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조각들 1
오랜만에 윤상우에게 연락이 왔다. 인사도 없이 ‘나 판교다’라는 메시지만 덜렁 보내왔다. 무슨 일로 구로에서 판교까지 왔는지 묻자 연구소 방문으로 잠시 들렀다고 한다. 윤상우를 마지막으로 언제 봤었지. 작년이었나. 기억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동창 중 누군가의 결혼 소식으로 식장에서 겨우 얼굴만 본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서로 바쁘다 보니 랜선 친구인 양 메시지만 간간이 주고받았다. 프롤레타리아의 삶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한 한탄과 상사를 죽이고 지옥에 가겠노라는 말장난을 몇 마디 나누다 어느 한쪽이 답장을 하지 않으면 어영부영 채팅 리스트 저 아래로 내려가고 만다.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이란 늘 그렇다. 매번 만날 약속을 하고 당일이 되면 의도치 않게 갖은 이유로 파투가 나고 말았다. 회사 일이 갑자기 몰려 정시 퇴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비단 나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번갈아 파투를 내다 보니 결국 아무 계획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제 위치를 밝힌 후 보내온 ‘얼굴이나 보자’는 메시지에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것처럼 말이다.
잘됐다 싶었다. 마침 이호연도 초과 근무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겸사겸사 밥이나 먹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동창인 윤상우를 만날 것이라 알려 주고 퇴근을 위해 짐을 챙겼다.
역 앞에서 마주한 윤상우는 변함이 없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구석 없이 기억에 남은 그대로였다. 옷을 입는 스타일도 매년 비슷비슷하고, 머리도 앞머리가 5대 5인지, 아예 가리는지에 대한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근래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식당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뗐다.
윤상우는 식당 안쪽에 자리를 잡자마자 밀도가 높은 구로보다 판교가 좋다며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식당 내부를 둘러보다 생각에 그대로 잠겨 들었다. 여기도 이호연이 추천해 준 식당이었지. 메뉴가 다양해서 배를 채우기에 좋고, 술도 종류가 많아 취향에 맞게 골라 마시면 되었다. 요리해 먹기 귀찮은 날이면 종종 찾는 곳이라 가게 주인이 이호연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다. 조만간 오자고 할까.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뜨리는데, 맞은편에 앉은 윤상우가 무어라 구시렁대더니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듣고 있냐?”
윤상우가 눈살을 찌푸린다.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나를 향해 탐탁잖은 시선이 달려들었다. 나는 뜨끔하여 후다닥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으응, 듣고 있지.”
“심각하다니까, 진짜.”
내 시선이 다시 저에게 향하자 윤상우가 꿍얼꿍얼 상황을 늘어놓았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 주임을 욕했고, 대학 때에는 자타공인 ‘또라이’ 선배를 욕했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은 ‘지옥의 주둥아리’라 명명한 상사를 욕한다. 그들을 칭하는 별명만 바뀌었을 뿐, 윤상우가 맞닥뜨린 상대들 전부 하는 행동 패턴이 퍽 유사했다.
“나 진짜 탈모 올 것 같아. 업무 진행이 안 돼. 회의만 들어가면 주둥이를 꿰매 버리고 싶다니까. 걔가 입 한 번 털 때마다 기획실에서 도끼눈을 뜨고 우리만 보는데, 우리라고 어쩌겠어. 힘이 있나. 너넨 그런 놈들 없어? 규모도 큰 회사니까 그런 일 없을 거 같은데.”
“비슷해, 우리도. 우리가 큰 거냐, 모회사가 큰 거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나를 보며 윤상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이코 질량 보존의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되기 마련이다. 열에 하나가 사이코라는데, 내가 다니는 SG플레이가 삼백 명 규모니 삼십 명이 사이코, 또라이라는 말이다. 회사의 대표적 사이코가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나 걸리는 놈이 있다. 사업부의 박동수. 그의 이니셜을 따 디도스라 부르는 인간 바이러스가. 나는 설설 고개를 저으며 반 정도 남은 잔을 비웠다. 로그아웃한 상태에서 사측 놈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뭐래?”
“위로는 해 주는데 결론은 하나지 뭐…. 참고 넘기든가 이직하든가. 누나도 세 번 정도만 더 참으라고 그러고.”
한숨을 푹 내쉰 윤상우가 소주잔을 들어 가볍게 털어 마셨다.
“은아 누나?”
윤상우는 연거푸 들이켠 술로 불콰해진 얼굴을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오래 사귀네.”
“3년이 오래인가? 뭐, 내 기준 오래이긴 하지. 이대로 결혼할 거 같기도 해.”
윤상우가 제 연인을 떠올리며 해죽, 웃음을 입가에 내걸었다. 조금 전까지 팀장을 욕하던 낯은 어디로 가고. 하여간, 단순하기는. 윤상우는 두 살 연상인 여자 친구와 벌써 3년이 되어 갔다.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 단위로 연애를 하던 놈이 3년 전, 첫눈에 반했다며 제 사랑을 고백해 왔다. 연락이 닿을 때마다 운명이라 말하던 사람이 바로 현재의 여자 친구인 강은아였다.
“곧 누나 생일이거든. 이벤트 하면서 프러포즈도 하려고.”
