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28)화 (28/60)

“이 비서, 너 내 비서야? 아니면 쟤 상사야?”

권 대표가 씩씩대며 내뱉은 말에 교원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권 대표는 무척 진지했지만.

“둘 다죠.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지.”

“제가 대표님 비서면, 저 사람 상사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만 하려면 뭐가 좋냐는 거야!”

교원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딸칵, 딸칵. 파일을 켜 놓은 교원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야 대표님 비서겠죠.”

도영 씨에게 상사는 저 말고도 여럿이니, 권 대표의 직속 비서로 일을 하는 게 연봉이 가장 높다. 교원은 뱉듯이 말을 던져 놓고,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역시 이 비서도 내가 좋구나?”

“들어가서 주무시기나 하세요. 미팅 중에 조시면 머리에 얼음물을 쏟아 버리겠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어, 은근 좋아하고 있었어?”

이 인간이 진짜.

교원은 소파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 다가가자 권 대표가 수줍은 얼굴로 볼을 감싸고 있었다.

“권 대표님, 자꾸 일 방해하실 겁니까?”

“박력 있어, 이 비서…….”

와중에도 좋다고 웃고 있다. 교원은 권 대표의 의자를 뒤로 질질 끌었다. 테이블에서 어느 정도 떨어트린 후, 권 대표의 팔을 잡아 제 어깨에 걸친 뒤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우왓!”

“자러 가시죠.”

“연하남을 왜 만나는지 알 거 같아.”

“지…… 아닙니다.”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꾹 참아 냈다. 교원은 그대로 권 대표를 질질 끌어 안쪽 침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크고 푹신한 침대에 내팽개쳤다.

“꺄아.”

“대표님만 아니셨다면 업무 방해로 시말서를 쓰게 했을 겁니다.”

침대에 뒹굴, 몸을 굴린 권 대표가 꺅, 하며 장난을 쳤다. 교원은 권 대표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목 아래까지 폭삭폭삭한 이불을 덮어 주자 갸름하고 예쁜 얼굴이 저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잠이나 주무세요, 진짜.”

“역시 이 비서도 나뿐인 거지?”

“졸려서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정신이 혼미하신 듯하니 어서 주무세요.”

이불 옆, 가지런히 놓여 있는 눈가리개까지 씌워 주자 권 대표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지금 이게 퍽 재밌는 모양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원은 그 말을 끝으로 침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왔다. 도착 전까지 일을 끝내고 저도 조금은 쉬어야 하는데, 권 대표 때문에 도저히 쉴 마음도 들지 않는다.

밖으로 나와 소파에 털썩, 앉은 교원이 한숨을 쉬며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요즘 장난이 심하네, 저 인간.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려 굴었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귀가 잠잠해지질 않았다. 교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두 손으로 제 귀를 감쌌다.

권 대표가 말하는 ‘좋은’ 감정과 제가 갖고 있는 ‘좋은’ 감정은 분명 다르다.

권 대표는 늘 여성 오메가만 만나 온 사람이었고, 남성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증거로, 저와 하룻밤을 보낸 뒤 찾은 베타 남성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지 않았던가. 오히려 만난 걸 후회하고 떨어뜨리기 위해 저에게 연인 행세를 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최근 제게 치근덕대는 것처럼 구는 건 다른 이유가 있겠지. 제가 다른 회사로 갈 것 같았다든가, 그냥 최근 여자를 만나질 않아 심심하다거나. 아니면 그냥 놀리는 재미에 맛 들렸다든가.

교원은 권 대표가 일어나서 먹을 기내식을 떠올리며, 메뉴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 * *

장장 12시간의 비행이 끝나고, 적당한 휴식을 취한 교원은 기내식으로 잔뜩 삐쳐서 도로 잠이 든 권 대표를 깨웠다.

권 대표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휘청이며 교원의 뒤에 착 달라붙었다.

“누가…… 야채 볶음밥을, 넣었어.”

“한우 안심 볶음밥이었습니다.”

“양파랑 고추가…… 너무, 많았잖아…….”

“건강을 위해 들어간 것이겠지요.”

LA 공항에 내리자 저 멀리서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칭얼거리던 권 대표는 자연스럽게 교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허리를 세웠다. 언제 애처럼 굴었냐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사의 인사를 받았다.

“대표님, 오시는 길 피곤치는 않으셨습니까.”

“괜찮아. 뭐, 박 이사야말로 일찍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꼭 집에서는 방정맞게 굴다가 집 밖에서는 세상 예의 바른 척 구는 남동생 같다.

한두 번 보는 꼴이 아니지만, 조금 전 이불 속에서 나가기 싫다고 꼼지락거리다가 까치집이 된 뒷머리를 보고 있으니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박 이사, 얼굴이 폈네.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유, 그야 대표님께서 잘 챙겨 주시니 그렇습니다. NM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영광인지.”

“이 사람 말하는 거 하곤.”

허허 웃으며 둘이서 앞장서서 나갔다. 교원은 남은 경호원을 포함해 인원을 체크하고, 쨍쨍한 햇빛이 비치는 공항 바깥에 검은 세단 네 대를 확인했다.

“이 비서님, 좀 쉬셨어요?”

