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97화 (97/119)

97화

“야, 너 괜찮냐? 표정이…….”

“아니에요.”

“어쨌든…… 고맙다. 그래도 들으니까 좀 낫네. 모르던 것보다야 훨씬. 근데 너도 이지후 언제 다시 오는 건지는 모르지? 문자에서도 며칠 걸릴 것 같다고만 이야기를 해서.”

“……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털고 일어서는 얼굴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식이 방을 나가려는 우람을 붙잡았다.

“형.”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면 제 의지로 몇 번 불러본 적 없던 호칭이었다. 그걸 느낀 건 우람도 마찬가지인 듯 돌아보는 얼굴은 놀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저 업어서 병원 데려간 거. 형이셨죠?”

“…….”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서요.”

“……빨리도 하네.”

한참을 늦은 감사 인사였지만, 뱉고 나서야 편해지는 마음은,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부정하지 않은 채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뒷모습은 방금 뱉은 말을 후회하게 하기보다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라서. 식은 그가 한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도는 와중에도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람에게 들은 것처럼 정말로 은호가 회사를 옮길 거라는 소식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던 듯했다. 은호가 지내는 곳을 묻는 자신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하던 진수를 본 식은 우람의 우려가 어쩌면 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사고가 아니었다면 지후가 이 문제로 마음앓이를 하고 말았을 거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했다.

“오랜만이네.”

자신이 그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어지던 고민에 대한 답은 우람의 말에 놀랄 만큼 빠르게 나타났다.

“비켜.”

“그럴게. 그 대신.”

“…….”

“같이 들어가. 할 이야기도 있고.”

제가 알던 유은호의 모습과 한참은 동 떨어진 눈앞의 사내는 그럼에도 눈만은 살아 있었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을 마주한 식이 부러 눈을 휘어 보였다. 광고주들이 좋아하는 웃음.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미소라 평가 받는 미소였지만 안타깝게도 앞의 남자한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를 무시하고 문을 여는 옆얼굴을 바라보던 식이 멈칫했다. 그가 꾹꾹 누르는 번호들이 익숙했다. 0831.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묘해진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제 발부터 들이미는 일을 잊지 않았다.

“돌았냐, 너?”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던 식은 평소 표정을 숨기기 위해 짓곤 하던 옅은 미소를 완전히 걷어냈다.

“아니. 근데 안 들여보내 주면 뭘 할지는 나도 장담 못 해.”

잠깐이나마 이어진 눈싸움의 승자는 식이었다. 시선을 돌린 은호가 욕을 짓씹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무시하기로 한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가던 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옷가지부터 시작해 먹고 치우지 않은 음식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린 거실을 훑어본 식의 시선이 부엌에 서서 맥주를 꺼내고 있는 은호에게 잠시 가 닿았다. 까칠하게 수염이 올라온 얼굴은 아무리 제가 유은호랑 친하지 않다 해도 평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집은 또 어떻고.

발이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며 거실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텔레비전에 닿았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창문을 막고 있는 커튼 덕에 집은 낮인데도 깜깜했다. 유일하게 빛을 내는 텔레비전 안에는 그가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이 얼마 전 예스와 함께 촬영한 리얼리티. 누군가가 그리웠던 밤, 그도 촬영장에서 찾아본 적이 있던 클립이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찾을 거 있으면 찾고, 좋은 말할 때 가라. 너랑 놀아줄 생각 없으니까.”

때마침 거실로 나온 은호가 손 안에 든 맥주를 들이켜며 이죽거렸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야 한층 여유로워진 얼굴은 식을 향해 비아냥대고 있었다. 그러나 식은 그의 이죽거림을 받아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 안 사람에 박혀 있었으므로. 누군가 일부러 멈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그가 그리워하던 얼굴이었으며.

“……하.”

앞에 선 은호가 그리워해서는 안 되는 얼굴이었으므로.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모두에게 한결같게 싸가지 없는 유은호가 유독 변덕스럽게 구는 대상이 지후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이면에 이런 마음이 숨어 있을지는 몰랐다. 비밀번호부터 시작해서 그의 웃는 얼굴이 크게 떠 있는 텔레비전 화면. 갑작스러운 회사 이적 통보와 숙소에 들어오지 않는 은호까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후 형 보고 있었나 보네.”

