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89화 (89/119)

89화

“정대현.”

“응. 왜?”

“혹시 나 어제 발견됐을 때…… 옆에 종이봉투는 없었어?”

“못 본 것 같은데. 왜? 중요한 거야?”

“……그런 건 아닌데.”

“찾아볼게. 뭐 들어 있는 건데?”

“그냥…… 책 몇 권.”

“무슨 책?”

대현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퇴원 관련 서류를 처리하고 돌아와 지후가 먹은 아침을 치우고 이제는 침대 정리까지 하고 있었다. 제가 하겠다고 할 때마다 화난 얼굴을 하기에 더는 말릴 수도 없었다. 움직이지 말라며 대현이 앉혀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지후가 옆의 목발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이 이야기를 해봤자 대현은 또 속상해하기만 할 거다.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린 지후가 시선을 내렸다. 쓰레기통에는 어젯밤 병실 안 의자 위에 있었던 선우의 담뱃갑이 들어 있었다. 지후가 발견했고, 대현이 버린 것이기도 했다.

‘김선우 왔다 갔었어?’

‘…….’

‘이거 걔가 피는 담배 같은데.’

‘……이지후.’

‘어.’

‘애들…… 알았어. 내가 너 소식 듣고 제정신 아니었거든. 병실 들어오자마자 네 이름부터 불렀고.’

‘…….’

‘결국 얘기했어. 어차피 너까지 이렇게 다친 상황에서 감춰봤자 의미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우리 몸도…… 곧 다시 바뀔 거니까.’

‘……화났어?’

‘어?’

‘걔들.’

‘……괜찮아. 걱정하지 마. 화났다 해도 내 잘못 때문에 화난 거니까.’

대현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지후는 그럴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건 대현의 눈물의 영향도 있었지만, 불쑥불쑥 천장에 나타나는 영민과 선우의 얼굴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이라도 화날 거였다. 친구였다고 생각해서 잘해준 건데,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제 친구의 행세를 하며 그걸 다 받아먹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다가도 가끔 섭섭함이 피어올랐다. 자신이 대현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들을 자꾸 찾는 자신이 이상했다. 꼴값한다. 자조한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부축해 줄까?”

“됐어.”

앞에 선 대현을 본 지후가 몸을 일으켰다. 하루 만에 익숙해진 목발을 짚어 옆구리에 끼자 자연스레 대현의 시선이 따라왔다. 가라앉은 눈으로 입술을 깨무는 그를 본 지후가 그의 주의를 환기했다.

“택시 타고 가는 거지?”

“응. 밑에 불러놨어.”

다행히도 먹혀들었는지 쓸쓸한 얼굴을 지우고 그를 앞서 나가 문을 열고 기다리는 대현을 본 지후가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발을 옮길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부러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던 지후는 얼른 나을 거라고 다짐했다. 대현이 이 수고스러운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후가 눈을 뜬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오른쪽에 자리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지후가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어둠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몸을 일으키던 그가 침대 옆 탁자에 기대어진 목발을 잡았다. 우연하게 시선이 스친 탁자 위에는 아까 병원에서 받아온 약 봉투가 있었다.

침대에 앉아 대현이 내민 약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그 후 바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마 약 안에 수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수면제를 달고 사는 그라 한 알은 거의 효과가 없다 봐도 무방했는데, 아마도 어제 사고로 인해 쌓인 몸의 피로가 그 내성을 이길 정도였던 모양이다.

얼마나 잔 걸까.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목발을 짚고 서던 지후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라는 말에도 있겠다고 우기던 대현이 아직 있을지 궁금했다. 문고리에 손을 잡고 돌리던 그가 멈칫했다.

“장난해?”

“김선우.”

조금 열린 문 틈 사이로 날카로운 음성들이 흘러 들어왔다. 낯익은 음성들이기도 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후는 그 사이로 작게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피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대현의 방과 마주 보는 곳에 낯익은 음성의 주인들이 있었다. 불이 꺼진 집, 그들이 서 있는 부엌의 천장에 달린 등에서 나오는 빛이 집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후가 보는 쪽에서 등만 보이는 사람은 대현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엔…….

“야. 김선우. 화난 건 알겠는데 말이 심하잖아. 앉아. 앉아서 얘기해.”

“놔. 야, 정대현.”

