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5)화 (45/60)

차의겸은 아주 어릴 적에 교원을 만났다. 아버지와 함께 빚 독촉을 하러 간 자리에서부터였다.

교원의 고모가 소리를 지르고, 집 안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뒤늦게 하교한 쪼그마한 꼬맹이가 달려들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 하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시, 신고할 거예요!〉

아버지는 교원을 위아래로 훑더니 “제법 예쁘게 생겼구나.” 하며 웃었다. 그때 차의겸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교원은 차 회장의 말을 그 어린 나이에도 똑똑히 알아들었다. 차의겸은 이해하지 못할 단어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고등학생이 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해 빚을 갚겠다고 빌었다. 고모님께도 빚이 얹어진다면 저는 보육원으로 갈 터고, 그렇게 되면 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나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할 거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차 회장은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린아이라고 마음이 약해질 리는 없었는데도 교원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후로 차의겸은 종종 교원의 집을 찾아갔다. 염탐하듯 쳐다보다가 만나기라도 하면, 교원이 까맣게 물든 얼굴로 노려보곤 했다.

〈지금 줄 돈 없다고…… 했잖아.〉

〈알아. 너 보는 게 재밌어서 온 건데.〉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보는 게 재밌어?〉

〈응.〉

교원은 차의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차의겸은 그에 대해 잘 알았다. 성적은 좋은 편이나 고모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어린애.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 혼자 이끌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빚더미 위에 앉게 된 예쁘장한 꼬마애.

형질 판정이 났을 때, 차의겸은 자신이 우성 알파라는 걸 알고 신이 나 교원을 찾아갔었다.

〈야, 너 뭐야? 난 알판데.〉

〈…….〉

〈왜, 오메가냐?〉

〈아니. 베타야.〉

그때 너무 크게 실망했다. 교원은 아예 형질 검사지를 보여 주며 차의겸을 지나쳤다.

알파와 오메가는 운명적인 짝이 있다고 했다. 차의겸은 왠지 모르게 그게 자신과 교원일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베타라니.

운명의 짝이라는 건 없는 걸까. 멍청했던 차의겸은 의외로 순진했고, 이상하게 제 짝은 교원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둘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교원은 클수록 사람들이 탐낼 만한 사람이 되었다. 키도 적당히 컸고, 무심하고 금욕적인 얼굴에는 묘하게 사람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졸라 같은 학교에 진학해 보니, 여학생들도 교원에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던가.

그 와중에 교원은 몇 번 고백을 받았다. 거의 거절하긴 했지만, 그중 두 명은 교원과 사귀었다.

그의 처음은 자신일 거라 생각한 차의겸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방해했다.

제 친구들을 끌고 가 여자아이를 협박하기도 했고, 헤어지라 종용하기도 했다. 교원은 그걸 다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게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학업과 아르바이트, 둘을 병행하던 교원은 꽤나 피곤해 보였다. 차의겸은 교원이 무리하다 기절이라도 하면 말없이 그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하, 윽. ……네가 왜 여기…….〉

〈지인짜,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잘 버틴다. 너.〉

〈……뭐, 그런 얘기 하러 왔어?〉

〈나라면 자살할 텐데. 너, 평생 갚아도 다 못 갚는다는 거 알아?〉

〈알아.〉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사냐?〉

〈…….〉

차의겸은 저를 무시하는 듯한 교원의 눈빛이 매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짓누르고, 그 위에 올라타 네가 뭔데 내 말을 무시하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차의겸은 침대를 발로 걷어차며 그 자리를 피했다. 어쩐지 저 눈빛, 왜 그리 열심히 사냐고 물었을 때의 공허한 눈빛을 보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이교원은 차의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차의겸도 쓰러진 교원을 보건실에 데려다주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 이후로 교원은 운동을 겸하기 시작했고 그가 쓰러지는 일은 적어져 갔다.

그 대신 차의겸은 교원의 책상에 비타민 음료를 두거나 참고서를 두고 가곤 했다.

저도 왜 그러는지는 몰랐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교원은 비타민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고 버렸다. 참고서는 며칠 지켜보다 아무도 가져가는 이가 없으면 썼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버렸다면 차의겸은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차의겸은 교원의 건너편 책상에 앉았다. 학기가 지나고 자리가 바뀌어도 그랬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엎드려서 고개를 들면 교원이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학도 못 갈 놈이, 그리 생각했건만 교원은 당당히 Y대에 합격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 후로도 차의겸은 교원을 따라다녔다. 친구들과 노래방 내지는 클럽에 가서 오메가를 끼고 놀 때에도 교원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달려가곤 했다.

