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대표는 최근 조금 난감했다.
단 한 번도 이성으로 느낀 적 없던 상대가 자꾸만 야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몇 주 전, 술을 마시다 러트가 오는 바람에 누군가와 잠자리를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날의 기억은 새하얗게 지워졌으나, 자꾸만 몇몇 부분이나 상대의 신음이 귀에서 맴돌았다.
그래,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짝’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짝이라도 만난 느낌이 들었다.
하나 문제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기억은 툭툭 끊겨 있었고, 상대의 얼굴이나 그가 저를 부르는 호칭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 비서에게 시선이 갔다. 체격이 비슷해서일까, 아니면 남성이라는 이유 탓일까.
제게 남은 기억은 상대의 체격과 신음 소리, 그리고 묘한 자리에 점이 있다는 정도였다.
권 대표에게 이 비서는 알파 같은 베타였으며, 일도 잘하고 놀리는 재미가 있는 비서였다. 후에 자신이 다른 계열사로 옮기게 되더라도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성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자신은 가벼운 연애를 지향하지만, 이 비서는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베타’라는 형질에 큰 흥미를 느낀 적도 없었다.
간혹 거래처 놈들이 눈독을 들여도 이상한 취향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나 그날, 베타 남성과 잔 것이 화근이었을까.
“권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 땡큐.”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 정장은 오래 입은 듯했음에도 지저분한 구석이 없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선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이 비서가 사 오는 샌드위치보다, 이 비서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그는 그런 쪽에서는 꽤 둔감한 편이라 눈치를 채지 못했기에 권 대표는 더욱더 죄책감 없이 훑어볼 수 있었다.
“안 드십니까?”
“어, 먹…… 어! 이, 이 비서.”
“예, 대표님.”
“…….”
최근, 이 비서는 달라졌다. 가끔씩 저를 골탕 먹이곤 했지만 그 빈도수가 확실히 늘어났다. 권 대표는 이 비서가 직접 사 온 할라피뇨와 피망 범벅 샌드위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안 드십니까?”
무심한 얼굴로 차갑게 내려다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제가 상사인데도…… 권 대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 딴에는 숨긴다고, 고개를 돌려 기분 좋은 듯 웃는 얼굴이 귀여워 보여서,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이 비서의 만행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 먹어야지…….”
고개를 내린 권 대표는 비죽 튀어나온 피망과 할라피뇨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권 대표의 호불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이 비서가 실수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건 백 퍼센트 고의였다.
이 비서는 권 대표가 먹을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듯 서류를 손에 쥐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권 대표는 결국 입을 벌려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심술이지?
이틀 전 애인 행세를 대신 해 준 것 때문에? 그렇다고 치기엔 이 비서가 이상해진 건 꽤 되었다. 대략 3주 정도. 그니까…… 러트 이후.
“꼭꼭 씹어 드세요.”
“으엉…….”
거의 씹지 않고 대답하자 이 비서가 구두 굽 소리가 나게 힘차게 걸어와 바닐라 라테를 들어 올렸다.
“함께 드시면서 삼키세요.”
이 비서가 나가면, 바로 뱉을 생각이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권 대표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낯으로 바닐라 라테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그러자 말랑말랑한 빵이 촉촉해지며 자연스레 목구멍이 열렸다.
와그작, 와, 그작…….
대표실 안에 할라피뇨와 피망을 억지로 씹어 먹는 가련한 식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 * *
“이 비서님. 요즘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경호 1팀 조 팀장이 기묘한 낯으로 제 턱을 살살 긁었다.
교원이 보기에도 권 대표는 최근 많이 이상했다. 처음 며칠은 제게 애인 행세를 부탁하기 위해 그런 줄 알았다.
한데 그날 이후로 그는 더욱 달라졌다. 근무 시간에 애인을 만나러 가는 일이 생기기는커녕 교원이 시키기도 전에 일을 끝내 놓고 다음 업무를 준비했다.
몇 년간 흥청망청 논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지금도 점심시간 이후 남는 시간을 다음 스케줄 체크하는 데에 쓰고 있다.
“이전 애인에게 거하게 차이신 건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 대표님께서 차신 걸로 압니다. 애인이 라운지 입구까지 몇 번 찾아왔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렇네요.”
