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3/25)

D-10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일하다 겨우 마감을 했다.

‘참나, 데이터한테 고백을 다 받고.’

멍한 눈으로 허공을 짚었다. 정확히 말하면 데이터는 아니긴 하지. 이 회사를 다니는 임원님 중 한 분이긴 하지. 또 한 며칠 잠수를 타고 싶었는데, 오픈 일자도 얼마 남지 않았고 뭘 하든 로그아웃 금지, 잠수 금지라는 버그맨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헤드셋을 뒤집어쓰고 오두막에서 눈을 뜬 나는 자연히 버그맨의 접속 유무를 확인했다. 내심 그가 다른 일이 생겨 늦거나, 오늘만큼은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어제 입맞춤을 나누고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 좀 막막했기 때문이다.

일단 마을 의뢰부터 하고 있을까.

의뢰 리스트를 살펴보다 가장 골드를 많이 주는 의뢰를 하나 골라 수락했다.

[마을 의뢰] 더덕 30뿌리를 캐서 복자에게 가져다주자 (0/30)

더덕을 캐기 위해 한 손에 호미를 들고 오두막을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친구] Bugman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막 접속한 버그맨이 내 바로 앞에 나타났다. 이 자식 어제 내 오두막 앞에서 종료한 건가?

“어디 가세요.”

“어어? 그, 그게,”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매를 말아 올린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을 의뢰 하는 거면, 같이 갑시다. 둘이 하면 금방이니까.”

나를 뒤따르겠다는 버그맨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는 그를 밀어 낼 수 없는 걸까. 막연하고 뜬구름 같은 호감에 기대어 그를 희망 고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격히 차분해진 내 분위기를 읽은 버그맨이 내 뺨을 감싸며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부담입니까?”

“그렇지는.”

“그럼 됐네요.”

웃음 짓는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로그아웃 안 하기로 했으니까.”

약속은 지킨다는 내 말에 버그맨은 배시시 웃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도선산 산책로를 걸었다. 나, 버그맨을 좋아하나? 같이 게임하면서 생각보다 좋았던 건가. 싫었다면 어제 바로 거절했겠지? 게임만 하면 좋겠다고, 선을 명확하게 그었을 것이다.

혼자 골몰하는 사이 더덕이 심긴 포인트에 다다랐다. 5년 근은 초록빛, 7년 근은 금빛으로 표시가 돼 있었다.

“콘텐츠가 너무 웃겨요. 7년 근 이상은 없어요?”

“산삼도 아니고 더덕이니 7년 근 정도만.”

“산삼도 있어요?”

적당한 위치에 쪼그려 앉아 버그맨을 올려다봤다.

“복자랑 친밀도 쌓으면 산삼 의뢰도 줄 겁니다.”

픽 웃은 그가 내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호미를 꺼내 들었다. 말끔한 생김, 큰 키와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희귀 호미로 해야,”

버그맨이 호미를 휘둘러 더덕을 캐기 시작했다.

“잘 되겠죠.”

“오오.”

흠집 하나 없이 깔끔하게 캐낸 더덕이 한편에 켜켜이 쌓였다. 마치 독무처럼 유려한 손놀림에 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의뢰를 금세 완료하고 우리는 나란히 산에서 내려왔다. 꼭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D-8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비에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의 투덜거림이 곳곳에서 울렸다. 내가 퇴근할 때만 안 오면 좋겠는데. 입속말을 중얼대며 전면 유리에 맺힌 빗방울을 멍하니 응시했다.

버그맨과 입을 맞추고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의뢰를 같이 하고, 어린 여치를 잡고, 함께 벌꿀 술을 마시며 그의 대청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어젯밤 나는 대청에서 그의 밑에 누워 있었다. 입을 맞추다 자연히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흐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설거지한 컵과 포터필터를 머신 위에 올리고 천으로 덮었다. 머신기 마감을 하며 뭉글뭉글 피어나는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버그맨은 나를 좋아해. 좋아하는 게 맞아. 게임이라도 그게 너무 잘 느껴지니까.

VR에서 키스가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다른 VR 게임도 이런 게 된단 말이야? 화끈대는 얼굴을 푹 숙이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거 전체 이용가가 아니라 청소년 이용 불가로 바꿔야 하는 거 아냐? 공동 명의 되는 순간 결혼하는 유저들도 생길 거 같은데. 그러다 이혼도 하면 재산 분할은 팜 머니로 하는 건가.

또 생각이 산으로 가네. 여하튼, 이 아저씨는 내 어디에 꽂힌 거지. 남자인 걸 떠나서 반한 포인트라는 게 있을 텐데, 설마 처음부터? 말벌 습격에서 지켜 줘서? 메인을 같이 밀어 줘서? 그게 아니라면 버그맨의 집에서 쉬는 횟수가 늘면서 자연히 마음이 기운 걸까? 초면에야 싸가지가 없을 순 있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벽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에라, 정예준. 그만하자. 그 사람도 각인 상대가 없다고 했잖아. 이호연 대표에게 투영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계기란 건, 언제나 사소한 데에서 출발하니까.

막연한 상상의 일부로, 혹시나 버그맨이 내 운명이었던 건 아닌지 생각도 해 보긴 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고(그게 사람 형상을 한 데이터든 뭐든) 애정 표현을 받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 그동안 많이 외로웠나? 알고 보니 내 이상형이 2D, 아니, 3D? 이걸 뭐라고 해야 해. 4D에 가까운데 현실은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거 아니었을까? 그래서 현실에선 반응이 안 온 거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긴 그렇지만, 버그맨의 시각 데이터는 내 이상형과 가깝게 설정돼 있긴 하다. 버그맨 본명이 이호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혼자 실성하여 키득거리다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집에나 가자. 어쨌든 오늘도 보긴 봐야 하니까.

버그맨과 기한이 정해진 연애를 하는 것 같다. 꼭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피치 못할 사정의 두 주인공이 주어진 시간 동안 사랑을 키워 가는. 문제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거지만.

작업대 밖으로 나와 불을 끄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문 앞에 선 나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며 고민했다. 눈발처럼 날리는 빗방울은 성나 있지 않았고 유순하게 지면을 적셨다. 빗발이 거세지 않아 정류장까지는 맞고 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다 다 젖을 수도 있겠지만,

“…정예준 씨.”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 어어, 대, 대표님. 안녕하세요.”

“우산이 없으신가 봅니다.”

이호연의 눈길이 아래로 내려가 내 빈손에 닿았다.

“가시죠. 야탑까지 금방이니까, 태워 드릴게요.”

어리바리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 기업의 대표가 직원, 아니, 아르바이트의 이름과 거주지를 아는 게 당연한 건가?

“여기서 가까운 분당선이 거기니까요.”

이어진 그의 말마디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오해를. 어쩐지 창피해져서 귓불에 열이 올랐다. 이호연은 나를 지층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데려갔다. 지하 주차장 C 구역에 세워진 마세라티 차량이 매끈한 전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혹시 문을 열 때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그가 차를 빼냈을 때 조심조심 조수석에 올랐다.

“야탑역에 내려 드리면 될까요.”

“네, 네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벨트를 꼭 붙들고 힐긋힐긋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담백한 시선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호연 대표. 호연. 이호연. 레오.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몇 번이나 굴려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같은 이름이라도 헛된 망상이지. 동명이인일 게 분명하다.

“캘리한테 RTF 모바일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렇죠. 유명하니까요.”

“VR은 어떨 것 같습니까.”

“잘될 것 같은데요? 아, 근데, 사마귀가 조금,”

“퀘스트 전체를 도려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그렇죠? 아휴.”

제말그말. 대표님도 같은 생각이라니 다행이네요. 차라리 귀염둥이 꿀벌들이랑 할 수 있는 퀘스트를 조금 더 늘려 주는 건 어떠신지? 미주알고주알 떠들던 나는 아차 싶은 심정으로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 벌레들은 좀 덜 사실적이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모바일이랑 다, 다르니까….”

미쳤나 봐. 허둥지둥 변명하며 진땀을 흘렸다. 테스터도 아닌데 사마귀가 어쩌고, 어떻게 알겠냐고! 목덜미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놈의 입! 입이 방정이야.

“맞는 말입니다. 아트는 전체적으로 누를 필요가 있죠.”

아트팀 전체적으로 벌레 성애라도 있는 건지, 쯧. 혀를 찬 그는 라이브 전까지 수정이 되면 좋겠다며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야탑역 인근에서 느리게 서행하던 차량이 골목 어귀에서 멈춰 섰다.

“이쯤이면 되는지.”

낮은 물음에 차창 밖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익숙한 상가 건물이 보여 반사적으로 벨트 클립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네?”

“시험 하나 해봐도 됩니까?”

어…? 시험?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말마디에 이호연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그의 시선에 클립을 끄르려던 손짓이 멈칫했다.

“피하지 말고.”

숨결이 코끝까지 다가왔다. 크게 벌어진 눈 바로 앞에 이호연의 얼굴이 보였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에 미미한 체온이 스쳤다. 도장을 찍듯 꾹 힘주어 눌린 살덩이의 촉감이 선명했다. 뒤로 물러난 그의 입매에 호선이 덧그려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어, 어어…….”

“이름 정예준, 맞죠?”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굳은 나를 대신해 벨트 클립을 눌러준 이호연은 차에서 내리는 내게 조심히 들어가라며 인사를 덧붙였다. 나는 유유히 사라지는 이호연의 차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입술 겉을 매만지다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이게 무슨. 이호연 대표가 왜 나한테. 그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 몰랐다며 이름을 확인했다. 그렇다는 건, 이호연 대표의 운명이 나와 동명이라는 건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피스텔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집에 오자마자 짐을 내려두고 씻고 나온 나는 젖은 머리를 털며 콘솔 앞에 앉았다. 차에서 묻던 이호연 대표는 나름의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각인을 눈으로 확인해본 건 아니지만, 그의 상대가 나라는 확신이.

이름이 각인된 경우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고 알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품은 이름이 가는 곳으로 시선도, 발길도 자연히 닿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라고 했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꼭 엮이게 되니까. 나만 해도 그렇다. 지스타에서 RTF를 접하고 이호연 대표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내게 만나자고 이야기를 꺼낸다면 지금 당장은 뒤로 물러날 것 같았다.

