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11화 (111/119)

111화

외전 2. 생일

“……김 식.”

“깼어요?”

“네가 깨웠잖아.”

사람이 잠도 못 자게 달라붙어서 못 자게 괴롭혀 놓고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양 어깨를 으쓱하는 얼굴이 얄밉다. 하품을 하며 옷 속으로 들어온 식의 손을 빼낸 대현이 다시 누우려 했지만 그의 양팔 아래로 손을 넣어 꽉 끌어안는 식 때문에 불가능했다.

“어제 늦게 잤다고…….”

“응. 그럼 더 자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뱉은 말과 달리 대현의 목, 목과 귀 사이의 연한 살, 쇄골까지 이어진 입맞춤은 그를 다시 잠에게 뺏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작게 한숨을 쉰 대현이 결국 눕기를 포기하고는 식처럼 몸을 반만 일으켜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앉기 편하게 몸을 비켜주는 얼굴은 아침부터도 잡티 하나 없이 뽀얗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한 대현이 식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하품을 했다.

“촬영 이제 끝났어?”“네.”

“진수 형은. 데려다주고 가셨고?”

“네.”

“촬영은 잘 했고?”

“그럭저럭요.”

말은 저렇게 해도 누구보다 집중해 연기하고 왔을 식을 안다. 그런 그의 집중력을 시청자들도 알아준 덕분인지 식이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현재 수목 드라마 1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본부장 역할을 맡아서인지 유독 정장을 입고 나오는 장면이 많았는데, 처음에야 저거 멋있는 척하는 거 보라며 토를 하는 척하던 우람까지도 어느새 식의 연기에 몰입해 그를 매몰차게 버린 여주인공에게 분노할 정도로 잘 해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왔다고는 해도 맡는 역할에 따라 손끝부터 표정까지 갈아 끼워야 하는 일이 어찌 쉬울까. 그래서인지 촬영을 마치고 온 식의 표정은 유독 피곤해 보일 때가 많았다. 물론 그는 그런 표정을 하고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듯이 대현에게 달려들곤 했지만.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귀찮음을 참아가며 손을 빼낸 보람이 없게끔 다시 허리를 지분거리는 손을 느낀 대현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체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형은 저 안 보고 싶었나 봐요.”

“어?”

“나만 보고 싶고, 이렇게 안고 싶었나 봐.”

갑작스러운 투정에 대현이 멈칫한 사이 허리에 있던 손이 쑥 빠져 나간다. 둘 사이의 공간이 생기고 그제야 어딘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식의 얼굴이 드러났다. 식이 잘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가 진짜 서운할 때만 보여주는 표정.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표정. 그 사실을 알기까지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대화와 함께 한 수많은 밤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안정감에 대현의 입꼬리가 쑥 말려 올라갔다. 다른 손으로 식의 목을 끌어당긴 그가 식이 그랬던 것처럼 귀와 목 사이로 입술을 갖다 댔다. 쪽.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아닌데. 나도 너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진짜?”

“응. 이번에 촬영 길긴 했잖아.”

“……“

“보고 싶더라.”

간지러운 말끝에 또 한 번 더 간지러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번엔 볼이었다. 밤샘 촬영을 했다면서 수염 하나 올라오지 않은 완벽한 볼에서 입술을 뗀 대현이 식과 눈을 맞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마주해 오는 눈에 절로 웃음이 났다. 누구 애인이 이렇게 잘생겼냐, 진짜. 간지러움과는 거리가 먼 대현의 연애사를 아는 영민과 선우가 들으면 경악을 해댈 애인의 자랑까지 속으로 마친 대현이 이불을 젖혔다.

“어디 가요.”

“씻으려고. 씻고 나가야지, 우리.”

“어딜요?”

“너 설마 잊은 건 아니지.”

허리를 잡아오는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바닥 위로 발을 딛던 대현이 식을 돌아봤다. 눈을 살짝 키운 채 설명을 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확인하자 한숨이 나왔다. 바쁘니까 잊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둘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듯한 눈을 보니 어딘가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써 실망한 기색을 숨기며 설명하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오늘 우리……“

“형 동네 가는 날인 거. 알죠.”

말을 끊고 웃는 얼굴은 어느새 대현의 앞에 서 있었다. 나가려고 열어놓은 문까지 닫고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본 대현은 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가 진짜…… 짜증을 내려다가도 저 예쁜 웃음만 보면 무장해제 상태가 되고야 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대현이 식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넌 네 얼굴을 너무 잘 이용하는 것 같아.”

“전 형이 더 그런 것 같아요.”

“내가?”“응. 특히 밑에서……“

깜짝 놀라 식의 입부터 틀어막은 대현이 문 밖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식의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대현이 미간을 모으며  뻔뻔한 남자를 응시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 막히고도 여유롭게 눈을 휘어 보이는 얼굴은 오늘도 대현의 앞에서만 보이는 장난기를 마구 분출 중이었다.