이벤트? 프러포즈? 크게 뜬 눈으로 윤상우를 바라보았다. 윤상우가 결혼을? 비뚜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던 자세를 풀고 상체를 바짝 기울이자 윤상우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벤트는 비밀이고, 프러포즈는 상황 봐서 같이 할지 아니면 따로 할지 고민 중이긴 해.”
예물 예단은 따로 하고, 프러포즈용 반지와 가방을 보기 위해 퇴근 후 백화점도 다녀왔단다. 어쭙잖게 공간을 빌려서 초를 켜고 사랑해 플래카드를 드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프러포즈는 그럼 호캉스 하면서 선물 주는 걸 거고, 이벤트는 뭔데?”
“그게….”
주저하는 윤상우를 보며 “뭔데.”라고 재촉했다. 자그마치 15년이나 보고 지냈는데 숨길 비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막말로 나는 이놈이 저지르고 다녔던 흑역사 리스트를 당장에라도 읊을 수 있을 만큼 그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일화를 꼽아 보자면, 그룹 과외를 한답시고 받은 과외비와 해지한 적금으로 오토바이를 구매해 어머니와 아버지께 먼지 나도록 맞은 일이나, 수학여행 당시 몰래 마신 술에 취해 숙소 창틀을 망가뜨리고 괴성을 지르며 돌아다니다 미친개에게 쫓긴 일, 졸업 여행으로 간 베이징에서 호텔 옆 카지노에 숨어들었다가 현지 카지노 직원에게 신고를 당한 일 등, 고등학교 재학 3년 동안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끊임없이 일으키고 다녔다.
“아이 씨, 보고 놀라지 마라. …이걸로 준비했거든.”
윤상우가 휴대폰을 꺼내어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주변을 두리번대며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나. 그는 혹여나 누가 볼까 한 손으로 화면을 반쯤 가린 채 내게 제 기기를 넘겼다.
[망사 섹시 For Men – 노골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을 겸비한 섹시 팬티!]
“으악! 미친놈아, 이게 뭐야!”
소스라치게 놀라 윤상우의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내 우렁찬 비명에 양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당황한 윤상우가 휴대폰을 낚아채어 도로 가져가 버렸다. 그러면서 “쉿” 하고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창피함은 누구의 몫이란 말인가.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눈짓으로 퍼부으며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팬티는 개뿔, 어망이라고 해도 믿겠다! 저게 무슨 팬티야!
“안 본 눈 산다, 이 미친놈아.”
“그래서 비밀이라고 했잖아, 새끼야. 아, 씨발.”
“미친놈인 건 진작부터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욕지거리를 내뱉은 윤상우가 낭패 섞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마른세수를 한 그가 길게 한숨을 토해 내며 비어 있는 잔에 소주를 한가득 채웠다.
“네가 몰라서 그래. 저거 입으면 누나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
“나만 입는 것도 아니야. 커플 속옷이란 말이다.”
들릴 듯 말 듯 윤상우가 주변을 살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처음 시작은 2년 전 둘이 떠난 첫 여행에서라고 한다. 드디어 사귀고 1년 만에 잠자리를 갖는 건가 싶어 숙소에서 타이밍을 보고 있는데, 누나가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라고. 같이 입으면 좋을 것 같아 준비했다며 원색의 속옷을 그에게 건넸다고 한다. 심지어 그때 입은 속옷은 지금 보여 준 망사 속옷보다 더 수위가 높은, 성기를 정면으로 수납 가능한 속옷이었다고 말했다. 윤상우 역시 처음 본 남성용 섹시 속옷에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사랑해도 이건 아니라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윤상우가 쐐기를 박았다.
“성욕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냐. 좋으면 그만이지.”
“그거 은아 누나가 한 말이냐.”
“어…….”
내 타박에 윤상우가 암암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본인이 한 말도 아니면서 꼭 제가 한 것처럼 하고 있어. 나는 입을 다문 채 윤상우의 얼굴을 뜯어보듯 응시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성별로 구분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본능에 충실한 것이 죄는 아니잖아.
“진짜야. 입고 하는 날이랑, 안 입고 하는 날의 차이가 있어.”
찢는 맛이 있다고 했단 말이야. 눈에 힘까지 줘 가며 진지하게 말을 잇는 윤상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끓는점부터 다르다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그런데 찢는 맛이라니. 누가 찢는 건데. 호기심이 인 눈으로 윤상우를 바라보았다. 설마 네가 입고 네가 찢는 건…? 뜨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봐도 미친놈인데? 이놈 이거,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엇, 누나한테 연락 왔다.”
휴대폰을 붙든 윤상우가 내게 눈짓을 보내왔다.
“그냥 일어나자. 나도 슬 피곤해.”
“나가서 전화 받고 있을 테니까 계산 좀. 이체해 줄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휴대폰을 대며 밖으로 나가는 윤상우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나와 있을 때와 달리 애교성이 다분한 말투였다. 휴대폰을 붙들고 얼굴을 붉혔다가, 우왕좌왕 당황하기도 하며 어리광을 부린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는 다른 친구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때는 윤상우가 은아 누나랑 문자만 했었나. 실제 통화하는 걸 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재킷에 팔을 꿰며 계산서와 지갑을 챙겨 카운터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더 하다가 갈 것 같네요. - 일억이♥]
마무리가 보이는 상황이라, 조금 더 한다는 게 결국 자정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볼 요량이었는데. 아쉬움을 드러내며 먼저 자겠노라 답장을 보냈다.
