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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Track 1 - 트라우마 (19/25)

Bonus Track 1 - 트라우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떠올리는 방법은 쉽다. 혼자 조용히 사색에 잠길 장소를 골라 눈을 감거나 적요에 잠긴 공간에 완전히 젖어 든다. 마치 최면처럼, 고른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떠올리고 싶은 시기나 기억해야 할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여기까지 성공했다면 이미 기억 회로에 한 발 다가선 것이다. 이호연이 특정 짓고 싶은 시기는 여덟 살 즈음. 정확한 나이는 호출하지 못하지만 사건에 대한 메모리가 비교적 구체적이기 때문에 방화벽에 분류된 기억에 접속을 시도한다. 시기를 특정 짓고 ‘나’를 중심으로 점점 범위를 넓혀 나간다.

당시의 풍경, 함께 있던 사람, 객체가 되는 개념들이 정리되어 데이터화된다. 이 과정에서 날씨와 느낀 감정들도 함께 수집된다. 시간과 사건이 한데 모인 허브는 훼손되지 않은 파편을 모아 현재의 내게 통신하기 시작한다. 이 신호를 현재의 이호연이 받는 것이다.

여덟 살의 이호연, 그러니까 나는 엘란트라 뒷좌석에 누나 이호수와 나란히 앉아 있다. 짧은 다리가 좌석 바닥에 닿지 않아 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마다 들썩들썩한다. 옆자리에 앉은 누나는 뚱한 얼굴을 하고 무슨 시골이냐며 입을 댓 발 내밀고 툴툴거렸다.

커다란 마트가 있는 시내를 지난 차량은 닦이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지났다. 사람이 오가는 마트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 상체를 쭉 빼내고는 조수석에 앉은 엄마를 보챈다.

‘과자 먹으려면 저기까지 나와야 해?’

‘똑바로 앉아야지.’

‘흥.’

누나와 똑같이 입이 댓 발 나온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층과 3층, 5층짜리 건물이 듬성듬성 난 시내에서 멀어지며 세월의 흐름을 탄 패옥이 빠진 이처럼 나 있다. 한참을 덜컹대며 시골길을 가로지르던 엘란트라는 탁 트인 벌판 앞에서 주춤, 속도를 늦추었다. 앉은키가 작은 나는 느려진 속도에 상체를 빳빳이 세우고 미어캣처럼 바깥을 살폈다. 굵게 여문 이삭이 고개를 숙인 들판에 다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노란 파도가 바람에 너울거리는 풍광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기서 필름이 끊기듯 재생이 잠시 멈췄다. 매끄럽지 못한 기억은 훼손된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타고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끊어졌던 통신은 감나무와 복숭아나무 단내가 코를 찌르는 마당 앞에서 다시 신호를 보내온다.

‘멀리 가지 말고, 알겠어?’

집 안에 얌전히 있으면 좀 좋아? 엄마는 한마디 하고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한 번 더 걱정이 반쯤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반드시 집 근처에서 놀 것. 마당을 벗어나더라도 멀리 나가지 말 것. 무슨 일이 있다면 소리를 질러 어른들에게 알릴 것. 절대 동생을 혼자 두지 말고 잘 챙길 것.

‘나 이제 애기 아니야.’

누나가 불퉁한 어조로 비죽대며 투덜거렸다.

‘나 이제 열 살이야. 학교도 혼자 잘 가고, 잘 돌아온단 말이야.’

또랑또랑 제 할 말을 하는 누나는 이제 3학년이 되었고, 위험한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그런 누나를 보는 엄마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누나는 혹여나 엄마가 번복할까 싶어 허리를 굽혀 냉큼 내 작은 손을 쥔다.

‘호연이도 잘 챙길게. 엄마아-.’

‘정말이야. 놀아도 이 근처에서 놀아. 슈퍼 갈 거면 허락 맡고.’

‘알겠어, 알겠어. 가자, 이호연.’

누나와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바로 집 뒤꼍으로 향했다. 대문을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한 번도 못 본 뒷마당을 통해 바깥으로 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누나는 어른들 시선에서 멀어지자 곧장 내 손을 내려놓았다.

‘누나, 어디 가?’

엄마가 조금 전 슈퍼라고 말했다. 마트는 아니어도 이 근처에 슈퍼가 있으면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금세 입 안에 단내가 고였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다 누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누나, 슈퍼 있어? 나 과자.’

‘과자 같은 소리 하네. 없어, 그런 거.’

‘누나아.’

‘쉿, 조용히 해. 이 앞에 잠자리 있는지 봐야 한다고.’

‘잠자리?’

‘응, 고추잠자리.’

‘왜 고추야?’

‘꼬리가 빨간색이어서.’

‘그럼 다른 잠자리도 있어? 초록색, 파란색.’

과자에서 잠자리로 관심이 옮겨 간 나는 손가락을 꼽아 보며 좋아하는 색깔을 웅얼거렸다.

‘글쎄? 아무튼, 누나가 잠자리 보면 잡아줄게.’

누나는 개구쟁이처럼 씩 웃으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쫓다 걸음을 멈췄다. 짧은 다리로는 그녀의 속도와 맞출 수 없다는 걸 어린 나이였지만 잘 알았던 것이다. 너른 부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누나가 돌연 ‘우와아!’ 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녀가 내지른 소리는 비명이 아닌 흥분 섞인 탄성에 가까웠다.

