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새빨간 스포츠카가 보였다. 또 저 차인가. 교원은 권 대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안에서 무슨 일 당한 건 아니지?”
“아…… 네. 대화만 했어요.”
“다행이다.”
고개를 든 권 대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키가 컸더라면 보였을까. 목소리는 한껏 다정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화가 났을까.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차의겸과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래도, 교원은 그가 더 이상 이 일에 파고들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보다 더 깊게 일에 연관된다면 권 대표 또한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교원은 짧게 끊어지는 숨을 뱉으며 찬 바람에 눈을 살짝 감았다.
제 삶은 무수한 언덕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의 언덕을 오르면 또다시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올라도 보이는 건 또 다른 언덕뿐이었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도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분명 자신이 더 노력하고, 쉬지 않으며 죽어라 오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아주 작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 길에서 교원과 함께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이 원치 않은 것도 있었지만, 저와 같은 삶을 택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사랑은 거짓이다. 현실의 사랑은 작은 것에 깨어지고 부서져, 금세 사라지곤 했다.
교원에게 사랑은 덧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고, 제 바쁜 일상에 불필요하며, 있어선 안 될 감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온 지 27년이었다.
“언능 타, 타.”
“네.”
교원을 조수석에 앉힌 권 대표는 문까지 닫아 주고는 반대편으로 후다닥 뛰어 운전석에 앉았다. 권 대표는 차에 오르자마자 오픈되어 있던 천장을 닫고 히터를 켜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씨가 벌써 왜 이래.”
“제가 오늘 아침에 날씨 브리핑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추울지 몰랐지. 그리고 요즘은 밖에 잘 안 나가니까.”
중얼중얼 변명을 뱉은 권 대표가 갑작스레 상체를 기울였다. 교원은 훅 느껴지는 페로몬 향에 몸을 움찔거리다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권 대표는 의식 없이 한 행동이었는지 교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상태로 굳었다.
점차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니 저도 괜히 열기가 솟는 것만 같았다. 교원은 시선을 돌리며 차분히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 어, 어. 어어…… 어?”
그제야 권 대표가 퍼뜩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 발끝까지 빨개졌을 남자가 허둥지둥하며 팔을 뻗었다가, 거두기를 반복했다.
“나, 그니까, 그! 베, 벨트. 안전벨트! 매 주려고…… 그랬어!”
“……저도 손…… 있어요.”
“그, 그렇지. 그, 그래.”
교원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겼다. 벨트를 길게 당겨 매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차 안을 감돌았다.
시선을 바깥에 둔 채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교원은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이러다 밖까지 들릴까 조금 걱정되었다.
……가볍고 경박한 남자 같으니.
교원은 괜히 민망한 마음에 속으로 권 대표를 욕했다. 사실은 심장이 쿵쿵 뛸 만큼 설레었으면서, 권 대표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닌 척하려 미간을 찌푸렸다.
“출발 안 해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자, 권 대표가 쥐구멍에서 날 듯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응…….”
“집으로 바로 가 주세요. 이상한 데 들르지 말고.”
“……어, 어떻게 알았어?”
“제가 대표님 속을 모를 것 같습니까?”
분명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 생각이었겠지, 뭐.
교원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권 대표를 힐끔 노려보았다. 그러자 권 대표가 한껏 시무룩해진 얼굴로 조수석 앞 서랍을 열어젖혔다.
“이거…… 이 비서 덮어.”
권 대표가 우물쭈물거리며 교원에게 내민 것은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 담요였다. 교원은 말없이 담요를 제 무릎에 덮고,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 * *
그날 밤은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이불 안에 몸을 밀어 넣고 눈을 감았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충격적인 상황을 겪어서라고 치부하기에는, 차의겸의 얼굴은 일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만지작거렸던 감각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아직도 권 대표가 손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손등을 모두 덮는 커다란 손이나 어깨를 감싸 왔던 긴 팔, 더불어 벨트를 매 주려 다가왔을 때의 얼굴.
그런 것들이 막연하게 떠올랐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일이라, 교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바보 같은 걸 알면서도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자꾸 생각날 때
그러나 유의미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안 좋은 기억이나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 따위만 나왔다. 그래서 교원은, 죽을 때까지 제가 할 줄 몰랐던 것을 검색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꾸 생각날 때
검색 결과가 쫘르륵 펼쳐지자마자, 교원은 퍽! 소리가 나게 핸드폰을 이불에 처박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깊게 헛숨을 크게 내뱉었다.
“……씨발.”
그리고 다시 누웠다. 검색 결과를 뒤적이다 블로그 하나를 발견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잊는 법.
일단 그 개새끼를 잊어야 하는데 잊혀지지 않아서 이 새벽에 글을 써 본다.
십새끼인 거 아는데 자꾸 생각나서 빡쳐서 잠도 안 온다.