일이 많은가. 하긴, 개발자가 야근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2주 전부터 평일에 두 번 정도는 수면실로 향하는 이호연을 보면 안쓰럽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집이 코앞이니 일찌감치 자고 내일 일찍 출근해도 될 텐데, 집중력이 깨진다며 마무리를 짓겠다는 거였다. 사세 확장을 굳이 하지 않아도 너끈하다면서, 제때 보내 주면 좀 좋아. 주말 출근을 하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건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이불을 목까지 쭈욱 끌어당겨 덮었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몇 잔 마신 술로 눈두덩이 묵직했다. 느리게 호흡하며 몸에서 힘을 빼자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의 문턱이 발치에 닿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이때쯤이면 아침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숙면을 취했는데 캄캄한 어둠에 잠긴 방은 아직 깊은 새벽이었다. 잠기운이 묻은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를 더듬었다. 휴대폰 기기가 손에 잡혔다.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리자 환한 불빛이 그대로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따끔한 눈가를 깜박여 시야를 확보하자 집에 도착해서 씻고 누웠다는 이호연의 메시지가 바로 보였다.
[출발. - 일억이♥]
[집입니다. - 일억이♥]
[씻고 나와서 누웠어요. 내일 또 연락해요. 잘 자요. - 일억이♥]
시간 차가 얼마 나지 않는 그의 메시지 내용을 읽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방향을 잃은 손가락이 인터넷 창과 OTT 서비스를 오가다 휴대폰 전원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바로 잠들기는 무리였다. 깊게 한숨을 내쉬다 문득 윤상우가 보여 준 속옷이 생각나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곧장 구글을 실행해 ‘성인 속옷’으로 검색어를 입력했다. 상단에 보이는 사이트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자, 메인 배너에 ‘내 남자를 조루로 만드는 남성용 섹시 속옷’이라는 카피가 바로 보였다.
정말 이런 걸 판다고…?
사이트 곳곳을 살펴보다 남성용 속옷 카테고리를 선택했다. 리스트 상단에 보이는 롤링 배너에 베스트 상품이 돌아가고 있었다. 두 번째 걸린 배너에 뜨는 속옷이 윤상우가 고른 것과 유사해 보였다.
정말 차이가 있을까. 내가 저런 그물 같은 속옷을 입는 걸 이호연도 좋아할까. 평소에도 새벽까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다. 입술이 마르고 가슴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배너를 클릭해 상세 페이지로 진입했다. ‘10차 재진행! 섹시 존슨 망사 팬티’라는 상품명에 손에 땀이 배는 기분이었다. 앞섶을 겨우 가린 속옷은 지나치게 여백이 많았다. 심지어 엉덩이 부근에는 검은 꼬리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다. 이런 걸 사는 사람이 진짜 있어?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거라지만, 한 번 입고 나면 너덜너덜해질 것 같은 쪼가리가 속옷이라니. 아연한 눈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사이트의 배너를 바라봤다. 그래픽 요소는커녕, 구매자 눈에 어떻게든 들기 위한 발악이나 다름없는 원색적인 디자인이었다.
[뜨거운 반응! 지금 구매하면 사슬 체인+목줄 무료 증정!]
*사은품은 조기 마감될 수 있습니다.
전환율을 올리기 위한 사은품 증정까지 내걸고 있는 상품이라 베스트로 걸린 걸까. 그리고 저런 게 왜 사은품이라는 걸까. 눈가를 찡그리며 상품의 구매 후기 게시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기는 총 열두 건이 있었고, 그중 세 건의 베스트 댓글이 상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미친놈입니다. 모범 음식점 아니라 모범 빤스! - sexy***, 하트 189
젤이랑 같이 쓰고 천국 다녀왔네요. 지금도 상층운 정도에 있는 듯. 많이 파세요. - kim***, 하트 154
하오츠, 하오츠. - deep***, 하트 102
단지 속옷일 뿐인데, 모범 빤스에 미친놈이라는 댓글에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트 수는 왜 이리 높은지. 설마 하트 누른 사람들이 전부 구매자는 아니겠지? 어쩌지. 주문할까? 속옷이 미친놈이라는 리뷰는 처음 본 데다, 열두 건 전부 호평이라 갈등이 일었다. 고가품도 아니고 속옷인데, 질러 볼까. 일단 주문해서 받아 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안 쓰면 되는 거 아냐? 입을 수도 없는 지경이면 혼자 흑역사 만들고 마는 거지, 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주문서 작성을 마치고 빠르게 결제를 진행했다.
택배는 빨랐다. 새벽에 주문한 속옷은 그날 오전에 송장 번호가 문자로 날아왔고, 바로 배송 중으로 상태가 전환되었다.
