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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4화 (4/119)

4화

“뭐 하냐, 너.”

성큼성큼 걸어 대현의 앞에 선 남자는 덩치가 컸다.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대현이 머리를 굴렸다. 아까 아파트 현관에서 사생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제게 달라붙던 여고생들에게 윽박을 지르는 것처럼 보이던 사내 말이다. 매니저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니 팬싸인회 때 비슷한 인상의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가 누군지를 알았으니 이제는 어떻게 의심받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내야 했다. 무엇보다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진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묻는 모습에서 아까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멍하니 서 있던 자신을 보던 식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지후가 아니었기에 지후답지 않게 구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그걸 모르는 이들에게는 평소의 지후답지 않은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의아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그들의 모습에 대현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아, 들어가려고 하던 중이었어요.”

“올라간 게 언젠데 이제…… 그러고 보니 왜 너 혼자야. 식이는.”

“먼저 들어갔어요.”

“넌 왜 안 들어가고.”

“전…….”

지후가 내놓을 법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무난하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대답.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스스로를 쪼아댄 것치고는 터무니없는 변명이었다. 말을 마친 대현이 소리 없는 자책을 하며 시선을 떨어뜨릴 때였다.

“……어휴. 새끼야.”

어림잡아도 대현의 두 배는 될 법한 두께의 손이 대현의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조심성 없이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손길이 퍽이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얼떨떨한 표정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 다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쓰러움까지 느껴지는 눈빛에 대현이 멈칫했다.

“네 맘 이해는 하는데. 그렇다고 추운데 여기서 이러고 있냐.”

“……아…….”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하자고.”

이제는 등으로 내려온 손이 대현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아까처럼 조심성은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악의도 찾아볼 수 없는 몸짓이었다. 굳은 대현을 지나쳐 도어락을 푼 매니저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안 들어올 거냐는 눈빛이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로도 몸은 어찌저찌 움직일 수 있었다. 대현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본 매니저가 현관 바로 옆의 문을 여는 게 보였다.

대현이 신발을 벗다 말고 멈칫했다. 삼 년간 좋아한 그룹의 숙소였다. 리얼리티 등의 목적이 아니라면 팬들이 엿볼 수 없는 사적인 공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고, 먹고, 기타 등등의 모든 행동을 하는 곳.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환호성을 지르고도 남았을 곳.

하지만 대현의 머릿속에는 설렘 대신 다른 것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방금 전 매니저가 제게 보인 눈빛에서 읽어낸 동정과 안쓰러움이 대현의 심장 어딘가를 북북 긁었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시기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눈앞에서 마주하는 상황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물며 집 안으로 들어서던 대현이 몇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

“…….”

소파에 앉은 남자가 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의 곱슬곱슬한 머리가 사방으로 뻗쳐 있고, 눈에 묻은 졸음기가 그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임을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얼굴은 대현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수려한 데가 있어서 대현은 남자를 과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자신을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윤성이었다. 플러그의 막내.

“오셨어요.”

윤성이 대현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일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대현이 그처럼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

“…….”

고개를 들자마자 제 얼굴로 쏟아진 이상하다는 시선에 바로 후회했지만 말이다. 헛기침을 한 대현이 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거실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팬들이 준 선물로 보이는 물건들이 베란다를 꽉 채우고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모델하우스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딸려 있었을 것 같은 텔레비전 밑 서랍장과 텔레비전, 그리고 소파와 소파 앞 원목 테이블이 거실에 있는 물건의 전부였다.

거실 구경을 끝낸 대현의 시야에 다시 윤성이 걸렸다. 눈이 마주친 윤성이 어색하게 시선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끄는 윤성의 행동에 당황한 건 대현이었다.

