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53)화 (53/60)

제가 애써 피했는데, 이 인간은 왜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런 짓을 해서 사람을 흔들어 놓는가.

괜히 짜증이 나서 교원은 손에 힘을 실어 권 대표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예?”

“흐으윽…… 교원아…….”

생각지도 못한 제 이름이 튀어나오자, 교원이 손을 뗐다. 권 대표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흐물거리는 몸이나 꼭 감긴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자는 척하는 얼굴’ 정도는 1년간 그를 깨워 온 경험 덕택에 구분할 수 있었다.

“교, 흐윽, 워나…… 나, 흑, 사랑하지이…….”

가만히 지켜보던 교원의 낯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너랑, 으응, 헤…… 좋았지이…….”

결국 교원은 이불을 확, 걷어 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창문도 활짝 열었다. 찬 바람이 순식간에 실내로 들어오자 권 대표가 몸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떴다.

“어…… 헤헤, 교원이네. 또 같은 침대에…… 아!”

철썩, 어깨를 내리치자 아직 꿈에 젖어 있던 권 대표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싶더니 울상을 지었다.

“이 비서…… 내 옆에 교원이 어디 갔어?”

“……출근 준비나 하시죠.”

“교원이가 내 품에, 이렇게, 이렇게 안겨서 막…….”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좀!”

사람이 6시간 동안 앓고 있을 때, 이 인간은 그런 파렴치한 꿈에 젖어 있었단 말인가.

교원은 권 대표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이불을 접어 정리했다. 권 대표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허공을 몇 번 끌어안다가 “교원이…….” 하고 중얼거렸다.

“제가 왜 대표님 품에 안겨 있습니까? 해괴한 꿈에 저를 이입시키지 마시고 좀, 일어나세요.”

권 대표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교원은 키오스크로 샌드위치와 오렌지 음료를 주문했다.

시간도 넉넉하고, 제가 챙겨 줄 수 없으니 권 대표의 몫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럼 씻고, 준비하고 나오세요.”

“네…….”

교원은 익숙하게 옷장으로 향하려다, 목발을 잊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러나 금이 간 발목은 이미 바닥을 짚었고, 강렬한 통증이 찌르르하게 올라왔다. 상체가 휙, 뒤로 넘어가려는 순간, 커다란 팔이 아무렇지 않게 교원을 받았다.

“이 비서는 들어가서 쉬어…… 속옷이랑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게.”

“……정장, 입으셔야 합니다.”

“응.”

권 대표는 교원을 조심스레 침대에 앉혀 주고, 제 손으로 속옷을 찾아 꺼내 들더니 안방 욕실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자 교원이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아, 진짜.”

저 인간 일부러 저러는 거 맞지. 의식도 안 하고 저러는 건 아니지?

잠시 생각하던 교원은 그의 그간 여성 경력을 떠올렸다.

……무의식중에 했을 법하다. 저 남자에게 오메가, 여성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일 것이다.

침대 위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받쳐 주는 건 수도 없이 했겠지? 습관이겠지, 아주?

지금껏 잠시 설렜던 일을 떠올리니 하나같이 수법처럼 느껴졌다.

침대에서 느끼하게 굴었던 것도, 생각해 보면 수많은 이에게 똑같이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교원은 애인―은 아니지만―의 과거에 집착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싶었다.

1년간 봐 온 그의 애인만 해도 두 손으로도 세기 힘들다. 권 대표는 취향이 확고하지 않았다. 모두 다른 키, 다른 외모, 다른 머리 색을 갖고 있었다.

교원은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흑색 머리의 여자들은 대체로 청순한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저는 까만 머리지만 청순하진 않았다. 교원은 솨아아, 물소리가 들리는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제 안 속는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목발을 짚는 순간, 교원은 조금 전 권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또’ 같은 침대에, 라고 말했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설마…….”

설마, 이전 일이 떠오른 걸까.

교원은 머리를 훌훌 털어 절뚝이며 몸을 일으켰다.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별 것 아닌 걸로 신경 쓰지 말자.

권 대표가 아직도 그 일을 회상하며 기억을 떠올리려 할 리가 없었다.

딱 하룻밤이다.

그에겐 무수히 많은 밤 중 하나였을 밤. 저에겐 하나뿐인 밤. ‘베타 남성’이라는 것이 독특하긴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이 특별한 건 자신뿐이었다.

교원은 손님방의 문을 닫고 노트북을 켜 업무를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권 대표가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와 샌드위치와 음료를 받으며 셰프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뿐사뿐 걷는데도 불구하고 권 대표의 걸음 소리가 귀에 박힐 듯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교원은 조용히 신경을 모두 밖으로 쏟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똑똑!

“……네, 네?”

“문 열어도 돼?”

교원은 닫힌 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곧장 대답했다.

“아뇨.”