친구들은 차의겸에게 숨겨 둔 여자친구가 있다고 속닥였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신경 쓰여서, 눈에 안 보이면 짜증이 나서 그랬다.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20대 중반이 되고 나서였다.

〈야, 이교원.〉

그날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교원의 편의점에 놀러 간 날이었다. 차의겸은 아예 계산대 안쪽에 의자를 놓고 시간을 때웠다.

〈안 가?〉

〈이교원.〉

〈왜.〉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있냐?〉

괜히 쑥스러워서, 차의겸은 고개를 돌려 창가를 보며 물었다. 싫은 척 굴면서도 제가 오면 “또 왔냐.” 하는 교원이 저를 나쁘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고등학생 때부터 챙겨 주었던 게 있으니 그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미미한 호감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왜.〉

막 도착한 상품의 수량을 체크하고, 새 물건을 안쪽부터 밀어 넣던 교원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한 명도 없었냐? 너, 두 명 정도 사귀지 않았어?〉

〈그게 사귄 거냐. 며칠 가지도 않은걸.〉

그럼 그냥 놔둘 걸 그랬나. 차의겸은 잠시 후회했다가 말았다. 어차피 눈에 거슬려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을 터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거든.〉

〈…….〉

교원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 네 상담소 아니야.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가 줄래?〉

〈근데 나 걔 꽤 오래 좋아했어. 몰랐는데 지금까지 좋아한 거였더라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가자 교원은 결국 입을 다물고 무시했다. 차의겸은 창밖을 보다 한 연인이 손을 잡고 지나가는 걸 보았다. 그 둘에 자신과 교원을 치환해 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교원은 분명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제가 잡아야겠지. 그럼 또 뿌리치지도 않겠지.

그렇게 되면 아버지한테 얘기해 이교원에 대한 것은 처분해 달라고 해야겠다. 크게 빌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들어주시겠지.

〈깨달으니까 되게 좋아. 걔도 나 좋아할 거 같거든.〉

착, 착, 착. 상품을 올려놓고 각이 지도록 정리하는 소리가 단조로웠다. 차의겸은 창가에 입김을 불어 허옇게 낀 김이 낀 창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콕, 콕. 손가락으로 교원의 이름을 썼다. 뽀득뽀득 힘을 주어 쓴 이름마저도 이교원다웠다.

어쩜 사람이 이름도 이리 고집스럽고 예쁠까. 차의겸은 입술을 비죽였다.

〈야, 이교원.〉

차의겸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고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스물하나의 차의겸에겐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백하기 전에…… 그니까, 걔랑 사귀기 전에 말이야.〉

〈…….〉

교원은 빈 수레를 끌어 창고에 정리해 밀어 넣고, 재고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창고까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차의겸이 언성을 높였다.

〈야! 이교원!〉

〈……하, 어.〉

편의점 유니폼을 입고 나온 교원은 눈 아래까지 시커먼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일이 끝나면 3, 4시간 정도 잠을 자고, 학교에 간다. 공강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는 시간은 모두 공부에 매진했다.

옆에서 항상 지켜본 차의겸은 그걸 잘 알았다.

〈……나랑 사귀자고.〉

〈…….〉

교원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창가를 보던 차의겸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눈을 맞췄다. 부끄러운 듯 눈을 맞추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교원이 가만히 서서 한심한 듯 저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연습, 용으로 말야! 너, 만큼 만만한 놈이 또 어디 있냐? 어, 어?〉

〈…….〉

처음 사귀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양아치들과 몰려다니며 이 오메가, 저 오메가 만나 봤으니까.

그냥 하는 말이었다. 연습 상대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귀자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교원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래.’, ‘그러든가.’라는 식으로 넘어가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점점 일그러지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차의겸은 실실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창고에 서 있던 교원이 성큼 걸어왔다.

〈야.〉

〈……뭐야. 왜. 빚쟁이 새끼가 뭐, 노려본다고 달라질 거 같냐?〉

조금 놀란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다. 차의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 나가라.〉

〈……어?〉

〈일에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오겠다며? 지금은 방해되니까 나가.〉

그렇게 차가운 얼굴은 처음이었다. 차의겸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네가 뭔데 명령이야.〉

〈그럼 넌, 네가 뭔데 내 일을 방해해? 빚 갚으려고 죽어라고 사는 거 안 보여?〉

말을 뱉던 이교원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텅 빈 박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 반대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A4용지가 들려 있었다. 용지는 누군가 쓰고 버린 듯, 한 면은 프린트돼 있었고 반대편에는 교원이 빼곡하게 정리한 용어가 나열돼 있었다.

그러나 차의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교원이 저를 밀어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사귀자는 말에 거절도 아니고 그간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다는 듯 구는 게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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