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Ch 3_4.)
“이지후. 잠깐만.”
배웅을 하겠다며 굳이 따라 나왔던 지웅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가볍게 마신 맥주 덕인지 볼이 약간 달아오른 그가 밴 안으로 고개를 내밀어 대현을 찾았다. 대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진수가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녀와도 된다는 뜻인 듯했다.
“……어디 가.”
“잠시만. 지웅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빨리 오세요, 형. 추워요.”
“응.”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우람이 묻는 말에 답한 대현이 윤성의 볼을 다정하게 툭 두드려 주고 나서야 밴에서 내렸다. 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웅이 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투맨 하나만 입고 선 그가 대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안 춥냐?”
“나 원래 몸에 열 많아서.”
씩 웃는 얼굴이 능청맞았다. 얼씨구. 그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은 대현이 그를 응시했다.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뭐가?”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얼굴 내내 가득하던 장난기가 쏙 빠진 얼굴이었다. 덩달아 진지해진 대현이 조금의 틈을 두고 물었다.
“오늘 촬영도 그렇고 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 사실. 너랑 나랑 친해진 것도 솔직히 오래 된 것도 아니고.”
“…….”
“사실 물어보면서도 좀 고민했었거든. 거절해도 할 말 없는 거라 생각했고. 근데…… 들어주고 이렇게 기대 이상으로까지 해줘서 고마워.”
어쩌면 이게 지웅이 아이돌의 아이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누구와 있든 상황을 어색하지 만들지 않는 센스나, 이렇게 상대방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그의 모습을 볼수록 왜 그의 주위에 사람이 많은지를 알게 된다.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얼굴을 바라보던 대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살짝 주먹을 쥐어 지웅의 어깨를 쳤다. 나름 진지하게 뱉은 말에 이런 반응이 돌아올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다 이내 웃어버리는 지웅을 본 대현이 툭 뱉었다.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
“너 가만 보니까 상습적이다? 때린 곳만 때리네.”
“한 번만 더 고맙다고 해봐. 기억해 뒀다가 또 때릴 거야.”
일부러 주먹 쥔 손을 들어 보이는 대현의 얼굴을 본 지웅이 소리 내어 웃는다. 하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듣던 대현이 지웅과 눈을 맞췄다. 장난기를 조금 털어낸 음성이 건너갔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너도 알잖아. 우리…… 촬영 못 하고 있었던 거.”
“……야. 그건.”
“고마워서 얘기하는 거야. 챙겨준 거잖아, 네가.”
대현이 직접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이 된 지웅을 본 대현이 부러 더 밝게 웃었다.
“당장은 안 되겠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너네 팀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열심히 해야겠지. 끝말을 작게 중얼거린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지웅은 의외로 말없이 대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함에 뭔 말이라도 내놓으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도울 수 있는 게 왜 없어. 당장 막내들 다루는 법부터 배우고 싶은데.”
“……나한테?”
“그래. 윤성이가 너 정말 잘 따르더라.”
“그건 윤성이가 착해서 그런 거고.”
“에이. 의지하는 게 보이던데 뭐. 하긴 그건 다른 멤버들도 다 그래 보이긴 했지만.”
장난스럽게 마무리하는 지웅을 보던 대현의 입가가 굳어갔다. 태영, 진수와 윤성을 신나게 비교하던 지웅이 말을 멈추는 게 보였음에도 한 번 굳은 입가는 쉽사리 풀리지 못했다. 대현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엉키고 있었다. 멤버들의 얼굴이 가득한 틈새로 지후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지후?”
“……어?”
“무슨 생각해. 불러도 못 듣고.”
“아, 아니. 야, 나 가봐야겠다. 멤버들 기다릴 것 같아서.”
“어? 어. 맞네. 미안. 잠깐이라고 해놓고.”
“아냐. 연락할게. 추운데 얼른 들어가.”
“어.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다행히 표정을 관리한 대현의 말을 의심 없이 믿은 듯한 지웅은 얼른 가보라며 대현의 등을 슬쩍 밀어주기까지 했다. 고개를 끄덕인 대현이 밴으로 걸어갔다. 대현이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대현이 주춤 물러났다.