버그맨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호연의 돌발행동에 의미부여하며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게임에서 만났다곤 하지만 버그맨의 호감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버그맨에게 끌리고 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래서 운명 같은 게 싫다니까? 이렇게 복잡하게 시련을 줄 거면 애당초 아르바이트 근무 초반에 이호연 대표랑 접점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연거푸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착용했다.

게임 상용 전까지 남은 시일은 8일. 남은 서브 퀘스트 2개. 어린 여치가 생김에 비해 꽤나 막강해 아직도 전부 잡지 못했다. 게다가 버그맨은 이제 퀘스트 진행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서브 6] 어린 여치도 이장님을 좋아해 (7/10)

[코어] 내 자식을 감히? 곤충계의 곤모님 갈색여치의 반란

오두막에 앉아 퀘스트 목록을 살피고 친구 창을 띄웠다. 퇴근 후 접속할 즈음이면 언제나 로그인되어 있던 버그맨이 오늘은 비활성 상태였다. 웬만하면 내가 접속하기 전부터 들어와 있던 그였는데, 오늘은 다른 일이 생긴 건가. 하긴, 버그맨도 사회생활 하긴 해야지. 임원이고 게임 상용도 얼마 안 남았는데 상식적으로 매일 게임 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접속하면 어련히 나를 찾겠거니 오랜만에 벌집이나 살필 겸 몸을 일으켜 뒤뜰로 향했다.

성장을 마친 꿀벌과 갓 태어난 꿀벌이 꽃이 만개한 들길에 한데 뒤섞여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히 완전 성체로 성장한 꿀벌 세 마리에게 향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성장한 꿀벌의 외양은 게임 첫날에 비해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검지 한 마디 정도의 크기에서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로 부쩍 자라난 꿀벌 삼총사는 마치 무리의 우두머리 같았다. 그도 그럴 게, 길가에 핀 꽃 중 볕이 잘 드는 꽃송이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꿀벌들은 제 몸집보다 큰 꽃에 달라붙어 낑낑대며 꿀 채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 얘들아, 일해야지, 일.”

큰 놈들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쯧쯧. 혀를 내두르며 일을 하라 잔소리를 거들었다.

[또?!]

[맨날 부려 먹기만 하구 말이야!]

[일하고 있는데 무슨 또 일이야!]

구시렁대는 왱왱거림이 퍽 현실적이라 부인할 수 없었다. 삼총사 중 한 마리가 다리를 떨듯 꼬리 침을 달달 떨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

벼락처럼 내리꽂힌 호통에 어린 꿀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팍팍 모아 봐, 팍팍!]

제 일을 떠넘긴 것도 모자라 큰소리까지 치는 모습을 보니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거 하이퍼 리얼리즘인가.

“야, 니들 할당량은 니들이 해야지.”

[사회가 쉬워?]

이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머신 러닝으로 학습한 결과물일 텐데.

“떠넘기지 말고 너희가 해.”

[우우- 악덕 업주우-]

“내가 악덕 업주는 아니고…….”

이호연 대표한테 꿀벌이 귀엽다고 했던 말 취소다, 취소. 꿀이나 빨고 있던 놈들이 외려 나에게 악덕 업주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벌들을 노려보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됐다. 5만 팜 머니에 눈이 멀어 가지고. 처음부터 길을 잘 들였어야 했는데 반항심이 하늘을 찌른다. 벌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건 상용 후 실제 게임을 해 보면서 습득해야 할 것 같았다.

때맞춰 시야 상단에 버그맨의 상태가 활성화되었다는 표시로 초록색 불빛이 떠올랐다.

“너희 삼총사, 오늘 할당량 안 채우면 말벌 습격 때 두꺼비 안 부른다?”

으름장을 놓는 내 뒤로 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갑질이냐!’, ‘이게 게임이냐!’ 말 같지도 않은 투정을 뒤로하고 몸을 틀었다. 친화고 나발이고, 이미 그른 것 같으니 일이나 시켜야지.

잰걸음을 놀려 오두막 대문을 넘다 길가에 서 있던 버그맨과 조우했다.

“버그맨 님.”

“어디 가세요.”

“들어오셨길래 버그맨 님한테 가려고 했죠.”

아직 퀘스트도 남았는데 어딜 가겠어요. 눈매를 휘어 웃자 버그맨도 화답했다. 한 발 그에게 다가서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는 근래 버그맨과 이호연 두 사람과 입을 맞췄다. 한쪽은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슴이 수런거렸고, 다른 한쪽은 피부로 느껴지는 확연한 체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각인이 두 개일 수 있나? 두 사람의 이름을 품은 거라면? 그런 거라면 수년 전에 방영한 드라마에나 나오는 망언이랑 같잖아. 뭐였더라.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하나가 아니잖아’였나? ‘내가 미치겠는 건 내가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거야’였나. 또 있는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는 확실히 기억하고.

또 보자던 그 말은 농담이 아닐 것이다. 이호연은 내게 분명히 관심을 표했다. 그런 그에게 ‘제가 어쩌다 테스트 환경에 들어오게 됐는데, 거기서 만난 어떤 분한테 마음이 가서요. 그 사람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고, (이상하게) 저도 싫진 않아서요’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냐고.

일단 2D인지 3D인지 4D인지 모를 이 사람과 테스트 기간이 종료될 때까지 나는 이호연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버그맨을 마음에서 정리하고 그때 보자는 말을 입 밖에 낼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현실에서 만난 것도 아닌 사람에게 마음이 기운다는 헛소리를 한다면 이름이고 뭐고, 이호연은 나를 미친놈처럼 볼 게 뻔하다.

“무슨 생각을.”

“아, 아뇨. 그냥 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네요. 이제 일주일 정도 남았나요.”

버그맨은 아쉽다며 눈매를 샐그러뜨렸다.

“퀘스트 하러 갈까요?”

“오늘은 버리 님 퀘스트를 깨죠. 수월하게 가려면 버리 님 레벨이 7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지금이 레벨 6이니까, 7까지는 경험치를 다른 데서 쌓아야 했다. 아직 깨지 못한 복자의 고민과 복지관 노인의 고민을 깨고 난 뒤면 레벨은 금세 오를 것이다.

“그래요, 그럼.”

노인 행정 복지 센터의 복자를 만나러 방향을 틀었다. 버그맨이 느닷없이 나를 안아 올렸다. 이게 뭔가 싶어 두 눈을 깜빡이자 그가 턱을 들어 입을 맞춰 왔다. 나도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쪼듯 입술을 머금었다.

테스트 시작부터 다른 사람을 보진 못했다지만 바깥에서 이런 짓을.

버그맨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부끄러움을 드러내자 그는 싱그럽게 웃으며 내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갔다 오는 길에 갈대숲 가 볼까요.”

“갈대숲이요?”

내 물음에 그는 턱짓으로 노랗게 물든 갈대숲을 가리켰다. 노란 들판 한가운데에서 재미있는 놀이를 한번 해 보자며 능글맞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도 없어요.”

확언하는 버그맨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에 두른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버그맨은 이번엔 어르듯 내 엉덩이를 두드려 왔다.

“시험해 보고 싶은데.”

뭐 이렇게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많아?!

“게임에서도 섹스할 수 있을까, 싶어서.”

으악! 귓가에 직접 속삭이지 마요! 게임에서 섹스라니! 섹스라니!! VR에서 그런 것도 되는 거였냐고요!

“수, 수숲, 숲 한가운데서?”

“응, 한번 해 보고, 되면 스크린 샷이나 클립으로 따 두고 싶은데.”

테스트 종료 후 계속 꺼내 보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며 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나, 나중에 로그 확실히 지워지는 거죠?”

“그렇죠. 테스트 데이터는, 특히나 오늘 건 저만.”

“아휴, 정말.”

날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부끄러운데 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클립 따 두는 건 좀 불안한데?

“찍는 건 싫어요.”

“알겠어요. 그럼 갈대숲은 되는 걸로?”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창피하게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라고요.

버그맨과 마주 안은 채 복자 앞까지 다다랐다. 퀘스트도 그에게 안긴 채 수령했다. 복자가 NPC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끄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메인 2장은 버그맨이 진행 중인 5장보다 비교적 쉬웠다. 복자가 요구하는 퀘스트는 서브 퀘스트 수도 적었고, 소똥으로 고통받은 유저들이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는 구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단순했다. 옆 마을 다녀오기, 친구 맺기, 벌집 분봉하기 등 몇 가지는 수령과 동시에 자동으로 완료 처리되었다. 합성이나 강화 같은 RPG 요소의 퀘스트도 있었는데, 해당 퀘스트는 받자마자 버그맨이 교환 창을 열어 아이템을 잔뜩 넣어 준 덕분에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다.

“2장보다 1장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이장네 소똥?”

“네.”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보다 복자가 먼저 나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처음부터 과금 유도를 위한 장치인 것인지도 몰랐다. 간혹 친구들과 페이스 아이디나 생채 인식 결제를 할 때, 얼굴로 긁는다는 농담을 주고받곤 했는데, 이건 가상 현실이니 전신 카드화되는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또, 소똥 하나 치우자고 과금한 유저들이 게임사 트럭 시위에 이어 농기구를 지참해 콘텐츠를 개선해 달라 시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웃기겠네, 농민 봉기도 아니고.

“그랜드 오픈으로 선물 상자 많이 뿌릴 겁니다.”

사전 예약 유저들 대상으로 이모티콘, 방충 모자뿐 아니라 장비 아이템도 줄 예정이라고 했다. 장비 아이템 안에도 확률은 있지만 가장 하위 단계의 장비로도 소똥은 30분 정도면 완료할 수 있다고.

대부분의 게임이 오픈하면 뽑기나 확률에 어느 정도 보정치를 제공한다고 알고 있다. 그래야 사용자들이 재미를 느끼고, 정착하게 되니까. 선물 상자 안에 상위 레벨의 굴삭기도 포함돼 있을 거라는 버그맨의 설명에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왜 내가 시작할 땐 없었나 했더니만, 테스트 환경이라 실 계정에 선물이 배포된 게 아니어서 그런 거구나. 와 씨, 좀 억울하네. 그래도 안 받았으니 버그맨과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겠지만.

“빨리.”

갈대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버그맨이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시험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요?”

가벼운 웃음을 흘리자 그는 참은 적 없다며 눈매를 휘어 웃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걷다 갈대숲 한가운데에 섰다. 수풀은 매우 폭신했다. 두툼한 솜이불을 몇 겹으로 깔아 둔 것 같았다. 둥실, 허공에 떠오른 몸 위로 버그맨이 무게를 더해 왔다.