이튿날 아침, 박스는 현관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같이 저녁을 먹자는 이호연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쫓기는 사람도 아닌데, 야탑역 앞에서 내려 오피스텔까지 달음박질을 쳤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걱정스레 묻는 이호연의 메시지에 부모님 핑계를 대고 말을 얼버무렸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올라 숨을 고르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현관까지 내달렸다.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며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 밴 관성으로 불을 켜고 곧장 우측 맨 끝 붙박이장으로 향했다. 붙박이장 두 번째 칸에 숨겨 둔 검은 봉투를 꺼내어 들고 침을 꿀꺽 삼켰다. 혼자 사는 집이고 누가 볼 일도 없건만, 괜스레 낯이 후끈거렸다. 접착제가 발린 봉투 끝을 힘주어 당기자 부욱, 소리를 내며 아가리를 벌린다. 그대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봉투를 뒤집었다. 와르르, 포장된 속옷과 사은품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비닐 포장 된 속옷을 들어 올렸다. 비닐을 뜯어 손끝에 닿는 촉감을 느껴 보았다. 육안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통발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손안에 두고 한참을 만지작대다 침을 꿀꺽 삼켰다. 입어 볼까…? 사이즈가 맞긴 할까…? 나는 몸을 반쯤 세워 엉벌린 채 망사 팬티 양 끝을 쥐고 앞섶에 대어 보았다. 탄성이 좋으니 어찌어찌 맞을 것 같긴 한데. 아무것도 입지 않고 이것만 입은 채로 이호연 앞에 서는 거란 말이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는 이런 속옷을 입고 있는 나를 좋아할까.
“아…, 정말….”
혼잣말이 절로 터졌다.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입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에게 망사 팬티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일 걸 생각하니 시야가 아득하게 번지는 것 같았다.
“이건 또.”
이건 또 뭐야. 속옷에 집중됐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쏟아진 사은품에 멎은 눈길과 상반되게, 떨리는 손이 포장된 패키지를 덥석 쥐었다. 사슬 체인과 목줄이 손바닥 위에서 덜그럭거렸다. 비닐을 뜯어 사은품을 확인했다. 목줄과 체인, 원형의 완구 같은 것이 선에 둘둘 말려 있었다. 검은색 목줄은 심플한 디자인으로, 버클 방식이라 목 사이즈에 맞게 끈 조절을 할 수 있었다. 손이 잘게 떨렸다. 내가 원한 건 단지 속옷일 뿐이었는데. 딸려 온 상품들이 너무 엄한 것들이라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상품은 확인한 세 가지가 다였다. 속옷만 필요했는데, 배송 온 것 전부 다 쓰게 될까. 혹시 모르니까 일단 다 챙기는 게 나을까. 근데 언제 입지? 만약 평일에 시도한다면 회사에 이 볼썽사나운 것들을 챙겨 가야 한다. 주말엔 조금 더 수월하겠지만, 그땐 게임도 만들어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고민을 잇는 입술이 옴짝옴짝 달싹였다. 주저하던 나는 크로스백 가장 아래에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결국 평일밖에 없다. 이호연이 오늘처럼 초과 근무를 하지 않는 날을 고르되, 목요일이나 금요일 밤이면 괜찮지 않을까. 목요일이면 금요일 하루 회사에서 퇴근 좀비로 있으면 되고, 금요일이면 다음날이 주말이니 체력적인 부담이 덜할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실행했다. 마치 결전의 날을 고대하는 전사처럼 목요일과 금요일 두 날짜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
일주일이 하릴없이 흘러갔다. 그도 그럴 게, 이호연의 야근 패턴이 내 예상에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만 야근을 한 것도 아니었다. SG플레이에서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의 톤 앤 매너를 맞추자는 윗선과 기획팀의 의사 결정으로 디자인 시스템 개편을 위한 회의가 길어지게 됐다. 처음 섹시 존슨 망사 팬티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내 야근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난 것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말에 시도했어도 좋았겠지만, 이호연이 본가에 일이 생겼다며 화성에 다녀오게 되면서 그와 보낼 주말 찬스도 잡지 못했다.
지난주부터 가방 한구석에 속옷과 사은품(을 가장한 성인 용품))을 챙겨 다닌 셈이었다. 누군가 내 가방을 들여다보거나 뒤져 보는 일은 없겠지만, 가방에만 신경이 쏠려 있어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죄지은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렇게 다시 목요일이 돌아왔다.
오늘도 실패하면 어쩌지. 그냥 주말 데이트고 뭐고, 모른 척 덮쳐 버릴까. 이호연은 내가 하는 행동들 대부분을 귀여워하는 편이니 이번 것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애교로 봐 줄지 모른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퇴근 시간만 바라보는 찰나, 긴 기다림을 보상받듯 이호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부모님이 닭새우를 보내 주셨는데, 같이 찜이나 해 먹을까요. - 일억이♥]
-닭새우요?
눈을 깜박이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꽃새우나 독도새우는 들어 본 적 있어도, 닭새우는 좀 생소했다. 내 물음에 그는 마치 새우 전문가처럼 닭새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육질이 연하고 흰 게 특징이라며, 오늘 바로 먹어야 싱싱함이 살아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그는 오늘이 지나면 아마 라면에 넣거나 국물을 내는 데 사용하고 말 것 같다며 오늘이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어필했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이 그 타이밍인 거지? 이호연이랑 통한 거 맞는 거지? 닭새우가 무슨 소용이야. 새우가 다 똑같겠지 뭐. 드디어 가방에 있는 걸 써 볼 날이 온 건가.
