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은 퇴근하자마자 집에 들러 몸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매고서 집을 나왔다.
차의겸이 있는 유와이 엔터테인먼트까지는 1시간 즈음이 걸렸기에, 그는 빠르게 준비한 뒤 차에 올라탔다.
최근 기름값이 올라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었지만 아마 대중교통이 끊길 시간에야 보내 줄 터다.
많이 때릴까. 다음 주에 출장인데, 보이지 않는 곳만 때렸으면 좋겠다. 더불어 다리가 움직일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면 했다. 그래야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운전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낮에 있었던 일.
차의겸이 저를 협박하듯 내뱉은 말부터 권 대표의 얼굴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듯 들어와 터질 것만 같았다.
교원은 침을 삼켰다.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거울을 확인했다. 겁을 먹은 낯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정하자. 진, 정.”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교원은 애써 떨리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회사에서처럼 얼굴을 굳히고 머릿속을 비웠다.
회사는 이전보다 삭막해질 것이다. 하나 권 대표가 달라졌으니 제가 무어라 잔소리할 일이 없다. 그러니 부딪칠 일도 적겠지. 그의 태도에 대해 죄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상사와 부하라기엔 최근 지나치게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지금 차의겸을 만나러 가는 것은 늘 있어 왔던 일이다. 오늘 낮의 일은 별개로, 그저 녀석이 조금 장난기가 돋았을 뿐이겠지.
교원이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고모네 집에 얹혀살면서 악바리처럼 이 자리에 오른 것은 그저 노력만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감정 변화가 적은 것은 그에게 장점으로 작용했다.
비참한 것도, 허무한 것도, 괴로운 것도 모두 스스로를 세뇌하면 되었다. 지금처럼.
교원은 어느새 1시간을 달려 유와이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까지 도착했다.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는 연습생들로 인해 건물 곳곳에는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차의겸이 경비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두었는지, 교원의 차는 바로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까만 하늘에 높게 솟은 건물, 그리고 형광등으로 가득 찬 네모반듯한 방들은 꼭 별빛처럼 보였다. 아마 저들은 자신들이 그 별이 되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있겠지.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던 교원과는 달리 말이다.
“차의겸 전무님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아,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교원입니다.”
건물 내부에서 다시 한번 확인을 받고 들어섰다. 안쪽에는 연습생부터 현직 연예인들과 매니저 등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교원은 눈을 내리깔고 엘리베이터로 성큼 다가섰다.
엘리베이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교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물러섰다.
“아, 저기…… 혹시, 연습생?”
“아뇨. 업무차 들렀습니다.”
“아!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는 그, 배우 위주로 키우고 있는 실장인데.”
“죄송합니다.”
여기 올 때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연습생이 있을 턱이 없고, 관계자라면 대체로 얼굴 정도는 꿰고 있으니까.
“그래도, 명함이라도…….”
“죄송합니다. 제가 그쪽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교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올라탔다.
10층까지 올라가는 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느리게 가기를 원했건만, 엘리베이터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또, 어렴풋이 권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애초에 그가 저 같은 인생을 살았을 리가 없지. 태어난 순간부터 비극적인 인생이 결정된 삶이다.
교원은 입구의 데스크 직원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녀 또한 교원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전무실
떡하니 걸려 있는 짙은 색의 문패에 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전무, 전무라. 이 새끼가 하는 일이 있긴 한가? 제 꼴리는 대로 마음에 드는 연습생들을 추행하지만 않으면 다행인 일이다.
아니, 이미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교원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9시 59분…… 땡. 10시네.”
노크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의겸은 기다렸다는 듯 장난스레 교원을 맞이했다. 놈은 뱀 같은 눈으로 집요하게 교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정장 너머를 훑어보는 듯한 느낌에 불쾌감이 일었다.
“올 때는 좀 편하게 입고 오지. 뭐, 정장 입은 것도 예쁘긴 해.”
“본론부터 해.”
“냉정하네. 오늘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위기감이 없나 봐, 교원이는.”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화풀이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인지, 사람을 골리기 위해 부른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교원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제안한 거 생각해 봤어?”
“제안?”