“어어?”

“이거, 버급니다.”

눈웃음 짓는 그를 보며 키득거렸다. 갈대가 눌리지 않는 게 버그라니.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냐고. 피식 웃자 버그맨의 입술이 코끝에 닿았다.

“고치라고 할까요?”

“아뇨. 그냥 둬도 좋을 것 같아요.”

상용되었을 때 버그로 남아 있으면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게임 시작 후 배정받는 오두막이 이 근처라면 좋겠는데.

“지금 앉아 있어요, 서 있어요.”

“의자에 앉아 있어요.”

“편하게 기대거나 누워요.”

버그맨은 내게 현실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물어 왔다. 그는 갈대숲에 도착할 때부터 안경형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고 했다.

내가 가진 장비는 머리에 뒤집어쓰는 형태라, 누울 수는 없어 의자에서 내려와 벽에 기대앉았다. 시각과 뇌파 영향도에 따라 움직이는 가상의 몸은 집중이 흐트러지자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꿈질거림에 버그맨이 피식 웃다 얼굴 위로 쪽쪽 깃털처럼 입술을 내렸다.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감각을 느껴 보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 혀를 단물처럼 빨아 삼킨 그의 손이 베이지색 티셔츠 위를 지분거렸다. 검지와 엄지에 쥐여진 젖꼭지가 굴려졌다. 통증이나 아릿함은 없었지만 나는 끓는 열기에 금세 발기했다. 흥분 섞인 앓는 탄성을 내지르며 버그맨에게 힘껏 매달렸다.

“…섰어요.”

내 중심부에 제 자지를 비빈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의상 해제해 봐요.”

게임이다 보니 옷을 직접 벗길 수 없어 수동으로 해제해야 한다는 게 퍽 우습게 느껴졌다. 캐릭터 설정에서 의상을 해제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해제하는 동안 버그맨도 옷을 벗고 전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한 버그맨의 곧추선 성기가 나를 향했다.

맞아, 각인. 놀란 내가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 하자 그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쉬이, 버그맨이 날 어르며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가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걸까? 이곳에서 내 각인이 보인다면 이호연의 이름이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좀 껄끄러울 것 같은데……. 그는 임원이고, 아무래도 이호연과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일 테니까.

“삽입도 될까요.”

“으,”

버그맨이 살집을 강하게 움켜쥐어 비부를 벌렸다.

“아프진 않죠?”

“진짜도 아닌데요.”

“진짜면 좋겠어서.”

내 엉덩이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주물럭거리며 손장난 치던 그가 내 발목을 그러모아 한 손에 쥐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가슴과 무릎이 닿고, 허리가 접히며 둔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고환 아래로 드러난 구멍이 움츠러들며 바짝 긴장했다. 버그맨은 혀를 세워 구석구석 훑었다. 집요한 그의 애무는 그 어떤 자극조차 없는 꿈을 생생한 색으로 물들여 갔다.

갈대숲에서 섹스하고 대청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벌꿀 술과 기정떡을 먹었다.

가꿔진 정원 위로 군청의 하늘이 장대하게 내려앉았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별이 쏟아질 듯 넘실거렸다.

“그래픽 안 같아요.”

게임 세상에서 섹스가 가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희에서 오는 쾌락도, 삽입의 고통도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하나가 되었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버그맨의 옷자락을 쥐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D-5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거울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다.

픽업대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무심코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게, 인터뷰 때를 제외하고 반년간 사내 카페에 걸음조차 하지 않던 이호연 대표가 이제는 수시로 카페를 드나들며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로의 이름이 몸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이유로 내게 꽤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3일뿐이었지만 아침 점심으로 커피를 사러 왔고, 휴게 시간 동안 내가 굶지 않도록 샌드위치를 건네주러 내려오곤 했다. 또 보자는 말이 우연히 보자는 게 아니라, 자의적으로 우연을 만들어 보겠다는 말일 줄이야.

이호연 대표나 버그맨이나, 대표나 임원이 오픈 앞두고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거야?

“…커피 나왔습니다.”

커피를 받은 이호연 대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호선을 그린 입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구나. 버그맨도 처음엔 잘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웃게 됐지.

간밤의 일을 떠올리자 괜스레 창피해져 고개를 돌렸다.

“안 잡아먹어요.”

“그, 그게, 죄송합니다.”

이보슈, 대표 양반, 생각을 해 봐요. 당신은 대표, 나는 일개 알바. 아무리 각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대뜸 만나 보자고 하면 누가 만나요. 내가 돈도 좋아하고 취업이 고프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기울고 있다구요. 다소 딱딱하고, 벌레만 보면 질겁하고 목석처럼 굳는 이상한 사람한테요. 시소가 아무리 중간에 선다고 하더라도 미미하게 기울잖아요? 사람 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지금의 나는 2D3D4D버그맨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은데요.

그동안 내가 버그맨과 주고받은 건 단순히 입맞춤이나 농도 짙은 스킨십만이 아니다.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 나눈 대화도 많았다. 직접적으로 나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희망) 직무나 현재 안고 있는 고민 따위를 털어놓으면 그는 제 일처럼 들어 주고 조언도 해 주었다. 서툰 표현으로 잘될 거라고 말해 주는 그 사람에게 나는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렇다 보니 게임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버그맨을 떠올리고, 버그맨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그 눈. 청색의 말간 눈동자가 계속 마음에 밟혀서. 동양인의 까만 눈동자가 아닌 VR 속 사용자 취향에 따라 표현된 시각 데이터일 뿐인데도 나는 그 눈을 잊을 수 없었다.

버그맨이 이앙기를 타고 있던 날, 그러니까 처음 보았던 날, 꼭 해왕성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낭만주의도 아니고 감상에 기대어 사는 사람도 아니지만, 푸른 눈을 보고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해왕성은 태양계에서 명왕성이 퇴출된 후, 지구에서 유일하게 망원경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행성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게 꼭, 지금의 나와 버그맨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창피한 말이지만 버그맨을 떠올리며 자위를 여러 번 했다. 이호연이 좋았으면 당연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떠올렸겠지.

“그런데,”

주변에 듣는 이가 없음에도 목소리를 한껏 낮춘 이호연 대표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예준 씨는 각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푸흡!”

미, 미친! 내 각인 위치 물어서 어디에 쓰려고! 깜짝 놀라 속삭이는 그에게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나는 예준 씨가 원하면 날 잡고 보여 줄 수 있는데.”

아냐, 넣어 둬요. 그리고 무슨 각인을 날을 잡고 보여 줘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라면 옷을 걷어 올려야 보이거나 나처럼 민망한 곳에 있는 거겠지! 목덜미부터 홧홧하게 오른 열이 머리까지 번진 것 같았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이호연을 노려보았다.

“서로 보여 주는 건 어떱니까.”

“콜록, 아니 제가 왜.”

“그럼 위치만 알려 줘요. 궁금한데.”

그의 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옥을 오갈 때나, 인터뷰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잘 마시겠습니다, 예준 씨.”

‘잘 마시겠습니다, 버리 님.’

순간 움찔하여 고개를 확 들었다. 하필 겹쳐 들릴 게 뭐람.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들이켜는 이호연을 바라봤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각인 상대가 이호연 대표라는 걸 인지해서인지 자꾸만 비교하게 됐다.

가령, 이호연은 왁스로 깔끔하게 머리를 올렸고, 버그맨은 차분하게 머리를 내리고 있다든가. 널따란 어깨와 곧은 자세는 두 사람 모두 비슷하지만 버그맨 쪽이 더 바른 것 같고. 물론 외양적인 부분은 커스텀을 거친 거라고 하더라도. 게다가 말투도 버그맨이 좀 더, 뭐랄까, 상냥하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목소리도! 목소리도 버그맨이 더 좋은 것 같고, 대표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겠지만 우리 버그맨도 현질 하는 걸 보면 한 경제력 한다고요?!

흔들리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호연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방향을 틀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를 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름에서 오는 막연한 호감. 이호연에게 호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버그맨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눈길은 자연히 그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으니까.

지잉.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들었다.

[쭌, 모아 채용 공고 떴던데 넣을 거야? - 시디 강준성]

강준성이 보내 준 링크를 클릭해 화면에 띄웠다.

<모아게임즈 2025 공개 채용 – [신입/경력] 아트 부문>

[담당 업무] RTF VR 인게임 UI/UX, 아이콘 디자인

[모집 인원] 0 명

곧 라이브 예정인 게임에 채용? 화면을 멀거니 내려다보다, 어쩌면 버그맨이 인사팀에 아트 충원을 지시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응, 이번에도 넣어 봐야지.

답장을 보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원서를 넣은 것도 아니고, 단지 공고를 보았을 뿐이지만 만약 뽑힌다면 버그맨에게 당당하게 닉네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 라이브 일자와 근소한 차이로 입사해서, 게임에서 버그맨을 또 만날 수 있을지도. 아니면 사내 익명 포탈에서 ‘닉네임 버그맨 찾습니다!’ 하고 찾아봐도 되는 거고.

그런 순간이 온다면,

‘버그맨 님. 저, 버리예요. 회사에서의 닉네임은 제이고요.’

막 입사하고 뻔뻔하게 밝히는 게 조금 창피하지만,

‘버그맨 님은 닉네임이 뭐예요?’

그래도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겠지.

D-2

복지관 노인을 돕는 퀘스트를 끝으로 레벨이 7로 올랐다. 게임 세상에서 체력이 오르고 웬만한 벌레는 장도리나 괭이 없이 주먹으로 때려잡아도 너끈했다.

버그맨은 어린 여치를 향해 주먹질하는 내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하다 중간중간 힐로 HP를 채워 주었다.

[서브 6] 어린 여치도 이장님을 좋아해 (10/10)

[시스템][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할수록 못 할 짓 하는 기분이네.”

당분간 집에서 마주치는 모든 벌레들은 방생해야겠다. 주먹으로 때려도 못 할 짓 같고, 도구를 쓰는 것도 심리적으로 뭔가.

“고생했어요.”

“퀘스트는 퀘스트인데, 조금 잔인한 것 같아요.”

버그맨을 향해 울상을 짓자 그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트가.”

나직이 말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아트만의 문제가 아냐. 게다가 지금 수정하라고 지시하면 어떡해요, 이틀 남았는데. 아트라기보다는 시나리오 문제 같은데. 어린 여치가 이장님이 얼마나 좋으면 이장님 댁 앞을 기웃대겠어. 사마귀도 마찬가지고.

