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 윽…… 너……!”
“알잖아, 내가 너 갖고 싶어 했던 거.”
“가, 까이 오지…… 마.”
교원은 갑작스레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붙잡아 거세게 돌리려는 순간, 잠겨 있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역시 도망가려고 했구나.”
“너, 이거…… 그만, 해.”
“너무하네, 빚 빨리 없애고 싶은 거 아니야?”
비뚜름하게 웃은 차의겸이 교원의 턱 밑을 쓸어 올렸다. 거칠게 턱을 돌리자, 놈은 우습다는 듯 유난히 굳은살이 많은 손바닥으로 우악스럽게 목을 쥐었다.
“나도 억지로 하기 싫어.”
“커, 흐윽…… 흐, 아…….”
당장이라도 마운팅을 할 기세로 제게 부어지는 페로몬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마치 장대비와 같았다. 피할 수 없는 페로몬이 지독하리만치 온몸을 휘감았다.
오메가가 된 후, 이렇게까지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된 것은 처음이었다. 교원은 간헐적으로 짧은 숨을 내뱉으며 차의겸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싫어?”
“흐, 흐윽, 컥, 허윽……!”
집채만 한 덩치가 몸을 마주해 왔다. 차의겸은 고개를 숙여 교원의 귓가와 목덜미를 눈으로 느긋하게 훑었다. 축축한 숨결이 예민해진 살결을 간지럽혔다.
“아버지보단 내가 낫지 않겠어?”
이상하다. 차의겸은 이상하게, 평소처럼 비열하게, 혹은 장난치듯 웃지 않았다. 기묘하게 서러운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데, 놈을 걷어차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제 몸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의 농도가 점차 짙어져만 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아니 무슨 짓을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관자놀이가 저릿하게 아려 왔다. 교원은 점차 가물거리는 눈으로 차의겸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얄팍한 입가를 길게 찢으며 교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상체가 놈에게 쓰러지려는 찰나,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차의겸의 책상, 업무용 전화기에서.
“씨발, 누가……!”
삐리릭, 하고 크게 울리던 벨 소리가 세 번 울리고, 꺼졌다. 그제야 차의겸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교원의 목에서 손을 떼어 냈다.
교원은 그 즉시 바닥으로 무너졌다. 바닥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 했으나 도저히 말을 듣질 않았다. 지금,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야 하는데.
“아버지.”
전화기로 달려간 놈에게서 들린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세 번의 울림, 그것은 신호였을까. 교원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손톱을 세우며 타일을 긁었다.
힘을 줘, 일어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음에도 페로몬에 무너진 다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예? ……아니, 왜…….”
차의겸은 꽤나 당황한 듯 황당한 낯으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동시에 방 안을 가득 채우던 페로몬이 거두어졌다.
“헉, 허억……!”
숨이 탁, 트였다. 벌벌 떨리던 두 다리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런 것인가. 오메가에게, 알파에게 페로몬이란 건…… 이토록 끔찍한.
“……네, 알겠습니다.”
짓씹듯 말을 내뱉은 차의겸이 쾅 소리가 나도록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씨발!”
우당탕, 커다란 의자가 차의겸의 발길질에 의해 바닥을 굴렀다. 교원은 멍하니 그것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이교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차의겸이 손에 명패를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큼지막한 명패를 솥뚜껑만 한 손으로 움켜쥔 녀석이 시뻘게진 눈으로 교원을 응시했다.
“나가.”
“……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차의겸이 또 씨발,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곤 명패를 바닥에 세차게 내리쳤다. 유리로 이뤄진 명패가 귀가 째질 듯한 소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아니,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조금 전까지 강압적으로 굴던 놈은 어쩐지 허무한 듯한 얼굴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렇게 싫어? 권희수라는 놈이랑은, 그렇게 실실 쪼개면서…… 왜 나한텐 화만 내?”
“…….”
놈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교원은 아랫입술이 터지도록 물어뜯으며 문고리를 붙잡았다. 당연한 걸 묻는 놈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덜컹이기만 했던 것이 단번에 열렸다.
교원은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목덜미가 후끈거리고, 온몸은 아직 진정되지 못해 경련하고 있었다. 차의겸이 만진 곳, 숨결을 내뱉은 곳, 그가 바라본 곳까지 피부가 찢어지도록 씻고 싶었다. 당장 살결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씨발, 씨발!”
쾅, 와장창!
전무실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차의겸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두렵다고 느끼지 못했던 남자가, 지금만큼은 괴물처럼 무서웠다. 교원은 경련하는 손으로 옷을 추슬렀다.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께서 바로 집으로 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마치 불쌍한 것을 보듯 교원을 바라보며 눈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수치스러웠다.
