나고 나서 이서는 방으로 들어왔다.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했음에도 언제든 들어와서 자고 가도 된다는 듯 방은 늘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책장을 훑다가 빈 곳에 놓인 액자 앞에 멈춰 섰다. 어린 자신과 그보다 더 어린 연우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꽃이 화사하게 핀 곳이었다. 이 시기에 연우는 처음으로 병원을 나와 이곳저곳을 다녀 보며 자신과도 짧게 교류했다.

이 죄 없고 가엾은 아이를 시기했다. 아이에게 사랑이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자신은 이 가족에 끼어들 수 없는 이방인이 되었고, 파양당할 거라는 악몽은 깊어져만 갔다.

이곳에 와 이 년간 모든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슬슬 적응할 때쯤 조연이 임신했고, 연우가 태어났다. 아이는 사 년을 살다가 떠났다.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모든 관심과 사랑은 마법처럼 사라졌고, 이서는 사려 깊은 아들, 다정한 형, 뛰어난 모범생, 노력하는 첼리스트를 연기하며 발버둥 쳤다. 그 당시 이서에게 사랑을 빼앗기는 건 생존의 문제나 다름없었다.

연우가 떠나고 나서 슬픔과 해방감은 동시에 찾아왔다. 그와 함께 이서를 덮친 것은 자기혐오였다. 어떤 때는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제 머리를 지배했던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저를 돌아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차라리 통쾌하거나 만족스러웠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스스로가 역겨웠고 매 순간 침몰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단지 사랑을 갈구했을 뿐인데, 스스로까지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원래 이런 인간인지 아니면 이 집에 살면서 그런 인간으로 변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아…….”

침대에 걸터앉은 이서는 핸드폰을 꺼냈다. 청우와는 이미 끝이 났음에도, 제 손으로 끝을 냈음에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먼저 메시지를 보내면 무시하는 일이 전혀 없고, 늘 짧은 대답으로라도 끝을 마무리하는 성실한 대화를 돌아보았다.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건드리면 움찔하다가도 차마 쳐 내지 못하는 손길이나 제 감정을 서툴지만 올곧게 표현하는 말이 욕심에 불을 질렀다. 산영의 곁을 지키며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듯 그 사랑이 제게로 돌아오면 얼마나 황홀할지 안다. 그러니 저를 두고 산영에게 간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누릴 환상에 비하면.

하지만 청우에게는 부모님과 동생이 있다. 산영이 있고, 많은 친구가 있다. 그들 모두를 성실하게 대할 테고 그의 다정은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건 청우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그들에게 정을 주고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제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기를 자처했다. 그러다 청우가 내민 손을 잡으면 그만 바라보며 그에게 지독하게 매달릴지도 몰랐다. 청우가 어느 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 손을 놓게 되었다고 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끝내는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면? 부모에게 그랬듯이, 청우를 상처 주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런 끔찍한 짓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았다.

청우가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위로를 해 주겠지. 너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나쁘지 않다고. 아픈 동생을 미워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너와 내가 같다고 말해 줄 테다. 전혀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비겁하게 변명만 늘어놓지 말고 그의 말이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될 것을. 하지만 굳은살처럼 박여 오랫동안 저를 잡아먹었던 시간의 수렁에서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끄고 몸을 뒤로 누였다. 형광등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부셨다. 팔을 얼굴 위로 얹어 시야를 차단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지만 한낮에는 햇볕이 꽤 뜨겁게 느껴지는 어느 날이었다. 이서는 공강을 누구와 보낼까 고민하며 연락처를 뒤졌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오늘은 혼자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하나를 들고 자리에 앉으려다가 창가 쪽에서 낯이 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건의 남자 친구. 사귄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달라진 분위기를 보아 알 수 있었다. 혼자 애달아 하고 술을 퍼마시고 별안간 화를 내며 지랄을 하더니 어느 순간 둘이 꼭 붙어 다녔다. 건과 함께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는데, 엉뚱하고 귀여우니 대화하는 맛은 있었다.

“산영아.”

“어? 이서야!”

반갑게 인사하는 산영의 맞은편 의자를 빼며 옆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서의 눈썹이 흘긋 올라갔다.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굳이 말하면 정석적이고 모범생 같은.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우뚝한 선과 맑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안녕. 산영이 친구?”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인사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어, 안녕.” 하고 나지막이 인사했다. 산영과는 달리 낯을 가리는 모양인지 어색해 보였다.

“정이서야.”

“어, 난 이청우.”

“청우? 이름 예쁘다.”

“어…….”

“이서는 건이 친구야.”

산영의 말에 청우가 아, 하고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건을 아는 모양이지. 둘의 사이도 알고 있으려나.

“둘이 같은 과야?”

“아니. 고등학교 친구야.”

“으흠, 뭐 하고 있었어?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니야. 우리 그냥 얘기하고 있었어.”

자신을 흘깃대는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자 청우가 금방 눈을 돌렸다. 애써 감추려는 듯하지만 자세를 고쳐 앉거나 음료를 연신 들이켜는 데서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합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참, 차건이랑 여행 간다며?”

“응!”

“차건이 어디 좋은 데 없냐고 닦달하더라.”

“아, 그랬어? 나한테는 자기만 믿으라고 했는데, 귀여워.”

건이 귀여워 보이다니 얘도 참 보통은 아니었다. 하긴 죽이 맞으니까 잘 사귀고 있는 거겠지. 이서는 커피를 마시며 옆을 보았다가 청우의 낯이 어딘지 굳은 것을 발견했다.

산영은 건과의 여행이 기대된다면서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산영의 말은 항상 통통 튀고 표정이 다채롭게 변해 듣는 재미가 있었으나 이서의 흥미를 끄는 건 제 옆에 목석같이 앉아 듣고만 있는 청우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듣고는 있지만, 거북한 느낌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건을 싫어하거나 건과 산영의 사이를 눈치챘거나. 건을 좋아하기란 힘든 일이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게 착하다 싶었다.

“아, 근데 이서 너는……. 으!”

산영이 테이블 아래 두었던 손을 올리다가 컵을 건드리면서 커피가 든 잔이 넘어졌다.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지는 커피에 청우가 벌떡 일어나 컵을 세우고선 카운터로 향했다. 이서는 재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카운터에서 티슈를 챙겨 온 청우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산영의 바지를 닦아 주고 테이블에서 흐르는 액체를 훔쳤다.

이서의 한쪽 눈썹이 힐긋 올라갔다. 되게 애지중지하네. 천성이 다정한 걸까. 그의 눈이 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청우가 고개를 들면서 눈이 마주쳤다.

애틋한 슬픔을 지닌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찰나의 경계가 어렸다. 청우가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 짧았던 순간 이서는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비슷한 냄새가 났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짓무르고 저쪽은 흐무러졌다는 것쯤일까. 목이 순식간에 말라 왔다.

이서는 차가운 커피를 넘기며 조금 전 보았던 눈빛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알아서 고꾸라질 감정에 관심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돌잔치가 아닌 결혼식 피로연 장소에 더 어울릴 정도로 홀은 컸다. 테이블이 많았음에도 거의 모든 좌석이 채워져 있었다. 남은 빈자리마저도 아직 오지 않은 손님들이 도착하면 만석이 될 터였다.

첫돌에 연우는 병원에 있었고, 두 번째 생일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생일에 아이는 드디어 제대로 된 생일을 맞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크게 기뻐하며 일가친지를 초대하여 큰 파티를 열었다.

이렇게 큰 규모의 파티는 처음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화려한 결혼식에 몇 번 가 본 적은 있으나 생일 파티를 이렇게 크게 열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입양된 후 첫 생일을 제외하면 이서는 가족들과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일이 워낙 바쁜 사람들이니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입양되기 전이었다면 절대로 살 수 없었을 근사한 선물을 받곤 했으니, 그것으로도 만족했었다.

역시 진짜는 다르네. 그런 생각은 꼭 의지를 가진 것처럼 머릿속을 마음대로 어지럽혔다. 이서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표정을 가다듬고는 제 동생의 생일 파티에 찾아 준 손님을 향해 인사했다.

‘이서야, 힘들지 않아?’

한복을 차려입은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서 이서 또한 마찬가지로 한복을 입은 채 자리를 지킨 지 오래였다. 어머니의 물음에 이서는 그린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시작할 텐데, 그때까지만이라도 들어가서 쉬어. 연우랑도 좀 놀아 주고.’

‘네, 그럴게요.’

이서는 언젠가부터 두 번 사양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홀 안쪽에 자리한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가족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삼촌, 고모, 할머니……. 뭐 그런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 사람들. 이서가 빙긋 웃으며 묵례하자 그들은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는 다시 어린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연우야, 까꿍.’

까꿍이라는 말에 연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가 드러내며 까르르 웃었다. 그 몸짓에 사람들이 따라 웃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들과 떨어진 곳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서는 곧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형아!’

연우가 제 곁으로 오라는 듯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손짓 하나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제게로 쏠렸다. 어서 아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져 이서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다가갔다.

‘형 불렀어?’

가운데에 마련된 자리에 앉자 조모가 연우를 이서의 품으로 넘겨 주었다. 아이가 보드라운 손으로 이서의 손을 쥐었다. 이서는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나긋나긋한 감촉이 왜 아프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 연우도 크면 이서처럼 훤칠해지겠다. 그치?’

‘이서는 좋겠네. 이렇게 예쁜 동생이 형아, 형아 하면서 잘 따라서.’

이서는 다소 수줍은 듯 혹은 겸연쩍은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들에게서 주입되는 생각을 미련 없이 버리며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위해 연우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면서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고리타분한 집안. 아이는 한 명이라도 꼭 있어야 한다고 압박을 주더니 막상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가 들어오자 껄끄러워했다. 그래도 집안의 면을 세워 주는 아이가 들어왔으니 잘된 일이라 하다가도, 연우가 태어나자 ‘진짜’를 대할 때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서가 몸소 깨닫게 해 주었다. 물론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살이 올라 뺨이 통통한 아이는 확실히 건강해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은 어디일까. 아직은 이들 가족의 울타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으나 언제 이방인이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은 꼭 시한폭탄처럼 이서의 머릿속에서 째깍째깍 울었다.