“바로 갈색 여치 가나요?”

갈색 여치는 코어 퀘스트라 갈대숲 입구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해 갈색 여치의 본진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와 버그맨의 집이 있는 민가보다 이장 집이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편이 가까웠다. 시선을 기울여 버그맨을 응시했다.

“…어떡할까요.”

일순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버그맨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별이 곧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아니, 오늘 빼면 하루구나.”

서비스 당일은 당연히 제해야 하고, 마지막 날은 테스트 데이터를 지워야 한다.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면 CBT 환경의 모든 데이터는 버그 래거시만 남기고 사라진다는 말이다. 버리라는 닉네임을 썼던 유저 정보도, 버그맨의 정보도, 전부.

처음 게임 환경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마음이 깊어질 줄은 추호도 몰랐다.

이앙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가던 버그맨,

퉁명스럽고 차갑기 그지없던 버그맨,

벌레를 무서워하는 버그맨,

내게 한없이 다정하게 구는 버그맨.

…비밀 친구처럼 하루의 끝에 서 있는 버그맨.

시무룩해하는 내 손을 그가 단단히 잡아 왔다. 여전히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큰 손을 보며 그의 아귀힘과 온기를 가늠해 볼 뿐인데, 이렇게 생각하니 아쉬움이 배가 됐다.

“우리 재미있는 거 하러 가요.”

“재밌는 거요?”

느닷없이 재미있는 걸 하러 가자며 날 이끈 버그맨은 순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대청 위에 그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버그맨은 나를 곧장 침실로 이끌었다. 정원의 반딧불이가 새로 꾸민 창문을 통해 침실에서 바로 보였다.

“맨날 현질만 하세요?”

“버리 님 보여 주려고.”

정원의 풍경이 좋다고 말한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의 마음이 연한 노란빛으로 찬란하게 발했다.

“손으로 여기.”

버그맨이 내 손을 제 중심부로 가져갔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바르르 떨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또한 내 사타구니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실제로 만진다고 생각해 봐요. 눈은 감지 말고.”

느끼지 못하니 눈에 다 담아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제 진짜로 만져 봐요. 목소리 들려줘.”

센서로 전달되는 현실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RTF와 현실이 교차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얕게 울리는 그의 욕망에 소름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나는 그가 내게 뜨겁게 욕정하고 있음을 느끼며 바지춤을 끌어 내리고 드로즈 위를 더듬거렸다.

“아…, 으으.”

금세 선단이 젖어 들었다.

“팬티 입고 있어요?”

“으흐…, 네….”

“벗어 봐요.”

버그맨의 속삭임에 나는 주저 없이 드로즈를 내렸다. 발기한 좆이 꺼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열이 몰려 뜨거운 살덩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아아, 읏.”

“듣기 좋은데.”

가쁜 숨을 헐떡이는 내 귀에 버그맨의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버그맨도 나를 상상하며 자위하고 있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흥분이 밀려들었다. 허벅지 안쪽, 고환에 각인된 이름이 붉게 달아올랐다. 탁탁 소리가 현실을 넘어 가상의 공간으로 흘러들었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뒤섞였다. 앓는 신음을 참지 않았다.

부푼 성기가 맥박 치며 묽은 체액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내가 사정하는 동안 버그맨도 탄성을 내질렀다.

“…갔어요?”

“하, 하아, 네에….”

“저도, 버리 님 소리 들으면서 갔어요.”

게임 속에서 손을 뻗었다. 현실과 달리 끈적한 체액이 묻지 않은 깨끗한 손이 그의 뺨을 스쳤다. 그의 눈가에 손가락이 머물렀다.

“버그맨 님.”

갈등하다 입을 열었다. 그의 고백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버그맨에게 말해 줄걸.

“저 되게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네.”

“돈 많고 능력 좋고, 그런 사람 좋아하고요. 제가 가진 거에 비해 눈이 높은 편이라서.”

“버리 님보단 내가 가진 게 많긴 하죠.”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챈 듯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버그맨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해왕성은 망원경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데, 꼭 우리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구에서 유일하게 그 행성만 남은 거죠. 인간들 마음대로 명왕성을 쫓아내고, 해왕성 하나 남았는데 그게 퍽 낭만적이라 고백에도 자주 쓰인대요. 저도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버그맨 님 눈이 하필 푸른색이라. 그리고 또 하필, 해왕성에는 역행위성이 붙들려 있어서. 서로 만나선 안 되는데 만나서 붙들렸다고 하지 뭐예요.

두서없이 내 마음을 고백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이불킥 각인데, 그래도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다. 현실적인 내가 비현실인 게임에서 너를 만났고, 운명이고 나발이고 네가 좋아졌다. 그러니 우리 현실에서도 만나 보자.

“닉네임 좀 알려 줘요.”

곧 입사해서 찾아갈 테니까.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지만, 아르바이트여도 알아낼 방법은 있다.

“버리 님.”

“회사 닉네임이요.”

“…음.”

“궁금해서 그래요.”

상황이 뒤바뀌었다. 처음엔 그가 내 소속을 물었고, 회피한 건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버그맨의 눈동자에 갈등이 서려 있었다.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닉네임을 알려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버리 님이 싫어할까 봐.”

그러니까 왜요. 재촉하는 내 눈빛에 버그맨이 뒷목을 긁적였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버리 님을 기만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의도를 헤아리려 애썼다. 기만하려던 건 아니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내 뺨을 어루만지던 버그맨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레오.”

레오…? 코앞까지 다가온 버그맨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레오라고 불러 봐요.”

그가 내게 회사에서 쓰는 영어 닉네임을 밝히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레오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회사에 한 사람뿐이니까.

레오, 이호연, 이호연 대표? 그 이호연 대표?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설마, 그럴 리 없다. 하하, 어떻게 버그맨이 이호연 대표야. 귀농 게임이 대표 게임이고 꿀벌이 게임 마스코트인데, 어떻게 벌레를 싫어할 수 있어? 말이 안 되잖아!

“왜 버리 캐릭터에 예준 씨 표정이 보이는 것 같지.”

버그맨이 키득거렸다.

“로그아웃 통제.”

행여 내가 또 로그아웃하여 달아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장난기 서린 말마디가 더해졌다. 그는 충분히 시그널을 보냈고, 내가 알아차리길 기다렸다고 했다. 테스트 기간이 끝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카페로 찾아가 자신이 버그맨임을 알려 주려 했다고.

항상 입매만 당겨 웃던 그가 이를 처음으로 드러내며 웃었다. 그 화사한 얼굴에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렀다.

“다음엔 뭘 해 볼까요.”

나는 충격에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야탑역으로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정예준 씨.”

“…….”

“보고 싶은데.”

“나, 나는.”

“늘 하던 거, 오늘은 현실에서 해 볼까요.”

그는 내 얼굴도 보고 싶고, 자신의 각인이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도 보고 싶다 말했다.

나는 대답을 미룬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정까지 2분이 남아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버그맨의 표정은 지나치게 담담해 보였다.

[미시 세계(Microscopic world)]

D-36. 호연.

CBT 환경은 게임이 서비스되기 전, 적어도 두 달 정도의 텀을 두고 진행한다. 안정적인 배포를 위함인데, 상용 전날까지 테스트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전송이가 잡은 일정을 보며 호연이 시선을 내렸다 매섭게 추켜올렸다.

“캘리.”

“레오, 빤한 프로세스를 타자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에도 호연의 눈빛은 서슬 퍼렇게 번득였다.

“선배애.”

말끝을 늘어뜨리는 전송이를 한참 노려보았다.

딱 한 달 하고도 며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한 차례 CBT를 거쳤고 UX팀에서 선발한 외부 유저를 대상으로 OBT도 마쳤다. 일정상 버그가 나오더라도 후속 배포로 미룰 수밖에 없고, 마케팅 전략과 함께 상장을 고민해야 할 시기에 한 달 더 테스트를 하겠다니. 허무맹랑한 그녀의 주장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왁스로 깔끔하게 올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뒷목에 뜨거운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만약 유출되면?”

“…….”

“OBT 돌린 게 언젠데. 뭐가 부족해서. 커뮤니티나 타사에 기술 유출로 투자 막히고 싶나 보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확언하는 그녀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확신하긴 어렵지만, 유출되더라도 스크린 샷 정도인데, 그 정도는 노이즈 마케팅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전송이.”

사납게 뇌까린 호연에게서 정제되지 못한 분노가 들끓었다.

모바일 출시 후 3년을 매달렸다. 실리콘 밸리의 기술과 AI 센서 구현을 위해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기술 개발에 목을 매며 목표치의 근삿값을 도출해 내기 위해 시뮬레이션만 수십, 수백 번을 돌렸다. 사람 갈아 쓴다는 악명을 얻고 싶진 않아 모바일 버전 출시 후 유치한 투자금 대부분이 인건비로 쓰였다.

“한 번만 수렴해 줘요. 핸드릭스도 오케이 했다고요.”

“니들끼리 정해서 통보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바지 사장으로 꿇어 앉히지 그랬어.”

비아냥댄 그가 비뚜름한 자세로 그녀를 노려봤다.

“선배,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김사훈과 전송이, 두 사람이 호연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 점은 그 역시 잘 알았다. 무시하는 행태를 취했다면 모바일 게임 출시 후 어떤 식으로든 그를 몰아냈을 것이다. 서비스에 대한 방향성은 물론 VR 개발도 호연의 의견이었고, 지금까지 늘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온 둘이었다.

“모니터링은.”

“UI 개발팀이랑 퀸 스튜디오에 최소 인력만 지시해 뒀어요.”

“…….”

“정 불안하면, 선배가 들어가서 봐도 돼요.”

전송이는 스튜디오에는 지시해 두었고, 테스터 접속 안내와 부차적 사내 공지는 그녀가 핸들링하겠다며 부연했다. 만약 모아읍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 보아도 좋다고 말했다.

호연이 피로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손짓했다. 이만 나가 보라는 제스처에 전송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대표실을 벗어났다.

문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김사훈이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 맨날 총대가 나예요?”

“저 녀석, 매몰된 거 안 보이냐. VR에만 몇 년째야. 내 말 듣는 시늉도 안 할걸.”

“이번 건은 선배가 심했어요. 다른 데도 이렇겐 안 한다고요.”

김사훈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전송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건 그런데, 내가 보려던 건 그게 아냐.”