“너 진짜 조심 안 하지.”“다 나간 거 확인하고 방 들어온 거예요. 우람이 형은 본가고, 윤성이는 친구들이랑 있대요.”

“연락했어?”

“네.”

“넌 이럴 때만 단체 메시지방 이용하더라.”

“이럴 때라도 안 쓰면 무슨 쓸모가 있어요.”

팔짱을 끼며 능글맞게 받아치는 얼굴은 반박할 힘을 잃게 한다. 결국 잔소리 대신 바람 빠지는 웃음만 흘리고 만 대현이 다시 문고리로 손을 뻗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알겠으니까 좀 씻자. 나 배고파.”

“알았어요.”

“쉬고 있어. 머리 보니까 넌 씻고 온 것 같은데. 맞지?”

“네. 씻고 왔어요. 형 근데.”

이번에는 순순히 보내주려는지 손목을 잡은 힘을 푸는 그에 안심하고 뒤돌던 대현이 고개만 돌려 식을 응시했다. 말을 하는 것 대신 시선을 떨어뜨리는 식이 보인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팽팽한 청바지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형 때문인데.”

묻는 얼굴이 천연덕스러웠다. 헛웃음을 뱉어낸 대현이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식의 눈에 가득하던 장난기가 그의 연한 갈색 눈으로 옮겨 붙었다.

“왜 내 탓을 하냐. 내가 한 게 일어난 거밖에 더 있어?”

말을 이으며 방금 그처럼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픽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욕망을 숨길 필요성도 못 느끼는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은 건데도 근사해 보이기까지 하는 걸 보니 이 정도면 팔불출은 자신인 것 같았다. 자기객관화까지 야무지게 마친 대현이 뒤돌다 말고 멈칫했다.

“아, 그리고.”

그가 가는 걸 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대현이 눈을 휘었다.

“오늘 기대해. 나 이것 때문에 늦게 잔거야, 어제.”

선전포고처럼 들리는 말을 던진 대현이 식의 반응을 보지 않은 채 다시 뒤돌았다. 화장실로 걸어가는 눈이 반짝거렸다. 식의 말처럼 오늘은 대현이 살던 동네에 가는 날이자, 대현이 1부터 100까지 계획한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대현이 계획한 데이트는 내용으로만 놓고 보자면 특별할 게 없었다. 같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단골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길거리를 걷는 등의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행동들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여느 커플에게는 지겨울 정도의 단순한 데이트를 계획까지 해야 하는 건 둘이 나갈 때마다 모자부터 눌러써야 하는 이유와도 같았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통까지 작은 식은 모자만 푹 눌러 써도 눈이 안 보인다.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그 사실을 곱씹으며 대현은 지나가는 가게에 붙은 거울로 제 얼굴을 살폈다. 식과 장난을 치느라 턱으로 조금 내려온 마스크부터 올린 그가 주위를 살폈다.

그래도 대현의 동네는 유동인구가 적은 편이라 평소보다 경계를 늦춰도 괜찮긴 했다. 번화가가 아니기도 했고, 주위에 학교가 많기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주거 지역이라서 더 그랬다. 그래서인지 둘의 데이트는 평화로운 주택가에 갑자기 등장한 180이 넘는 장정 둘을 힐끔거리는 어르신 몇몇을 빼면 대현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코트 아래로 슬쩍 손장난을 할 수도 있었고. 그 사실이 주는 만족스러움에 자꾸 마스크 아래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그렇게 좋아요?”

“응?”

“또 웃고 있길래.”

마스크 아래로 웃는 얼굴을 매번 귀신같이 알아채는 식이 신기하긴 하지만. 고개를 조금 올리자 그제야 모자 챙 아래의 까만 눈이 보였다. 저만이 제 눈이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인 양 바라보는 눈은 마주할 때마다 항상 대현을 부끄럽게 만들곤 한다. 하물며 신발주머니를 붕붕 흔들며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이 가득한 길가에서조차.

“응.”

“자주 와야겠다.”

그제야 대현에게서 시선을 떼 주위를 둘러보는 식은 대현의 기분이 좋은 이유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 와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방금 지나간 초등학생들처럼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던 초등학생 때부터, 반년마다 훌쩍 자라는 키 때문에 매해 교복을 새로 사야 했던 중학생 시절, 입시와 같은 조금은 텁텁한 고민을 하며 이어폰을 끼고 다니던 고등학생 때가 모두 묻어 있는 거리였다.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은 그렇기에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 거리가 이토록 특별해진 건 너와 함께 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밖이어서 그런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현은 대답 대신 웃으며 식의 팔을 끌었다.

“저기야. 내가 좋아하는 곳.”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