“예준 님.”
“…….”
“예준 님?”
“아, 네. 말씀하세요.”
권재율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메일로 배너 시안 3종 제작해서 드렸어요. 확인 부탁드려요.”
“벌써요? 확인하고 피드백 드릴게요.”
손이 빠른 편이네. 작게 중얼대며 메일함을 열었다. 오전에 전달된 기획팀의 요청서 중 화면에 작게 들어가는 배너 시안 제작을 권재율에게 배분해 주었었다. 기한이 월요일 오전까지라 넉넉하다고 판단해 넘긴 것이다. 기존에 있는 가이드 위에 적절한 컬러와 카피라이트 배치만 얹으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작업물이 올라왔다. 이만하면 윤아영도 오케이 사인을 내릴 것 같았다. 바로 전체 답장 버튼을 눌렀다. 시안이 전체적으로 잘 나온 것 같다는 답변과 함께 이채선과 윤아영을 CC로 걸어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업무를 마무리했다.
“예준 님.”
“왜요.”
“오늘 시간 돼요? 같이 저녁이나 먹자. 그간 안 먹은 지도 오래됐고….”
“안 돼요.”
“아, 왜.”
“되겠냐고.”
단박에 떨어진 거절에 송기현의 낯에 그새 시무룩한 기운이 번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너는 항상 때가 안 좋더라. 역시 너랑 나는 서로 갈 길이 다른 게야.
“어제는 일주일의 중간이어서 일찍 갔고. 오늘은 왜요.”
“목요일이 피로도의 정점이거든요.”
암, 그렇고말고. 월요일은 월요일이어서. 수요일은 일주일의 중간이니까. 목요일은 월, 화, 수의 모든 피로가 정점으로 찍히는 날이니 무조건 회사와 멀어져야 한다. 다른 날은 적당히 튕기다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하더라고 오늘만큼은 절대 안 된다. 당연하게도 내 우선순위는 네가 아니라 이호연이니까.
“그럼 금요일은.”
“금요일을 회사 사람과 보낸다고?”
“전에는 잘만 보냈잖아요. 정예준 변했네, 변했어.”
송기현이 입매를 비죽거렸다.
“다음 주 정도에 맥주 한잔해요. 오늘이랑 내일은 진짜 안 돼.”
네가 이호연의 어마무시한 체력을 몰라서 그래. 사람들이 미국 돼지, 미국 돼지 하는데 이호연은 미국 돼지가 아니라 미국 근육이야. 원산지를 따지자면 한국이 맞는데, 미국산 근육 같달까. 오늘 성공한다면 내일은 퇴근 좀비 예약일 거라고. 어쩌면 내일 오전 반차나 연차를 내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재율 님, 오늘.”
“어허, 기현 님, 번개로 모이는 것도 아니고 벌써부터 그렇게 먹자고 하면 꼰대 소리 들어요.”
“…정말이야? 정말 그런 거예요, 재율 님? 저 지금 꼰대였어요?”
송기현이 울상을 짓는다. 권재율은 난처하다는 듯 모호한 표정으로 나와 송기현을 번갈아 보았다.
“재율 님, 기현 님이 꼰대같이 굴면 신호를 보내요. 그런 말 할 때만 쓰고 있는 안경을 고쳐 쓴다거나.”
“하하.”
권재율이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쨌든, 나는 갑니다? 내일 봐요!”
가방을 챙겨 후다닥 자리를 털었다.
결전의 순간이었다.
“어떤가요. 오랜만에 꺼낸 화이트인데.”
이호연이 준비한 요리는 늘 그래 왔듯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는 통통한 새우의 껍질을 발라 내 앞에 놓아 주며 맛은 어떤지, 간은 맞는지, 함께 곁들이는 술은 잘 어우러지는지를 물어 왔다. 버터 향이 진하게 밴 새우 살을 삼키다 시선을 잠시 와인 잔에 두었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화이트 와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적당한 산미와 열대 과일 향으로 해산물과 즐기기에 좋다고 했던가. 비네티… 뭐였는데. 속으로 중얼대며 턱을 당겨 이호연을 보았다.
내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섹시 망사 존슨이었나, 존슨 망사 섹시였나. 어떻게 말을 꺼내지. 포크를 내려 두며 눈을 데굴, 굴렸다. 자고 가도 되느냐는 물음 자체는 익숙하다. 여기서 출근하겠다는 말만으로도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릴 터다.
물로 입을 헹구고 고개를 돌려 소파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기대어 세워 둔 가방으로 신경이 삐쭉 솟았다.
“예준 씨?”
이호연이 멍한 얼굴로 아무 반응 없는 내 이름을 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도수도 적당한 것 같고, 새우랑 잘 맞아서 맛있어요.”
“입에 맞았으면 됐습니다.”
반쯤 남은 와인을 털어 마신 후 입술을 달싹였다.
“저어, 호연 씨.”
식사를 하며 몇 잔 마시지 않았건만, 그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내일…, 여기서 출근해도 되죠? 한동안 호연 씨 바쁘기도 했으니까….”
