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잊고 있던 식이 떠오른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지후가 있는 병실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춘 그가 돌아보는 영민과 선우에게 잠시 전화를 하고 오겠다며 뒤돌았다. 핸드폰을 꼭 붙든 대현은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어야 했다.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 수가 있지.
정신을 놓을 만큼 놀랄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식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이 신기했다. 더 미치겠는 건 자신이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지후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미치겠네.
눈을 가리며 신음하던 대현이 그 모든 것을 마주할 용기를 내 전화를 건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어찌 됐든 식과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식이 전화를 받았다.
“…….”
[…….]
전화를 받은 그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면서도 대현은 통화가 제대로 연결된 건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통화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망설이던 대현이 결국 식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식아.”
[네, 형.]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식의 대답은 금방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처럼 차분한 목소리에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핸드폰을 쥔 손에서 조금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바지에 닦은 대현이 옆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네 차 타고 온 건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는 잘 기억이 안 나. 미안해.”
[아…… 괜찮아요, 형.]
“당황했지. 미안해. 너한테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형.]
“응?”
[그분은…… 괜찮으세요?]
“어……?”
[다치신 분이요.]
대현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곧 아, 하는 작은 탄성을 내놓았다. 병원에 데려다준 건 그였으니 당연히 누가 아파서 온 거라고 생각했겠지. 거기다 영화관에서 전화를 받고 덜덜 떠는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니 상황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아. 응. 괜찮아.”
[……다행이네요.]
“아, 맞다. 근데 너 어디야? 나 데려다주고 바로 간 거지?
질문하긴 했지만 갔으리라고 생각해서 나온 확인 차 물음에 가까웠다. 시계는 어느덧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화 시작 시간이 9시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보지도 못한 영화 시간을 떠올려 보던 대현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몸이 무거웠다. 자꾸 감길 것 같은 눈꺼풀을 힘주어 붙들고 있는 그는 잔뜩 지친 상태였다.
식의 답을 기다렸지만,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감에 불을 붙일 만한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대현이 의자에 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김 식? 너 설마 안 갔어?”
[…….]
“야. 지금이 몇 신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물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식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발걸음은 무작정 엘리베이터 쪽을 향했다. 버튼을 누르고 계기판을 초조한 눈으로 응시하던 대현이 곧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디야? 로비야?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탔으니까 내려갈게.”
[……지금요?]
“어. 거기 그대로 있어.”
전화를 끊은 대현이 벽에 머리를 대고 기댔다. 차가운 벽은 머리를 식히는 것 대신 그의 몸에 오한이 들게 만들었다. 마치 지금 그를 둘러싼 상황들처럼.
식은 정말 로비에 있었다. 검은색 코트, 검은색 모자 등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그는 그럼에도 불이 한두 개만 켜진 로비에서조차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 옆 붙은 의자의 끝에 앉아 있던 그가 대현의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을 바라보던 대현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왜 안 가고 있었어.”
“…….”
“난 당연히 갔을 거라 생각해서…….”
“…….”
“미안해. 진짜 몰랐어.”
말을 고른 보람이 없게 미안함과 자책감이 섞인 말이 뒤죽박죽 엉망으로 튀어나갔다. 식은 자리에 일어서지 않은 채로 아무 말 없이 대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대현이 아닌 제 무릎 위의 작은 인형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제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대현이 횡설수설 이어나가던 말을 멈췄다.
“…….”
“…….”
식이 들고 있는 건 아까 대현이 뽑아준 인형이었다.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는 고양이 인형을 쥔 식은 인형의 배 부분을 가만히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를 따라 눈을 굴리던 대현이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갈게요, 형.”
“어? 아…… 응. 얼른 들어가. 차는 주차장에 대놨어?”
“네.”