다락방스튜디오부터 개발사 설립까지 초기 자본은 그가 모두 대었다. 광고 효과와 입소문을 탄 게임이 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고, 퍼블리싱한 인디 게임들도 중상 이상의 매출은 거뒀기에 이대로 영업 이익을 유지해 상장까지 가도 나쁘지 않았다. 국내 중대형 게임 회사들의 수순을 똑같이 밟으면 됐다.

그러나 대표 게임 하나와 배급만으로는 몸만 커진 회사의 비전을 두기에 한계가 있었다.

3년 전, 모바일 출시 직후 가졌던 술자리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다음 스텝이 필요해.’

모아게임즈를 상징할 다음 게임을 고민하는 거였다.

이호연은 RTF 모바일은 소규모 팀이라는 미숙함을 관대하게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운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퍼즐이나 육성은 단발성이고, PC 게임은 사용 풀이 넓지 않다. 모바일 시장에 특화된 RPG를 개발하고, PC 런처를 제공해 꾸역꾸역 운영하는 게 관행이었다. 유저가 손을 떼면 PC도 덩달아 우수수 떨어져 나갔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수명이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유통 기한이 1년짜리가 대부분인 게임 업계에서 RTF 모바일이 출시 후 매일, 매주 기록을 경신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이호연은 모바일 버전의 고공 행진을 체크하며 낙관하지 않고 다음 방향을 제안했다. 김사훈도 제 고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고민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는 게임이 바로 RTF VR이었다.

VR은 들어가는 제작비가 일반적인 게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다. 매사 여유로운 김사훈도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출시에 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막까지 CBT를 해 보자고 제안할 정도로.

모바일 빠칭코를 만들어 수급하는 게임 회사는 이제 질렸다. 도박이라는 이름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과금 유도와 교묘한 마케팅 전략을 이용한 사행성 게임은 그만 만들고 싶었다. 투자금 회수를 위해 RTF 모바일에도 뽑기나 패키지를 붙였지만 말이다.

때문에 모아게임즈를 대표할 다음 게임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경영진의 가치관이 묻어나 있되, 몸집이 커진 회사를 헌신적으로 다니는 직원들의 급여를 보장할 수 있는 게임.

온전히 수익화를 위한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면 세 사람은 회사를 매각 시도했을 것이다.

“뭐든, 다음은 없어요. 핸드릭스가 레오 얼굴 안 봐서 그래. 나 진짜 울고 싶었다구요.”

“하하, 미안, 미안.”

김사훈이 눈매를 접어 싱글싱글 웃으며 표정을 감췄다.

“놔요. 저 커피 마시러 갈 거니까.”

“같이 갈까?”

“선배들이랑 그만 보고 싶어요. 으, 지겨워.”

김사훈을 밀어 내고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모노크롬을 찾았다. 4층 카페도 있지만 그녀는 꼭 1층을 찾았다. 흡연하지 않는 전송이가 바깥 공기를 잠깐이라도 쐴 수 있는 여유는 이때뿐이니까.

뭐, 그것도 그거지만, 서글서글하고 귀여운 외모의 알바생 정예준 때문도 있었다. 그래, 역시 커피는 예쁘고 귀여운, 연하의 남자가 타 주는 게 최고지.

그녀가 해죽 웃으며 커피를 주문했다.

예준이 커피를 건네며 VR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모바일부터 오래도록 해 왔다는데, 귀여운 친구라 그런지 태도도 싹싹하고 서글서글 웃는 인상도 매력적이다. 전송이는 예준의 휴대폰을 받아 CBT 테스트 링크를 전해 주었다. 반년 남짓이지만 그간 거쳐 온 경험상 예준이 어딘가에 유포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드넓은 대지와 초록으로 우거진 산세를 두루 살폈다.

몇 번을 시뮬레이션했는지 횟수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했다. 노인 행정 복지 센터부터 할당된 저택, 그리고 주변을 감싼 소유의 농장들까지.

호연은 자신의 닉네임이 표시된 캐릭터 정보를 살펴보았다.

[Bugman]

[서버 | 모아읍(TEST)]

[길드] 소속 길드 없음

[캐릭터] IT 귀농인

[직업] 농장주인(전직 보류)

[레벨] 17

[생산력] 38,320

호연은 기존에 테스트하던 계정의 데이터를 그대로 끌어와 모아읍에 세팅해 두었다. QA와 UX 인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전송이 말마따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개인 계정은 따로 배포가 가능하도록 개발실이 손을 써 두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하.”

편집이야 어련히 해 주겠지만, 열흘 전쯤 촬영한 <토킹어바웃유>의 인터뷰 내용이 머릿속에서 좀체 빠지질 않았다. 각인에 대해 노코멘트 했어도 됐을 텐데, 괜히 운명이니 짝이니 부연한 것 같았다.

“…됐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을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자연히 만날 수 있겠지.

호연은 잡생각을 떨쳐 내려 창고에서 이앙기를 꺼냈다. 추가 확대한 땅을 갈며 농작물을 심을 생각이었다.

밭으로 향하는 도중, 시선이 옆으로 기울었다. 유저 표시가 추가된 오두막이 보였다. 누가 온 건가? 호연이 미간을 모았다. 벌써 테스터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가? 따로 접속 안내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직원인가.

대문 문턱을 넘는데 오두막 주인인 듯한 청년이 보였다.

“뭡니까?”

“안녕하세요.”

“소속.”

덜덜덜, 크게 울리는 이앙기 시동을 끈 그의 말투는 퍽 냉랭했다.

“서버 접속 안내 못 받았습니까?”

“서버요?”

“퀸 스튜디오 모니터링?”

디렉터한테 전달받지 못했는데, 벌써 진행 중인 건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향해 언짢은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황한 청년이 뒤로 물러났다.

**

이호연의 시야에 옆집 청년이 보였다. 오픈을 앞두고 아무리 신경이 곤두섰다지만 기분 여하를 막론하고 함부로 대한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쓰였다. 청년이 직원이라면? 서버실일 수도 있고, UX팀이나 QA 조직일 수도 있다.

VR을 준비하며 모든 직원이 격무로 고생 중이지만 특히 서버실은 밤낮이 없었다. 모아게임즈의 꺼지지 않는 촛불은 단연 퀸 스튜디오였다. 정기 점검이나 긴급으로 해야 하는 점검이 아닌 이상 게임은 24시간 돌아간다. 즉, 서버도 24시간 돌아간다는 말이다. 봇이 자동 탐지하여 이슈 발생 로그를 올려 주지만, 퇴근 후 서로 돌아가며 이상 패턴 감지를 모니터링 한다.

직원이 아니어도 문제다. ‘우리 게임을 잘 부탁합니다’ 하고 굽혀도 모자랄 판에 테스터에게 너 누구냐 삿대질한 것과 같았다. 뉴스에 모 게임 회사 대표 테스터에게 갑질, 이런 식으로 부풀려진 기사가 보도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명백한 제 실수라 정중히 사과해야겠다 싶어 청년의 로그인을 기다렸다. 옆집인 것 같으니 한 달 동안은 싫어도 얼굴을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는 트랙터로 밭을 일구며 힐끔힐끔 건너편 농장을 살폈다. 씩씩하게 삽을 들고 내려온 청년은 첫 퀘스트로 소들이 싸 둔 똥을 치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던 청년의 밭에서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기요!”

투르르르, 투두르르르.

“저기요! 아, 아저씨!”

아저씨? 호연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트랙터 시동을 끄고 청년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버리라고 하는데요.”

버리. 입속말로 청년의 닉네임을 굴려 보았다. 호칭을 정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예, 어제 뵌 분.”

버리는 제가 게임을 어제부터 시작했고, 삽질이 너무 힘드니 굴삭기를 빌려 달라고 했다. 이미 대부분의 장비를 갖춘 호연이었다. 교환 창을 열어 굴삭기를 넣어 주자 그는 해맑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해 왔다.

호연이 묘한 이질감을 느낀 건 그때였다. 그는 트랙터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며 잠시 골몰했다.

테스터가 장비를 빌리기도 하나? 전송이에게 테스트군에 대해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분명 결제 테스트에 대한 안내를 받았을 텐데, 왜 빌려 달라고 하지?

서버실 직원이 아니라는 건 확언할 수 있었다. 접속 로그나 데이터를 살펴볼까 하다 손끝을 세워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껏 해 온 대로 개발 환경 코드를 짜깁기해 확인할 순 있을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접속했고, 사용한 콘솔이 어떤 것인지, 테스트 링크도 정상적인 루트의 것인지까지 모두 다.

다만, 타인의 로그를 열어 보려면 대표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개발실과 컨플라이언스에 별도 요청을 해야 한다.

“흠.”

호연은 지시를 내릴지, 아니면 30일 동안 모아읍을 통째로 걷어 내 자신이 직접 감별해 낼지 고민하다 전송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시끌시끌한 외부 소음을 뚫고 전송이의 음성이 귓바퀴를 돌았다.

“외부 테스트, 아직 시작 전이면 타 서버로 옮길 수 있지.”

「타 서버요? 얼마 안 돼서 가능은 한데….」

“볼 게 좀 있어. 유저 닉네임 버리, 버리라는 유저 데이터 빼고 다 날려.”

「네, 네? 갑자기?」

버리가 불안 요소이긴 하지만 아직 전송이에게 알리기엔 시기상조였다.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정이 있지 않은가. 서버실 직원이 대표자 캐릭터를 미처 구분 못 한 걸 수도 있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전송이의 목소리엔 의아함이 만연했다. 호연은 재차 부탁하며 설명을 얼버무렸다.

「지금 날려야 해요? 저 지금 나와 있는데.」

“출근하고 날려도 되고.”

지시를 내린 다음 날, 개발실 전체에 공지가 내려졌다. 테스트 진행 서버를 옮기자는 내용이었다.

<사내 공지>

안녕하십니까, 총괄 디렉터 캘리입니다.

후속 CBT는 전부 의례읍 0서버(TEST)에서 진행합니다.

서버 ‘모아읍’은 상용 전까지 데이터를 초기화하지 않으며 향후 모아읍 모니터링은 @LEO가 진행합니다.