“형! 제가 자리 데워놨어요! 여기 앉으세요!”
“야, 캥거루. 시끄러워. 머리 울린다고.”
“무슨 얘기 하신 거예요, 형?”
문 앞에 바로 윤성이 앉아 있었다. 그가 문을 연 듯했다. 문 앞에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웃는 그와 맨 뒤에 앉아 창문에 얼굴을 댄 채 짜증을 부리고 있는 우람, 매니저 옆에 앉아 있다가 몸을 돌려 묻는 식을 차례대로 훑은 대현의 눈이 흔들렸다.
“형?”
“……어. 별 이야기 안 했어.”
의아하게 바라보는 윤성을 느낀 대현이 겨우 대답을 내놓고는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은 지금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들이었다.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차를 느끼며 대현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윤성아, 나 좀 잘게.”
잠긴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윤성이 ‘네, 형’ 대답해 왔다. 몇 분이 지났을까. 불쑥 나온 우람의 물음이 조용한 밴을 울렸다.
“근데 쟤 많이 마셨냐?”
“많이 안 드신 것 같았는데…….”
“야, 김 식. 봤어?”
“……못 봤습니다. 저 밀쳐 내고 앉으신 게 누군데.”
“또 내 탓하네, 저 새끼.”
“저희 좀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은데…… 형 깨시면 어떡해요.”
식과 우람의 유치한 말다툼까지 얹어진 대화를 들으면서도 대현은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윤성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다시 조용해진 밴을 느낀 그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은 옆을 향했다. 옆자리에 앉은 윤성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잠시 내려다보던 대현이 습관처럼 나갈 뻔한 손을 마저 뻗지 못하고 거뒀다. 흐트러진 윤성의 머리를 정리해 주는 것 대신 손을 내린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뒷자리의 우람, 앞좌석의 식까지 자고 있는 걸 확인한 그가 윤성이 기대지 않은 다른 쪽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윤성을 깨우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해 불편하게 몸을 몇 번 움직이자 핸드폰을 꺼낼 수 있었다. 망설이듯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결심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의 움직임 끝에 화면에 뜬 번호는 대현에게 익숙한 번호였다. 잠깐 가라앉은 눈으로 번호를 바라보던 대현이 이내 창을 옮겨 문자를 입력했다.
성공적으로 전송된 메시지를 확인한 대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터널을 지나는 중인지, 그의 얼굴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란 불빛이 비쳤다. 다음 순간 빛을 받은 핸드폰 화면에 방금 전 그가 전송한 글자들이 반짝거렸다.
<서울 오면 이야기 좀 하자.>
“진수 형. 저희 다 왔죠?”
“어. 지후 아직도 자냐? 깨워 얼른.”
“아, 사실 아까부터 깨우려 해보긴 했는데 못 일어나셔서…… 피곤하신가 봐요.”
“비켜봐. 야. 이지후. 일어나봐.”
“술 드셔서 그런 것 같은데. 그냥 더 자게 하면 안돼요?”
무의식을 뚫고 흘러들어온 말소리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평소라면 눈을 뜨고도 남았을 소리에도 대현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무언가 그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도 어깨를 움츠리기만 할 뿐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형. 먼저 올라가세요. 제가…….”
어깨에 올라온 손이 떨어진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동시에 귓가를 파고든 소리는 이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어.”
한참을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나서야 제가 왜 이 곳에 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잠깐만 눈을 감아야지 생각해 놓고는 결국 잠에 들고 만 모양이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게 지후에게 문자를 보낸 일임을 떠올린 대현이 작게 하품을 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고요한 밴 안에는 저뿐인 듯했다.
어둠에 적응한 옅은 갈색 눈은 운전석 주위를 맴돌다 이내 다시 꾹 감겼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찌뿌듯한 몸을 비틀자 언제 몸 위로 올라와있는지도 몰랐던 패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떨결에 손을 뻗어 패딩을 잡아낸 대현이 제 것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패딩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딘가 익숙했다.
“일어났어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