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자신만큼이나, 아니 자신보다 배로 당황한 듯한 윤성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현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대현도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가긴 어딜…….”
“거기 유은호도 있지 않냐?”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는데 일부러 대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우람은 대신 윤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확답을 받겠다는 의지가 서린 얼굴이었다. 당황한 대현과 단호한 우람을 번갈아 보던 윤성이 결국 우물쭈물하면서도 대답을 내놓았다.
“네. 근데 은호 형은 요새 잘 안 오셔서…….”
“그 개새끼는 그럼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요새.”
우람의 입에서 나온 다소 거친 말에 다시 제 눈치를 보는 윤성을 보면서도 대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우람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우람이 어떻게 삼 년 전 그 일의 전말을 알게 되었나가 궁금했던 대현이 조심스레 질문을 하면서 시작된 대화였다.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가라앉은 낯을 하던 우람은 은호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이를 갈았다.
‘가만 안 둬.’
‘…….’
‘그 새끼 일부러 그런 거야. 알아? 너랑 내가 그런 오해도 못 푸는 사이인 거 눈치채고는 일부러 그렇게 지 멋대로 지껄인 거라고.’
‘알아.’
대현의 대답에 흥분을 삭이지 못하던 우람은 되물었다.
‘안다고? 넌 알면서 화도 안 나냐? 넌 그것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맞……’
제가 지후에게 한 짓이 생각났는지 입술을 깨무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읽혔다. 그 감정들 중에는 지후의 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대현으로서도 공감 가는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현은 우람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화나지. 특히나 그렇게…… 뻔뻔하게 구는 걸 봤는데.’
‘근데 왜!’
‘너처럼 화 안 내냐고?’
‘…….’
‘지금 그래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아. 화난다고 걔랑 싸우고 그러면 우리한테 좋은 게 뭐가 있어? 안 그래도 넘치는 불화설에 힘만 실어주는 거지.’
‘야, 그래도!’
‘화를 내도 지금은 아니야. 시기상 불리하다고.’
차분하게 이어지는 대현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우람도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옆의 쿠션을 발로 뻥 찼다. 씩씩거리는 숨소리의 끝에는 결국 우람의 볼멘소리가 붙었다.
‘얼굴이라도 한 대 갈겨줘야 되는데.’
씨근덕거리는 얼굴을 본 대현은 우람이 아쉬워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번 주 새벽, 화해 아닌 화해를 한 후 우람과 대현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되는 대현과 원체 말에 거침이 없는 우람은 생각보다 더 말이 잘 통했다. 그중에는 플러그의 미래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우람은 플러그의 해체를 막고 싶다는 대현에 동의했다. 그랬기에 당연히 제 말에 따라줄 줄 알았다. 그치만 방금 우람이 한 말들은 당장은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생각했던 게 저만의 착각이 아니었나 의심하게끔 한다.
“그래도 갈래. 혹시 모르니까.”
“…….”
“이지후, 너도 가는 거다?”
“야, 한우람.”
“많이 먹어라, 그래도 엉아들이 응원 간다는데.”
대현의 말을 가볍게 씹은 우람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양아치 같은 소리를 하며 윤성의 머리를 거칠게 흩뜨려 놓아 엉망으로 만든 그가 뒤도는 걸 보며 대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함이 그의 등을 타고 올랐다.
“야, 한우람.”
“어, 왜.”
“좋은 말 할 때 그만 두리번거리고 앉아.”
대현이 이를 악물고 티 나지 않게 우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앉는 걸 보니 제가 생각해도 튀는 행동이었다는 걸 드디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대현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됐다.
“한우람.”
“아, 왜 또! 앉았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쟤 예스 리더 아냐?”
“뭐? 아. 어 맞네.”
들어올 때부터 느낀 거지만 구장 안에는 아이돌들이 참 많았다. 아이돌 축구단이니만큼 아이돌이 많은 게 당연했지만 아직 플러그 외에는 연예인을 실물로 접한 경험이 희귀한 대현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예를 들면 방금 구장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대현이 플러그를 보기 위해 챙겨보던 음악방송의 엠씨였다. 그 옆에서 축구공을 무릎으로 통통 튕기고 있는 건 이 년 전 플러그와 같은 예능에 나왔었던 선배 그룹의 멤버.
우람에게 두리번거리지 말라고 이까지 악문 것치고는 고개까지 휙휙 돌려가며 신나게 구경하던 대현이 멈칫했다. 아까 우람에게 맞냐고 확인하기까지 했던 예스의 리더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피하기는커녕 눈이 마주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얼굴에 깜짝 놀란 대현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제가 지후의 몸에 있음을 잊은 행동이기도 했다. 플러그와 늘 라이벌로 언급되는 그들에게 악감정을 가진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한 적도 없는지라 오래 시선을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얘는 어디 있는 거야. 명색이 응원을 하러 온 거면서, 우람을 말리느라, 또 구장 안 가득 찬 연예인들을 구경하느라 막내를 잊고 있었다. 구장 안을 훑던 대현의 시선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인영에게 닿았다. 윤성이었다. 대현이 찾기 전부터 대현을 보고 있었던 듯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팔을 위로 들어 휘휘 흔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대현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솔직히 말해. 네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지? 쟤.”
