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우당의 뒤편 꽃담에 난 둥근 쪽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홍월정(紅月亭)은 연씨 가문의 치부가 서린 장소였다.
원래 녹우당과 홍월정은 몇 대 전 가주의 병든 노모를 위해 지어진 곳이었다. 병자를 위한 곳이기 때문에 주위에는 사계절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난만했고, 본채와 멀찍이 떨어져 새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과장을 좀 더 보태자면 홍월정에 앉아 있노라면 겨울에 눈 쌓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하니, 세상 근심 걱정을 잊고 요양하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때문에 녹우당과 홍월정은 이후로도 병든 사람의 요양지는 물론, 연씨 가문 사람들의 휴식처로 쓰였다. 사계절 때 맞춰 피는 꽃들이 가득한 녹우당도 구경하기가 좋았으나, 홍월정의 녹양(綠楊)과 연화(蓮花)는 그 중에서도 일품이었다. 여린 듯 강하게 휘어진 버들이 거울 같은 연못에 투영된 가운데, 수면을 감싸 안고 핀 연분홍 연꽃들의 품위 있는 자태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여기에 수풀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못 가에 흐드러지게 핀 도화까지 어우러지면, 가인(歌人)은 노래 한 곡절 뽑지 않으면 못 견뎌 했고 화가는 그 풍경을 화폭에 옮겨 그리지 않으면 못 견뎌하곤 했다.
그래서 연씨 가문 사람들은 때가 되면 사람들을 불러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다. 연회를 열지 않을 때엔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한 예인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기교를 뽐내기도 했었다. 걔 중, 그 유명한 칠현금 연주자가 녹우당에 세 달간이나 머물며 작곡을 하고 간 일은 연씨 가문의 은근한 자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홍월정을 찾았던 한 가인(歌人)과 연씨 가문의 한 여인이 야반도주를 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여인의 이름은 연우비로, 그녀의 부친은 당시 연씨 가문의 주인이었던 연호경이었고, 모친은 연호경의 부인인 담씨 부인이었다. 혼인을 한 달 앞두고 있던 그녀가 이름도 모를 천한 가인과 정분이 나 집을 나가 버린 일로 담씨 부인은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연호경 또한 크게 노해 홍월정은 물론이고 녹우당까지 폐쇄해버렸다.
홍월정은 혼인을 앞두고 도망친 연우비의 이름과 함께 두고두고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를 가만 두고 볼 연호경이 아니었다. 몹시 노한 그는 홍월정은 물론 녹우당까지 허물어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이제껏 그곳을 머무르고 지나쳤던 이름 높은 예인들이 이를 크게 반대했다. 반대하고 나선 이들이 그들뿐이었다면 연호경이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건물을 허무는 걸 반대한 건 비단 예인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늙은 노모는 연호경에게 녹우당을 허물지 말라고 간절히 청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때문에 결국 연호경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연호경이 죽고, 연무의로 가문의 주인이 바뀌어도 녹우당과 홍월정은 폐쇄된 채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연무의의 다섯 번째 자식인 연서강은 전형적인 문인(文人)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는 병법서보다는 문학이나 예술 서적 등의 잡학서를 읽는 걸 즐겼으며, 대대로 훌륭한 장수를 배출한 연씨 가문 사람답지 않게 승마와 활쏘기, 무술 등에는 거의 재능이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연서강은 전형적인 무인인 연무의가 볼 때 영 못마땅한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의 경우, 그런 연약한 자식은 어머니의 품안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람은 물론 아버지 또한 노심초사하며 키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연서강의 경우는 달랐다. 일단 연서강의 친모인 예씨가 병으로 일찍 죽었고 연무의 또한 아이를 함함하게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연무의는 자식을 훈육하는데 있어 다소 독선적인 경향이 있는데다 강압적이기까지 한 아버지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연무의도 어린 연서강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거의 학대에 가까운 훈육이 이어졌지만, 입안에서 연무의를 말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서강이 한 번 죽어야만 그 고된 교육과 훈련이 멈추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연서강이 열 살이 되었을 무렵, 연무의가 그를 교육시키는 걸 포기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연서강이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지는 것도 모자라, 넘어지면서 제 칼에 제 어깨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 어이없는 실수로 연서강은 꼬박 열흘을 앓았고, 연무의는 아무리 해도 연서강이 자신의 기대에 미칠 날은 오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후에 연서강은 까다롭고 딱딱한 무인 집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방치되어 자라게 되었다. 그 분위기는 연서강의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가솔(家率)에게까지도 미쳤다. 그랬기에 연서강이 녹우당을 발견하고 그곳을 제 주된 거취지로 삼아도 아무도 만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연무의만이 ‘그곳은 대대로 여인들이 지내던 곳인데.’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런 연무의에게 연서강이 ‘소자가 여인은 아니지만, 여인들보다 훨씬 허약하지 않습니까.’라고 우스갯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연무의는 그 말에 웃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홍월저은 여전히 폐쇄된 채였지만, 녹우당만은 연서강의 부지런한 왕래로 겨우 사람 사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 수려한 경치를 어느 정도 되찾은 녹우당은 연서강의 자랑이 되었다. 동시에 무인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무인이 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연서강의 하나 있는 긍지와 자부심이 되었다.
