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52)화 (52/60)

결국, 미루고 싶던 질문이 도착했다.

“……뭐, 가……요.”

교원이 힘겹게 대답을 뱉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도망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권 대표를 밀치기만 해도 되는데 그걸 떠올리지도 못해서 품에 갇힌 채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권 대표는 진짜 죽을 지경이었다. 숨이 완전히 멎을 지경이었다. 그야, 아까부터 교원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새빨개져서는 제 눈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권 대표가 아는 이 비서는 야근을 할 때도,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일이 늘어날 때도, 제가 도망가는 바람에 미팅이 미뤄질 때도, 잔혹한 영화를 볼 때도…… 늘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꼭 로봇처럼 일만 했다.

멀리서 보는 이들이나 ‘금욕적이다.’, ‘무심한 느낌이 섹시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1년간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놀리면 툭툭 뱉는 말이 재밌기라도 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 비서와 일하는 내내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을 터다.

여하튼 그런 사람이 근래 웃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면서 표정을 보여 주더니 지금은 꼭 사춘기 소년처럼 볼을 붉히고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나 어떠냐고.”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온몸에 힘을 주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갗에 핏줄이 우락부락하게 튀어나와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코피를 줄줄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교원을 끌어안고 뒹굴뒹굴 구르고, 제 어깨에 앉히고 전 세계를 질주하면서 자랑하고 싶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비서가 제 비서라고, 지나가는 아무 사람의 멱살을 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니까, 지금 그걸 다 참고 여유로운 척하고 있는 거다.

“난 교원이랑 키스도 하고 싶고, 안고 싶고, 그것도 하고 싶은데.”

“아, 아니, 자, 잠깐…… 잠깐만요.”

“하면 안 돼? 교원아, 나 진짜 너 좋은데.”

납치를 당했을 때도 얌전히 누워서 새근대며 잠들어 있었다는 이교원이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자, 잠……!”

“교원아…….”

이때다. 권 대표는 애절한 목소리로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그건 누구의 의지도 아니었다. 교원의 다리가 움직였지만, 교원의 의지가 아니다. 반사 신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일까. 교원은 제게 다가오는 입술을 보고 저도 모르게 다치지 않은 다리를 힘껏 뻗었다.

“컥! 허억!”

무릎이 권 대표의 명치를 휘두름과 동시에 발끝은 정확히 그의 소중한 그곳을 가격했다. 권 대표의 거대한 상체가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어으, 허, 어으윽…… 컥…….”

풀썩, 권 대표가 뒤로 넘어갔다. 교원은 빨갛게 물든 얼굴로 숨을 고르다가, 입술을 질끈 물고 권 대표의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갑자기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대화를 하자고 해 놓고 왜 입을 맞추시려고 하세요?”

“흐윽, 크흐윽…… 교, 교원아…….”

“제 의사는 듣지도 않고! 멋대로 결정하시면 안 된다고 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표님이 회사의 대표는 맞지만, 대표님의 한마디로 회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고 제가 초반부터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지 기억하십니까!”

권 대표의 다 스러져 가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교원이 언성을 높여 그를 혼내기 시작했다.

권 대표는 1년 전, 그가 자신의 직속 비서가 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거의 한 달 동안은 귀가 터지도록 혼이 났었다,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에, 말씀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직원이 움직이는 줄 아십니까! 그래서 제가 공적이든, 사적이든 말씀을 조심하라고 늘 그랬습니다!”

평소의 낯으로 돌아온 교원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고 완전히 ‘설교 모드’로 들어갔다.

“연애를 하실 때도 상대를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신체 접촉이 지나치셨습니다! 뭣보다 지금 아픈 사람한테 이걸…… 이걸…… 왜 세우, 아니, 왜 흥분하십니까!”

권 대표의 다리 사이를 슬쩍 내려다본 교원이 무진장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저게 얼마나 흉측한 크기인지, 얼마나 무섭게 움직이는지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 잠깐의 가벼운 감정으로 제게 들이대고 있지만.

“저번에는 베타 남성을 찾아 달라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저에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솔직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대표님께서 그간 얼마나 많은 오메가를 갈아치우셨는지 말입니다! 갑자기 제가 좋다는 이유도 모르겠고, 베타 남성에 대한 가벼운 감정이시라면 제가 아닌 회사 밖에서 사람을 찾으시는 게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권 대표가 상당한 타격을 당했음에도 부푼 제 아들을 감싸며 반대편 손을 파르르, 들어 올렸다.

‘할 말 있습니다, 선생님.’이란 뜻이었으나 교원은 그에게 발언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나가서 잘 테니, 꼭 이! 침. 대. 에서 주무셔야 한다는 대표님이 여기서 주무세요!”