사전 공유 없이 급히 진행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TO @VR_UIDEVTEAM, @UX_TEAM, @QA_TEAM

C.C @LEO, @HENDRICKS

모아읍 서버가 내부 시스템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낮 동안 진행된 분리 작업이라 예준은 알 수 없었다. 호연은 개발실에 열람 로그를 남기고 버리의 접속 로그를 확인했다. 불법적으로 접근한 이력은 확인되지 않았고, 접속 링크 또한 경로로서의 결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버리를 특정 지을 수 있는 정보를 긁어 내(모두 긁어모아) 정리했다.

접속 IP는 야탑역 부근, 접속 시간대는 주로 저녁 시간.

접속 장소는 외부일 수도 있지만 정상적인 테스터라면 사전 공유된 시간대에 접속해야 함이 맞고, 배정된 충전금으로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버리는 최초 접속부터 결제는커녕 상점에 들어간 이력도 없고, 그저 이앙기와 굴삭기에 대한 조회만 확인되었다. 확실히 외부인이 맞았다. 호연은 버리라는 청년을 어떻게 처리할지 잠시 고민하다 치미는 한숨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다시 접속해 보니 게임 내 알림이 추가돼 있었다.

[친구 요청][버리][확인][취소]

“친구?”

외부인이 감히 겁도 없이 친구? 실소를 터뜨린 그는 수락을 잠시 보류했다.

**

처음엔 전부 계산하고 한 행동이었다. 어디 본부인지 넌지시 떠본 것도, 퀘스트를 같이 하자는 제안도. 버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추가적인 로그를 파악해 보려던 의도였다. 악의를 갖고 접근한 사람인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했고, 만약 그렇다면 증빙을 위해서라도 붙들어 두어야 했다.

장수말벌의 등장만 아니었어도.

코드를 잘못 손본 탓인지, 개별 배포 진행 중 발생한 사소한 이슈인 것인지 꿀벌 활동 시간대가 아닌 해가 진 뒤에 장수말벌이 출몰했다. 로그 데이터를 남길 겨를도 없이 적으로 인지되어 공격받았고, 저택에 버리가 들어오게 됐다. 게임을 종료하고 다시 시작해도 됐지만, 도와줄 사람이 버리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황이 해소된 후 버리는 1장을 깰 수 있도록 도와주어 고맙다며 교환을 요청해 왔다.

경계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적기라는 판단이 섰다. 좋은 사람인 것 같다며 버리를 구슬리고, 벌꿀 술을 함께 먹자 했던 것도 나름의 전략이었다. (물론 5장을 깨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러던 중,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눈에 들어왔다. 촬영을 마치고 전송이와 김사훈과 커피를 마시다 우연히 이름을 듣게 됐다. 예준이라고.

그때부터 예준을 주시하게 됐다. 7개월 된 카페 아르바이트. RTF를 좋아해서 개발사 사내 카페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어 지원했다고 전송이에게 들은 것도 같았다. 인사팀 단기 계약직 인사 명부를 볼 것도 없이, 인사팀장과 몇 마디 나누다 예준이 야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야탑에서 접속한 이력이 보이는 정체불명의 테스터 버리와 사내 카페 1층에서 근무하며 야탑에 사는 예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

긴가민가하던 추측에 확신을 얻은 건 외부 미팅에서 돌아오던 때였다. 적당한 타이밍을 보다 전송이에게 예준에 대해 물었다. 둘만 다녀온 미팅이라 다행이지, 눈치 빠른 김사훈이 있었다면 한 번에 호연의 각인 상대가 예준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반년 전인가? 바뀐 알바인데 귀엽죠?’

‘…성은 뭔데.’

‘정예준. 동글동글해서 정감 가는 이름이야, 그쵸?’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조작하다 ‘아!’ 하고 무언가 떠오른 듯 탄성을 내질렀다.

‘망했다, 있잖아요, 선배….’

‘왜.’

‘내가 CBT 코드를 저 친구한테도 줬어요. 아직 하고 있나?’

이실직고한 전송이가 잘못했다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도 하고 있다면, 모아읍에서 게임을 진행 중일 거라는 이야기에 호연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 그래도 저 친구가 유포하거나…, 그런 친구는,’

‘그냥 둬.’

‘네…?’

‘그냥 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피식, 절로 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소속을 묻는 질문에 불안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캐릭터 표정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살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편으로는 문을 잡아 주었던 그날 알아차렸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오랜 친구와 후배가 돌아가며 훼방을 놓고 확신을 준 상황이 퍽 우습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게, 김사훈이 아니었다면 예준이 제 이름을 말하는 걸 진작 들었을 테니까.

예준이 접속하지 않았던 사흘. 딱 거기까지가 호연이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였다. 금요일에 버리가 버그맨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호연은 현실에서 예준에게 접근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Re, D-1 +00:12

타인과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 사람의 삶과 자신의 삶을 교환하는 행위다. 서로의 삶과 시간을 교환하는 동안, 기억과 추억과 정이 남게 된다. 사람이 아닌 로봇이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만, 이호연은 로봇도 아니고 냉혈한도 아니었다.

알아차리자마자 버그맨이 이호연임을 밝혔어야 했을까.

자문한 호연이 신호 앞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에게 각인된 이름이 이호연임을 알고도 예준은 자신과 거리를 두었다. 흔한 이름일 순 있겠지만,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회사의 대표 이름을 몰랐을 리 없었다. 이름으로 묶일 생각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다. 각인된 상대를 등지고 게임 속 버그맨에게 호의를 드러낼 것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서 마음에 남은 것은 버리가 보이는 호의와 다정함이었다. 툴툴대고 왁왁 소리를 지르면서도 대신 벌레를 잡아 주는 모습을 보며 한 번도 웃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달리던 차량이 야탑역 인근에 다다라 비상등을 켰다. 출발 전 전송이에게서 미리 받아 낸 예준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예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드셋을 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010-23XX-1001]

넋을 놓고 있던 예준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에 화들짝 놀랐다. 상대방은 짐작건대 이호연일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준 씨.」

“대, 대표님.”

「레오라고 부르랬는데.」

귓가에 맴도는 농도 짙은 음성에서 이호연과 버그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게.”

「형이라고 불러 주면 더 좋겠지만,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서.」

삼십 대가 이십 대를 만나는 것만으로 사기꾼, 도둑놈이라 양심이 찔린다며 호연이 희소했다.

「보고 싶은데요.」

“기만하려던 거 아니라면서요.”

「기만처럼 느껴졌다면 사과할게요.」

“버그맨이, 대표님 맞아요?”

「또 다른 뭔가가 있을까 봐?」

“…….”

「저 지금 야탑역인데, 내려와요. 얼굴 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어디인지 알려 줘도 좋고.」

다정한 그의 말투는 분명 버그맨이 맞다. 또, 이호연이기도 했다.

예준은 호연에게 오피스텔 주소를 알려 주었다. 밖에 내려가서 갈 곳도 마땅치 않고, 그의 차에서 이야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 것 같았다. 정확히는 끊어 낼 수 없는 운명의 실이 손에 쥐여 있었다. 가지고 논 거라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아 너무하다 말하고 싶은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507호 앞에 다다른 이호연이 문을 두드렸다. 예준 씨, 부르는 목소리에 예준이 문을 열고 그를 맞았다.

“드디어 보네요.”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예준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버그맨에게 하듯이 해요. 그렇게 대해 주는 게 훨씬 좋은데.”

그가 아쉬움을 표하며 신발을 벗고 마루 위에 올라섰다.

“지, 진짜 버그맨, 맞아요?”

“맞습니다.”

이호연이 고개 숙인 예준의 턱을 손으로 감싸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겨우 맞춰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했는데, 이런 게 정말 운명인 걸까.

“제 눈.”

“…….”

“해왕성이라면서요.”

그런 고백은 처음 들어 봤다며, 이호연의 눈이 따뜻하게 일렁였다.

예준은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이 난다던데,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가 제 고백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 좀 봅시다.”

호연의 부탁에 예준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버그맨이 이호연인 줄은 전혀 모르고 그냥 끌렸는데,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꿈처럼 느껴졌다.

놀람, 배신감, 서운함이 한데 엉긴 마음 한구석엔 분명 엷게 피어오른 안도가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호연의 각인 상대가 저이고, 호감을 느낀 버그맨이 실은 이호연이라는 사실이 마음의 시소에서 추를 더해 왔다. 열감과도 같은 감정이 배 속 낮은 점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예준 씨, 응?”

거리를 좁혀 다가간 호연이 예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현실에서 닿고 싶었던 체온이 선연히 피부로 느껴졌다. 맞닿은 입술을 거부하지 않는 예준이 사랑스러워 새가 쪼듯 계속해서 입술을 내렸다. 예준은 마주한 호연의 눈동자에서 깊은 바다를 느꼈다. 숨이 막힌 건 입맞춤 때문만이 아니었다. 삼킬 듯 입을 맞춰 오는 호연 탓에 예준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침대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호연은 망설임 없이 예준의 드로즈를 벗겼다. 게임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따끈하게 데워진 살결 위로 입술이 닿았다. 혀를 굴려 예준의 자지를 샅샅이 핥았다. 선액이 흐르는 귀두를 쭉쭉 빨아 삼키자 허리가 움찔움찔 들썩이며 정직하게 반응해 왔다.

“으, 흐읏.”

“맞네.”

“흑.”

“제 이름, 여기 이렇게 선명한데.”

앙증맞은 고환을 주물거린 이호연이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예준 씨 이름은 여기 있습니다.”

성난 좆이 꺼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길쭉하고 두꺼운 살 몽둥이에 새겨진 이름은 분명 예준의 것이 맞았다. 호연이 예준의 다리를 벌려 가슴 가까이 고정했다. 엉덩이가 들리며 둔부가 천장을 향했다. 조명에 반사되어 하얀 엉덩이에 호연의 자지가 불끈 섰다.

“자자잠깐!”

“응?”

호연은 별안간 튀어나온 외침에 멈칫했다.

“처, 처음인데요.”

어디로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만, 현실에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단 말입니다. 웅얼댄 예준이 고개를 수그렸다.

“가르쳐 줄게요.”

“으아, 앗.”

파드득 움츠린 다리가 허공에서 달달 떨렸다.

호연은 주름을 하나하나 훑으며 꼼꼼하게 적셔 나갔다. 입술이 번들거리고, 침이 턱을 타고 흐르는데도 멈출 수 없었다. 풀어질 대로 풀어진 구멍이 반질반질 젖어 움찔거렸다. 오금을 고정한 손이 거둬지자 하얀 다리가 힘없이 벌어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예준이 가쁘게 호흡하며 쌕쌕거리는 동안,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호연의 귀두 끝이 벌름대는 구멍에 맞춰졌다.