“뭐야, 장난인 줄 알았나 보네.”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활짝 휘어졌다. 그는 커다란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입술을 찬찬히 훑었다. 늘씬한 입술이 번들거렸다.
“너 말이야, 이렇게 해 봤자 빚 다 못 갚을 거 알지.”
“…….”
“물론 우린 꼬박꼬박 내기만 하면 돼. 어쨌든 끝까지 다 받아 내야 하고 말이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매달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갚아도 이자도 못 갚는 신세라고, 너.”
알던 사실이다. 교원은 덤덤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본론부터 말하라고 했잖아.”
“말했잖아? 저번에 제안한 거. 이대로라면 다 못 갚을 게 뻔하니, 더 비싸게 써먹어야겠다는 소리야.”
저번의 제안.
교원은 그제야 그날을 떠올렸다. 페로몬 조절제를 먹지 않았던 주말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차의겸.
놈은 그때, 교원이 오메가로 발현한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순간 눈빛이 축축하게 변했었다. 꼭, 미끌거리는 액체가 온몸에 쏟아진 듯한 시선이었다.
〈몸으로 갚는 건 어때, 빚.〉
차의겸이 제게 한 제안은 이것뿐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간간이, 농담처럼 해 대던 말.
그러나 이번에는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는지 차의겸은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으며 한숨을 느리게 뱉었다. 그러곤 커다란 손으로 제 턱과 뺨을 비비고, 교원의 몸을 보며 입술을 적셨다.
“할 거라고 생각해?”
“뭐,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는데…….”
차의겸의 손이 책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교원은 피곤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딴 걸로 부른 거라면, 가겠어. 회장님께서 부르신 건 확실하지?”
“아아, 뭐. 근데 아버지도 같은 말을 하실 거라.”
“……무슨, 말?”
“나 말고, 뭐…… 알잖아, 너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한 달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모든 돈을 가져다 바쳤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결국, 또.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교원은 차의겸에게도, 회장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 몸을 파는 편이 훨씬 빠르게 빚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평범한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연봉을 잔뜩 받아도 연에 1.5억씩 쌓이는 이자를 감당할 방법은 없다고, 그리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쳐? 근데 그렇게 뻣뻣해 가지고 손님 응대나 제대로 하겠어?”
차의겸은 위아래로 시선을 움직이며 교원을 훑어보았다. 장난스레 말을 뱉고는 교원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뱉었다.
“여자 손도 안 잡아 봤잖아. 아, 남자 손도 말이지.”
“…….”
“그리고 너같이 생긴 오메가, 많지 않거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이런 쪽에는 조금도 관심 없게 생긴 거.”
짓궂은 목소리에 화는 나지 않았다. 늘 있어 왔던 일이었다.
“아버지도 이제 네가 더 나이 들면 안 되겠다, 싶으셨나 봐. 아예 스무 살 때부터 시킬 걸 하고 후회하시더라고?”
“…….”
“그래서 내가 먼저 부른 거야. 너도 그런 건 싫지 않겠어? 네가 원했다 치고, 나랑 놀아.”
수치심, 그리고 굴욕감이 얽혀 눈앞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교원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에 힘을 주며 차의겸을 노려보았다.
“내 애인 노릇하는 게 일하는 것보다 돈 잘 벌 거라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꼬박, 꼬박 내면 문제없을 거라고 했잖아.”
“계약서라도 있어? 교원아, 우리 계약서는 하나뿐이잖아. 네 아버지가 작성한 것.”
어릴 때에는 많이 원망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왜 이런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죽었는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죽을 거면 다 갚고 죽지. 죽을 거면 돈을 빌리질 말지.
그 원망을 잊고 살았다.
“너 열성이지? 알파랑 만나 본 적도 없고.”
“…….”
“그래서 어쩔 거야, 이교원?”
빙글 웃는 얼굴이 유난히 신이 나 보였다. 놈은 벌써 살짝 흥분한 기세로 탁자를 두드렸다. 한 손은 여전히 책상 아래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서워?”
“……닥쳐.”
“하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무섭긴 하겠다, 그치.”
차의겸은 구김살 없는 눈매를 잔뜩 휘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위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커다란 덩치 탓만은 아니었다. 알파의 페로몬이 지독하리만치 단번에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