“뭐?”
“아니면 숨겨진 동생 그런 거냐?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한다. 대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하든 말든 우람은 삐뚜름한 자세 그대로 윤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풀어진 얼굴로 대현을 향해 방긋대던 윤성이 삐그덕 소리가 날 만큼 어색하게 몸을 돌려 다시 몸 풀기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걸 보니 윤성도 그런 우람의 시선을 느낀 게 틀림없었다.
어이없음이 가시고 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우람도 윤성에게는 똑같은 멤버 형이었다. 그렇지만 윤성이 대현과 우람을 대하는 태도는 누가 봐도 달랐다. 의도해서 차별한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 듯했다. 아마 거기에는 껄렁껄렁한 우람의 태도가 한몫했을 거다. 동갑인 데다가 어딜 가서든 지지 않고 살던 대현이야 우람의 퉁명스러운 태도를 가볍게 넘길 수 있다지만, 막내로서 늘 눈치를 봐왔던 윤성에게는 제게 관심 없단 듯 구는 우람이 얼마나 어렵고도 무서울지 안 봐도 뻔했다.
“야.”
“뭐.”
“내가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
“네가 멤버 동생을 너무 안 챙겨준다고는 생각 안 해봤냐?”
“…….”
“쟤 열아홉 살이야. 열여섯 살에 데뷔해서 친하지도 않은 형들 사이에서 얼마나 눈치 보고 지냈는지 몰라? 형들이 넷인데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멀리 갈 것도 없어. 널 봐.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애 음식이나 뺏어 먹질 않나.”
“야, 그건!”
“뭐. 할 말 있으면 해 봐.”
“……아씨.”
결국 반박은 하지 못한 채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우람을 대현이 가만히 응시했다. 표정은 그래도 윤성 쪽으로 고개를 돌린 얼굴은 대현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는 눈치였다. 대현이 손을 뻗어 우람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흠칫한 우람은 그럼에도 어깨를 빼지는 않았다.
“갑자기 막 잘해주란 말 아냐. 그냥 조금씩 신경 쓰자고. 우리 다.”
“…….”
“어? 시작하나 보다.”
호루라기 소리에 우람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손이 풀리고 대현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팀 구분을 위해서인지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윤성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대현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옆을 돌아봤다. 아까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우람이 보였다.
야, 뭐해. 툭 치는 대현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우람이 어색하게 자세를 고쳤다. 어어, 어색한 대답을 내놓으며 고갤 돌린 그가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연습 경기는 생각보다 길었다. 처음에야 이리저리 잘도 뛰는 윤성을 응원하며 시간을 죽였다만, 윤성이 교체된 지가 십분이 넘어가자 절로 하품이 나왔다. 옆에 앉은 우람도 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지루한 표정으로 앞좌석에 얹은 발을 까닥대는 얼굴을 본 대현이 의자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야, 추워?”
“뭐?”
“아까부터 귀가 빨개서.”
귀 쪽으로 손을 뻗는 대현의 행동에 우람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는 몸을 물렸다. 대현이 뭔 말을 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대꾸한 그는 어느덧 목도 빨개진 채였다.
“춥, 춥기는! 완전 봄 날씨구만.”
봄 날씨……? 의아한 낯을 하는 대현을 따라 실내체육관을 괜히 한 번 쭉 본 우람이 민망한 낯을 했다. 실내체육관이긴 했지만, 난방이 되지 않아서인지 좋게 봐줘야 겉옷을 입고 떨지 않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12월이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는 없는지, 더운 척을 하며 외투를 벗으려던 우람을 본 대현이 손을 뻗어 막았다.
“알았어, 알았어. 입고 있어 그래도. 감기 든다.”
다정한 말투에 우람의 귀가 더 달아오른 것도 모른 채 이제 대현은 그의 블루종 지퍼를 잡아 쭉 끝까지 올리고 있기까지 했다. 말리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그의 손길을 받아야 했던 우람이 그런 대현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서늘한 눈매 속 옅은 갈색 눈이 우람과 시선을 맞춘다. 눈매와 달리 순한 눈동자가 우람을 걱정스레 훑었다.
‘이젠 얼굴까지 빨가네. 벌써 감기 걸린 거 아냐?’
인상을 찡그린 대현이 우람의 이마로 손을 뻗을 때였다.
“이지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