‘다들 나오세요.’

행사를 시작할 시각이 되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서는 방을 나와 연우를 부모의 품에 안겨 주고 가족석에 앉았다. 돌상 앞에서 연우를 껴안은 채 화사하게 웃고 있는 부모는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 나는 늘 이렇게 관객으로 있겠구나. 이 자리에서.

문득 찾아온 깨달음이 머리를 가볍게 울렸다. 나쁘지 않지, 이런 것도. 이서는 애써 침착하게 생각을 도닥이며 주변 사람들을 따라 그들에게로 박수를 보냈다.

하이라이트인 돌잡이를 하기 전 연우의 사진과 영상을 감상하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이벤트로 걸었던 선물을 증정하는 지루한 식순까지 끝나자 사회자가 이서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 우리의 주인공 정연우 군의 형인 정이서 군께서 멋진 축하 공연을 준비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역시 준비된 지루한 식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곳에 마련된 무대로 향했다. 무대 위에는 첼로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기 전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자리에 앉자 부모님의 기대 어린 시선이 이곳으로 향했다. 이서는 문득 자신이 장식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랑하기 좋은, 열쇠고리 같은 것. 이렇게 비싼 열쇠고리가 또 어디 있겠어. 그는 자조하며 활을 들었다.

사람들은 제 연주에 어떤 감동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주는 제게도 어떤 전율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니까. 어차피 어중간한 재능인데, 이걸 언제까지 내세울 수 있을까. 이서는 기계적으로 활을 움직이며 연주를 끝마치기 전 연우가 있는 곳을 흘긋 보았다. 이곳에서 눈을 빛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연우 한 명이라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연주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박수가 쏟아졌고 사회자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자신을 치켜세웠지만 어떤 감흥도 들지 않았다. 이서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가 다음 이벤트가 진행되는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홀을 빠져나오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복도에 마련된 의자로 가 앉고 나서 맞은편 창밖을 멍하니 보았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비우려 할 때였다.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람이 자신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서 군? 아까 연주 잘 들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김조연 씨가 이서 군을 아주 잘 가르친 것 같아요. 연주도 잘하고 잘생겼고. 다 가졌네, 다 가졌어.’

‘어머니 친구분이신가요?’

‘네. 뭐……. 힘든 건 없어요?’

서론은 끝났다는 듯, 탐색하는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이서는 손끝을 움츠렸다. 비정상적인 관심은 이미 꽤 받아 본지라 낯설지 않았다.

‘네, 힘들 게 뭐 있나요.’

‘동생 돌잔치가 이렇게 성대하게 열리고……. 형으로서 기분이 어때요?’

‘당연히 기쁘죠. 연우가 건강해서 열릴 수 있었던 건데요.’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서는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매끄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역시 그런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남자는 흐음, 하고 낮은 목소리를 흘리더니 품 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명함에 적혀 있는 회사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여성 잡지일 테다. 회사 이름에서부터 ‘우먼’을 달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들자 남자가 씩 웃었다.

‘김조연 씨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좋은 기사 쓰면 좋잖아요.’

‘죄송하지만, 이상한 루머 얘기 하시는 거면 드릴 말씀 없어요.’

이서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도 따라 일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정말 말 그대로 좋은 기사 말하는 건데.’

굳이 말을 더 섞으며 실랑이할 이유가 없었다. 무언가를 잘못 말해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도 않았고. 이서는 쫄래쫄래 따라오는 남자를 무시하며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맨 앞쪽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며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길이 이서를 스쳐 남자에게로 향한 뒤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문득 이서는, 이 자리에는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 기자는 부모님께 초대를 받은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초대의 의도. 이서는 그 의도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좋은 기사. 화목한…… 모습의 감상. 하지만 단지 제 자격지심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서는 어떤 감정이 차오를 때면 그것을 항상 저울질했다. 단 한 번도 이 감정이 정당한 것이라 결론 내려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을 뿌옇게 흐리는 상념을 흩트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행복한 공간이 단번에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문득 떠오른 그 날의 기억을 헤치며 이서는 눈앞의 나무를 응시했다. 보드라운 감촉은 어느새 잊혀 갔다. 이제 남은 것은 거친 나무껍질뿐이다.

나무에서 손을 뗐다. 당연하지만 어떤 고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아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미워할까. 아이를 미워한 것도 모자라 아이가 누려야 할 모든 것을 가져온 주제에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미워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미움을 받는 게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편한 듯도 했다.

문득 재킷 안쪽에서 울리는 진동에 이서는 핸드폰을 꺼냈다. 어머니의 연락이었지만 받지 않았다. 요즘 들어 연락이 잦아진 이유는 아마 자신이 본가를 찾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 테다. 무언의 약속을 어기고 있으니 어서 가야 할 텐데, 요즘은 유난히 버겁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 마음은 언제 끝날까.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미움과 오기로 똘똘 뭉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제는 자신을 지배하는 이 감정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마음은 무척 오래되어 절대 고칠 수 없는 나쁜 습관 같았고, 그렇기에 떼어놓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서는 발걸음을 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구름이 낀 하늘은 우중충했다. 장마철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요즘 들어 비가 자주 왔다. 그래서 기일도 아닌데 이곳에 찾아왔던 것이다.

곧장 학교로 향했으나 도착하니 강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서는 그저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날씨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빨리 이 기분을 떨쳐 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날까.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다. 집에서 혼자 처박혀 있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니 차라리 드라이브를…….

강의동에서 낯익은 남자 둘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산영과 그의 친구 청우였다. 산영은 무언가 신나는 일이 있는지 웃으면서 조잘대고 있었고, 그 곁에서 청우는 산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여전하네. 청우의 낯을 응시하는 이서의 눈이 다소 가라앉았다. 미련한 인간. 되지도 않을 사랑에 용기도 내지 못하면서 목을 매는 놈들은 딱 질색인데 왜 쟤한테는 자꾸 눈길이 갈까.

그건 아마도…….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아마도 오래되었을 짝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이 흔히 보일 수 있는, 상대를 해하려는 욕구나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음습한 기색 없이 단단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서는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청우의 낯을 끈질기게 주시했다. 재잘대던 산영이 순간 멈칫하며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받더니 이내 한쪽을 보고 활짝 웃었다. 산영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성큼성큼 걸어온 건이 단번에 산영을 품에 안았다. 하긴 건은 주위에 사람이 있을지언정 신경 쓰지 않을 놈이었다. 청우의 몸이 그들 쪽으로 틀어지며 여기서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서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건을 끌어안은 채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던 산영이 이내 뒤를 돌아보고 청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청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들이 떠났다.

청우는 남겨졌다. 그는 청승맞게도 떠나는 건과 산영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지금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조급함에 서둘러 차에서 내려 청우를 향해 뛰어갔다. 보폭이 큰지라 몇 걸음 만에 그에게로 도착했다. 손을 뻗어, 청우의 팔을 잡아 돌렸다.

순간 움찔해 어깨가 굳었으나 이쪽으로 돌아온 얼굴은 한 박자 늦게 표정을 바꾸었다. 청우는 갑작스레 나타난 이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

“……안녕.”

이서는 실없는 미소를 의식적으로 걸고는 조금 전 그가 채 가다듬지 못했던 표정을 떠올렸다. 청우가 이서의 얼굴을 훑더니 이내 제 손목을 보고는 팔을 뒤로 물렸다.

“어, 안녕. 뭐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가다가 보이길래.”

“……그래. 난 간다.”

“응, 잘 가.”

청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리를 떴다. 이서는 그가 조금 전 서 있던 곳에 발을 디딘 채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짓무르지 않았다. 왜일까. 처음 보았을 때 이후로 일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 생각보다 짝사랑이 오래지 않아서?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랑의 기간이 아님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어째서 그는 여전히 아프지만 단단한 눈을 하고 있을까.

저 눈이……. 홀로 앓아야 하는 사랑에서 벗어나는 걸 보고 싶었다. 이청우는 사랑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저렇게 깨끗하고 단단한 사랑도 결국엔 깨어진다면 제 사랑이 변질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하지만 저와는 달리 그는 사랑에서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고 해방된다면?

그런 끝도 있었으면 좋겠다. 바보 같은 대리만족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사실은 해방되길 원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차라리 온전히 사랑하고 싶었다. 조금 전 잡았던 손목의 온기가 손끝에 저릿하게 흔적을 남겼다. 이서는 꽤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인마, 이서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영현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밥 사 줄까?”

“왜요?”

“왜긴 왜야. 시간 남으니까 후배 밥 좀 사 주겠다는 거지.”

“전 좋죠.”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고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미소를 걸고 답했다. 요즘은 되도록 혼자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약간의 틈만 생겨도 그 사이를 벌리고 들어오는 생각들을 차단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사람들과의 영양가 없는 교류는 이서의 익숙한 도피 방법이었다. 기습한 상념에 침몰하면 시간이, 하루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벼운 말을 내뱉다 보면 시간은 상대적으로 빨리 갔다.

“넌 내년에 연극 안 할 거냐?”

“글쎄요. 후배들 놀게 좀 빠져 줘야죠.”

“조연이라도 해. 지금 애들 봐라. 다 빠져 가지고, 제대로 된 극 올리겠냐?”

“너그럽게 봐주세요. 귀엽잖아요.”

“흥, 귀엽기는. 그 나영인가 걔는 좀 귀엽긴 하더라.”

그새 눈독을 들였군. 영현은 한 학기마다 한 명을 찍어 호감을 표하기로 유명한 선배였다. 한 번도 그들과 사귄 적은 없지만. 어쩌면 오늘 밥을 사 주겠다는 것도 제 주변 여자애 중 누구든 소개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아, 그건 좀 귀찮은데. 적당히 떨궈 낼 레퍼토리는 수십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안 써먹은 것이 뭐였는지 고를 때였다. 맞은편 길에 청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걸음이 덜컥 멎었으나 횡단보도 앞이라 이상할 게 없었다.