교원은 대답도 않고 직원이 불러 놓은 엘리베이터에 빠른 걸음으로 올라탔다.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고, 구석으로 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왜,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왜…… 페로몬 따위에 휘둘려야 하는 거지?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 하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교원은 애써 눈물을 삼켰다. 꼴사납게 이런 일로 울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엘리베이터 밖에서 차의겸이 욕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이교원 씨.”
그때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가 교원의 팔을 붙잡았다.
“아!”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때도,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을 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교원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팔을 뿌리치려다가, 상대가 익숙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대, 대표님?”
“응.”
교원을 놀라게 한 것은 편안한 복장의 권 대표였다. 그는 적당히 넉넉함에도 몸의 선이 드러나는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항상 깨끗하게 올리던 머리가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너 찾으러.”
덜덜 경련하던 손 위로 따뜻한 손이 겹쳐졌다. 권 대표는 1층 버튼을 누르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무서웠지.”
“……대, 대표, 님.”
“늦게 와서 미안.”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권 대표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근원부터 무너져 내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교원은 멍하니 권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다신 여기 올 일 없게 해 줄게.”
“…….”
“이 비서는, 아니 교원아. 네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권 대표는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는 층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랑 그냥 상사랑 부하 사이이기만 한 건 싫어.”
“…….”
“미안.”
응당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맞다. 지금이라도 감사하다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저를 구해 준 건 감사하다고…… 그리 말해야 했다.
하나 차가운 말로 그를 밀어내고, 비겁하게 회피하던 기억이 교원을 막아섰다. 몰염치하게도 자신은 그에게 고마워할 자격조차 없었다.
곧 1층에 도착했다. 교원은 권 대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권 대표는 먼저 앞장서 교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나 어깨를 잡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의 배려임을 알 수 있었다.
“대, 대표님.”
“응, 교원아.”
권 대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교원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셨어요?”
로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느릿하다. 교원은 권 대표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를 계속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오늘 낮에, 이상했잖아.”
“……아.”
“너한텐 미안한 일이지만 조금 조사해 봤어.”
그렇구나.
제가 그를 밀어낼 때에도, 화가 나게 했을 때에도 권 대표는 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미안.”
“아니에요, 감사……해요. 정말로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일하는 걸 싫어하고, 책임감도 없는 남자지만 재벌 특유의 오만함이나 사람을 외모나 돈으로 구분하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을 1년간 옆에서 지켜봐 온 만큼, 지금 권 대표의 행동이 그에겐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런 권 대표가 좋았다.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 본 적 없어, 인정하기를 차일피일 미루던 감정이 가슴 안쪽부터 진득하게 퍼져 나갔다.
꼭 부풀 대로 부푼 물풍선이 결국 터져 버린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조금 전의 일은 아예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출구를 나서는 이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빨리 나가자.”
활짝 열린 유리문 앞, 저를 돌아보는 금발 머리 권 대표가 멋있게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교원은 조금 전과 달리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모르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거칠게 둘 사이를 스치고 들어섰다. 교원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떨어져 있던 권 대표의 손이 어깨를 와락, 잡아 왔다.
“추워?”
“조금……요.”
“옷 사러 갈까?”
뭐라는 거야.
조금 전 멋있다고 생각한 걸 교원은 바로 취소했다. 저번처럼 백화점에서 셀 수 없는 0이 붙은 옷을 사 줄 생각인지, 이 호구 대표님은 교원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저 옷…… 없지 않습니다. 돈 좀 아껴 쓰세요.”
“교원이 이쁜 거 입혀 주려고.”
“대표님이 더 추워 보이십니다.”
본인은 티 하나 걸쳐 놓고서 절 걱정하는 게 웃겨 툭 말을 뱉자 권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어? 너, 모르나 본데 나 완전 튼튼해서 안 추워.”
“대표님 추위 많이 타시는 거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작년 겨울에도 지각한 권 대표를 데리러 갔다가 더울 정도로 뜨뜻하던 집 안 공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침실에는 크고 부들부들한 이불에 둘러싸여 전기장판에 뺨을 비비적대는 권 대표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권 대표는 아닌 척 굴면서 입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실 거면 대표님 옷부터 사세요.”
“나 옷 많아.”
“제가 아까 드린 말씀이 그겁니다. 저도 옷 있어요.”
“…….”
똑같은 말을 뱉었다가 반박을 당한 권 대표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마디조차 져 주질 않는 교원이 원망스러웠는지, 시위하는 듯한 시선으로 교원을 흘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