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숙소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데려다주겠다고 꽥꽥대던 얼굴은 타이밍 좋게 그를 찾으러 나온 지인에게 붙들려 사라졌다. 손을 흔들어주자 그가 버둥대는 게 인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포박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모자를 한 번 더 눌러쓴 대현이 향한 곳은 집이었다. 숙소가 아닌 그의 집. 예준과 같이 있던 동안에 옆에 내려두었던 노트를 다시 손에 쥔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옅은 갈색 눈이 어둠 속에 숨은 빛들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둑판처럼 소등 여부에 따라 까맣고 하얗게 물들어 있는 집들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박혔다.
불은 꺼져 있었다. 고민하는 얼굴을 하기를 잠시 결국 대현은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
지후는 역시 예상대로 자지 않고 있었다. 모든 불이 꺼진 집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건 TV뿐이었다. TV 앞의 둥글게 만 등을 지켜보던 대현이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천천히 일으키던 지후가 대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행동을 멈춘다. 그도 잠깐, 몸 위의 담요를 옆으로 치우는 얼굴은 덤덤했다. 누워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반응이었다.
잠기운이 전혀 묻지 않은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약통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 위로 TV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스쳐 지나갔다.
몸이 바뀌고 나서 대현이 집에서 숙소로 가져간 것은 여러 개였다. 핸드폰이야 지후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바꾸는 게 위험할 것 같아 바꾸지 못했다지만, 지갑을 비롯해 카메라, 속옷을 비롯한 옷가지까지 올 때마다 하나둘씩 가져다 날랐다. 하지만 지후는 달랐다. 숙소에서 가져올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구는 그를 보다 못한 대현이 말만 하면 대신 가져다주겠다고 제안까지 했지만, 입을 꾹 다문 얼굴은 한참 뒤에야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약통을 가져다 줄 수 있겠냐 물었을 뿐이었다.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대현은 약통에 든 것이 수면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한때 먹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 넘게 잠을 자지 못했을 때였다.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 온 영민과 선우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선우의 손에 끌려 방문한 선우 어머니의 진료실에서 대현은 작은 약통을 받았다. 주의사항을 꼼꼼히 일러주는 그녀는 선우만큼이나 다정했다. 괜찮아, 대현아. 다정한 눈빛을 가진 그녀가 대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렇게 신경을 써준 사람들 덕분인지 대현의 불면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번 꺼내지도 않았던 통은 그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끝내 다른 잡동사니들처럼 어딘가로 처박혔다.
그렇지만 지후는……? 그에게는 불면의 세계에서 나올 수 있게 손을 뻗어줄 사람이 있었을까.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멤버들, 그리고 플러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캐묻지 않은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후가 부러 약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말도 곧잘 했고, 때로는 욕도 잘했다. 그렇지만 대현은 지후를 볼 때면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찌르면 피 안 방울 안 내줄 것 같이 쌩쌩 찬바람이 부는 태도를 지닌 그는 모순적이게도 산들바람에도 부서져 버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대현은 자꾸 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왔냐.”
“응. 내가 깨운 거야?”
대답 없이 충혈된 눈을 두어 번 비비는 얼굴이 거칠하다. 말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뒷모습은 마치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대현이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손에 든 가벼운 노트가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맨투맨 하나만 입고 선 어깨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더 말라 있는 것만 같았다. 마른 등에서 어렵게 시선을 뗀 대현이 지후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
“커피 좀 줄여라.”
잠도 못 자면서. 뒤의 말은 굳이 뱉지 않았다. 잠시 멈칫했던 등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던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따르는 그를 보면서 대현은 오늘도 그의 불면 증상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지후가 그제야 대현이 앉은 식탁으로 다가온다. 툭 내려놓은 커피잔을 바라보던 대현의 위로 무뚝뚝한, 조금은 힘없는 음성이 들려온다.
“문자 봤어?”
“……응.”
지후는 어제 소원나무의 이전을 알리는 안내문 밑에 적혀 있던 재단에 방문했었다. 나무가 정확히 아프리카 어디에 옮겨졌다는 건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인지 지후를 앞에 두고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하던 직원은 결국 정확한 주소를 알게 되면 바로 연락드리겠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 일을 알리면서 제 연락처를 적어두고 왔으니 걱정 말라는 말이 끝에 붙어 있던 문자를 떠올린 대현이 머그잔을 꼭 쥐었다.
“근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처럼 그의 손은 컵 가장자리를 따라 이리저리 맴돌기만 했다. 은호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멤버들의 얼굴이 커피 위의 하얀 김처럼 무럭무럭 대현을 타고 올랐다. 대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대현이 앉으며 무릎 위로 올려두었던 노트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지후의 시선이 딸려 왔다. 침을 삼킨 대현이 입을 뗐다.
“이거.”
“…….”
“네 거 맞지.”
오는 길에도 수없이 고민했다. 이 사실을 지후에게 말해야 할지. 말한다면 또 어떤 방식으로 전해야 할지. 은호가 작곡 노트를 훔쳐간 거에 그치지 않고, 그걸 프로듀서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걸 알면 그는 또 얼마나 배신감에 휩싸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창백해진 지후의 얼굴이 벌써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은 그냥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지후가 알 권리가 있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피곤한 몸, 지쳐서 숨이 죽어버린 듯한 마음을 안고도 굳이 숙소가 아닌 지후를 찾아오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 게 가장 덜 상처를 줄 수 있을지 시나리오까지 생각해 봤지만 막상 닥치니 뱉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하기 전 숨을 크게 들이쉰 대현이 제게 날아든 날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게…… 왜 너한테 있어?”
노트를 든 지후의 얼굴은 대현이 그러리라 예상했던 것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다른 게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게 무슨…….”
대현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지후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너한테 있냐니. 잃어버렸던 자신의 노트를 찾은 사람의 반응 같지 않았다. 질문은 이게 왜 너한테 있냐가 아닌, 어디서 찾았냐는 말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근데 방금 지후는 분명 왜 노트가 대현에게 있냐고 물었다. 마치 다른 곳에 있어야 했던 노트가 왜 네게 넘어왔냐는 것처럼.
대현의 표정이 굳었다. 딱 봐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은호에게 지후가 제 노트를 줬을 리 없으니, 은호가 훔친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와 벽 사이 틈이나, 옷장 맨 밑 서랍 등의 은밀한 장소에 노트를 숨겼던 은호의 행동은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특히 노트를 봤냐고 떨리는 눈으로 묻던 그의 표정까지 떠올리니 오히려 다른 가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충혈된 지후의 눈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던 대현의 입에서 느릿하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묻는 그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너…… 알았어?”
이지후가 유은호가 노트를 가져간 걸 알고 있었다면?
지후는 대현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꺾어 대현의 뒤를 응시했다. 성마른 옆모습을 바라보던 대현이 멍하니 지후의 손에 잡힌 노트로 시선을 떨궜다. 그 와중에도 노트를 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얗게 불거지는 손가락 끝은 마치 지후가 입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감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잔뜩 움츠려져 있었다. 오전에 보았던 은호가 그 위로 겹쳐졌다. 그도 저렇게 노트를 꽉 쥐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오는 길에 그의 머릿속에 잔뜩 생겨났던 시나리오들 중에는 지후가 은호가 자신의 노트를 가져간 걸 안다는 가정은 포함된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일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지후, 너…….”
“상관없어.”
“……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할지나 알고 상관없다고 하는 거야?”
“어. 그러니까 그만해.”
대현이 겨우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마치 벽 같이 느껴지는 지후의 단호한 반응이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지후가 거실로 나가 버리는 걸 본 대현이 급히 따라 일어섰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