며칠 만인데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색 패딩을 입은 채 백팩을 어깨 한쪽에 덜렁 걸친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멀뚱히 서 있었다. 꿈에도 나오지 않던 얼굴을 그리던 순간, 청우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았다.

꿈이 깨어지듯 청우의 낯이 굳었다. 그가 얼굴을 홱 돌렸다. 실수로라도 전혀 보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에 가슴속으로 손이 들어와 안을 헤집는 것 같았다. 자초했고 원하던 결말이었으니 징징댈 이유도 없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는데, 청우가 다시 이쪽을 퍼뜩 돌아보았다.

자신과 영현을 번갈아 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언뜻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듯도 했다. 이서는 제 모습을 돌아보다가 영현과 청우가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 벌인 승강이를 떠올렸다.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우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러고 있으니 삥이라도 뜯기는 것처럼 보이려나.

이서는 쓴웃음을 삼켰다. 산영을 과보호한다고 생각했는데, 과보호도 맞지만 저건 천성이기도 했다. 이미 끝이 난 상황에서도 제게로 향하는 염려에 마음이 달떴다. 만일 청우가 덜 다정하고 조금이라도 올곧지 않았더라면 그의 마음을 바로 채갔을 테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렇게 저도 모르는 새 빠지지도 않았겠지.

“야, 저 새끼 네 친구 아니냐? 그때 그.”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 이서는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저 새끼랑 많이 친해? 아무리 봐도…….”

“듣는 새끼 기분 나쁘겠어요. 형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생긴 대로 말하셔야죠.”

“어?”

영현이 이서의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해석하고 있을 때 이서는 튀어 오르는 마음을 걸음걸음마다 짓밟았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영현과 밥을 먹고 헤어진 뒤에는 연습실로 왔다. 이곳에 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지만, 타인과의 시간에 더는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건반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나자 청우와 함께 이곳에 와 연주를 들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저를 바라보던 시선에 손끝이 깃털처럼 날아올랐었다.

그날 연주했던 곡을 다시 쳐 보았다. 그때는 끝맺지 못했던 멜로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방 안을 채웠다. 청우에게는 가닿을 리 없는 곡의 여운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건반에서 손을 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은은한 조명의 빛이 속눈썹 사이로 부서졌다. 옆방에서 기타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불현듯 무서워졌다.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까. 잊을 수 없다면 이 시간은 얼마나 길게 늘어나 저를 지독하게 조여 올까. 익숙하다고,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알고 있는 감정이기에 더 두려웠다.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청우를 보호하고, 또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겼으나 마음의 구덩이는 계속해서 깊어지는 듯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 너는 그냥……. 너지.’

그는 자신을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처럼 말하곤 했다. 청우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꼭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청우의 말에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솟았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욕심내어 그를 고립시키고 또다시 자신을 역하게 느끼고…….

선명하게 그려지는 미래에 이서는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서 일어났다. 어느 쪽이든 후회할 것은 자명했고, 그렇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나은 쪽을 택하는 게 맞았다. 이번에도 역시 옳지는 않겠지만.

교재의 내용을 외울 겸 노트에 따로 정리하던 청우는 핸드폰을 돌아보았다. 공부하는 내내 자꾸만 연락을 확인하게 되었다. 오늘만 있던 일도 아니었다. 이서와 그렇게 헤어진 후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열이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자신은 지나치게 흥분했었고 이서 또한 달리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걸로 정말 끝이었다는 듯 이서는 먼저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자신이 하면 되지만, 그날 거리에서 이서를 저도 모르게 외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서 또한 자신을 보고도 알은체하지 않았으니 그의 의사도 명백했다.

이서의 친구 관계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 남자와 어울리는 건 신경이 쓰였다. 툭툭 내뱉는 말이 그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지라도, 무의식중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런 생각도 오지랖이 된 걸까.

한숨을 삼키며 다시 공부에 몰두했다. 그날 이후 슬픔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머리 위로 녹아내렸다. 자신이 이서에게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이 뼈를 찌르고 들어왔다. 차라리 화가 난 것이었다면 어떻게든 노력해 보았을 텐데, 가짜 연애가 아니었다면 따로 시간을 보낼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그런 제안을 제게 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것일까. 근본적인 의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서에 대한 생각으로 일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떨어진 벽돌을 발견하고 다시 쌓아도 그 자리에 남은 부스러기가 신경 쓰여 할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바깥 공기를 쐬지 않고 답답한 실내에 오래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청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매점에서 커피 한 캔을 사고 나오며 기지개를 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쳐서 돌아보았다. 윤선이었다.

“이청우. 여기서 공부해?”

“어. 너도?”

“응. 머리 안 돌아가서 커피 사러 나왔는데 너도 똑같네.”

윤선이 웃으면서 커피 캔을 내밀었다. 거기에 제 캔을 부딪치고 나서 청우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번에 외울 거 너무 많지 않아? 머리 빠개지겠어.”

“응. 이번 학기가 유독 그러네.”

“넌 그래도 잘 외우는 편 아니야?”

“별로 그렇지도 않아.”

“겸손하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청우의 팔뚝을 찔렀다. 청우는 픽 웃으며 커피를 들이켜다가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이쪽으로 향해 있던 이서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뛰었다.

‘걔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

문득 일전에 이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저 듣고 넘기려고 했었던 이야기가 다시금 상기되자 청우는 저도 모르게 윤선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오해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왜 자신이 지레 걱정하여 이서의 눈치를 살피는지 알 수 없어 발끈하기도 했다.

“왜 그래?”

“아니야. 난 이제 들어가려고.”

“그래. 난 좀 더 있다 갈게.”

“어, 수고해라.”

청우는 커피 캔을 비운 뒤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열람실로 돌아갔다. 이서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어수선해져 글이 읽히지 않았다. 아까 제 눈을 피한 걸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잘 지내는 듯 보여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다고 그의 불행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안 되는 공부를 꾸역꾸역 붙잡고 자리를 지키느니 차라리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듯싶었다. 청우는 짐을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저녁을 먹고 청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운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친구도 안 된다는 소리인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잊을 만하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서의 행동이,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아 자꾸만 미련을 남기는 듯했다.

청우는 패딩을 걸치고 핸드폰을 챙겼다. 성난 걸음으로 밖까지 나와, 이서에게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가 던졌던 물음이 불현듯 머리를 후려쳤다.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냐고? 아니다. 어쨌든 연인이었으니 둘의 관계에 충실했을 뿐이다. 사랑? 헷갈리지 말라고? 애초에 헷갈린 적도 없었는데. 아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는데.

청우는 멍하니 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이서의 물음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무언가가 거대하게 제 앞을 막은 기분이었다. 그는 피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했다. 그로서 닿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이 좋고 따뜻해 도시락을 사 와 산영과 함께 밖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인문관 앞 잔디밭에는 곳곳에 테이블과 벤치가 놓여 있었다. 둘은 그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와, 맛있겠다. 여기 거 오랜만이야.’

뚜껑을 연 산영이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들었다. 따끈따끈한 미트볼 하나를 입에 넣어 볼이 불룩해진 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얼른 먹어 보라는 손짓에 청우도 젓가락을 쥐었다. 산영의 말대로 미트볼은 맛있었고, 산뜻한 바람과 화창한 하늘에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고3 때 급식 메뉴 별로면 나가서 떡볶이 먹었던 거 생각나?’

‘응. 거기 맛있었는데.’

‘그니까. 없어져서 아직도 슬퍼. 아주머니 어디로 가셨을까? 장사 아예 안 하시는 걸까? 따라가고 싶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맛있는 걸 그리워하며 울상을 짓는 산영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 밥을 먹는 걸 학교에서 금지했기에 친구들과 함께 몰래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갔던 기억이 떠올라 즐거웠다. 줄지어 떠오른 추억을 말하려고 할 때, 뒤에서 산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건아!’

산영이 손을 들고 붕붕 흔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건과 이서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서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닌데 어쩐지 불편해져 청우는 고개를 돌렸다.

‘안녕. 둘이 여기서 밥 먹어?’

‘응, 날씨 좋아서. 너흰 밥 먹었어?’

‘아니, 지금 먹으러 갈 참이었는데…….’

건이 당연하다는 듯 산영의 옆에 앉았다. 이서는 산영과 청우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도시락을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고선 청우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야, 시켜 먹자.’

‘그럴까?’

산영의 다른 친구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유독 건과 이서는 대하기가 꺼려졌다. 건은 산영의 연인이니 어쩌면 당연하지만 이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을 이유 없이 거북하게 느끼는 것 때문에 희미한 죄책감까지 더해지니 그와의 거리가 더더욱 벌어지는 듯했다.

‘이거 먹어 볼래?’

산영이 미트볼 하나를 집어 건의 입에 가져다 댔다. 건은 산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연스레 받아먹었다. 건에게로 정직하게 흘러가는 애정 어린 시선과 다정한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입 안이 쓰게 느껴져 젓가락 끝으로 밥알만 굴리고 있는 사이, 귓가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퍼졌다.

‘괜찮아?’

제게로 향한 시선과 물음에 청우는 잠시 멍해졌다. 뭐가 괜찮냐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서를 가만 쳐다보자 그가 눈을 내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좇은 청우는 제 손등 위로 개미가 오른 것을 발견하고 얼른 손을 털어 냈다.

‘아, 고맙다.’

‘별말씀을.’

이서가 시선을 거뒀고,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이 아직 남은 듯해 청우는 손을 긁적이다가 밥을 크게 떠먹었다.

인문관을 나온 청우는 빈 테이블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 괜찮냐는 물음이 개미가 아니라 제 마음을 가리키고 물은 것이었나. 더디게 찾아온 의문에 손등이 홧홧해졌다. 마치 수백 마리의 개미가 그 위를 기어 다니는 것처럼.