식의 눈빛이 대현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대현이 멈칫했다.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뒤 돈 뒷모습은 입구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던 대현이 어딘가 어색한 기분으로 식과 반대편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형.”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입구까지 얼마 남기지 않고 멈춰 선 식이 그에게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방금 전 한 뼘을 남기고 섰던 것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다. 그를 느낀 대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식이 한 걸음 더 다가와 소용은 없었다. 더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지도 못한 대현은 결국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어? 뭐가? 아…… 다친 사람? 내가 말하지 않았나? 괜찮대.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뇨. 그분 말고 형이요.”
“…….”
“제 앞에 있는…… 형.”
대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식의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식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식이 처음 보는 눈빛을 하고 있어서인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눈앞의 식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그의 그런 눈빛은 지후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그는 마치, 이지후가 아니라, 지후의 뒤에 있는 정대현을 보려 애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러기를 바라서 마음대로 상황을 해석한 걸지도 모른다. 입술을 작게 깨문 대현이 침을 삼키고는 늦게나마 대답했다.
“나야…… 괜찮지. 근데 그건 왜?”
“…….”
“식아. 너…….”
“아니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식이 말을 끊었다. 그가 대현에 가까이 했던 몸을 뒤로 뺐다. 두 걸음 물러선 그 덕에 둘 사이에 거리가 생겨났다. 그를 바라보는 식에게서는 아까와 같은 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현이 멍하게 그를 응시했다.
“형이 괜찮으신 거면 됐어요. 저도 괜찮아요.”
“…….”
“갈게요. 들어가세요.”
그의 마지막 말은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누군가에게 다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함을 느낀 대현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식이 뒤도는 게 더 빨랐다. 아까처럼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은 대현이 따라갈 틈도 남기지 않고 병원 로비에서 사라졌다. 따라가려던 대현은 주먹을 꼭 쥔 채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형이 괜찮으신 거면…… 됐어요. 저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지 알려주지 않은 사람은 떠나고, 그 사람의 말만이 귀에 남아 반복됐다.
* * *
지후의 감각을 가장 먼저 깨운 건 소독 향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그가 미간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하얀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당황한 지후가 시선을 내렸다. 한쪽 다리가 무거운 붕대에 싸여 있었다.
그제야 떠오르는 것들에 지후가 작게 신음했다. 정면으로 다가오던 오토바이의 불빛이 떠올랐다. 어딘가 붕 뜨는 것 같았던 낯선 느낌도 함께 떠올린 그가 다시 몸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붕대로 감긴 다리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불편함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제 몸이었으면 몰라도 이건 대현의 몸이니까 절대 심하게 다쳐서는 안 됐다.
“……잘하는 짓이다.”
대충 상처를 확인한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자조하는 일이었다. 익숙하게 스스로를 비웃은 그가 곧 고개를 돌렸다. 몸을 감싼 병원복을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곳은 병원이 맞는 듯했다. 온통 하얀 곳이었다. 특히나 제가 있는 지금 이 병실은 더 했다. 혼자 쓰기에 지나치게 넓은 구석이 있는 이곳은 소파부터 시작해 보호자 침대, 그리고 화장실까지 딸린 1인실인 듯했다.
또 김선우 짓인가. 인상을 구기던 지후가 윗몸만이라도 일으키기 위해 낑낑댔다. 붕대 때문인지 무거워서 균형을 잡는 게 힘들었다. 몇 번의 시도가 지나고 나서야 조금 몸을 일으킨 그가 옆에 놓인 목발을 불만스럽게 쳐다볼 때였다.
“이지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확인한 지후의 눈이 커졌다.
“깼구나. 괜찮아? 머리는 안 아파?”
성큼성큼 다가온 대현이 질문을 쏟아부었다. 동시에 손을 뻗어 머리를 짚는 손이 차가웠다. 당황한 얼굴로도 이마를 내어주던 지후가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건 그가 물어본 부위 모두 아프지 않다고 몇 번이나 대답을 하고 나서였다. 그제야 조금 진정한 표정이 되어 옆의 의자에 앉는 대현을 본 지후가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눈 뜨자 본 게 그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