바로 준비돼 있는 짐을 챙기고 두 임원의 뒤를 따르니, 임도영이 총총 따라와 옆에 섰다. 교원은 시간을 체크하고, 호텔에 메시지를 넣은 뒤 고개를 들었다.

“아, 도영 씨. 저야 뭐…… 업무 체크하느라.”

“비행기 내에서도 일하신 거예요?”

“별건 아니고, 그냥…… 직원들이 넘기는 거 확인해 줘야 하니까요.”

그 후로 짧은 휴식 시간이 있었으나 눈을 붙이기는커녕 주말 아르바이트를 찾느라 바빴다.

교원은 곧, 비서 1팀의 김 팀장을 직속 비서로 올리는 것을 건의해 볼 생각이다. 권 대표가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지만, 간혹 그가 부를 때면 달려가야 할 일이 종종 있었다.

게다가 이제 오메가로 발현된 만큼, 저 또한 가끔 월차를 써야 할 듯싶으니 그때를 대비한 부비서가 필요할 것 아닌가.

물론 권 대표의 비서팀은 따로 존재했다. 그것이 비서 1팀과 2팀. 권 대표의 모든 일을 교원이 도맡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교원이 원하는 것은 자신처럼 항상 옆에서 그를 보좌할 부비서였다.

그렇게 일을 분담하게 되면 아무래도 봉급이 줄어들 테니 주말에 시간을 내 아르바이트를 추가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도영 씨는 좀 쉬셨나요?”

“저야, 편히 쉬었어요.”

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우선 호텔로 가 체크인을 하고 나면 내일까지는 시차 적응을 위해 업무가 없다.

물론 권 대표야 푹 잤으니 낮처럼 쌩쌩하겠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엔 현재 오후 10시인 한국의 시간이 지금 몸 상태에 익숙할 것이다.

“도착해서 짐 풀면, 아마 쉴 순 없을 거예요.”

“아, 넵.”

“권 대표님이 여행을 좋아하셔서…… 분명 어디론가 가자고 하실 겁니다.”

외국으로 출장을 오는 날이면 매번 그랬다. 스케줄 중간에 도망을 갈 정도로.

“아, 네.”

“도영 씨도 시차 적응을 해야 하니까, 졸려도 참고 이따 저녁에 자요. 핸드폰 시간도 바꿔 놓고요.”

“알겠습니다.”

얘기를 하는 사이, 전용기에 탑승했던 인원이 모두 바깥으로 나왔다. 우선 맨 앞에는 박 이사와 그의 비서, 경호원이 탑승했다.

그리고 두 번째 차에는 박 이사의 남은 경호원들이, 세 번째 차에는 권 대표와 교원, 경호 1팀 조 팀장과 임도영이 탑승했다.

“이 비서, 임도영 비서까지 같이 타야 되나?”

“불편하십니까?”

“뭐,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뒷좌석에 교원과 앉은 권 대표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창가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뒤차를 타도 되겠지만, 도영 씨가 불편할 거 같아서 앞에 타라 했습니다.”

“아, 그래?”

“예.”

“그래서 이 비서가 내 옆에 앉게 됐구나?”

“뭐…… 네.”

뒤에는 경호 2팀 팀장과 팀원들이 탔으니, 그곳에 홀로 가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경호팀들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인상이나 덩치가 험악해 보통 사람이라면 겁을 먹을 수도 있었다.

물론, 임도영은 그들만큼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지만서도.

“출발하겠습니다, 대표님.”

“응.”

잠시 눈치를 보던 조 팀장이 출발을 알렸다. 고급 차의 푹신한 좌석만큼이나 부드럽게 차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교원은 창밖을 보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자 등을 등받이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질문이 들려왔다.

“이 비서, 우리 어디 갈까? 샌프란시코랑 요세미티 갈까? 박물관은 어때?”

“박물관…… 게티 센터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나 거기 너무 좋더라.”

호텔도 좋은데, 요즘 유행하는 호캉스나 그런 거 하면 안 되는 걸까. 교원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다 저번처럼 아침부터 피곤하시다고…….”

“안 그럴게, 안 그럴 테니까 어디라도 가자. 나 요세미티도 좋아.”

“……그럼 게티 센터로 가죠.”

그나마 덜 운전하고, 한 곳에서 끝내고 후딱 숙소로 돌아갈 마음으로 행선지를 정하자 권 대표가 씨익 웃었다.

“좋지. 근데 우리 방은 다 1인실이야?”

새삼스레 당연한 걸 묻는다. 교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대표님과 이사님을 제외하고는 2인실입니다.”

“어…… 그럼 이 비서…… 누, 누구랑 자?”

질문의 목적이 그것이었을까. 권 대표가 침을 삼키며 교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한껏 가까이 다가오자 알파 페로몬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저야…… 당연히 도영 씨랑 자죠. 전에는 조 팀장님이랑…….”

“뭐?”

“예?”

“너, 너, 쟤랑 자?”

조그마한 소리로, 힘을 줘서 묻는 얼굴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렇게 속닥여 봐야 바로 앞 좌석인 둘에게 다 들릴 것을. 교원은 시선을 피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비……서팀끼리 자야죠.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급히 대답하자 갑작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교원은 살짝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다시 눈길을 권 대표에게로 돌렸다.

평소답지 않게 굳은 얼굴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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