청우는 손등을 매만지며 걸음을 뗐다. 이서는 정말 오래전에 제 마음을 알았고, 산영을 좇는 제 모습을 한참 지켜봤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일 그때 정말 제 감정에다 대고 괜찮냐고 물은 것이라면…….

제가 지켜보고 겪어 온 이서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간혹 속을 알 수 없고 냉담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친하지 않았을 때도 저를 신경 써 주었으면서 지금은 왜…….

도돌이표에 다다른 것처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생각에 청우는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일단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서를 볼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같이 듣는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마음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혼재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있었으면 좋겠다.

청우는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강의 시작 시각이 다 되어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서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오기 전 했던 갈등이 무색하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뒷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피탈당한 듯한 느낌이 밀려오는 것을 감내했다. 교수가 들어오자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청우는 그제야 오늘이 자신들의 과제를 발표하는 날이란 걸 깨달았다. 최근의 일로 인해 그만 깜빡 잊어버렸고, 그의 발표 준비를 돕지도 못했다.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이서는 이미 준비를 마친 듯 능숙하게 PPT를 띄웠다. 불이 꺼지고 프로젝터의 불빛이 이서의 얼굴을 밝혔다. 그는 오늘 무채색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모습이 단정해 분위기가 평소보다 성숙해 보였다.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는데 이서의 시선이 강의실 전체를 훑었다. 이내 눈이 마주쳤으나 이서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영상학과 정이서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그는 함께 준비한 PPT를 보며 외운 대본을 읊었다.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과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시선, 곧은 자세가 이목을 돌릴 수 없게 했다.

같이 서점에 갔던 것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좋았던 때는 왜 기회도 주지 않고 부스러지듯이 떠나 버리는 걸까. 사위가 어두워서인지 빛을 받은 이서와 어둠에 잠긴 자신, 마치 둘만이 이 강의실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간혹 이서의 시선이 닿을 때면 쿵, 쿵 뛰는 심장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하지만 이쪽은 정거장이었다. 시선은 멈췄다가 길을 떠났다. 공평하게 돌고 돌아 결국 타인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 분간의 짧은 발표가 끝이 났다. 불이 켜지고 박수 소리가 들리자 마치 깊이 잠수해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듯 멍멍했던 감각이 깨어났다.

가슴이 세차게 술렁였다. 청우는 남은 시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너울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숨을 조용히 내쉬며 멍한 생각, 이를테면 어제 먹은 저녁 메뉴 따위를 떠올리다 보니 강의가 끝날 때쯤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강의가 완전히 끝나고 나자 여기를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청우는 도망치듯 강의동 밖으로 나와 빠르게 걷다가 산영이 줄 게 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카페로 향했다. 어디라도 좋으니 갈 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내 카페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청우야, 왔어?”

“응. 사람이 별로 없네.”

“오늘 무슨 날인가 봐. 나 올 때부터 휑했어.”

청우는 카운터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산영이 음료수를 만드는 동안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건과 주먹다짐을 했던 것도 어느새 한참 전의 일 같았다. 기억 상실부터 비 오는 날의 실족, 장례식까지 거쳤으니 산영과 건의 사이는 더 단단해지겠지. 둘이 오래도록 서로에게 좋은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우는 문득 바랐다.

곧 산영이 음료수와 함께 표 두 장을 내밀었다. 표는 뮤지컬 예매권으로, 유명한 작품의 VIP석이었다.

“건이가 고맙다고 전해 달래.”

“차건이?”

“응. 장례식 때도 그렇고 다쳤을 때도 도와줬잖아.”

고맙다고 제게 선물을 주다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는 행동이겠지만 상대가 건이다 보니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표를 건네받았다. 날짜는 크리스마스 저녁 시간대로, 구하기 꽤 어려웠을 것 같았다.

“고맙다. 잘 본다고 전해 줘.”

“응! 아, 이서랑 같이 갔으면 좋겠대.”

“뭐……?”

“둘이 건이 도와줬으니까.”

겉으로 보기엔 정말로 훈훈한 상황에 산영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건이 아직도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떨떠름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착각과는 별개로 이서와 자신은 지금 틀어진 상태였다. 크리스마스에 이걸 같이 보러 갈 수나 있을까.

과연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될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청우는 이서와의 관계를 영영 끊어 내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화가 나서 돌아서기는 했지만, 속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다시 한번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서가 받아 주어야 가능한 얘기였다. 기분이 다시 침잠했다. 어쩌면 최근에는 늘 이런 상태인 것 같기는 했다.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이서의 물음이 또다시 머리를 강타했다. 그의 덤덤한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손등이 또다시 화끈해졌다. 불쾌한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운 듯도 한, 정확히 알 수 없는 감각에 눈을 내린 청우는 산영이 제 손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청우야, 졸려? 아님 어디 아파?”

산영이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온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손이 내뿜는 온기와 감촉이 뒤늦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청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산영이 제 손을 쥐고 있는데, 손등은 건드리지 않고 손끝만 잡았을 뿐인데도 이서의 눈길이 닿았던 부근이 흔적을 날카롭게 알렸다. 그것도 작년에,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어느 날에, 선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기억 속에서 단지 시선이 스쳤을 뿐이었는데.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이서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청우는 손가락을 뻗어 산영의 손을 덥석 쥐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산영을 보며 그는 제 가슴이 잠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영과의 접촉이 어떤 울림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손끝이 두근거리지도 않았으며 가슴께가 저릿하거나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일도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청우는 갈 길을 잃은 눈을 깜빡이며 이서의 손길을 떠올렸다. 피부를 유려하게 타고 올라와 가슴속까지 간질이던 움직임을. 가슴을 꽉 조이고 귀 끝까지 달뜨게 했던 입맞춤을.

“왜……. 무슨 일 있어? 말해 줘.”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입술을 앙다문 산영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방금 건과 그의 행복을 빌지 않았나? 둘이 오래도록, 서로에게 좋은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지난 육 년의 시간이 통째로 뒤집히는 게 피부로 느껴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숨만 내쉬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온몸이 요란하게 들뛰기 시작해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산영아. 미안한데, 나 잠깐 도와줄래?”

“응! 도와줄게!”

청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산영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내 주저 없이 산영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산영이 의아한 낯으로 청우를 올려다보았다.

산영의 몸은 따뜻했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떤 설렘도 없었으며 그와의 접촉에서 비롯한 갈등이나 자괴감 따위도 따라붙지 않았다. 청우는 미간을 구긴 채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깨달음은 비로소 찾아왔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왜 몰랐을까? 왜 이제야 알았을까? 깨달음은 오늘이었지만, 그 사실은 언제든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듯 한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그거 알아? 짝사랑도 오래 하면 말이야. 나중에는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돼.’

아. 벌어진 입술 새로 한 줄기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랑하지 않는데 휘둘리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상해지지.’

이서의 말이 맞았다.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다 보면 굳은살이 되어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해진다. 쳐다보거나 만지지도 않고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굳은살이 갈라지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은지도 모르고.

청우는 한 걸음, 두 걸음 산영에게서 멀어졌다. 의문과 염려를 담은 제 오랜 친구의 눈빛을 보며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방감과 희열, 기대와 옅은 혼란이 소용돌이치며 청우의 몸을 휩쌌다. 그 속에서 청우는 천천히 입을 뗐다.

“산영아. 나 먼저 갈게.”

“응? 벌써? 갑자기?”

“어. 꼭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간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챙기고 뒤를 돌았다.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건이 성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그의 손이 다가왔으나 청우는 팔을 내치고는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핸드폰을 들어 이서의 연락처를 누르고 귀에 붙였다. 닿은 귀가 두근거렸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같은 말을 끊임없이 읊조리고 있을 때 연결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나 지금……. 예술관인데. 왜?]

“지금 갈 테니까 앞에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전화를 뚝 끊은 뒤에 청우는 예술관이 있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바람에 귀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몸에서 피어오른 열이 귓가를 서서히 녹였다. 심장이 아주 크게 부풀어 손끝과 발끝까지 차지한 것만 같았다. 철렁대는 몸을 가누며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전속력으로 달린 청우의 눈에 예술관 건물과 그 앞에 서 있는 이서가 보였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이서의 앞에 다다른 청우는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쪽을 향해 선 그의 신발마저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뭐가 급해서 이렇게 뛰어왔어.”

머리 위로 떨어진 목소리에 숨을 깊게 내쉰 뒤 허리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털고 나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정이서.”

“응.”

“내가 만약 널 좋아하면?”

내리감다가 뜨기를 반복하던 이서의 눈꺼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청우는 자신의 새살을 향해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고백을 내질렀다.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한 거면?”

이서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감정은 말로 완전히 내뱉고 나서야 완성이 되기도 한다. 청우는 뜨거운 숨을 흘리며 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를 좋아한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좋은 것들, 슬픈 것들 모두 그와 나누기를 원했다. 떨어져 있기 싫었다.

그간의 혼란이 모두 해결되어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이서를 좋아해서 그랬던 거다. 그래서 친구로 돌아가자는 말에 만족할 수 없었고, 그의 작은 거절도 견디기 힘들었으며 다른 여자와 있는 모습을 보고 화가 치솟았다.

감정의 자각이 마음속에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청우는 기대 어린 눈으로 이서가 돌려줄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정적이 길어졌고, 청우의 낯에 깃든 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서가 침묵을 지킬수록 마음속에 불안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표정 없이 굳은 것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않던 이서의 시선이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의 눈은 무언가를 가볍게 생각하듯, 이를테면 오늘 먹을 저녁 메뉴를 떠올리듯 한 바퀴 굴렀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꼭 뭐가……. 달라져야 해?”

“어?”

이서의 물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충격이 여진을 일으키며 머리를 뎅뎅 울렸다. 숨이 점차 가라앉았고 청우의 낯이 희게 굳었다.

“우리 그냥 이대로 지내자. 시간 지나면 별거 아니었다고 느끼게 될 거야.”

