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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95화 (95/119)

95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로 선 그는 위태위태해 보였다. 다가선 제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그와 눈을 맞추려 했지만 핸드폰에 매달리고 있는 그 덕분에 쉽지 않았다. 그의 입을 가르고 나온 뜬금없는 이름보다 식을 더 흔든 건 그런 그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정신없이 흔드는 그에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잔상들이 그 얼굴 위로 겹쳐졌다.

* * *

“유은호. 적당히 해.”

“뭘?”

“지금 네가 하는 거 다.”

“왜?”

“…….”

“솔직히 너 관심 없잖아. 왜 갑자기 지랄이냐고.”

“왜인지 궁금해?”

“어. 말해봐.”

“거슬리거든, 너.”

“…….”

“관심 없는데도 한 마디 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거슬린다고. 알아들어?”

“너…….”

“작작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마주하는 눈에 독기가 남아 있음에도 그가 더 반박하지 못하는 건 그가 여태껏 멤버들 중 유일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은 이유와 같으리라. 사무실에서 마주쳤던 영악한 얼굴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히던 그가 문을 닫고 복도에 나오다 말고 멈칫했다.

흔들리는 눈을 본 식이 피곤한 표정을 했다. 들었나 보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특히 눈앞의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이상. 별 말 없이 걸음을 옮기려던 식은 곧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왜…….”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그 누군가가 당신이 될 순 없을 것 같았거든. 뒷말을 얼굴에 대고 하지 않은 건 그에게 남은 마지막 동정심 때문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팀을 제대로 이끌지도, 마치 모든 일을 망치겠다는 기세로 거슬리게 구는 새끼 하나 처리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더 나누어줄 인내심도, 아량도 없다. 생각을 마친 식이 시계를 흘끗 응시했다. 리허설까지는한 시간 삼십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 * *

마치 그동안 못한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는 양 구는 그 덕에 잊고 있었다. 눈앞의 지후가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는지. 마치 누군가가 그의 앞에 새로운 사진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것처럼 내려다본 사진은 제가 알던 얼굴과 같았다. 마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부축해 나와 차에 태우고, 그가 중얼거리는 병원 이름을 듣고 그 쪽으로 차를 몰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보았던 지후의 얼굴만이 맴돌 뿐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물음이 불쑥 떠올랐다.

동정과 사랑은 다르다. 그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은 언제부터 한쪽에 기울기 시작했나.

“…….”

물음에 대한 답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던 순간에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병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튀어나간 지후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따라온 길이었다. 조금 열린 문 사이, 망설이던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들린 말들은 그가 알고 있던, 아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손쉽게 뒤집었다.

“언제부터냐고 물었잖아, 정대현.”

“……이제 두 달 정도 됐어.”

“그럼 넌 두 달 동안 이걸 우리한테 말할 생각이 없었어?”

“안영민, 그만해.”

“너, 씨발…… 너 내 친구 맞아? 정말 정대현 맞냐고.”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식의 머릿속에는 지후의, 아니 자신이 지후가 아니라고 말한 다른 사람이 방금 뱉어낸 말만이 울리고 있었다. 두 달.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가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와 겹쳤다.

식이 문에서 물러섰다. 옆 벽에 기대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그러면서도 그와 함께한 시간을 반추했다. 촬영이 늦은 자신을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던 그, 아픈 자신을 밤새 간호하던 그, 괜찮다고 가슴을 두드려 주던 그, 미팅에 간다던 자신에게 떨지 말라며 다정한 눈빛을 하던 그, 옷에 묻은 먼지를 떼주던 그, 웃던 그. 그러니까 그 모든 건…….

“…….”

그가 이지후가 아니어서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국 식은 더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생경하게 다가오는 추억들이 마치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수없이 지나다니던 로비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한산해졌다. 누군가 얼굴을 알아볼까 모자를 꾹 눌러쓰면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아서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아줬으면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될 것만 같았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행위는 잊고 있던 핸드폰에서 울린 진동으로 인해 끝이 났다. 당황한 목소리는 지금 내려가겠다고 했다. 아니라고, 어차피 갈 생각이었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치 누군가 그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처럼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왜 안 가고 있었어.”

“…….”

“난 당연히 갔을 거라 생각해서…….”

“…….”

“미안해. 진짜 몰랐어.”

앞에 선 그가 횡설수설 뱉어내는 말들은 귀에 닿기도 전에 스러졌다. 식은 차마 그를 마주보지 못했다. 그가 몇 시간 전에 뽑아준 인형이 그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결국 식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른 채 뒤돌아 걷던 그가 로비를 가로질러 입구를 한 걸음 남겼을 때였다. 의무처럼 눈앞의 것들을 훑던 그의 눈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걸린 건.

‘좋겠다. 여기는 별이 없어.’

‘…….’

‘정말 하나도 없네…….’

별로 꽉 찬 하늘을 도저히 혼자 볼 수 없었던 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떠오른 얼굴은 그밖에 없었다. 통화라곤 해본 적 없던 사이,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대화 사이의 틈을 느끼면서도 고집스럽게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식은 그 순간 몇 시간째 올려다본 하늘의 별이 그에게만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딘가 억울하게 느껴졌다. 없다고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어딘가 쓸쓸해 보여서 더 그랬다. 처음으로 생각했다. ‘지금 그의 옆에 있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별이 없는 하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까만 하늘에 대신 다른 생각을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이 그의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생각 중에 그에게 올곧게 전할 수 있던 것은 몇 되지 않았다. 결국 식은 그 모든 생각들 중 가장 무난한 것을 골라야 했다.

‘형. 나중에…… 같이 오실래요? 여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라도 그의 쓸쓸함을 덮어줄 수 있다면. 잠시라도 잊게 만들 수 있다면 만족했다.

“…….”

왜 하필 지금 그때의 하늘이 떠오르는 건지. 오늘도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그때 자신과 통화를 하던 그가 보고 있었을 하늘처럼. 불투명한 병원의 유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흐리게 빛나는 달을 잠시 응시하던 식은 뒤돌 수밖에 없었다.

마주보는 얼굴은 이지후가 맞다.

“괜찮아요?”

그러나 아니다. 자신은 그에게 밤하늘을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아뇨. 그분 말고 형이요.”

“…….”

“제 앞에 있는…… 형.”

식은 이제 알 것도 같았다. 왜 자신이 계속 병원 로비에 앉아 있었는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고, 걱정하고 있었는지.

“나야…… 괜찮지. 근데 그건 왜?”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원래의 속도를 되찾은 심장은 여태껏 누굴 향해 뛰고 있었던 건지.

자각한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모든 것들은 눈앞의 그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까 들었던 대로라면 해체를 막기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견뎌왔다던 그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해왔던 건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해체를 막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지금 멍멍한 머리로도 바라는 것처럼, 저와 같은 마음으로 그랬던 건지.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깨달음이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형이 괜찮으신 거면…… 됐어요.”

제 마음은 줄곧 이 얼굴 뒤의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옅은 갈색 눈이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본 순간부터, 어떤 눈빛인지 읽어낼 수 없는 지금까지도.

“저도 괜찮아요.”

그러니 당신만 괜찮다면 난 상관없어.

경계에 선 마음은 이제 완전히 기울었다. 이제는 어느 쪽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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