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래도 그날 밤 마주친 선우에게는 화낼 수 없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또 삽질한다, 또.”
“…….”
“원래도 3주 정도 잡고 온 거잖아. 그리고 나 사실 말은 안 했는데 어제 선배한테 전화 왔었거든. 졸작 도와달라고. 거절하긴 했는데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고.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보네.”
“다음에는 이런 일 없게…….”
“아, 그만하라고 좀! 야, 정대. 너도 괜찮지?”
“어.”
“봐봐. 정대도 괜찮다잖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 돌아온 그가 일정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둘은 더 있다 가도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애초에 펜션을 빌린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있겠다고 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도 그걸 아는 모양인지 미안하다는 이야기만 벌써 열 번은 들은 것 같았다.
물론 지후야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꾸 이상해지는 자신을 더는 견딜 필요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벌써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했다.
“아침 비행기라고?”
“응. 미룰까?”
“아니. 딱 좋아. 짐은 지금부터 싸면 되고.”
돌아갈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돌린 지후가 창밖의 바다를 응시했다. 그래도 이걸 더 못 보는 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지후는 술이 약했다. 데뷔가 결정된 날, 소속사 회식 자리에서 그걸 알았다. 그 이후로는 그런 자리를 피했고, 정말 술이 먹고 싶은 예외의 상황이 아닌 이상 찾은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의 친구도, 연예계에 들어와 사귄 친구도 없는 그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 있는 피치 못할 술자리만 주의하면 딱히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영민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든 그가 멈칫한 이유기도 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그의 머릿속에 살면서 몇 번 해보지 않은 호기로운 생각이 스쳤다. 설마 대현의 주량이 저보다 약하겠냐는 게 바로 그거였다.
“뭐 해. 안 마시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던 영민의 말은 그 호기로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렸다. 첫 모금만 해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잔을 먹었는지를 떠올려 보려고 해도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멍한 눈을 깜빡이던 지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대현도 술이 약한 거거나, 아니면 몸이 바뀌어도 주량은 그대로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라고.
“뭐야. 정대 취했음?”
“대현이 취했다고?”
“어. 그런가 봐. 정신을 못 차리네. 정대. 야. 대현아.”
지후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지러웠다. 앞에 선 선우와 영민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했다. 뭐라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이까지 딱딱 떨릴 정도로. 무의식중에 온기를 찾아 움직이던 지후가 멈칫했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였다.
“……대현아.”
“푸하하! 야, 가만히 있어봐. 찍어놔야지.”
“안영민.”
“아, 왜! 잠시만.”
“그만하고 와서 부축해.”
“오키. 어차피 다 찍어쓰.”
귀를 울리는 따가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 지후의 다른 쪽 팔을 잡아 일으켰다. 비틀비틀 일어난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누군가가 그를 다시 차가운 세상으로 밀어냈다. 짜증을 낸 그가 고집을 부리듯 방금 전까지 기대어 있던 방향으로 다시 몸을 움직였다.
“얘 많이 마셨어?”
“아니, 원래 마시는 거에 반도 안 마셨는데. 추워서 그런가. 야, 그냥 안아서 거실에 들여놔. 그게 낫겠다.”
“알았어. 적당히 마시고 있어라. 너까지 옮겨줄 생각 없으니까.”
“걱정할 걸 해라.”
한 손이 자유로워진다 싶더니 이내 몸이 들렸다. 뭐야. 흔들리기 시작한 몸을 느낀 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흔들렸던 몸이 곧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갑자기 공기가 따뜻하게 변했다. 동시에 코에 와 닿은 향을 느낀 지후가 슬쩍 미간을 풀었다. 포근한 향이었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했다.
“…….”
그러는 사이 어딘가로 내려앉고 있었다. 동시에 목과 머리 사이로 들어온 무언가에 지후가 편하게 목을 기댔다. 한결 숨쉬기가 편해진 느낌이었다. 몸의 떨림도 멎었다. 가슴께에 덮인 것을 향해 손을 주춤 움직이던 지후가 온기를 느끼고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으로 나간 행동이었지만, 곧바로 제 손아귀에 잡힌 따뜻함에 놀란 그가 손의 힘을 풀었다.
“자. 이불은 차지 말고.”
