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식은 딸기가 올라간 수플레와 에스프레소. 교원은 드디어 조용해진 안방에서 여유로움을 즐기며 수플레를 수저로 떠먹었다.
진짜 먹어 보고 싶었는데,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몹시 기뻤다.
셰프님께 여쭤보니, 그녀의 경력은 어마 무시했다. 해외 곳곳의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모든 종류의 요리를 섭렵하고, 한국으로 와 가장 큰 레스토랑의 셰프를 맡았다고 하셨다.
근데 왜 여기에 계시냐 했더니, 권 대표에게 신세 진 것이 있어서란다. 덕분에 2주 치의 예약 손님들에게 하나하나 연락해야 했다고, 그녀는 작게 푸념을 늘어놓으며 웃었다.
수플레의 소스까지 삭삭 긁어 먹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6시였다.
메시지나 전화가 단 하나도 오지 않은 걸 보니 조금 불안했다. 평소에는 부하 내지는 동기들의 업무 관련 질문과 도움 요청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없는 게 다행인 걸까, 아니면 누가 못 하게 해서 불안한 일이라도 생기고 있는 건 아닐까.
교원은 제1 비서팀 팀장에게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때 때마침 지이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Web발신]
이교원 님, 금일 19시 예약 있으십니다.-한마음한사랑내과]
“아.”
그제야 병원이 떠올랐다. ……약, 약도 먹지 않았다. 교원은 다급히 안방을 살피다, 제 가방이 보이지 않자 아픈 다리를 끌고 목발을 짚었다.
처음 써 보는 목발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교원은 아직은 페로몬이 조절되어 나오지 않음을 깨닫고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 있는 권 대표가 벌떡 일어났다.
“왜? 왜? 영화 보자고?”
맞다, 그거 보기로 했지.
“아뇨, 제 짐…… 어디 있어요?”
“그거 저쪽 손님방에, 아이고, 교원아, 넘어져!”
낯선 목발로 재빨리 걸으려니 이리저리 삐끗거리고 휘청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권 대표가 다가와 부축하자 그의 페로몬 향이 훅 다가왔다.
“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
“뭐 찾는데 그래.”
“약…… 약이요. 저 빈혈 있다고 했잖아요. 철분제 약이요.”
이전에 써먹은 거짓말을 또 쓸 줄은 몰랐는데. 교원은 손님방으로 들어가 곧장 제 가방으로 향했다.
물론 그보다 먼저 권 대표가 가방을 들고 교원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냥…… 나 시키지 그랬어. 발목 안 아파? 목발 잘못 쓰면 더 붓는댔단 말야.”
권 대표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낮 시간이 지났으니, 서서히 약효가 떨어질 때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선, 안 돼. 제발…….
가방을 급히 뒤지던 손에 약 봉투가 잡혔다. 교원은 비닐로 된 봉투를 바로 뜯어 입 안에 물도 없이 털어 넣었다. 잘 삼켜지지 않아 침을 모아 여러 번 목 너머로 넘겨야 했다.
“교원아, 물, 물.”
“……감사합니다.”
“물도 없이 삼켰어?”
권 대표가 가져다준 물컵을 받아 들고 한 번에 들이켰다. 교원은 급하게 삼키느라 흐른 입가를 닦아 내며 다시 목발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저…… 가방이요. 안방으로 옮겨 주실 수 있어요?”
“옮겨 줄게, 잠깐만.”
권 대표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반대 팔로 교원을 부축했다.
“많이 어지러워? 이렇게 심한 거였어?”
“아뇨, 아뇨. 아침 약만 챙기면 되는데 오늘 안 먹어서…… 그래요. 괜찮으면 저 혼자 쉬어도 될까요?”
‘혹시’, ‘설마’ 하는 일들은 꼭 일어나기 마련이다. 교원은 안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앉았다.
권 대표가 키오스크 옆에 짐을 가져다 둘 때까지 목발을 내려놓고 침대 구석으로 이동하는 데에 성공했다.
“응, 혼자 쉬어. 필요한 거 있으면 나오지 말고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권 대표가 걱정스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교원은 시선을 피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큰일 날 뻔했다, 정말로. 약을 먹고 부축을 당하는 도중, 어제 먹은 약의 효과가 떨어짐을 느꼈다.
페로몬이 조금씩 새어 나가기 시작했고, 교원은 안간힘을 다해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안방이 페로몬으로 눅진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머리에 손을 짚은 교원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때마침 온 문자가 아니었더라면.
교원은 바로 병원에 연락했다.
- 네, 한마음한사랑 내과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교원 환자입니다. 오늘 7시에 예약했었는데, 예약 시간을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 아! 교원 님? ……형질 변화 하신 지 한 달째인데 몸은 좀 어떠세요?
어떠냐, 묻는다면 상당히 불편하고 좆 같다. 하지만 병원에서 이걸 물어보는 건 아닐 것이다.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히……트는 아직이고요.”
‘히트’라는 단어를 얘기할 때엔 혹시 몰라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안방 문이 닫혀 있긴 하지만, 그래도.
- 아침마다 약은 드시고 계시죠? 주말엔 페로몬 풀어놓고?
“아…… 네. 약은 먹고 있어요. 근데 그, 조절은 아직 잘 안 되네요.”
- 성인 이후 억지로 발현된 케이스라, 다른 분들하고 경우가 다를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럼 예약 바꿔 드릴 테니까 오셔서 검진받으시고 약 새로 받아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3시 괜찮을까요?”