이대로 지내자는 말은, 지금처럼 거리를 벌리자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데면데면한 친구보다 못한 남이 되어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자고. 청우는 그제야 이서의 얼굴을 멀리서 보듯 응시했다. 그의 낯에는 놀라움도 설렘도 없었다.

‘아니야. 그러니까 헷갈리지 마.’

아. 청우는 탄식을 흘렸다. 알고 있었구나. 이서는 이미 제 마음을 알고 있었다. 훤히 꿰고 있었다. 그렇기에 멀어진 것이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알았지?”

“…….”

“난 이제 가 봐야겠다, 할 일이 있어서. 잘 가.”

이서가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청우의 어깨를 쥐고는 돌아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청우는 무력하게 응시했다.

제 감정을 알고 나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서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의식중에 그와 자신이 같은 마음이리라 여겼던 것 같다. 그간의 시간이, 제게 향했던 그의 시선이, 다정했던 그의 말과 행동 모두가 진심이라 믿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감정의 일부는 겹쳐 있을 줄 알았다. 바보같이.

‘몰라. 처음부터 엔조이였다 이거지.’

언젠가 그의 전 연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자신도……. 아니, 저는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그 여자가 말했던 엔조이도 못 될 것이다. 이서에게는 정말 놀이였나 보다. 그러다가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되니 그 마음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이서가, 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한들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관계를 끊어 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함께했던 시간 동안 자신만 좋았을 뿐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알던 이서의 모습 중 어느 부분이 그의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믿으려고 해도 상황은 그럴 수 없게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청우는 천천히 돌아서 걸음을 뗐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거절당했다는 것. 또다시 홀로 사랑을 앓아야 한다는 것.

사랑은 알아채고 나서야 가뭄 끝에 단비를 머금은 것처럼 부피를 무섭도록 키웠다. 가득 부푼 마음이 버거워 청우는 천천히,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랑은 어떻게 숨기고 짓누르는 걸까. 산영을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았으나 기억이 희미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강렬했던 감정이, 오래 품어 왔던 마음이 이제는 먼지처럼 흩어져 흔적도 찾기 힘들다는 게.

청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서에게 거절을 당했으니 이 마음을 정리해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러기도 싫었다. 어쩌면 아직까지 현실을 부정하는지도 모르겠다.

저를 열렬히 끌어안던 몸, 냄새가 좋다며 제 품에서 단잠을 자던 얼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애정이라고 여길 만한 시선.

그 모든 것이 정말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한 우정, 혹은 그보다 못하다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간이 이해되지 않아 헛웃음을 흘렸다. 이서를 폄하하던 타인의 말처럼 그는 정말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우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들보다 그와 깊은 시간을,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서가 품은 것이 깊은 우정일 뿐이었다면, 그래서 제게 희망 고문 하고 싶지 않아 저를 거절한 거라면……. 그렇다기에는 장례식에 가기 전까지도 키스를 나누었다. 그때도 이서는 제 마음을 알고 있었을 테다.

“뭐 하냐.”

청우는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윤수가 의자를 빼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냥.”

“뭔 일 있냐? 너 요즘 좀 멍한 것 같아.”

“별일 없어.”

“없기는. 말해 봐, 자식아.”

윤수가 청우의 목에 팔을 걸며 달달 흔들었다. 청우는 무기력하게 잡혀 있다가 정말 아니라면서 고개를 젓고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아, 나 여친이 연말에 가족들이랑 시간 보낸대서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넌 진짜 안 가냐?”

“……어.”

“너도 가족들이랑?”

“응.”

“동생은 잘 지내냐? 고3이랬지?”

“잘 지내. 주말에 생일이라 가 봐야 돼.”

“선물도 주고 그래?”

“어.”

“와, 너희는 진짜 사이좋다. 우리는 선물은커녕 욕이나 안 오가면 다행인데.”

제 동생을 욕하며 투덜거리는 말에 청우는 픽 웃었다. 자신도 동생과 데면데면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더는 부딪치지 않았고, 그런 상황이 생기더라도 한발 물러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너 오늘 도서관 갈 거냐?”

“응.”

“같이 가자.”

“그래.”

청우는 윤수와 함께 도서관으로 내려왔다. 꽉 찬 열람실에 막 생긴 자리를 잡아 나란히 앉았다. 기분이 내내 침울했으나 옆에 윤수가 있었기에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은 이제 열여덟 어린애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때보다 더 힘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집중이 되지 않아도 공부에 몰두해야 했다. 시험까지 망치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의 시간이 될 테다. 이서와 함께한 학기를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간간이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듯 이서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도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비록 거절당해서 좌절하기는 했으나 감정 자체가 어떤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책에 시선을 붙이고 있다가 목이 뻐근해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켰다. 제 옆에 앉은 윤수는 엎드려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히터 때문인지 실내가 건조해 목이 말랐다. 청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진짜 없냐?”

“없다니까요.”

정수기에서 물을 떠 마시려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의 뒷모습이 보여 가슴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앉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는 모르는 얼굴이었고, 옆에는 연극부의 그 남자였다.

저 사람이랑 또 같이 있네. 청우는 종이컵에 물을 따르고 나서 그쪽을 예의 주시 했다.

“하, 이서야. 네 주변에 여자애들 쌔고 쌨잖아. 다리 하나만 놔 주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제 주변에는 연애를 하루라도 쉬면 입에 가시가 돋는 애들밖에 없어서요. 다 남자 친구가 있다네요.”

기름칠을 한 듯 유달리 매끄러운 투를 보아 거짓말인 듯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이서의 표정까지 그려졌다. 직접 그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물을 마시는데 남자가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하, 자식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소개했다가 파투 날까 봐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하지.”

“다들 알아서 잘한다고 하는데, 저 그러다 잃은 친구만 여럿이에요. 나중에 좋은 자리 생기면 당연히 연결해 드리죠.”

“내가 씨발, 안 됐다고 너를 버리겠냐? 형을 뭘로 보고.”

남자가 또다시 이서를 퍽 밀었다. 그의 몸이 살짝 기울면서 삐져나와 있던 지갑이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이서는 지갑이 떨어진 걸 모르는 듯했다.

왜 연애를 이서를 통해서 하려는지도 이해가 안 갔지만, 저 손버릇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라서 그런 걸까? 이서라면 저 남자와 굳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왜 저걸 견디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새끼 약은 새끼네? 지 연애 사업만 신경 쓰고.”

연애 사업이라는 말에 청우의 입가가 굳었다. 뭘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청우는 떨어진 지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남자가 다시 한번 이서의 어깨를 손으로 쥐었을 때 종이컵을 구겨 버린 뒤 발을 내뻗었다.

지갑을 주워 테이블 위에 소리가 나게 올려 두자 모두의 시선이 청우에게로 향했다. 그를 마주한 이서의 눈이 다소 크게 뜨였다.

“지갑.”

무뚝뚝한 투로 한마디 던진 청우는 이서의 어깨에 얹힌 손을 참지 못하고 그의 다른 쪽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남자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남자가 이서에게서 억지로 떨어진 손과 청우를 번갈아 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꺾고는 일어났다.

“너 저번부터 왜 이렇게 거슬리냐?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아!”

제게로 향해 내뻗은 팔을 청우는 가볍게 붙잡았다. 약하게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듯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그걸 무시하고서 이서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좀…….”

널 보호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 생떼까지 다 받아 주지 말고. 상대방 기분이 좆같아지기는커녕 너만 저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잖아.

청우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과 함께 말을 삼켰다. 안다. 쓸데없는 오지랖인 거. 이런 행동은 주제를 넘는다는 거. 하지만 저런 사람은 견디면서 자신은……. 제게선 그렇게 돌아서 버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이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시기와 분노로부터 비롯한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간다.”

청우는 흐트러지는 표정을 가다듬지 못하고 돌아섰다. 뒤에서 남자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서의 목소리가 와닿지는 않았다. 휴게실을 나오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괴롭고 또 좋았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우는 미리 사 두었던 선물을 챙겨 집에서 나섰다. 수능까지 다 보고 이제 집에서 쉬고 있는 청아가 원한 선물은 게임기였다. 비용이 꽤 들었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얼마 없을 테니까.

본가에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신입생 때는 자주 찾아갔었는데, 이제는 오가는 게 번거롭게 느껴져 동창들과의 약속이나 가족의 생일이 있지 않으면 잘 안 가게 되었다.

저번에 갔을 때는 부모님께 인사도 하지 않고 급하게 돌아왔다. 그날 처음으로 이서와 몸을 섞었다. 돌이켜 보면 곳곳에 이서와의 시간이 떠다녔다. 청우는 흐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면 모를까 청아는 눈치가 빠른 애니 그 애의 앞에서 이서 생각을 했다가는 걱정을 살 게 뻔했다. 저번에도 아침에 일어나니까 오빠가 없다면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메시지를 왕창 보냈다.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성난 이모티콘을 잔뜩 받았다.

해가 지기 전에 본가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청아가 현관까지 쪼르르 나왔다.

“왔어? 얼굴 보기 힘들다?”

“너 안 춥냐.”

“보일러 빵빵한데, 뭐.”

이 겨울에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청아가 들어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청우는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부모님을 보고 인사했다.

“저 왔어요.”

“어, 청우 왔어?”

청우는 짐을 내려놓은 뒤에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소파 위에 거의 눕듯이 앉아 있는 청아 옆에 자리를 잡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내 선물은?”

“이따가 줄게.”

“나 기대한다?”

“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청아가 싱글거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웃음이 짧게 나왔다.

“참, 산영이 오빤? 괜찮대?”

“응. 잘 지내.”

“에휴, 그때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더라.”

기억이 희미한 어린 시절 이후 처음 가 본 장례식의 인상에 대해 청아가 이야기하는 동안 청우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제 마음을 알지 못해 모든 것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때보다는 나았지만, 더 큰 돌덩이가 남아 버렸다. 제게 다른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이서인데, 그 길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으니 이후의 방향을 설정하는 건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오빠. 내 말 듣고 있냐?”