말미를 흐리는 나와 이호연의 시선이 얽혔다. 익숙해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소파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뭉개고 있다가 “귀찮으니 자고 갈게요.”라고 말해야지, 안 되겠어. 홧홧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수그리며 혼잣말을 구시렁댔다.
“예준 씨 안 힘들면 자고 가요.”
“어차피 내일 금요일이기도 하고, 적당히 뭉개다 퇴근하면 될 거 같아요.”
내 바람대로 된 적이 거의 드물기는 하지만, 회사 일이 중한 게 아니지. 지금 가방 안에 있는 속옷이 더 중요하단 말이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미뤄 두면 걔가 알아서 할 거야. 가방에 넣고 다닌 시점부터 오늘만을 기다렸는걸.
내게 고정된 맑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같이 씻을까요.”
“아니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미쳤어? 같이 씻으면 준비한 건 언제 입어 보라고!
내 완강함에 이호연이 시무룩하게 눈매를 이지러뜨렸다. 오랜만에 나른한 몸을 풀 겸, 함께 거품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긍정을 표했다면 당장에라도 나를 들쳐 메고 욕실로 향했을 테지.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같이 씻는다는 것은 결코 씻기만 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준비하고 온 내 뒤를 어루만지고, 물고 빨고 핥다가 기진해 밖으로 나올 것이 뻔했다. 선하게 그려지는 상황에 “따로 씻고 싶어요.” 하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이호연은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하고 느리게 욕실로 들어갔다. 달깍, 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듣고서야 깊은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이호연이 씻다 말고 문을 열 것도 아닌데, 굳게 닫힌 문을 흘끗대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 속에서 포장된 속옷과 체인을 꺼냈다. 택배를 받고 뜯어본 후 그대로 가방에 처박아 두고 얼마 만에 꺼내 보는 것인지. 비닐로 소포장 되어 있지 않았다면 입어 보기 전에 그대로 버려야 했을 것이다. 잠시 속옷을 내려다보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빨았어야 했나. 새로 산 속옷은 항상 빨아서 입었는데, 어망을 닮아 얇디얇은 이 팬티만큼은 세탁했다가 찢어질 것 같아 차마 손도 대지 못했다. 손빨래라도 할걸. 아니야, 잠깐 입고 말 텐데. 나는 오른쪽 주머니에 속옷을, 왼쪽 주머니에 체인과 타원형의 스틱을 쑤셔 넣고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었다.
문이 열리고, 이호연이 중요 부위만 젖은 수건으로 가리고 새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언제 보아도 건장한 몸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향하는 그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욕실로 들어와 준비한 물건들을 선반에 올려 두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이호연과 한두 번 몸을 섞은 게 아닌데, 이벤트성으로 준비한 물건들 때문일까.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유난히도 붉어 보였다.
미온으로 맞춰진 물줄기가 어깨부터 가슴, 허리 아래로 떨어졌다. 허리를 틀어 팔을 뒤로 보내 거품이 묻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엉덩이 주변을 더듬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반대편 손으로 벽을 짚고 천천히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힘주어 누른 중지가 원활히 내부를 휘저을 즈음, 가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빨리, 하고 싶어. 열이 오른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부터 손이 분주해졌다. 거품기를 말끔히 씻어 내고 수전을 아래로 내려 물을 잠갔다.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어 급히 물기를 닦았다.
포장을 뜯어 속옷에 왼발과 오른발을 순서대로 꿰어 넣고 그대로 허벅지 위까지 들어 올렸다. 촘촘한 소재가 성기와 엉덩이를 감싸며 묘한 촉감을 주었다. 달랑달랑 붙은 꼬리가 회음부 위를 아슬아슬하게 간지럼 태웠다.
문을 반쯤 열어 그가 준비해 준 옷까지 마저 꿰어 입고,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이호연은 침대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기척에 책을 덮은 그가 팔을 벌렸다.
“따끈따끈하네요.”
보송하게 마른 피부 위로 그의 체온이 덧씌워졌다.
“오늘은 웬일로 자고 가고 싶다고 했을까.”
작게 웃은 그가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어딘가 묘하게 경직된 내 행동을 보고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이호연의 체취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식었던 몸이 재차 달구어졌다. 전희조차 없었건만, 그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과 곧 그에게 보일 속옷에 대한 생각으로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호연이 내 티셔츠를 말아 올려 등허리를 더듬었다. 가슴께까지 티셔츠가 둘둘 말려 올라갔다. 가슴 위로 입술이 떨어진다. 혀끝을 세워 젖꼭지를 찌르고, 강하게 흡입해 물고 씹기를 반복했다. 가해지는 자극에 꼿꼿하게 선 유두가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반대편 가슴도 똑같이 그의 입을 탔다. 쭉쭉 빨리는 소리가 침실 가득 울렸고, 움찔움찔 떨며 간헐적인 신음을 내뱉었다.
상의가 그대로 벗겨졌다. 헐렁한 바지가 골반에 걸쳐진 채로 등이 밀려 났다. 힘없이 무너진 몸 위로 그가 올라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스탠드 끌까요.”
“아니….”