선우, 그리고 영민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선우의 팔을 잡은 영민이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나 어제 너한테 뭐라 안 했어.”

“……알아.”

“한 달 반도 넘게 내 친구 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 솔직히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냐. 그렇지만 믿었어. 왜냐면 너 맞으니까. 우리만 아는 이야기 네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아는 정대현은 다른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 옮길 사람 아니고, 그래서 믿었어. 네가 그 동안 이거 우리한테 얘기할 생각조차 안 했던 거? 그것도 이해하려 했어.”

“…….”

“근데 뭐? 몸이 나을 때까지 기다려? 너 장난해?”

“선우야.”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할 건데? 말해봐.”

“…….”

“안 나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선우가 저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대현을 내려다보는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또한 처음 보는 거였다. 언젠가 영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선우 저 새끼야말로 진짜 무서운 새끼야. 넌 모르지, 정대? 저 새끼 너한테는 화 잘 안 내니까.’

‘……뭐. 때리냐?’

‘때리는 게 낫지. 어휴. 겪어보면 알아. 아니다. 웬만하면 겪을 일을 만들지 마라.’

그의 화난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영민이 겁을 냈는지 알 것 같았다. 선우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대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에서는 듣는 것만으로도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듣고 있는 지후의 마음까지 서걱서걱 썰리는 것 같았다.

“너…… 돌아갈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적당히 하라고, 김선우. 후회할 짓 하지 마.”

“안영민. 적당히 하면 저 새끼가 지 마음 솔직하게 얘기할 것 같아?”

“…….”

“봐봐. 이렇게 말하는데도 말 못 하고 있는 거.”

목발을 짚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문 사이로 살짝 내민 얼굴을 다시 문 뒤로 숨긴 지후가  뒷걸음질쳤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상처도 끌어안기 어려워 늘 망설이는 건 제 쪽이었고, 대현은 그런 자신을 받아주고 있다고만 생각했으니까. 한 번도 대현도 저처럼…… 돌아가는 것을 미루고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현은 거기다 직접 자신에게 소원나무에 대해 알아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렇지만 선우의 질문은, 그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대현은 지후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있었던 맹점들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

“…….”

“왜냐면. 어제도, 오늘도. 네 얼굴을 아무리 봐도 모르겠거든.”

“……선우야.”

“내가 아는 정대현이 안 보인다고.”

“…….”

“몸 바뀌는 거. 그래. 일어날 수 있다 쳐. 근데 내가 아는 정대현은 그런 상황에 맞춰서 어쩔 수 없다고 손 놓고 있을 사람은 아니라고.”

“…….”

“나을 때까지만? 할 게 남아서?”

“…….”

“웃기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너 뭐 하자는 거야, 대체.”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영민도 이번에는 선우를 말리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도 날을 세우던 모두가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엌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이 깼다는 걸,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후는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숨을 내쉬는 순간 모두가 그걸 알아채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영민과 선우처럼 대현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부정하지 못했다.

“뭘 솔직히 이야기 할까.”

대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의 크기로 들려왔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솔직히 얘기하면 되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안 돌아갈 수 있어?”

“정대, 너…….”

“나라고 모르는 거 아냐. 내가 병신같이 망설이는 거. 이런 고민하는 거 자체도 웃긴 거 알아. 너네 눈에도 보이는 걸, 당사자인 내가 몰랐다고 생각해?”

“…….”

“근데…….”

“…….”

“근데 못 하겠는 걸 어떡해. 해야 되는데. 할 건데! 근데 그러다가도 자꾸만 이렇게 병신같이…… 이러고 있는 걸 어떡하냐고.”

선우에 맞서기라도 할 기세로 이어지던 말은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그 대신 울음기가 섞였다. 그걸 깨달은 건 지후뿐만이 아닌 듯, 선우와 영민은 침묵하고 있었다. 지후는 이제 문에 뒤로 젖힌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너네한테는 정말…… 미안해. 말 못한 것도 미안해. 근데 그때는 이럴 줄 몰랐어.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럴 자신도 있었어. 잠시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 안 한 거야.”

“…….”

“근데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니까.”

“…….”

“이젠 하려고 해도 못 하겠어. 아는데…… 머리로는 분명히 아는데…… 안 되겠다고.”

“…….”

“모르는 게 아니야.”

지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르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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