“어?”

“이씨. 죽을래?”

청아가 청우의 얼굴 위로 잽 날리는 시늉을 했다. 생각을 제어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날파리같이 가벼운 주먹을 대충 피해 주다가 저녁이 다 되었다는 말에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찜닭이었다. 청아가 워낙 좋아하다 보니 청아의 생일에는 닭이 빠지지 않았다. 쇠고기가 듬뿍 든 미역국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잡채, 맛깔스러워 보이는 겉절이를 훑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은 청우는 개운한 숨을 흘렸다. 인스턴트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에 자취생의 식단에 길들여 있던 위가 요동을 쳤다. 오랜만에 입맛이 도는 것 같았다.

“자, 우리 딸.”

아버지가 찜닭에서 목을 골라내 청아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심상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던 청우는 밥알을 씹으며 자신도 닭 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해 냈다. 두 남매는 별나게도 닭의 목을 좋아했다. 하지만 하나뿐인 부위였기에 한 사람만 먹을 수 있었고,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청아의 몫이 되었다.

어릴 때는, 자신이 뒤로 밀려 있다는 생각에 한창 빠졌을 때는 그것이 매우 야속하게 느껴졌다. 고작 먹을 것 하나였지만, 먹을 거라서 더욱 서러웠던 듯싶다. 쟤는 모든 걸 다 가져가 놓고 닭 목마저 빼앗아 간다고 유치한 분노를 품었더랬다.

“청우야, 많이 먹어? 집밥 먹는 거 오랜만이잖아.”

“네. 맛있어요.”

머리가 크면서 어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부 이해했고 이제는 묵은 감정 따위 없었다. 닭 목을 맛있게 뜯는 청아를 보자 문득 이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집에 아픈 애 있으면 나 아픈 건 별일도 아닌 것 같잖아.’

그러자 산영에게 가기 위해 이서를 남겨 두고 떠났던 상황이 다시금 눈앞으로 펼쳐졌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돌연 머릿속을 차지했다. 이서에게도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오르자 어린 자신과 그의 이야기가 겹쳐 보였다.

이서도 이런 일을 자주 겪었을까. 사랑과 관심이 마법처럼 사라졌다고 말했으니 저보다 더했을 수도 있겠다. 저 또한 한때는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여름 방학, 청아가 병원에 입원한 뒤에 저까지 돌볼 여력이 없는 부모님이 자신을 할머니의 손에 맡길 때 그랬다. 이서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혹은 아직도 그리 여기고 있을까.

문득 자신의 이야기와 그의 사정이, 그리고 현재 상황이 하나의 점에서 모이는 듯했다. 이서가 제 마음을 순수하게 믿고 있을까?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다급했던 고백을 진실이라 생각했을까? 산영을 담아 두었던 마음을 옆에서 지켜봐 왔기에 그 감정이 방향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깊게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를 좋아해도 발길은 언제든지 산영에게 향할 거라는 뼈아픈 불신을 자신이 심어 주었다면?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도 그들의 일 순위는 언제나 청아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언젠가의 저처럼.

청우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서가 제 마음을 알고도 갖고 논 것이 아니게 된다. 제가 보고 겪었던 이서가 이서이게 된다.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온 희망이 물길을 만들었다. 그 길의 유혹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밥 안 먹고 뭐 하냐?”

“야라니, 오빠한테.”

어머니의 타박에 청아가 입술을 비죽이며 기가 죽은 시늉을 했다. 정신을 차린 청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케이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 방으로 들어왔다.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탈탈 털며 창문을 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문이 열리고 청아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청아가 웃으면서 안으로 폴짝 뛰어왔다. 찬 공기가 들이쳤기에 창문을 다시 닫았다. 청아는 의자에 앉고서 창가에 기대선 청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물 고맙다.”

“응. 그렇다고 그것만 붙잡고 있지는 말고.”

“아, 잔소리. 알았어.”

청아가 다리를 흔들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망설이는 기색에 청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그냥. 나 내년이면 기숙사에 들어가든 자취를 하든 할 거 아니야.”

“응.”

“그럼 오빠 얼굴도 자주 못 볼 거고…….”

새삼스레 아쉽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게 별소리를 다 한다 싶어 웃자 청아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웃지 말고.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성숙해졌다고.”

“네가?”

“확.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고. 나 오빠 고마운 거 다 알고 있어.”

어리게만 여겼던 동생이 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전부터 줄곧 품었던 생각이리라. 집안의 모든 관심, 사랑이라는 이름의 보호와 걱정을 혼자 받아 내는 것이 절대 편하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청아가 뒤에서 부모님께 자신만 챙기지 말라고 이야기한 일을 알고 있다. 그 뒤로 부모님이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여 자신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결국에는 믿음을 줘야 한다. 어떻게 하면 꺼내 보일 수 있을까.

청우는 청아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청아가 짜증을 내며 청우의 손을 내쳤고, 청우는 산발이 된 동생의 머리를 보며 웃었다.

“알아.”

“……응.”

솔직한 마음을 내보인 것이 부끄러운 듯 청아는 눈을 피한 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 잔다.”

“어, 잘 자.”

청아가 방을 나가고 나서 다시 창문을 열고 조용한 야경을 눈에 담았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전하면, 그가 받아 주기는 할까. 새롭게 열린 생각과는 반대로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빛을 내며 자리를 지켰다.

백화점에 들른 청우는 1층부터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잘 모르는 화장품이나 이서가 더 잘 알 듯한 의류와 가방 따위는 넘기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이서의 늦은 생일 선물을 사기로 했다. 그때 귀걸이가 아닌 다른 것을 사 주기로 해 놓고 깜빡 잊고 말았다. 사실 그에게 선물을 주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관계가 어그러지고 이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다시 만나 이야기할 구실을 만들고 싶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한 결과 빈손보다는 선물이라도 있으면 그것에 대해 말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어떤 일에 이렇게 간절해 본 적은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제 마음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아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이서에게는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조금 낯설게도 느껴져 열없는 웃음이 나왔다.

1층부터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차례로 둘러보다 잡화를 파는 곳에 도착했다. 접시와 향초, 생활용품 등을 훑다가 향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벽과 기둥을 목재로 꾸민 곳에서는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종류가 워낙 많아 하나하나 들어 보며 향을 맡았지만 이서가 어떤 향을 좋아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간 뿌리고 다녔던 향수의 향을 떠올려 보는 사이 직원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고객님,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음……. 불면증에 도움 되는 것도 있나요?”

“그럼요. 이 라인이 불면증 겪는 분들이 많이 찾으시는 제품인데요. 이게 제일 무난하고 잘나가요. 숙면에 도움이 되는 라벤더 향인데, 천연 캔들이고 향이 은은하게 퍼져서 좋아요.”

향 하나를 확실히 고르지 못하겠다면 그의 숙면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향초를 고르는 게 좋을 듯했다. 설명을 들은 청우는 직원이 권한 향초의 향을 맡아 보았다. 크게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향이라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해당 라인의 제품을 세트로 구매했다.

“포장해 주시겠어요?”

“네.”

직원이 포장을 하는 동안 청우는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향초를 침실에 두고 피우며 새벽 동안 괴로워하지 않고 단잠에 드는 이서를 상상했다. 그윽한 향이 청우를 이서의 침실로 데려다 놓았다. 서로를 품에 안으며 온기를 나누었던 때가 어느새 희미해져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포장된 향초를 건네받고서 백화점을 나왔다. 이서에게 줄 선물을 손에 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잘 풀어 보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청우를 호되게 몰아붙였다.

학교에 도착한 청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예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서의 학과가 예술대에 속하기에 일단 그 앞에 가서 이서에게 연락을 해 볼 생각이었다. 만일 그가 거기 없고 다른 데에 있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나쁜 일도 아니었다.

예술관은 청우가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할 일이 전혀 없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이서와 만나고 나서 한 번씩 발걸음 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곳에서 건물을 새삼스레 올려다보다가 이곳에서 차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가슴이 내려앉던 기분이 아직도 선연해 명치께가 찌르르했다. 한숨을 내쉰 뒤에 마음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들 때였다.

“어? 안녕하세요!”

들려온 인사에 옆을 돌아보니 연극 뒤풀이 당시 자신을 김지수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있었다. 청우는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청우 오빠 맞죠?”

“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서 오빠 보러?”

약속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지라 답하기가 애매해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안 들어가세요?”

“아, 네. 여기서 기다리려고…….”

순간 시야에 걸린 익숙한 모습에 청우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서가 어떤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여자가 이서의 한쪽 팔뚝을 꼭 쥔 채 그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둘은 즐거워 보였다. 청우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엥. 그냥 가는데요?”

지수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돌아보아서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주먹을 쥔 손에 쇼핑백의 끈이 잔뜩 구겨졌다.

“어디 가나? 저랑 들어가서 기다리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같이 들어가시지. 음……. 크으, 선남선녀다.”

떠나는 이서와 여자의 모습을 좇으며 지수가 감탄을 흘렸다. 그 감상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은 남자이고, 이서는 남자와 여자 둘 다 만나 보았다고 했지만 여자를 더 많이 사귄 듯싶었다.

“이거 비밀인데요. 둘이 조만간 잘될 것 같아요.”

지수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말이 청우가 살포시 쥐고 있던 용기를 무너뜨렸다.

오랜 짝사랑의 경험은 청우에게 지우지 못할 두려움을 심었다. 마음을 다잡다가도 어디서 튀었는지 모를 물 한 방울에 싹을 틔웠다. 짝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잘 알기에 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겁이 나는 것은 알 수 없는 끝이었다. 만일 오늘 그를 만났다가 완벽하게 거절을 당하게 된다면? 정말 끝이 난다면? 그때는 아주 자그마한 희망도 움킬 수가 없게 된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제 추측일 뿐, 현재 이서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마음의 저울은 다르니 호의적인 감정 단 몇 그램에 이서가 제게로 기울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몇 그램의 무게가 바람결에 날아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 속의 이서는 진짜였고, 제게서 떠난 이서도 진짜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꺼내 보이고도 끝을 통보받느니 차라리 홀로 이 마음을 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짝사랑은 두렵지만, 그 감정이 불러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과의 완전한 끝은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저……. 가 볼게요.”