고개를 설설 저으며 그의 손을 바지춤으로 이끌었다. 선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앞섶에 손바닥이 닿았다. 점액질이 묻어나는 바지가 쑤욱, 끄집어 내려졌다. 무릎까지 내려간 바지 주머니에서 체인과 원형의 기구가 빠져나와 침대 위를 굴렀다. 이호연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주머니에 왜 이런 것들이 있느냐는 시선이 느껴졌다. 창피함에 얼굴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눈을 질끈 감고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예준 씨.”
“…….”
“얼굴 보여 줘야죠.”
살그머니 뜬 눈으로 이호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번득이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예쁘다.”
망사 팬티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둥글게 살집이 오른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살덩이를 감싸다 터뜨릴 듯 세게 움켜쥐기를 반복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엉덩이 골을 스치는 손길에 따라 귀두 끝에 맺힌 선액이 주르륵 기둥을 타고 흘렀다.
“목줄까지 샀어요?”
낮게 묻는 음성이 긁듯 쇳소리를 냈다. 흥분이 섞인 탁한 목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사은품…….”
“그럼 이건.”
검지와 중지를 합한 사이즈의 기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건…, 몰라요……. 팬티만 샀는데, 왔어….”
창피함에 목울대가 뜨거워 깔깔했다.
“싫어요…?”
울먹이며 묻자 이호연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흑색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이내 자취를 감췄다. 단정한 입술이 벌어지다 꾹 다물렸다.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망사 팬티를 입고, 기구를 준비한 내가 싫어진 걸까. 홧홧하게 달아오른 눈가에서 왈칵 눈물이 솟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눈물을 훌쩍이자 당황한 이호연이 바짝 얼굴을 붙여 왔다.
“왜 울어. 울지 마요.”
“이런 거, 싫으면 안 할게요.”
“하.”
곤란한 웃음을 터뜨린 그의 얼굴이 흐린 시야에 번져 보였다.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지. 어떻게 예준 씨를 아프지 않게 요리해 먹을 수 있을까. 남김없이 다 발라 먹고 싶은데, 그러면 울 것 같아서.”
“안 싫어요?”
“좋아. 8월도 아니고 10월도 아닌데, 기념일로 삼고 싶을 만큼.”
그가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내 눈꼬리를 혀로 핥아 주었다.
그리고 마치 제 흥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중심부에 비벼 왔다. 망사 소재의 팬티가 예민한 피부를 거칠게 자극했다. 이호연 역시 미간을 좁히며 뜨거운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나는 팔을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호연은 내 몸 구석구석에 입술을 내렸다. 봄비와도 같은 입맞춤이 거듭 이어졌다. 목줄기와 승모근을 물어뜯듯 이로 씹어 자국을 남기고 젖꼭지와 갈빗대에도 얼룩과 같은 흔적을 남겼다. 예열된 몸은 금세 달구어졌다. 작은 자극에도 발끝이 빳빳하게 섰다 곱아들었다. 한참 동안 잇자국을 새기던 그가 뒤로 물러나며 젖은 성기와 고환을 주물럭거렸다. 밭은 숨을 헐떡이며 시선을 내렸다. 달뜬 얼굴로 허리춤을 비비적대었다. 보채는 내 움직임에 팬티가 우악스레 잡아당겨졌다. 양옆으로 팽팽히 당겨진 얇은 천이 부욱-, 하고 찢겼다. 크게 난 구멍에 불거진 성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호연이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젤을 꺼내 들었다. 튜브에서 짜낸 투명한 액체가 사타구니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젤에 피부가 경련하며 울었다. 기구와 연결된 전원 버튼을 달칵달칵 누르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았다. 부르륵 떠는 진동이 허공을 갈랐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로 시선을 기울였다. 그는 미끈거리는 젤을 기구 끝에 묻히며 귀두 끝부터 항문까지 천천히 자극을 가했다. 주름 주변을 배회하던 기구가 입구를 꾹꾹 눌렀다. 경직된 허벅지 근육이 파들파들 호소하였다. 이호연이 나를 달래며 기구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거부감 없이 그것을 집어삼킨 나는 묘한 이질감에 눈가를 찡그렸다.
“으읏….”
“잘 먹네요.”
불편한 몸을 뒤채어 허리께를 내려다보았다. 기구와 연결된 하얀 선만 보일 뿐이었다.
순간, 침대가 출렁이며 이호연이 몸을 붙여 왔다. 다리를 한껏 벌려 오금 사이로 팔을 밀어 넣은 탓에 무릎이 가슴과 맞붙었다. 반쯤 접힌 허리 아래로 연결된 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호연이 내 귓불을 깨물며 낮게 물었다.
“이대로 넣어 볼까. 어디까지 들어가나.”
“으응, 싫어…. 안 들어가…….”
“이러라고 보내 준 거 아닐까요.”
“…무서운데…….”
이호연이 피식 웃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무섭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좋지 않았느냐, 아래를 보면 알겠지만 잘 먹을 거다. 이제껏 잘해 왔지 않느냐. 어르고 달래는 그의 어조에 머뭇머뭇 입매만 달싹이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반만 넣어요.”
겁먹은 눈을 끄먹거렸다. 가뜩이나 큰 그의 성기를 기구를 삽입한 채로 넣는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를 것 같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기구 자체가 그리 크지 않고, 선이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뚝을 쓸었다. 천천히 해 달라는 제스처였다. 입구 끝에 조준된 그의 귀두가 오밀조밀 맞물린 구멍을 파고들었다.