그런 연서강을 이내 사람들은 녹우당 도련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작업을 하는데 나를 부를 것 까지는 없지 않아.”
불만이 섞인 남ㅁ자의 가벼운 투정에 연서강은 잠깐 호미질을 멈추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 옆엔 무참한 호미질로 인해 뿌리까지 뽑힌 잡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리고서 그는 자신의 옆에서 똑같이 호미를 들고 땅을 일구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묘시(卯時)였다. 초하(初夏)라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해가 뜨기엔 아직 어림도 없었다. 고작해야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해질 만한 시각이었다.
“허면?”
잠시 호미를 툭툭 쳐서 거기에 묻은 흙덩이를 털어냈다. 밤새 내린 이슬에 젖은 흙이 호미에 감자나 고구마마냥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금 자신이 잡초를 뽑고 있는 것인지 땅을 뒤엎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연서강의 질문에 남자, 기연조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장마가 들고난 후에 할 일을 쓸데없이 지금 하고 있다, 는 말이다.”
무릇 잡초 뽑기란 여름 내내 해야만 하는 막중한 과업임을 모르는 자가 할 법한 투정다웠다. 이래서 농사 한두 번 안 지어본 자는 관리로 나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장마가 지난 후에 짐승처럼 자란 잡초들을 뽑아봐야 지금의 이 노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저놈은. 사방 천지에 넘쳐나는 물을 먹고 쑥쑥 자란 잡초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래를 장착한 소뿐이다. 농사꾼은 아니지만 홀로 녹우당을 가꾸면서 그 사실을 스스로 깨우친 이후, 연서강은 한 번도 이 과업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손에 익지 않은 서투른 호미질에 짓무른 손바닥을 주무르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늘은 정오까지만 입궁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 심심하면 언제든 부르라 말한 건 자네지 않나.”
“그건 밤늦도록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이었지, 이른 아침에 불러 일을 시켜달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밤을 지새워도 괜찮단 뜻이었다고.”
눈썹을 구긴 기연조가 볼 맨 소리를 늘어놓자 연서강이 가벼운 웃음을 흘렀다. 요사이 일이 바빠 자신을 등한시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어제 밤 근무를 마치자마자 자신을 찾아와 묻지도 않은 내일 일정을 늘어놓는 폼이 이상타 싶었다. 일정을 다 말한 뒤 ‘자, 이제 어찌할까!’하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연서강은 ‘석찬(夕餐)이나 하시게.’하며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그때, 눈앞의 남자가 퍽 섭섭한 표정을 짓는다 싶었더니 기분 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기연조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나는 오늘 새벽에 급히 네가 부르지 않았다면 쉬지 말고 정시 출근이나 할까 고민도 했는데.”
평소라면 ‘눈치가 없어서 미안하군.’하고 말하고도 남았을 텐데, 연서강은 그저 웃음만 흘릴 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랬군.’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파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연서강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더욱더 차갑게 만들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내려오는 싸늘한 감각을 애써 지우며 연서강은 기연조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눈치가 없어서 미안하네. 조금만 더 하면 맛난 식사를 대접할 테니 힘을 내주게.”