“네? 그냥 가시게요?”

“시간을 착각한 것 같아서요.”

청우는 지수에게 인사하고서 돌아섰다.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물줄기는 마음을 바람 맞은 갈대처럼 굼실굼실 흔들리게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탕물이 질퍽하게 튀었다. 좌절과 불안, 두려움과 체념이 이리저리 흩어져 바닥을 더럽히고 말았다.

곱게 포장해 두었던 상자를 열어 향초 하나를 꺼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방 안을 그윽하게 채웠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더니, 확실히 마음이 좋은 의미로 가라앉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청우는 책상 한구석에 피워 둔 향초를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벤더 향이 코끝에서 살랑이며 들쭉날쭉한 기분을 부드럽게 다독이려 애썼다. 청우는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려고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씩 지웠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종강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안에 해결을 하지 못하면 영영 멀어질 거라는 압박감이 그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일이 휘몰아쳤다. 아무 걱정 없이 잠으로 빠져 자신을 좀 달래고 싶었다. 팔을 얼굴 위로 얹은 뒤에 눈을 감았다. 길게 호흡을 하며 콧속으로 들어오는 향을 만끽할 때였다. 진동 소리가 그의 무념을 방해했다.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진동은 계속해서 울려 왔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으나 ‘010’으로 시작했기에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야.]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목소리에 청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단 한마디였을 뿐이지만, 이 건방진 말투와 사나운 목소리의 주인은 한 명밖에 없었다.

“차건?”

[나와.]

“어딜?”

[집 앞이니까 나오라고.]

“네가 내 집을 어떻게……. 왜?”

[산영이가 널 찾으니까.]

산영이가 날 찾는다고? 이해되지 않는 소리에 미간에 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산영이가 왜?”

[찾으면 찾는 거지, 왜 잔말이 많아?]

건의 막무가내에 청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영이 저를 찾는다면 왜 직접 연락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고, 건이 제 집까지 찾아왔다는 것도 이상했다.

“산영이 어디 아파? 다친 거야?”

[어.]

“어디가 어떻게. 많이? 심각해?”

[아니. 미쳤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청우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뗐다가 붙이며 고개를 젖혔다. 심각한 일도 아닌데 건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산영이가 아프면 네가 옆에서 지켜야지, 왜 여길 와.”

[…….]

“싸운 거면 가서 사과해. 끊는다.”

안 그래도 이서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이제는 정말 건과 산영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건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제가 대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산영은 제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이제는 그 선을 긋는 노력을 해야 했다.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진심으로.

건은 말이 없었다. 산영을 미끼로 자신을 어떻게 해 보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순 들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사실 정이서가 널 찾아.]

“뭐?”

산영에 이어서 이번에는 이서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청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자기 집 앞까지 와서 이런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지,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려고 했다.

[걔가 씨발, 술에 잔뜩 취해서 널 찾는데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 올 거라잖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서의 이름이 나오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은 달콤한 향을 흩뿌렸다. 청우는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지 갈등하다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이서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응답음만이 들려왔다. 청우는 흠칫해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솟았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청우는 건의 번호를 응시하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큰 외제 차가 좁은 길을 막고 있었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향초를 끈 뒤에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건이 차창을 내리고 턱을 까딱였다. 이걸 타는 게 맞나. 아무래도 찝찝해 떨떠름한 낯으로 쳐다만 보니 클랙슨이 세차게 울렸다. 매너라고는 조금도 없는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이서 지금 어딨는데?”

“가 보면 알아.”

차가 급발진하듯 출발했다. 황급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청우는 이것이 거짓말이란 걸 깨달았다. 설령 이서가 술에 취해 자신을 찾는다 해도, 건이 이곳까지 직접 올 리가 없지 않나. 타인의 심부름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이서의 이름을 듣자마자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튀어나온 게 패인이었다. 깨닫고 나자 그저 허무해져 화도 나지 않았다.

“너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면 뭐, 어쩌게?”

건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고 이내 차의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제멋대로인 행동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서한테 가는 건 맞아?”

“너 정이서랑 싸웠냐?”

“…….”

“그래서 산영이한테 다시 집적거리는 거냐?”

카페에서 산영을 끌어안았던 모습을 건이 목격했던 게 떠올랐다. 그날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 청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이마를 문질렀다.

“미안하다. 그때 그건……. 그냥 확인을 좀 해 보려던 거였어.”

“무슨 확인.”

“나 이제 산영이한테 어떤 마음도 없어.”

자신이 건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며 정리가 필요한 일이었다. 청우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너도 내가 싫었겠지. 불쾌한 일 이제 안 만들도록 할 테니까……. 내려 줘.”

건이 코웃음을 쳤다. 제 말을 곱게 들을 기색이 전혀 아니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시험은 코앞이었고 이서와의 일도 마무리해야 했는데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청우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창에 머리를 기댔다.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해서 잠자코 있었다. 설마 영화도 아니고 데려가서 생매장이라도 할까. 물론 심정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망설임 없이 한다는 게 대단하기도 했다. 그는 산영에게 마음을 전할 때도 이처럼 어떤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산영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을 숨기는 데만 급급했다. 이대로도 좋다고 자기 위안을 하며 절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차가 터널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동굴, 길을 안내하는 빛에 의지해 차는 긴 길을 통과했다. 청우는 문득 사이드 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뒤따라 오는 차가 보였으나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차였다. 누가 쫓아오지도 않고, 그럴 리도 없는데 이상하게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해가 지는 하늘 아래 끝도 없을 것같이 뻗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왜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는데도 퇴보하는 것만 같을까. 길은 언젠가 끝날 테고, 언제까지 도망갈 수는 없었다.

이서와 친구로 남아 그저 그런 관계로 만족하며 멀찍이 떨어선 곳에서 지켜보는 일을 정말 할 수 있을까? 왜 이서와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든, 무엇이든 해 보는 게 맞지 않나? 시도도 해 본 적 없으면서 도망쳐 놓고 또 어떤 원망과 연민을 스스로에게 늘어놓을까. 그게 더 무서운 일 아닌가.

한참을 달린 차가 국도로 진입할 때쯤 눈이 떨어졌다. 첫눈이었다. 강원도에서는 첫눈이 아니었지만, 올겨울 눈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창에 떨어져 와이퍼에 밀려나는 눈송이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일전에 이서와 산영, 건과 함께 찾았던 별장이었다.

이곳에 왜 온 건지 의아해하는 사이 건이 먼저 차 밖으로 나갔다. 청우도 따라 내리자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청우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야, 뭐 해?”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건의 손에는 제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뭐 하자는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자, 건이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야. 야!”

얼른 문을 열어 보려 했으나 이미 잠겨 버렸다. 이내 차창이 내려가더니 건이 조소 어린 낯으로 청우를 내다보았다.

“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뭐? 야!”

건의 차가 떠나 버렸다. 청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좇다가 건이 완전히 떠나 버렸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는 다른 사람에게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지갑도 가지고 나오지 않아 빈털터리였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부닥친 걸까. 어느새 해가 모습을 감추었고, 사위가 어둑한 고요에 잠기고 있었다. 청우는 소리 없이 눈이 쌓이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기다리라는 말은 돌아오기는 한다는 뜻일 테니 일단은 안에 들어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별장의 문은 다행히도 열려 있었다. 사람이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는지 난방이 되어 훈훈했다.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런 곳에 혼자 떨어지니 외려 차분해졌다.

노란 불빛을 흩뿌리는 조명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이 상황은 여전히 어이가 없었지만, 막무가내인 건과 함께 긴 거리를 달려오면서 어느 정도 마음이 정돈되었다.

이제 도망치지 말자. 진심으로 부딪쳐 보지도 않고서 제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제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설령 거절당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는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이 지나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굳은 다짐을 머금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건이 돌아왔나 싶어 청우는 밖으로 나갔다. 별장 앞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건의 차가 아니었다. 의아해하는 순간 뒷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이서였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집에서 입는 차림을 한 그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이 외딴곳에 뚝 떨어진 이서를 맞닥뜨리자 정말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정해진 길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시선이 맞닿아 이서가 눈가를 찡그린 순간 세단이 그를 두고 떠났다. 이서는 떠나가는 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안녕.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어…….”

“너도 차건한테 끌려왔어?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그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에게는 난감한 상황일지 모르겠으나 청우에게는 기회였다. 차건이, 제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놈이 지금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서가 제 연락을 피하거나 만남을 거절할 상황이 원천 차단되었다. 청우는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응, 걔가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걔도 참 어지간해. 산영이 친구라 차마 험한 짓을 할 순 없었나 봐.”

골 때리는 자식이라며 헛웃음을 흘리는 이서의 옷차림을 훑었다. 얇은 옷이 점점 거세지는 눈발에 젖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

“핸드폰이나 지갑 있어?”

“없어.”

“나도. 저기 뒤쪽에 올라가면 관리인이 사는 곳이 있을 거야. 어딘지는 가 봐야 알 것 같긴 한데, 가서 뭐라도 받아 올게.”

청우는 돌아서는 이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 탓에 이서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다시 청우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냥 자고 가자. 해 다 졌고 눈도 많이 오는데, 거기 사람이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았다. 건이 생각이 있다면 내일 아침에는 오지 않을까. 그 시간 동안 기다리며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속에 감춰 두었던 것을 털어 내면 조금이라도 닿을 거라 믿었다.

청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 이내 붙잡힌 팔로 내려왔다. 청우는 손을 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아무 짓도 안 할게.”

그래도 이서의 마음과 기분이 최우선이 되어야 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대답을 기다리는데, 이서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짓을 하려고 생각은 했나 봐?”