‘짱 커!’

‘짱 크다!’

‘와 씨, 대박이다.’

‘이호연! 이리 와 봐!’

누나의 반응은 너무나 솔직했다. 자신이 발견한 생명체에 대한 놀라움과 약간의 경악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아니다, 내가 갈게!’

누나는 내가 잰걸음으로 가까이 가는 것보다 내가 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장 발을 놀렸다. 내게 다가오는 걸음걸음이 힘차게 지면을 내디뎠다. 누나의 두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나는 크게 눈을 뜨고 그러모은 두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희고 가는 손가락 사이로 굽어진 진갈색의 다리 같은 것이 보였다.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온 누나는 그러쥔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거 봐! 내가 엄청 큰 곤충 잡았어!’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허리를 반쯤 굽힌 누나의 음성은 무척이나 신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손바닥이 조개가 입을 뻐끔, 벌리듯 완전히 벌어졌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서 갈색빛이 도는 몸체를 가진 커다란 곤충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눈이라도 마주친 것 같은 감각에 등허리를 타고 올라온 선득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순간-.

누나의 손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생명체가 제 도약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뒷다리에 힘을 주며 강하게 뛰어올랐다. 시야 가까이 곤충의 몸체가 크게 다가오는 듯 느껴졌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1초, 2초, 3초.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다 종국엔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곤충의 기다란 다리가 입술을 가른 것도 같았다.

‘으우, 으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얼굴 위에 착지한 얼굴만 한 곤충을 고사리손으로 밀어 내려 부단히 애썼다.

‘이호연!’

나처럼 놀랐던 누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엄마아-! 벌레가 이호연 먹었어!’

흰자위를 보이며 까무룩 의식을 잃은 내 귓가에 누나의 당혹감 서린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허브가 내보내는 신호에 의한 데이터는 여기까지였다.

“…연, 이호연! 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주말을 맞아 본가에 온 후, 서재 리클라이너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잠기운이 번진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미간을 좁혔다. 앞에 선 이호수가 내 어깨를 뒤흔들었다. 눈가를 더듬던 손을 내려 이호수를 올려다봤다.

“뭐 하는데 불러도 몰라. 나와서 밥이나 먹어. 갈비찜 했대.”

“…….”

“야, 들었냐고.”

“…꿈꾼 것 같다.”

“꿈? 얼마나 잤다고 꿈까지 꾸냐.”

“어릴 적 시골 갔을 때.”

심드렁하게 답하던 이호수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존나 웃기다. 그 잠깐 동안 그걸 꿈으로 꾸냐. 개꿈도 찾아서 꾸고 있네.”

어깨까지 떨며 웃는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직도 싫어?”

“싫어.”

단호하게 말했다. 이호수는 치를 떠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한국 오는 동생을 위해서 집도 내어 줘, 세도 안 받았어. 얼마나 좋은 혈육이야, 어? 고작 벌레 몇 마리 나온다고 그렇게 내버리고 새 집을 구해?”

“…그 집은.”

아니다. 입을 꾹 다물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개체의 벌레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집은 처음 보았다. 이호수가 선선히 6개월을 살아도 된다고 했던 것이 전부 나를 놀리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몸을 사리고 지냈던 때가 훨씬 나았다. 끽해야 두세 번 정도였을까. 그마저도 내가 몸을 굳히고 있는 동안 동료들이 벌레가 나온 것을 신기해하며 잡으려 했고, 벌레가 알아서 달아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옥에서도 방역에 신경을 꽤 썼었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는데.

“처분하는 건 어때? 판교 근처로 구하려면 백현동도 있잖아.”

“돌았니? 민재랑 나의 스위트 홈을 네가 뭔데 팔라 말라야. 우리가 사는 2년 동안 나오지도 않았다고.”

“누나가 보기 전에 매형이 잡았나 보지.”

뾰족하게 날을 세우는 이호수를 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호수는 서재를 벗어나는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그녀는 베푼 친절을 받았으면 넙죽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집을 팔라는 훈수나 둔다며 구시렁거렸다.

주방으로 향하다 뒤를 돌아 이호수를 내려다봤다.

“누나.”

“응?”

“갖고 싶은 거 있어?”

“으응?”

“뭐 갖고 싶은 거 있냐고.”

이러나저러나 이호수 덕에 정예준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긴 했다. 인연이었다면 언제고 만났을 테지만, 그 집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가능성을 조금 더 이르게 이어 준 것은 모아와 그 집이니까.

“고마워서.”

“갑자기?”

“누나 말대로 그 집에 잠깐 살게 해 주긴 했으니까. 갖고 싶은 거 있는지 생각해 보고 말해 줘.”

손을 휘휘 저었다. 주방에 들어서자 달큼한 갈비찜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박민재가 나를 보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나 또한 그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맞은편에 앉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집에 정예준을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아들 하나 더 얻은 셈 치라고 하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야, 나 그럼 현금으로 줘!”

100만 원! 아니, 200만 원!

우렁차게 소리치는 이호수에게 웃음을 흘리며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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