권 대표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조 팀장도, 교원도 그가 변화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교원은 문득 이틀 전 일요일이 떠올랐다. 항상 함께해야 하는 기사도, 조 팀장도 나오지 않았다.
“조 팀장님, 근데 일요일에는 왜 안 나오셨습니까?”
“……예?”
“대표님 그날 회사 나오셨는데, 모르셨습니까?”
조 팀장의 눈이 잘게 경련했다.
“그, 그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댁에서 나오지 않을 예정이라고, 오피스텔 근처에도 있지 말라고 하셨는데.”
“……기사님도, 그리 들으셨나. 그날 대표님 혼자 나오셨거든요.”
왜 그날은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권 대표가 일요일에 출근한 것이 너무 당혹스러워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일까. 교원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죽을 때가 되신 건 아닙니까? 오늘 검진 좀 받아 볼까요?”
교원의 말에 조 팀장이 “아.” 하고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4시 즈음에 스케줄이 비니, 그때 가는 건 어떨까요?”
“음…… 검사하는 데에 1시간 정도 걸린다고 치면 애매합니다. 다음 스케줄이 5시 30분이에요.”
“아…… 그럼 비서님께서 되는 시간에 빨리 잡아 주세요. 이러다가 대표님 가시면…….”
조 팀장과 교원은 잠시 권 대표가 병을 앓으며 끙끙대는 것을 상상했다.
3개월 남았습니다. 의사의 선고에 좌절하는 권 대표의 얼굴. 그리고 남은 3개월 동안 죽어라고 그 짓만 해 댈 권 대표…….
“우선, 저희는 조금 더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이 오실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둘이 뒤에서 만담을 나누는 동안, 권 대표는 스케줄을 모두 체크한 뒤 이전에 생각해 두었던 프로젝트도 살펴보고 있었다. 최근 IT 사업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만큼 도전하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NM 계열사라는 것 자체가 ‘대기업’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소비자들에게는 상당히 어필이 되겠지만 그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트렌드에 맞춰 가는 것이 좋았다.
이 비서가 워낙 일을 잘해 온 덕에 회사에 모자람은 없었지만……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트렌드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만들어야 했다.
그만큼 독창적인 것이 필요한데…….
“대표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아, 으응.”
교원은 진지하게 태블릿을 살피던 남자가 저를 보자마자 양 볼을 붉히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쯤 되니 ‘열’이라고 하기엔 너무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주기적으로 발열이 일어나는 병이 뭐가 있지?
“이 비서, 근데.”
“네, 말씀하세요.”
차로 돌아가는데, 권 대표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교원은 의학 지식이 모자란 저를 탓하며 열심히 뇌를 굴리고 있었다.
“나 어때?”
“풉, ……뭐, 뭐, 무슨…….”
먹은 것도 없는데 뱉을 뻔했다.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권 대표가 묘하게 수줍은 듯,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살짝, 눈을 휘어 웃었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가 반달눈이 되었다. 그 요사스러운 눈가로 매끄러워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이 툭, 흘러내렸다.
1, 2, 3.
한계다.
먼저 눈을 피한 건 교원이었다. 역시 권 대표가 죽을 때가 다 된 게 분명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이라니 안타깝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권 대표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일까?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저런 얼굴로 애 같은 질문을 하는 거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조만간 검진 예약을 해 두겠습니다.”
“응?”
교원은 다급히 말을 뱉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뛰다시피 차에 올랐지만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쓸데없이 예뻐 가지고, 왜 쓸데없이 페로몬은 또…… 그렇게 야해 빠져서.
그간 권 대표에게 홀려,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까지 쫓아오던 그의 전 애인들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뭐야, 이 비서. 왜 먼저 가고 그래?”
“기사님, 출발 부탁드립니다.”
“대답해 봐, 응? 나 어떠냐니까?”
재차 던져진 물음에 조 팀장과 운전기사의 시선이 교원에게로 쏠렸다. 교원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가늘어지자 교원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미치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꾹, 눈을 감아 버렸다.
차 안에는 삽시간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고, 운전기사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나 안 멋있어? ……그럴 리가 없는데?”
권 대표의 아련한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