“해도 되나.”

“이, 이미 할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호연의 어깨를 가볍게 밀친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매트리스가 출렁이며 두 인영이 겹쳐졌다.

D-day, Release

[PICK][게임 업계 지각 변동! VR의 신세계를 연 RTF VR!]

[하반기 기대작 모아게임즈 ‘RTF VR’출시]

[모아게임즈, ‘RTF VR’ 출시와 함께 상장 예고!]

[이호연 모아게임즈 대표, 전 직원 대상 인센티브 개별 300만 원 지급. 정규, 계약, 인턴, 아르바이트 가리지 않고 전원 지급 약속.]

라이브 당일 아침부터 보도가 쏟아졌다. 서버가 열리기도 전인데 천여 명의 대기자가 생길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출근하는 직원들의 얼굴에서 환희가 보였다. 오래도록 준비한 게임이 출시된 날, 그간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귀한 날이었다.

뉴스 보도뿐 아니라 예준의 주변도 RTF VR에 큰 기대를 보였다.

[(의례3섭)꿀벌키우기장인협회_오픈대화방]

[라일락꽃필무렵]: 오늘 오픈 맞죠?

[Daydream]: 네네, 길마님 서버 의례읍 3 맞죠?

[장충동오함마]: 11시만 기다리는 중ㅠㅠ

[권윤재]: 저도요.ㅎ

[qwer1234]: 11시 오픈이라니… 자정부터 기다린 백수는 웁니다.ㅠㅠ

길드원들도 서버 오픈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예준이 한 달 동안 플레이해 본 사실을 아는 준성은 인턴 기간이 끝나자마자 RTF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예준은 작업대 아래로 손을 내려 메시지를 작성했다.

-아마 다른 게임처럼 길드 생성이나 가입 가능한 단계가 있을 거라 오늘 밤에 빠르게 진행하고 말씀드릴게요.

모바일이면 카페에서도 바로 접속이 가능하지만, VR이다 보니 집에 가야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었다. 아쉬움을 드러내며 먼저들 즐기고 계시라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엔커피]: 방충 모자 쓰고 모여서 오픈 기념사진도 찍어요! 공카 보니까 이벤트로 올라왔던데.

[래미콘힐스테이트]: 역시 커피 누나! 빠름빠름~

-밤에 공지 따로 할 텐데, 길드 구성이나 운영진은 모바일이랑 동일하게 가져갈게요.

[백현동버그킬러]: VR에서도 잘 부탁드려요.

백현동버그킬러의 대답을 보고 예준은 휴대폰을 바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궁금하긴 했다. 3년 동안 오프 모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백현동의 모습이. 커스텀된 외모라도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테니까. 예준은 이번 기회에 백현동에게 부길마 자리를 위임할까 싶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레오! 안녕하세요!”

멀리서 명랑한 인사가 들려왔다. 이호연은 저에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화답했다. 예준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호연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예준 씨.”

픽업대 앞에서 인사하는 그를 보며 예준이 귓불을 붉혔다. 각인을 확인하고 아침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아직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능글맞게 웃음 지은 호연이 상체를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이따 퇴근하고 벌꿀 술이나 마시러 갈까요. 이번엔 내 집에서.”

“지, 집에요?”

“좀 부담인가? 오픈했으니 같이 스타트할 겸, 저녁도 먹으려고 했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예준의 반응에 호연이 눈매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제 분명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예준은 꼭두새벽부터 아르바이트 출근을 해야 한다며 제 품에서 매몰차게 벗어났다. 8시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도 예준은 단호했다. 남들보다 늦은 연애이니만큼 1분 1초가 아쉬운데 조바심이 나는 건 호연 저뿐인 것 같았다.

“저 오늘은 퇴근하고 길드 사람들이랑…, 아, 말했나요? 제가 길드 마스터라서 이거저거 세팅할 게 좀…….”

예준은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다 말끝을 흐렸다. 어찌 보면 사귀기 시작한 지 1일, 아니 2일째인데 애인보다 게임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양심이 콕콕 찔렸다.

“RTF 모바일?”

호연이 묻자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해요. 저도 모바일 길드원들이랑 같이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돼요?”

예준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서버는? 다른 서버일 수 있지 않나? 그보다 대표면서 길드까지 가입했단 말이야? 그쪽 길드원들은 자기 길드에 대표가 있다는 걸…, 당연히 모르겠지? 오픈 직전 테스트를 같이 진행했던 걸 생각하면 호연에게 RTF가 매우 각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바일 버전을 아직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서버는 의례읍 3, 여분 콘솔 있어요.”

호연은 혹시나 있을 예준의 거부를 원천 봉쇄했다. 서버가 다르다면 길드원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예준이 사전 예약한 서버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무조건 제집으로 데려가 밥도 해 먹이고, 게임도 하고, 잠도 같이 잘 생각이었다.

“알겠어, 알겠어요. 이따 끝나고 대표님 집 가요.”

승낙하기 전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생각으로 버티고 선 호연의 모습에 예준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의 대답에 만족한 호연이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예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

예준은 약속대로 호연과 같이 퇴근하기 위해 6시가 되자마자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뒤, 주머니에서 계속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의례3섭)꿀벌키우기장인협회_오픈대화방][+300]

대화를 전부 확인해 보면 좋겠지만, 옆에서 운전하는 이호연도 있고 대화량이 많아 다 읽을 수 없어 맨 밑으로 내려왔다.

-저 퇴근 중이요. 가서 바로 접할게요!

예준은 짧게 메시지를 남기고 시선을 기울여 호연을 살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거치대에 둔 호연의 휴대폰 상단에 메시지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겹겹이 쌓이는 UI를 흘끔 바라보며 역시 대표자라 퇴근 후에도 바쁜 건가, 하고 생각했다.

퇴근 시간이었지만 호연의 집은 5분 거리에 있어 교통 체증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회사와도 가깝지만 역과도 가까웠고, 주차도 속전속결이었다.

예준은 호연의 아파트 현관에 발을 들였다. 게임 잡지에서 가끔 보았던 대표자 인터뷰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청소가 취미라고 했던 것 같은데,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실내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서른 중반 남자가 혼자 사는 집치고 평수도 넓은데 깨끗하기까지 하다니. 멍한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다 이호연의 재촉에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았다.

“편히 앉아요. 밥부터? 아니면 게임 세팅부터?”

“게임 세팅부터요. 메시지가 많이 와서……, 미안해요.”

호연이 괜찮다며 예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예준이 RTF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길드 마스터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자신이 만든 게임을 좋아한다는데 식사부터 하자고 할 수 있을 리가.

이호연은 TV장에서 콘솔을 꺼내 전원을 켜고 RTF VR 게임 코드를 넣었다. 그는 예준의 머리에 헤드셋을 씌워 주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말 못 했는데, 저도 의례읍 3 서버예요.”

캐릭터 세팅을 진행하며 예준이 입을 열었다.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 이렇게 닿을 줄도 몰랐고, 많고 많은 서버 중 같은 서버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들어가면 친구부터 걸게요. 저는 원래 사용하던 닉네임으로 가려고요. 버그킬러로.”

“버그킬러…?”

이호연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도 아세요? 저 나름 오래된 길드 소속이라 아실 수도…….”

“예준 씨가 버그킬러?”

되묻는 호연의 목소리에 예준이 헤드셋을 살짝 내려 그를 바라봤다.

“하하, 하…, 그 길마님이 예준 씨라니.”

“네?”

“들어가서 친추 걸게요.”

이호연이 보면 안다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헤드셋을 고쳐 썼다. 테스트 환경에서 이미 보았기 때문에 시네마틱과 1장 진입 컷 신을 스킵한 뒤 마을에서 눈을 떴다. 보이는 풍경은 테스트 때 보았던 것과 같았다.

운영 서버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선 버그맨의 저택이 바로 지척에 있었는데 이번엔 저에게 할당받은 저택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거였다. 맵을 확인한 예준은 모드 자체가 구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바로 마을 모드로 맵을 전환했다. 마을로 전환되고서야 접속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미정슈퍼와 철물점 등을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예준은 다시 맵 메뉴를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세 가지 모드 전환을 통해 맵 구성을 커스텀할 수 있었다. 솔로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사유지 모드와 친구와 공동 명의를 위한 파티 모드, 길드 쉼터와 전용 금고, 농장 등을 가꿀 수 있는 길드 모드. 테스트 환경에서는 자동으로 파티 모드로 설정돼 있어 모드 전환이 불가했던 것이다.

[친구 요청][백현동버그킬러][확인][취소]

때마침 예준의 시야 아래에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어…?”

당황한 예준이 두 눈을 깜빡였다. 아직 길드 대화방에 캐릭터 생성 여부를 알리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확인 버튼을 탭해 친구 정보를 확인했다. 레벨이 1인 것을 보아 막 생성한 계정 같았다.

[백현동버그킬러]

“길마님.”

예준의 앞에 Bugman의 모습을 한 백현동버그킬러가 다가왔다. 커스텀을 할 수 있다곤 하지만, 외양을 이렇게 똑같이 세팅할 수 있다고?

“백현동버그킬러 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백현동버그킬러의 목소리가 Bugman과 똑같이 느껴졌다. 아니, 옆에서도 겹쳐 들리는 듯했다. 예준이 손을 뻗어 백현동버그킬러의 팔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회색빛 머리카락, 깊고 푸른 눈동자. 어떻게 보아도 같은 사람이었다.

“설마.”

허탈한 웃음을 내비친 예준이 헤드셋을 벗고 옆에 앉은 호연의 무릎을 건드렸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호연도 헤드셋을 벗고 예준을 마주 봤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Bugman이 이호연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놀라웠는데, 이건 정도가 더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3년 동안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이 촤르륵,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오프 모임에 나올 수 없던 이유, 래미콘힐스테이트가 그리마를 봤다고 했을 때 덩달아 놀라던 모습까지.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도.

“운영 잘하는 길마님이라 한번 보고 싶긴 했는데, 예준 씨일 줄이야.”

“저도 마찬가지라고요. 어떻게 백현동 님이 대표님이에요.”

“나 되게 막 벅찬데.”

호연이 상기된 얼굴로 예준의 손을 포개 잡았다.

“안고 싶은데, 해도 됩니까.”