“……안 했어.”

“그래……. 들어가자.”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서가 눈 오는 하늘을 찡그린 채로 올려다보다가 걸음을 뗐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둘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짧은 사이 얼었던 몸이 훈훈한 기운에 녹았다.

긴장이 되어 입술이 말랐다. 손을 만지작대며 서성이는데 이서가 소파에 앉더니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어디 아파?”

“약을 좀 먹었더니.”

“약? 어디가 아픈데.”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수면제. 아, 역시 뒤끝이 안 좋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여 걱정이 되었다. 수면제를 복용할 정도로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던 걸까. 청우는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럼 자는 중에 나온 거야?”

“끌려 나왔어. 문을 따고 들어오더라고.”

“그건 범죄잖아.”

“걔가 뭐 그런 걸 신경 쓰겠어?”

경악하는 청우의 옆에서 이서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청우는 그의 얼굴을 살피다 물었다.

“더 잘래?”

“아니야. 저녁 먹었어?”

“아니.”

“그럼 밥이나 먹을까.”

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그리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청우는 그를 따라가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찬장을 열자 파스타 면과 소스, 참치 통조림, 김, 즉석 밥 따위가 있었다. 냉장고는 빈 채라 먹을 게 없었다. 이서가 혀를 차며 파스타 면과 소스를 꺼냈다.

“이걸로도 괜찮겠어?”

“응.”

“그럼 앉아 계세요. 내가 파스타는 또 잘하거든.”

청우는 팬과 함께 조리 도구를 척척 찾아 준비하는 이서의 뒤에서 어정거렸다. 향초를 가져왔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선물이 없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일단 이서가 자신을 피하려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좋은 신호로 여겨야 했다.

청우는 무언가 도와줄 게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파스타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고, 반찬으로 준비할 만한 것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해 보겠다고 숟가락과 포크를 꺼내고 물을 컵에 따르는 사이 이서가 끓는 냄비에 면을 집어넣었다.

삐딱하게 서서 파스타를 준비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식탁 앞에 앉았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가 고요한 공간 안에 울렸다. 어쩐지 서글펐고 그럼에도 좋았다.

“파스타 많이 해 봤어?”

“응. 거창하게 할 거 아니면 간편하게 해 먹기 좋거든.”

“넌 못하는 게 없냐.”

이서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청우를 흘깃 돌아보며 웃었다. 청우는 턱을 괴고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면을 한 가닥 꺼내 맛보더니 물을 버리고는 팬에 소스와 함께 볶는다.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팬을 휘젓다가 불을 끄고 접시에 담았다.

하얀 접시에 담긴 토마토 스파게티가 식탁 위로 놓였다. 따끈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자, 드세요.”

“고맙다. 잘 먹을게.”

청우는 포크로 면을 크게 말아 한 입에 넣었다. 시판 소스라 유별나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와서 먹으니 특별하게 느껴졌다.

“맛있다.”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냉장고도 안 채운 거 보면 우리 밥 먹일 생각은 없었나 봐.”

“그러게.”

“낮에 왔었다며. 지수한테 들었어.”

포크로 면을 뜨던 청우가 멈칫했다. 그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에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가 입꼬리를 올렸다.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

“어, 하려고 했는데…….”

“온 거 늦게 알아서 미안했네. 다음엔 연락하고 와.”

누구에게나 보여 주는 미소를 띤 낯에서 빈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낮에 여자 친구와 화기애애하게 건물을 나서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청우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분이랑 만나?”

“누구?”

“봤어. 너랑 같이 나가는 거.”

“아.”

이서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더니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그가 면을 씹는 동안 청우는 대답을 덤덤하게 기다렸다.

“만나는 건 아니지만…….”

“…….”

“내 대답이 너한테 기대를 줄까? 그러면 만나는 걸로 하고.”

미소를 머금은 낯은 얄밉기까지 했으나 만나는 게 아니라는 답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청우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크를 손안에서 돌렸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하며 접시를 비우는데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들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서가 그저 잠깐이었을 뿐이라는 듯 눈을 돌렸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다 먹고 나서 청우는 일어나 식탁 위를 치웠다. 그릇을 씻는 동안 뒤가 조용해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든 보고 있지 않든 동요하게 될 것 같아 설거지에 집중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서가 없었다. 당황해서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주방을 나왔다. 1층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아도 그가 없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둘이 함께 창밖을 구경하던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이서가 보였다. 그는 이번에도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얀 눈이 펄펄 내린다는 것이었다.

벚꽃이 피는 봄, 풀벌레가 우는 여름, 단풍이 절정인 가을. 사계절의 그림을 모두 이서와 함께 보고 싶었다. 내년의 우리는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청우는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이서의 옆에 다가가 서자 그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렇게 눈 많이 오는 거 오랜만에 보네.”

“응. 눈 오는 거 좋아해?”

“보는 건 좋지. 이런 날 운전하기는 싫고. 넌?”

“난 그냥, 좋지도 싫지도 않아.”

재미있는 말도 아니었는데 이서가 픽 웃었다. 청우는 바깥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위에 턱이 있어 손바닥에 닿지는 않았으나 바람결에 들어온 눈송이 하나가 손끝에 안착했다. 차갑게 녹아내리는 감각을 가만히 느끼다가 손을 안으로 들였다.

곁눈으로 이서를 보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묵직하게 뛰며 어서 고백하라고 종용했다. 청우는 제 손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정이서.”

“응?”

“내가 너한테 믿음을 못 줬어?”

이서가 그제야 청우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낯을 청우는 담담하게 마주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난 너를 두 번이나 두고 갔잖아. 내가 전적도 있고, 너는 내가 산영이를 좋아하는 걸 옆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너를 좋아한다는 내 말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 마음이 이해가 됐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고.”

좋아한답시고 상대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깨달은 사랑에 허둥지둥했으니 제 감정이 충동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자신과 이서, 둘의 상황은 특수했다. 그러니 제 감정을 앞세운 고백보다는 진솔한 대화가 먼저 필요했을 터였다.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돼? 네가 날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려서 나왔다. 이렇게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을 받아 달라고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받아 줄 거라는 기대와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번갈아 찾아와 가슴을 뜨겁고 차갑게 적셔 댔다. 그 속에서 중심을 지키며 청우는 이서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이서의 시선이 까만 밤, 하얀 부스러기가 흩날리는 풍경으로 잠시 향했다. 청우는 그의 귀에 여전히 제가 선물해 준 귀걸이가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는 한 번이라도 자신을 의식했을까.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웠던 위치에서 그의 귀에 귀걸이를 끼워 주던 순간이 자신에게만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아닐 터였다.

그가 다시 눈을 돌려 자신을 마주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노랗게 익은 햇빛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만 같은 다갈색 눈이 순간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랑 내 마음이 같을 거라는 전제를 두고 있네.”

“난 그렇게 믿어.”

“왜?”

“그 시간이 전부 가짜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제 짝사랑을 보다 못해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나섰던 그가 제 마음을 알고도 저를 갖고 놀았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한 번도 쌍방의 사랑은 해 본 적이 없었으나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외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제 내부에 존재하는 이서를 떠올려 보면 나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정말 나한테, 조금의 마음도 없었어?”

“없었어.”

단번에 나온 대답에 청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부정을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쓰라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여태까지 네가 날 갖고 논 거밖에 안 되는데, 그게 말이 되냐?”

“왜 안 돼? 청우야, 넌 날 너무 좋게 보고 있다니까.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너 같은 애 갖고 노는 거? 일도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나 잘 갖고 놀다가 왜 이제 와서 피하는데? 네가 씨발, 진짜 못된 놈이었으면 나한테 이런 말 하지도 않았어!”

“질렸어.”

태연한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사나워진 숨을 가라앉히며 청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화가 났다. 이서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무엇이 이렇게 서로를 엇갈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과 기회를 주지 않는 이서 모두에게 울화가 치솟았다.

청우는 손을 뻗어 이서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틀어막으며 뼈와 뼈끼리 조이는 느낌이 들도록 강하게 그를 붙잡았다.

“너 나랑 안 볼 자신 있냐? 이대로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서 얻는 게 뭔데? 서로 부딪치더라도 나아가는 쪽이 더 낫잖아.”

“시작도 안 하는 관계가 더 나을 수도 있어.”

이서는 지친 듯 보였다. 미소로 겹겹이 싸여 있던 얼굴이 드디어 민낯을 드러냈다. 그는 내리는 눈덩이를 모조리 맞아 젖어 버린 것처럼 몹시 고되어 보였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자신일까. 손에서 힘이 풀렸고, 맞잡은 손이 뚝 떨어졌다.

청우는 고개를 돌려 눈이 쌓이는 풍경을 응시했다. 하얀 눈이 어둠과 공존하며 밤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감정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그 사실이 뼈아팠다. 이서의 저울 위에서 자신은 큰 무게를 짊어 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몰아붙여 얻어 내는 마음이 쟁취인지 약탈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줘야 했다. 혹은 서로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다르다는 걸 인정하든가.

청우는 말없이 돌아서 발코니를 나갔다. 방문 밖으로 막 발을 뻗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서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낯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정이서. 좋아해.”

혀로 굴리면 참 부드럽고 다정한 이름이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 이름의 뜻은 기쁜 여름이라 했다. 그는 원래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부모님을 여름에 만나 기쁜 여름이 되었다. 매년 찾아오는 이서의 여름은 어땠을까.

“나는 달라. 나는 그런 마법 같은 거 부릴 줄 몰라.”

“…….”

“믿는 건……. 누군가를 믿는 건 결국엔 자기 몫이더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은 양쪽이 다 당겨야 유지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은 끈을 쥐여 주었고, 이제 잡거나 당기는 건 그의 몫이었다.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뭘 더 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서의 뒤로 내리던 눈이 어느새 멎었다. 청우는 걸음을 뗐다. 찾아온 건 기다림이었다. 절망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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