“아, 아윽!”
세찬 압력에 숨이 막힐 듯 조였다. 숨 쉬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들이켠 호흡이 제대로 내쉬어지지 않았다. 그의 성기가 안을 파고들고, 기구를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관통하는 쾌감이 평소보다 강렬하게 뇌리에 꽂혔다. 이호연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철썩대며 파랑이 일었다. 쿵쿵 내리치는 몸짓에 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신음이 불꽃처럼 터졌다. 접힌 몸이라도 풀어 주었으면 했지만, 단단하게 고정된 채로 그의 것이 마구잡이로 들쑤셔졌다.
“아, 아아, 아…!”
미친 사람처럼 눈물과 침을 줄줄 흘려 댔다. 이호연과의 섹스는 언제나 뇌수가 녹을 듯 정신이 혼미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한 것 같았다. 기구 때문인지 내장 전체가 들썩거렸다. 거칠게 휘갈겨진 낙서와 같이 삽입을 거듭할수록 또렷하게 흔적이 남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 위에서 콱콱 찍어 대던 그가 들린 다리를 놓아주며 골반을 쥐고 추어올렸다. 오물대는 구멍에 이호연의 얼굴도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마치 술이라도 걸친 양 불콰해진 낯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엉덩이와 연결되어 몸이 흔들릴 때마다 같이 덜그럭대는 전원 스위치로 이호연이 손을 뻗었다. 그를 말릴 겨를도 없이 달칵, 하고 스위치가 구동하였다.
“아, 안, 으, 하악…!”
배 속 깊은 곳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이호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동과 삽입으로 시야가 하얗게 표백되는 것을 느꼈다. 퍽퍽 허리 짓을 거듭하던 그가 순간 호흡을 멈춘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 왔다.
예준아. 예준아.
거듭 부르는 목소리에 어룽지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다 초점을 찾았다.
“흐윽…. 형, 혀엉….”
덜덜 떨며 배꼽 주변을 더듬다 아이처럼 엉엉 흐느껴 울었다.
이거 꺼줘. 무서워. 싫어. 아파. 아픈 것 같아. 깊어. 싫어요.
두서없는 말들이 아무렇게나 뭉크러졌다. 혼비백산하여 넋을 놓은 내 입 안으로 이호연의 혀가 밀려들었다. 엉겨 붙은 살덩이가 비벼지며 입 주변으로 타액이 넘쳐흘렀다.
허리 아래로 들썩이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호연이 제 성기를 빼내곤 배 속에서 징징 울리는 기구의 스위치를 끄고 선을 쑥 끄집어냈다. 내벽이 딸려 나가며 의지에서 벗어난 하반신이 크게 들썩였다. 까무러치며 날카로운 신음이 비명처럼 터졌다. 탁한 사정액을 질질 흘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쉬이. 예준아.”
“흑, 흐윽.”
“미안해. 너무 셌다. 그쵸.”
이호연이 나를 품에 안으며 뺨과 이마를 훑어 주었다.
“그만할까? 따뜻한 물에 목욕할래요? 아니면 찜질해 줄까요?”
그가 내 등과 허리를 어루만졌다. 훌쩍임이 차츰 가시며 물기 어린 눈으로 이호연을 보았다. 가차 없이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못 갔잖아요….”
웅얼거리며 입술을 비죽거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하면 나 진짜 나쁜 놈인데.”
“…언제는 안 나빴나.”
침대에서 착했던 적이 있어야 말이지. 싫다는 사람 붙들고 만족할 때까지 한 사람이 누군데. 눈을 흘기며 턱을 당겨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가시지 않은 흥분이 얕게 남아 있었다.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것을 감싸 쥐었다.
“손으로 해 줄게요.”
“…귀엽고, 착하고, 다 하네.”
“닥쳐요. 오늘 너무했던 거 알죠?”
이호연이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나는 그의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탁탁, 규칙적인 소리가 외설스럽게 공간을 이지러뜨렸다. 강약을 조절하여 두껍게 발기한 성기의 사정을 유도했다. 그가 제 성기를 쥔 내 손을 감싸며 자위하듯 손을 놀렸다. 뜨겁게 뭉개진 숨이 어깨 위에 닿았다. 얼마간 이어진 자극에 곧추선 성기가 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속옷은 좋았어요?”
“미치도록.”
“그럼 됐어요.”
윤상우와 만나지 않았다면 망사 팬티를 주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호연이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저지른 일이긴 하니까. 결과적으로는 팬티는 찢기고 기구 때문에 거의 혼절하다시피 하며 끝났지만, 마음에 들었다니까 되었지 뭐.
“다음에 또 해 줄 건가.”
“하는 거 보고요.”
“나중에 재미있는 놀이 같이 해 보죠.”
이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눈매를 접었다.
“재미있는 거…?”
“나중에.”
바로 답을 주지 않는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심해 아래로 가라앉듯 정신을 놓았다가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진 탓에 피로가 말도 못 하게 짙었다.
“자요. 자는 동안 닦아 줄게.”
느린 자장가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묵직해진 두 눈을 찬찬히 감았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졸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