“……치.”

“다녀오세요.”

“웅…….”

곧 신을 신는 소리가 들리고, 도어 록이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교원은 그때까지 숨을 참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시간을 보니 오전 7시. 아직 직원들이 출근한 시간은 아니었다. 교원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으로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그때, 핸드폰이 징 울렸다.

잊고 있던 임도영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비서1팀임도영: 안녕하세요, 이 비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피곤하실 듯해서 오늘 연락드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

왜 얘를 잊고 있었지.

출장 중, 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임도영이었다. 그러니 이래저래 진술을 했다거나, 권 대표에게 혼났다거나…… 많이 놀랐을 것이다.

교원은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

[네, 안녕하세요. 출근길이세요?]

[비서1팀임도영: 앗 아뇨. 회사입니다.]

[잠깐 전화 가능하세요?]

[비서1팀임도영: 네넵!]

답장이 빠릿빠릿하게 왔다. 교원은 바로 임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차례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넵, 이 비서님.

“벌써 회사예요? 출근 시간 한참 남았잖아요.”

교원은 노트북으로 직원 출근 프로그램을 켰다. 임도영의 평균 출근 시간은 오전 8시였다. 본래 출근 시간은 9시니, 1시간이나 일찍 출근하는 셈이다.

“지금…… 7시 좀 넘었는데.”

- 아…… 원래는 이렇게까지 일찍은 안 오고요, 오늘은 출장 다녀온 사이에 일이 좀 쌓였을 것 같아서 일찍 왔어요.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

교원은 참 성실하다, 그리 생각하면서 유독 지각이 많은 비서 2팀 팀장의 출근 체크 목록을 살펴보았다.

“네, 잘 쉬고 있어요.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있으니 물어볼 게 있으면 연락해도 좋고요.”

- 아! 그냥 쉬시지, 왜 일하셔요. 다치신 데다 피곤하실 텐데…….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교원이 작게 웃었다.

“그냥 조금 체크하는 정도라서, 괜찮아요. 그나저나 일이 좀 있어서 놀랐죠? 원래는 출장이 이렇게 다이내믹하진 않아요.”

혹여 항상 이런 출장일까, 생각할까 봐 덧붙였더니 임도영이 축 처진 목소리로 물었다.

-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이 비서님 개인적인 일인가요? 앞으로도 또 위험한 일이 생기실까요?

“음…… 글쎄요. 한 번 정도는 더 생길 거 같긴 한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전화는 도영 씨가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서 드렸어요.”

차의겸은 하고 싶은 건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다. 이번에 일이 그렇게 됐으니 또다시 사고를 칠 수 있겠지.

“여튼 오늘 출근 힘내시고, 나중에 회사에서 봬요.”

어제는 권 대표 덕분이었을까. 아예 잊고 있던 것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차의겸이 했던 말들.

- 아, 아…… 네.

어쩐지 시무룩한 대답을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냥 같이 있고 싶다던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한 번이면 되냐는 말에 화까지 냈지.

뭘 원하냐고 물어도, 놈은 옆에 누워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냐 물었을 땐 연락이 되지 않아서라고 했다.

교원이 알던 차의겸은 저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 놈이었다. 인생의 수많은 걸림돌 중 하나.

그 걸림돌이 갑자기 데굴데굴 굴러 제 발을 툭툭 차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저는 넘어질 것 같은데, 걸림돌은 같이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후…….”

교원은 차의겸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크게 한숨을 뱉은 후, 바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할 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좋다. 일 자체는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하고 있노라면 앞으로의 인생이라거나 빚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교원은 사무 업무를 평소처럼 빠르게 처리하고, 오늘 권 대표의 스케줄과 그에 관련된 것들을 살폈다. 비서 1팀 팀장이 깔끔하게 처리해 둔 것이 보였다.

어느 정도 업무가 끝나고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권 대표의 점심시간.

권 대표는 제가 없는 동안 비서 1팀 팀장과 함께한다. 교원은 문득, 저도 모르게 1팀 팀장에게 연락했다.

- 네, 이 비서님. 비서 1팀 김 팀장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받고 나서야 제가 왜 전화를 했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제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김 팀장님, 수고하십니다. 오전 업무는…… 잘 진행되었습니까?”

- 예, 문제없이 진행됐습니다. 대표님께서도 미리 브리핑을 들으신 것처럼 하시더라고요 …….

보통 식사는 권 대표와 저, 단둘이서 했다. 그럼 이번에도 김 팀장과 권 대표 둘이서 먹는 건가.

……김 팀장, 베타였지. 아니, 권 대표는 이제 베타도 상관없었지?

성별과 형질 모두 한 번에 취향이 바뀌지 않았던가. 여성 오메가만 만나다가, 남성 베타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니…… 그보다 가까운 여성 베타에게도 호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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