우선 그 새끼 생각이 나지 않도록 SNS부터 번호 등등 모든 걸 차단 박았다. 물론차단박기전에는 그새끼를 개시발새끼라고 저장해 놓긴함.
그리고 그 새끼가 얼마나 시발ㄹ놈인지 지금부터 적을 거다.
일단 이 새끼는 존나 작다. 시발 얼마나 작냐면 첨에 찾지도 못햇음.
그리고 이 새끼는 일도 존나 못한다. 맨날 처자고 밤새겜하고지각처하는거내가맨날깨워줌왜그랫지ㅋㅋ..
……
…….
작성자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이었다. 교원은 글을 꼼꼼히 정독하고, 작성자가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감정이 차분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작성자는 ‘내일부턴 연하남을 꼬셔 볼 생각이다.’라고 적으며 끝맺었다.
“……음.”
꽤나 효력이 있는 듯했다.
교원은 연락처 목록을 켜 권 대표를 찾았다. 그리고 작성자의 말대로 차단을 하려다 잠시 고민했다. 업무상 상사이니, 차단은 할 수 없다.
그래서 권 대표의 이름을 ‘개시발새끼’라고 저장해 보았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시원하다든가, 조금 미워졌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고민하던 교원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정자세로 누워 두 손을 배꼽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칙칙하고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권 대표의 단점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작성자와는 반대로 권 대표는 작지 않았다. 그날 밤의 기억, 권 대표의 것을 보고 식겁했던 것 같다.
“일…… 못 하지.”
맨날 처노느라 늦잠 자서, 제가 깨우러 가야 하는 대표인 건 확실히 단점이다. 생각해 보니 그 짓을 1년이나 했다. 요즘 들어 조금 다를 뿐 주에 2, 3회는 이불에 둘러싸인 권 대표를 힘들게 깨웠다.
그리고 차에 태워 회사로 가는 길에 아침밥을 먹이고, 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서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했다.
“미친 새끼네.”
아무리 비서가 상사의 모든 것을 보좌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이건 심한 거 아닌가? 지 회사 잘되는 일을 여럿 물어다 줘도 귀찮다고 차일피일 미룬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교원은 약 반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권 대표는 일을 내팽개치고 떡볶이집에서 혼자 감자튀김까지 시켜서 먹다가 교원에게 걸렸었다. 교원은 즉시 권 대표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팔뚝을 잡아 질질 끌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 이 비서……! 이, 이거!〉
〈예?〉
〈예원 씨야! 도와줘……!〉
지금은 헤어진, 그때의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녀는 상당히 집착이 심한 편이었는데, 권 대표가 여성 편력이 엄청나다는 사실 때문인지 업무 시간에도 권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대표가 바람을 피우는 놈은 아니라는 걸 교원이 보증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그녀가 믿을 리는 만무했다.
〈아니, 아까 나 혼자라고 말했는데 안 믿어. 응? 도와주라, 응? 이 비서, 제발.〉
〈…….〉
교원은 결국 권 대표를 대신해 전화를 받아 주었다. 그녀는 전화를 늦게 받은 사실에 화를 내려다, 교원의 목소리에 금세 차분해졌다. 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었다.
“…….”
이런 새끼를 내가 좋아한다고.
얼굴만 번지르르한 애새끼를?
눈앞이 탁 트인 기분이 들었다. 교원은 수백 가지의 에피소드를 재빨리 머릿속으로 다시 구겨 넣었다. 차 안에서 느꼈던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교원은 머릿속을 깨끗하게 날리고 눈을 감았다. 얼마 가지 않아 교원은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하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꿈에 권 대표가 나왔다.
교원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경이 바뀌더니 권 대표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자리가 바뀌었음에도 교원은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다시 일에 집중했는데, 그때 딸기 라테의 생크림을 입가에 묻힌 권 대표가 나타났다.
‘교원아아.’
앙큼한 얼굴로 윙크를 한 권 대표가 턱받침을 하고서 교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교원 씨? 이 비서? 교원아?’
‘왜요.’
‘나 좀 봐 봐, 웅?’
대놓고 애교를 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권 대표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눈을 감고 입술을 쭈욱, 내밀고 있었다.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빨아 달라는 듯이 권 대표는 양 볼을 붉히고 있었다.
‘칠칠맞게 왜 입에 생크림을 묻히고 다니십니까?’
꿈속의 교원은 마치 드라마 남자주인공처럼 권 대표의 턱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3인칭 시점이 되어 버린 교원은 그런 자신을 보며 충격에 얼어붙어야 했다.
교원이 아닌, 꿈속의 교원은 그대로 고개를 꺾으며 권 대표의 입에…….
“씨발!”
새벽 3시.
교원은 벌건 눈으로 악몽에서 깨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