- 음, 내일은 예약이 꽉 차 있어서…… 내일모레 3시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그때로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일정표에 병원을 추가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교원은 키오스크를 통해 후식 접시를 반환하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따끈따끈하니 졸리다. 먹고 바로 자면 안 되는데.
저에게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있었던가. 밥을 먹을 때에도 늘 조급했고,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하느라 바빴다.
교원은 키오스크의 배경 화면을 보며 작게 웃었다. 가슴이 보이게끔 단추를 잔뜩 풀고,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있는 권 대표는 지금 안방에서 쫓겨났다.
교원은 그의 안방에 앉아서, 같은 부엌에서 나온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근사한 식사를 하고 후식까지 즐겼는데 말이다. 그도 따로 뭔가 먹었겠지.
교원은 키오스크의 네모난 버튼을 눌러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 수 있는 24장의 사진을 휙휙 넘기며 하나하나 살폈다.
헤어와 메이크업, 코디 모두 완벽한데 표정과 구도가 조금 아쉽다. 다음에는 좀 더 괜찮은 포토그래퍼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권 대표는 이런 표정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라거나, 달달한 걸 먹을 때나,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가 더 예뻤다.
최근에는 저를 보고 있을 때가…… 그랬다.
애매하긴 하지만 고백까지 들어 버린 입장이라는 걸 다시 한번 떠올리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권 대표였다.
“……여보세요?”
- 네, 교원 씨. 몸은 괜찮으십니까아…….
걱정 섞인, 그리고 저를 내버려 둔 것에 삐친 듯한 목소리에 자연스레 입술을 비죽 내민 권 대표가 연상되었다. 교원은 머리를 뒤로 기대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후식도 잘 먹었습니다.”
- 그럼 저 좀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아.
이 얘기를 하려고 전화했구나. 교원은 내려놓았던 책을 무릎에 올리고, 일부러 팔랑팔랑 넘겨 소리를 내었다.
“책을 읽어야 해서 안 되겠는데요.”
- 교원 씨이. 이 불쌍한 중생과 영화를 봐 주시기로 하셨잖아요오.
“지금 보겠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 ……으…….
발이라도 동동거리고 있는지, 소파를 작게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교원은 거의 읽지 못한 책을 펼치고 끙끙대는 권 대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한참 앓더니, 결국 힘없이 타협을 내놓았다.
-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되십니까요오…….
“방해됩니다.”
-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 앉아만 있을게요, 네?
“시간 낭비입니다.”
- 낭비해도 내 시간이니까 좀 봐줘! 내가아, 내가 이 비서 시간 낭비하고 싶다고 했어? 이 비서 이거 진짜 못된 사람이네, 킁.
결국 참다못한 권 대표가 언성을 높였다가, 꿍얼꿍얼거렸다. 그래도 제멋대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문 근처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의겸은 어떻게 됐어요?”
교원은 책을 넘기며 갑작스레 주제를 바꿨다. 마치 대답하면 들어오게 해 줄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러자 건너편의 권 대표가 또 끙끙거렸다. 간식 달라고 낑낑대는 개 같은 소리였다.
“말해 줘요.”
- ……몰라. 경찰에 안 잡혔어.
“진짜?”
- 응, 진짜. 공항까지 막아 뒀으니 언젠간 잡힐 거 같긴 한데…… 어떻게 하고 싶어?
교원은 책을 덮고 제 볼을 살살 쓸었다. 납치해 놓고 고작 하고 싶은 게 옆에서 잠만 자고 싶은 거라고 말하던 차의겸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꼴리는 대로, 하고 싶으면 바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면서 차의겸은 이상하게 교원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오메가인 걸 알게 된 후 두어 번 페로몬으로 장난을 치긴 했어도 거기까지였다.
……물론 발목을 이렇게 만들어 놓긴 했지만, 덕분에 쉬게 됐으니 별생각도 없었다. 부상으로 인한 휴가는 월급에서 제하지 않으니까.
고등학생,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차의겸은 사람 성질은 건드리면서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교원에게는 길가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처럼 거슬리는 놈이었지만, 동시에 어릴 때부터 쭉 함께해 온…… 놈이었다. 어떤 관계라 정의할 수 없는.
“수배 안 내리면 안 돼요? 공항도 풀어 주고…… 그렇게 해 봤자 내 빚이 적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교원은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든 폭력에 상처를 입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상처를 인식하지 못했다.
무의식의 교원은 아파하고 있어도, 겉으로는 상처투성이여도 그는 늘 ‘별일 아닌데.’ 하고 넘어가곤 했다. 이것은 그의 환경이 만들어 낸 성격이었다.
- 그래, 그럴게.
“……진짜요?”
상큼한 대답에 조금 놀랐다. 권 대표는 늘 헤벌레 늘어져 있는 것 같다가도, 한번 정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이전 승화 엔터의 박 전무와의 성희롱 사건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가 일을 치른 걸 알고 있었다.
저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리고 이전에 교원을 희롱했을 사람들을 골라 거래처에서 제외한 것도 보았다.
- 응, 진짜로. 뭐, 미국은 피해자가 합의했다고 해도 안 봐주지만.
아, 교원도 그 사실을 떠올렸다.
“뭐야, 그럼 못 하는 거 아니에요?”
퍽 실망한 목소리로 되묻자,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 내가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