너무 빤히 봤나. 하긴 리더가 갑자기 텔레비전을 보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울 만도 했다. 상황을 읽어낸 대현이 손을 저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윤성이 빨랐다. 쭈뼛쭈뼛 일어나 다시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고는 거실을 가로지르는 윤성을 보던 대현은 제자리에서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윤성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보이는 수많은 방 중 어느 방이 그의 방인지 궁금함에도 몸을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당하는 외면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이 당하는 외면이 아님에도, 이 순간만큼은 마치 제가 진짜 플러그의 리더 이지후가 되어 외면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왜, 대체…… 속에서 온갖 물음이 뒤엉키고 있었다.

“지후야.”

부름을 듣고서야 굳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매니저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목을 주무르며 대현을 쳐다보는 얼굴이 피곤에 젖어 있었다. 복도에서 그의 등을 토닥일 때만 해도 없었던 피로함을 눈치챈 대현이 매니저의 뒤로 보이는 덜 닫힌 문과 그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간 되면 얘기 좀 하자.”

매니저의 말이 대현의 귓등을 스쳤다. 듣고는 있지만 듣는 게 아니었다. 대현의 시선은 앞에서 말을 건네는 매니저가 아닌, 덜 닫힌 문으로 보이는 우람의 모습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람도 시선을 눈치챈 듯했다. 고개를 든 그와 시선을 나눈 지 몇 초쯤 되었을까. 자리에서 일어선 우람이 걸음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쾅. 단 두 걸음 만에 닫힌 문. 꽤 크게 난 소리에 뒤를 돌아본 매니저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가타부타 언급 대신 대현을 다시 돌아보는 얼굴은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님을 유추 가능하게 했다. 대현의 심장이 바닥끝까지 떨어졌다.

세 번째 외면이었다. 그리고 대현은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일단 방으로 가자.”

애들 들을지도 모르니까. 말을 덧붙이고는 주위를 살핀 후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매니저를 보는 대현의 입 안에서 나오지 못한 말이 아우성쳤다. 물론 그중 입 밖으로 뱉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대현이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발을 뗐다. 매니저가 앞장선 곳은 구석에 위치한 방이었다. 먼저 들어선 그가 열어놓은 문 사이로 발을 떼던 대현이 이내 우뚝 멈춰 섰다.

아까 보았던 거실의 풍경이 오버랩 되는 기분이었다. 작게 흐트러진 침구와 책상 위에 놓인 노트 몇 개가 아니라면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다.

그 와중에 시선이 간 노트 끝에 적힌 J라는 알파벳에 대현은 이 방이 이지후, 즉 제가 들어가 있는 이 몸의 주인의 방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매니저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이끌 때부터, 그리고 안에 멤버가 아무도 없을 때부터 눈치를 채긴 했다만 한눈에 보기에도 허전해 보이는 이곳이 정말 지후의 방이었다니 뭔가 씁쓸했다.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

책상에 걸터앉은 매니저가 손짓을 했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자마자 출렁이는 매트리스를 괜히 한 번 쓸어보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대현이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주쳐 오는 시선이 불편했다. 아까의 대현처럼 이마를 긁으며 인상을 쓰는 행동이 무언가가 잘 안 풀려가고 있는 듯했다.

“우람이 설득이 힘드네.”

“…….”

“윤성이 진정시켜 놓으니까 이제는 저놈이 난리다. 윤성이는 애가 어리니까 설득이 쉬웠다 쳐도, 저놈은 그냥 싫다는 데 뭐 어떻게 해야 될지…….”

“…….”

“대표님은 이번 주 내로 정리를 하는 쪽으로 결론 냈으면 하는 눈치시던데. 솔직히 말이 쉽지. 안 그러냐. 나도 이렇게 마음이 뒤숭숭한데 너네들은 오죽하겠어.”

말을 이어갈수록 착잡한 얼굴은 바닥을 응시했다. 팔짱을 낀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각진 얼굴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 얼굴을 살피던 대현은 그가 고개를 들려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정리’란 단어가 유독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리. 무엇을 정리한단 말인가. 리더인 지후를 앉혀놓고 매니저가 상의하듯 꺼낸 말들은 그가 지난 몇 달간 치열하게 부정해 왔던 것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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