교원은 침대 밖으로 훌쩍 몸을 일으켰다. 한쪽 다리로 일어난 뒤, 세워 둔 목발을 짚고 성큼성큼 안방을 나갔다. 아까는 목발을 제대로 쓰지 못해 휘청거리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윽, 흑, 교원, 아…… 내 말, 좀…….”

권 대표는 어떻게든 교원을 붙잡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가, 상체를 구부리기를 반복했다. 너무, 너무 아팠다. 눈물이 주룩 흐를 만큼 아팠다.

솔직히 교원의 말 하나하나가 옳은 것이긴 했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고쳐 주고 싶었다. 결코 가벼운 감정은 아니라고 말해야 했는데.

“교원아아…….”

계속해서 문밖으로 죽어 가는 목소리를 내자, 또다시 교원이 안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권 대표의 낯이 희망으로 물든 순간, 탁!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흐으윽…… 너무 아퍼, 나 진짜 아파…….”

결국, 흐느끼는 목소리는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차가운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 홀로 남은 권 대표는 제 다리 사이를 붙잡고 몸을 굼벵이처럼 웅크린 채 침대 위를 굴렀다.

* * *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원은 새빨갛게 물든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다가,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의 시간을 보고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는 지금 손님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권 대표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다.

권 대표가 수를 쓰기 위해 어제 그런 말을 했고, 넘어갈 뻔한 것이 약 6시간 전이다.

그리고 6시간 동안 교원은 그 잠깐 사이의 일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떠올리고, 권 대표가 한 말과 표정, 손짓을 느끼고 제가 한 짓과 말을 모두 떠올렸다.

참으로 모태 솔로다운 대응이었다.

아니, 잘한 짓인 거 같기도 하고…… 차분히 떠올려 보니 제가 명치와 급소를 아주 세게 때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랬으니 권 대표가 쓰러져서는 꼼짝도 못 했지.

그런 생각을 하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핸드폰을 켜고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인터넷 뉴스를 잔뜩 봤다. 너튜브도 엄청나게 봤다. 충전과 동시에 배터리를 소모하는 무진장 사치스러운 짓을 하다가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전기를 너무 썼나 싶어, 이제 잘까 하는 마음에 눈을 감으면 다시 권 대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래, 그 짓을 몇십 번 반복하니 오전 6시…… 지금이 되었다. 그리고 교원은 다시 안방에 가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곳에 페로몬 조절제 약이 있다. 가기 싫다고 버틸 일이 아니었다.

“하아…….”

교원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목발을 짚고 마른 입술을 훑은 뒤 침을 꿀꺽 삼켰다.

손님방 문을 여니, 익숙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손님방부터 안방으로 가는 길은 1년간 권 대표를 깨우려 수없이 드나들었던 루트였다. 괜히 그게 떠올랐다.

“……아.”

생각해 보니 권 대표는 오늘부터 출근이었다. 저야 병결로 빠지게 되긴 했지만―물론 집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기로 했다― 권 대표는 출근해야 했다.

“후우…… 그럼…….”

그러면,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권 대표를 깨우고 가방을 들고나오면 될까.

거실을 가로지르던 교원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어제 일은 솔직히 말해, 설레기보단 웃기고 어이없는 사건이었음에도 이렇게 떨리는 걸 보면 제가 그를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다.

진짜, 그를 왜 좋아하게 됐더라.

1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떠올려 봐도 그에게 반했다거나, 크게 설렌 적은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그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동료애인 줄 알았던 감정이 에로스적 의미의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건 ‘그날 밤’이었다.

사고로 그와 밤을 보낸 날 말이다.

“대표님, 회사 가실 시간입니다.”

교원은 차분히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늘 그랬었기에 익숙했다. 교원은 안방 문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권 대표는 여러 벌을 사 두었던, 늘 입던 핑크색 잠옷이 아닌 검은 티셔츠에 헐렁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자고 있었다.

침대 구석까지 몸을 웅크린 그는 꼭 어제 얻어맞은 ‘그곳’을 지키려는 듯도 보였다.

게다가 눈가는 빨갛게 부어 있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게 안쓰럽기보다는…… 좀 추했다.

교원은 키오스크 옆에 놓인 제 가방 부근으로 다가가 목발을 내려놓고 등에 가방을 멨다. 그리고 다시 목발을 짚고 섰다.

“대표님. 지금 일어나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흑…… 킁, 시로…….”

“예, 오늘은 좀 일찍 깨우긴 했죠. 근데 이게 정상적인 기상 시간입니다.”

그리고 출장을 가기 전에 얼마 동안 저를 데리러 온다고 무척 일찍 일어나지 않았던가. 물론, LA의 시간과 달라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을 터다. 자신이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대표님, 일어나세요.”

목발을 짚고 깨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교원은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목발을 테이블에 기대 놓았다.

어젯밤 치우지 못한 나초 그릇이 보였다. 영화를 볼 때까지만 해도 딱 좋았는데. 직장 상사보다는 가깝고, 친구나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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