게임보다, 식사보다 더 중요한 순간이었다. 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러분, 죄송한데 저 오늘 못 들어가요ㅠㅠ 내일 봐요!

동시에 울린 진동에 호연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예준을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

“갑시다, 길마님.”

“으, 으앗…!”

예준이 호연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등에 둘린 커다란 손이 저를 다독였다. 집에 가자고 할 때부터 하게 되리라는 걸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는 아니었는데…!

당황한 예준의 목소리가 신음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예준은 또 제집으로 가자는 호연을 가까스로 뿌리쳤다.

게임 시작과 함께 오픈 대화방은 연일 복작거리고 있었다. 서버 최초로 뽑기 상자에서 전설 등급 이앙기를 뽑은 아침엔커피는 못해도 1년 이상은 RTF 세상에 살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이를 본 장충동오함마는 남의 손으로 뽑는 게 진리라며 제 계정을 알려 주겠다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참여율이 저조했던 강준성과 권윤재도 오픈 대화방 채팅에 활발히 참여하며 흥미를 드러냈다. 1장을 깬 준성은 소똥이 뭐냐고, 알고 있었던 거냐며 묻기도 했다.

괜스레 조바심이 생겼다. 아무리 그래도 길마인데, 길드도 생성하고 기반을 다져 놔야 이탈이 없지. 이렇게 가다가는 길드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호연만 남을 게 빤했다.

헤드셋을 뒤집어쓴 예준이 캐릭터 설정 창에서 버그킬러를 선택하고 마을에 섰다. 꿀벌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알림과 함께, 눈앞의 화면에 관리자 알림 창이 떠올랐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마이그레이션?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36%, 52%, 87%……. 100%까지 다다르자 테스트 환경에서 쌓은 꿀벌 친밀도가 운영 서버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호연이 따로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직권 남용 아닌가?

예준은 새로 설정한 버그킬러 캐릭터로 꿀벌을 키워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악독하고 지독한 인간이라며 마주칠 때마다 꿀인지 침인지 모를 분비물을 찍찍 뱉어 대는 제 꿀벌들을 생각하면 친밀도를 다시 형성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양아치 같은 꿀벌들이긴 해도 한 달 동안 정이 들기도 하여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아주 가끔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제 인벤토리와 캐릭터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장비나 캐릭터 자체를 옮기는 건 길드원들이 알아차릴 수 있고, 모니터링 과정에서 운영자 제재가 들어갈 수 있기에 기존에 키우던 꿀벌만 옮겨 준 모양이었다.

예준은 게임 가이드를 하나씩 눌러 보며 길드 생성 조건을 확인했다. 테스트 당시에는 제한돼 있었던 듯, 1장까지 완료 후 길드를 생성할 수 있도록 버튼이 활성화된다고 적혀 있었다.

1장이면…, 소똥인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랜드 오픈으로 선물 상자 많이 뿌릴 겁니다.’

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린 예준이 바로 상점에 들어가 이벤트 메뉴를 탭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선물 상자 0원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고, 구매하는 것 외에도 우편함에 여러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상자와 우편에서 습득한 고급 등급 굴삭기를 강화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이호연이랑 현실에서 첫날밤을 보낸 게 싫었다는 건 아니지만, 어제 했으면 더 좋았을걸.

게임 접속 1시간이 지나기 전에 1장을 완료한 예준이 서둘러 길드를 생성했다.

[꿀벌키우기장인협회]

생성 완료 후 헤드셋을 벗고 피로감에 불룩 솟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의례3섭)꿀벌키우기장인협회_오픈대화방][+300]

얼마나 많은 대화들이 오간 건지, 채팅창 벽타기는커녕 바로 위 대화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러분, 길드 생성됐고요. 길드 명은 똑같아요. 하루지만 유목 생활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엔커피]: 고생 많으셨어요!

[래미콘힐스테이트]: (이모티콘) 드디어 길드가!

[qwer1234]: 가입 신청 넣었습니다!

[Daydream]: 저도 넣었어요!

[라일락꽃필무렵]: 저도!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해요ㅠㅠ

-(이모티콘) 신청 수락 바로 할게요!

[장충동오함마]: 길마님, 오늘도 제 머리 위에 길드 마크 없으면 막피 전향할까 생각했잖아요ㅋㅋ

-저 1빠로 따이는 건가요?ㅠㅠㅋㅋㅋ

[장충동오함마]: ㅋㅋㅋㅋ 버그킬러 좌표 제보받습니다.

[qwer1234]: 미정슈퍼 앞!!ㅋㅋㅋㅋㅋㅋ

[장충동오함마]: 화긘

-ㅋㅋㅋㅋ

[백현동버그킬러]: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준의 시선이 백현동버그킬러가 보낸 메시지에 머물렀다. 백현동버그킬러가 이호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평소와 같은 딱딱한 말투가 다르게 느껴졌다.

-자자, 길드 모드 전환해서 모입시다! 방충 모자 쓰고 오세요. 이후는 길드 음성 채팅으로 할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길드 설정에서 사람들 닉네임을 하나하나 보며 가입 신청을 수락해 나갔다.

길드 모드에서 제공하는 농장 입구에는 정자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골프장 그늘막처럼 길드 농장을 가꾸다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는 햇볕 조각이 꼭 윤슬처럼 부서져 풍광과 어우러졌다.

예준은 정자 앞에 서서 인벤토리에서 방충 모자를 꺼내 쓰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우와, 실제로 만난 것 같은 기분인데요?”

Daydream이 먼저 다가오며 예준에게 인사했다.

“진짜 개쩐다.”

장충동오함마도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저를 보자마자 커스텀 외모라도 상상했던 분위기와 비슷하다며 한참을 멀뚱멀뚱 신기하게 쳐다봤다. 외양이 현실과 다르더라도 그간 보아 왔기에 척하면 척이라나.

“지방민이라 정모 같은 거 하면 참가도 못 하고 외로웠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너무 좋아요.”

“그러게요. 와, 왜케 막 감동이지? 약간 상봉 느낌이야.”

아침엔커피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함께해 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한 줌의 어색함도 없이 대화를 곧잘 주고받았다. 주로 수다를 끌고 가는 멤버들 외에 그간 조용히 활동해 온 길드원들은 부끄러운 듯 쭈뼛쭈뼛 다가와 인사했다. 북어찜, 레드플래닛, 레인보우캔디, 다이빙인썸머 등 몇몇 유저들은 메신저와 길드 채팅에서도 조용했던 터라 이러한 만남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어!”

그때, 장충동오함마가 예준의 뒤쪽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백현동 님이다!”

“백현동 님?”

“길마님, 백현동 님도 왔어요!”

예준이 백현동버그킬러,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눈짓으로 인사한 예준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반갑습니다.”

꾸벅 인사한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예준 옆에 서며 길드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정자에 앉아 스크린 샷을 찍기 전, 예준이 길드원들 앞에서 길드 세팅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길드 운영 관련해서 달라지는 점부터 이야기하고 사진 찍을게요.”

시끌시끌하던 길드원들이 침묵하며 예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길마 변경 관련해서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qwer은 제 대학 친구고, 여태 많이 도와줬거든요. VR에서는 백현동버그킬러 님께 부길마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여기서 의견 주셔도 되고, 개인 채팅 주셔도 됩니다.”

이호연은 예준의 조곤조곤한 설명을 담담히 들으며 길드원 면면을 살폈다. 길드에서 간부를 맡든 맡지 않든, 그건 그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반 길드원으로 소속돼 있는 편이 요직에 있는 그에게는 나은 선택이었다. 정예 길드원까지 하게 된 것도 버그킬러 자체의 운영 능력을 보고 간부진 제안에 응한 것뿐이었다.

예준은 VR 게임을 하게 되면 백현동버그킬러가 누구라고 하더라도 부길마 자리에 올리려 했다.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준성에게도 오늘 오전에 미리 전달해 두었는데, 준성은 부길마에서 내려와도 괜찮고, 정예든 일반 길드원이든 아무래도 좋다고 해 주었다.

“의견이 있을 리가 있나요?”

조용히 듣고 있던 아침엔커피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준이 길마에서 물러나는 것만 아니라면 어떤 결정이든 따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길마 형, 지금 백현동 님 얼굴 보고 부길마 넘기겠다고 한 건 아니죠?”

래미콘힐스테이트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어깨에 팔을 걸쳤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호연이 단걸음에 다가와 제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 반동으로 래미콘힐스테이트가 뒤로 물러서게 됐다.

“길마님이 부탁하시는데, 거절하면 안 되겠죠.”

“어어…?”

“그래도 조건은 걸고 싶어서요.”

예준이 눈을 크게 뜨고 호연을 올려다봤다. 조건을 걸고 싶다는 그의 눈이 따뜻하게 빛났다.

“제가 VR에서 해 보고 싶은 콘텐츠가 있는데, 그거 저랑 같이 해 주시면 부길마 하겠습니다.”

멍한 표정을 한 예준과 달리 진지하게 말을 잇는 호연을 보며 길드원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뭔데요?”

이호연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어 물었다.

“저랑 공동 명의 해 주세요.”

다른 사람이랑 하지 말고, 무조건 저랑 하자고 말했다.

예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부길마랑 공동 명의가 무슨 상관관계라고! 새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니 길드원들 전부 한마디씩 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중 Daydream이 콧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꼭 프러포즈 같다, 그쵸?”

“아아니! 무, 무슨!”

당황한 예준이 바락 소리치자 다들 키득거리며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간 묵묵하게 게임하고 콘텐츠에 성실하게 임한 백현동버그킬러의 공동 명의 제안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길마님, 다들 이견 없다고 하니 부길마는 백현동 님인 걸로 하고, 우리 사진부터 찍읍시다. 공동 명의는 두 분이 정해서 길드 메신저에 올려 주시면 축하는 해 드릴게요. 자자, 포즈들 취하세요!”

강준성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와하하 웃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강준성은 저가 스크린 샷을 찍겠다며 서로 겹치지 않게 길드원들의 닉네임을 한 명 한 명 불러 가며 배치를 조정해 주었다.

예준 옆에 선 호연이 감싸듯 어깨동무를 걸어 왔다. 끌어안겨진 채 두 눈을 크게 뜨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설마 다른 사람이랑 하려고 했어요?”

속닥이는 음성에 예준은 결국 못 말린다는 듯 눈매를 이지러뜨렸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요. 손을 들어 제 어깨를 감싼 이호연의 손등을 포개 잡았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함께하자는 약속의 표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