손을 잡아 내려주고는 허리께로 내려온 걸 다시 올려 덮어주는 손길에는 방금 그가 느꼈던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멈칫하던 지후가 곧 눈을 감았다. 희미하게나마 붙들고 있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지후가 다시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멍멍하던 귀가 뚫리고 무뎌졌던 감각이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고요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지후는 시야가 익숙해지고 나서야 거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 2시 부근을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한 그가 시선을 내렸다.
오른쪽에는 선우, 그리고 왼쪽에는 영민이 누워 있었다. 반듯하게 누운 선우와 팔과 다리를 사방으로 뻗고 잠든 영민을 살핀 그가 멈칫했다. 그들에게서 사이좋게 나는 알코올 향도 그랬지만, 어딘가 익숙한 향기를 따라 몸을 옮기던 그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그의 오른쪽에 누운 선우로부터 나는 향이었다. 아까전의 기억이 물밀 듯 몰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미친.”
돌았다, 이지후. 상황을 짚어가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온기를 찾아 파고들었던 것이 선우의 품이었던 듯했고, 자신을 들어 옮긴 것도 선우인 듯했다. 아, 미친. 머리를 짚던 그가 진동을 느끼고는 멈칫했다.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든 그가 어두운 방 안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화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서울 오면 이야기 좀 하자.>
발신자를 확인한 지후의 눈이 방금과는 다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대현이었다.
캐리어를 집 안에 들여놓던 지후가 멈칫했다. 현관에 보이는 익숙한 신발은 제 것이었다. 그가 한때 모으던 신발 중 하나였고,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 신발을 봤던 곳은 숙소였으니까. 익숙한 마크를 눈에 담던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3주 비운 집이라 치기에 집이 따뜻하다. 그가 머뭇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으로 자연스레 걸음이 향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이 잇새로 나오는 걸 느끼며 지후가 인기척을 냈다.
“어. 왔어?”
돌아보는 얼굴은 지후를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려 식기를 꺼내는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다. 둘의 몸이 바뀌는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이곳에서 매일 했을 법한 행동들이니까.
분주하게도 움직이는 등을 보며 자리에 앉은 지후가 물었다.
“뭐 하냐.”
“밥.”
“그러니까 그걸 왜 여기서……”
숙소에서 안 먹고.
지후가 멈칫했다. 이상하게도 뒷말은 뱉을 수 없었다. 새벽에 그가 보냈던 문자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늦은 시간에 보낸 문자에도 바로 답장이 왔던 걸 떠올리며 입을 다문 지후가 대현의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잠깐 멈칫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등이 다시 아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스토브 위의 냄비를 열어 국자로 퍼 담던 그가 몸을 돌려 식탁 위로 접시를 내려놨다.
“왜긴. 배고프니까.”
뒤늦게 돌아온 대답은 지후의 질문에 충실했다. 마치 질문의 표면에 깔린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왜 밥을 먹냐는 질문에만 한정된 답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제가 아는 정대현은 그런 의미를 못 알아챌 사람이 아니었다. 문자를 보고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그의 척추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너도 먹을래?”
“……아니.”
“그래.”
더 권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대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미리 퍼 놓은 밥과 국을 먹기 시작하는 하얀 얼굴에서 생각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십 년 넘게 보아온 제 얼굴임에도. 생판 모르는 사람 같이 느껴지는 낯선 얼굴을 한참이나 훑던 지후가 입술을 달싹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탁 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둘 사이에 있었던 가장 긴 침묵이 아닐까. 그걸 느끼면서도 지후는 쉽사리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이지후.”
대현이 입을 연 건 그가 먹고 있던 미역국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갈 곳 없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던 지후가 고개를 들어 대현을 응시했다. 대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늘 말을 할 때 눈을 맞추는 그답지 않은 행동에 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소원 나무 있잖아.”
“…….”
“혹시 그 이후에 알아봤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그는 남은 밥을 마저 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후가 한 박자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잠시 멈칫한 대현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짧은 사이에 스스로 납득을 마친 모양이었다.
“하긴. 계속 제주도에 있었지, 너.”
또 침묵이 이어졌다. 지후는 대현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입안에서 차마 뱉을 수 없는 것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선뜩 닿아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