확인하기 위해 뱉은 말에 빈정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유은호의 시선이 그에게 박힌다. 흔들리기 시작한 충혈된 눈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식은 좀 허무해졌다. 생각은 자연스레 그와 보내온 삼 년의 세월에 멎었다.

“어때. 웃는 거 보니까.”

물론 네가 아는 그가 웃는 건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괴롭혔던 사람이 웃는 걸 보니까 어때?

“……꺼져.”

“안 그래도 그러려 했어.”

그룹을 해체하는 길로 이끌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처럼 굴던 그였다. 티 안 날 정도로 사람을 쑤시는 그 못된 성정은 웬만해서는 끼어들 생각이 없는 자신마저도 방관하기 힘들게 할 때가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소속사 이적 타이밍이 의심스러웠다.

지후가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한 영상의 반응이나, 예스 리얼리티에 출연한 이후 플러그 관련 대중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변해가는 건 식도 느끼고 있었다. 플러그라는 그룹을 모르는 경우도 있던 광고주들도 최근엔 미팅 때마다 먼저 플러그 이름을 꺼내곤 했다. 재계약 기사가 뜬 것도 그런 대중들의 반응을 재빠르게 눈치챈 기자들이 미끼를 던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위험했다. 재계약이 유보된 상황에서 한 명의 소속사 이적 사실이 알려지면 현재의 호의적인 반응이 뒤집히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불안한 동시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게 독이 될 수 있는 건 은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그는 티 안 나는 방법으로 차근차근 그룹을 좀먹어온 것이리라. 삼 년을 참은 그가 몇 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행동에 나선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유은호가 무슨 꿍꿍이로 이 짓을 하는 건지. 방금 눈으로 확인한 모든 것들은 그에게 색다른 정답지를 내놓았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게 만든 사람이 제가 애초에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를 제공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게 우스웠다. 어쨌든 그 이유가 사적인 것임을 알았고,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음을 안 이상 이곳에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문으로 걸어가던 식이 뒤를 돌아봤다.

“이건 진심인데, 잘 생각했어.”

움찔하는 뒷모습은 그럼에도 뒤돌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지도 모르는 뒷모습을 보며 식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점에 동의해.”

드디어 은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식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여전히 지후의 웃는 얼굴이 한 가득 떠 있는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한 식이 입 안에 남은 말을 마저 뱉었다.

“그러니까…….”

“…….”

“다시는 나타나지 마. 우리 앞에.”

‘우리’란 건 지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지후의 몸에 들어온 그를 말하는 것일 수도, 멤버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식 자신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확실한 건 그 ‘우리’ 안에 은호는 없었다. 그의 후회가, 절망이, 눈물이 한참 전에 되돌아봐야 했을 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는 그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는 늦었고, 그래서 소중한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걸.

* * *

“어. 식아. 왔어?”

화색을 띠고 다가오는 팀장을 본 식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익숙하게 그를 이끄는 팀장을 따라 들어간 곳은 회의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회의실에서 데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때 아닌 감상에 젖어 방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이내 제 앞에 앉는 여자와 남자에 멎었다.

한 실장과 진 팀장. 회사 내 임원급의 파워를 행사하는 이들이었다. 가벼운 미팅이라고 줄곧 강조해 온 것치고는 너무 힘을 준 거 아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뻔히 예상되는 그림에 식의 입에서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그들을 보고 자세를 정돈했다.

“어제는…….”

“아,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에이. 죄송할 것까지야. 광고 촬영은. 잘했고?”

“아, 네.”

“그래. 그 쪽에서도 만족하는 분위기더라.”

“그래요? 다행이네요.”

“응. 이번 기회에 그쪽 다져 놓으면 좋지. 나중에 네 후배들도 진출하기 편할 거고.”

웃으며 답하던 식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후배들이요?”

“어? 응. 회사 후배들 말하는 거야.”

“저 걔들 진출에 관심 없는데.”

“……어?”

“저희 멤버들이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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