그에 기연조가 ‘할 수 없지.’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과 달리 남자는 무척 일을 잘해주고 있었다. 이런 일을 자주 해 본 연서강보다 당연히 호미질이 더 서툴 법도 한데 그런 티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의 불평불만이 단지 말뿐이라는 걸 연서강은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대부터 그는 그러했다. 연서강이 하는 일 전반에 참견하며 따가운 잔소리를 하기 일수였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행동은 매우 살뜰하게 연서강을 챙겨 주곤 했었다. 누가 동생만 줄줄이 많은 장남 아니랄까봐 무슨 일을 해도 칠칠맞기 짝이 없는 연서강을, 꼭 나이 많은 형이 동생에게 그러하듯 보살펴주었다. 형제가 많은 것은 연서강도 기연조에 뒤지지 않으나 사정이 사정인지라 연서강은 동갑내기인 그에게서 처음 ‘형제의 정’을 느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
손바닥을 주물거리는 걸 멈추고 연서강은 멍하니 다시 작업을 시작한 기연조의 등을 바라보았다. 성인 남성의 것이 분명한 다부진 등을 응시하던 연서강이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같은 연배에 같은 사내이니 자신 또한 저 남자의 몸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달랐다. 기연조가 꽉꽉 빈틈없이 짜인 비단이라면 자신은 얼기설기 엮인 삼베일 것이다.
연서강은 유모 서씨가 어린 자신을 품안에 두고 쯧쯧 혀를 차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딱히 허약한 체질은 아닌데 우리 도련님께서는 어찌 이리 몸이 약하신지.’ 그런 서씨의 말을 듣고 마침 옆을 지나가던 계집종이 눈치 없게 대답했었다.
‘사실 죽을 목숨이었는데 살아 있어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말을 자신이 들을까봐 겁이 났는지 유모 서씨는 바로 그 계집종의 등을 때리며 정도 이상으로 성을 냈다. ‘이것아, 망령된 소리를 지껄일 힘이 있으면 저쪽에 가서 일이나 해!’ 허나 연서강은 이미 그 계집종의 말을 똑똑히 들은 후였다. 그것을 눈치 챈 서씨가 황급히 ‘도련님께서도 저런 년 말은 귀담아 듣지 마세요. 원래 쓸데없는 말이 많은 아이라서.’하고 둘러댔지만 연서강은 그냥 서씨를 향해 웃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안도하도록 그저 ‘네.’하고 대답하며.
그때, 계집종이 말한 ‘죽을 목숨’이란 말은 연서강이 어릴 적 검술 훈련을 하다 제 칼에 제가 찔려 죽을 뻔 했던 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형제들이 연서강과 한 자리에 있길 꺼려하고, 연서강도 차마 형제들의 눈도 마주볼 수 없어 하는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일 테다. 눈치 없다, 칠칠맞다, 둔하다 등등의 소리를 내도록 듣고 있는 그였지만 집안 분위기가 자신에게만 냉랭한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녹우당으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안 되는구나.”
한탄하며 중얼거린 말을 어찌 듣고 기연조가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연서강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기연조가 ‘힘들면 거기 서 잇지 말고 어디 앉아 있지?’하며 권한다. 허나 아무리 약골인 연서강이래도 이 정도 일한 것 정도로 지쳐 나가떨어지지는 않는다.
약간 몸이 약할 뿐, 사실은 큰 병 한 번 앓은 적도 심지어 잔병치레를 한 적도 없는데 기연조는 마치 연서강이 죽을병을 앓다 겨우 일어난 사람처럼 대하곤 했다. 그것이 연서강은 못내 우스웠다.
“그런 말 말게. 내가 이래봬도 이 나라에서 이름을 날리는 무신집안의 핏줄이라네.”
“칼은커녕 붓 한 자루도 못 들어 빌빌거리는 주제에 말은 참 잘하지.”
하고 말하며 기연조가 몸을 일으켜 연서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연서강의 서늘해진 이마를 제 손바닥으로 슥 쓸었다. 자신보다 훨씬 뜨거운 손바닥의 열이 이마를 스치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순간 동요한 연서강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기연조는 연서강에게 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보게. 땀이 흥건하잖아.’ 하고 말하면서.
“몸은 찬데 이마엔 땀이 나잖나. 이만 가서 쉬지 그래. 무신 집안의 도련님. 그래야 이 허약한 문신 집안 아들내미에게 조찬을 대접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겠어?”
얄미운 말투와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무척 다정하다. 거기에 근원을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끼며 연서강은 제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언제 상대방의 더운 손바닥이 닿았었냐는 듯, 자신의 심장을 말려 들어가게 만든 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냉한 이마였다. 자취도 남지 않고 사라진 열에 애틋함을 남기며 연서강은 ‘그럴게.’하고 중얼거렸다. 연서강의 순순한 대답에 기연조가 만족한 듯 ‘좋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을 이룬 기연조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이마에 짚고 있던 손을 떼며 연서강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번 눈이 가자 그에게 쉽사리 시선을 떨어지지 않는다. 기연조가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다른 곳에 열중하고 있을 때면 연서강은 그를 응시하곤 했다. 아무 재미도, 즐거움도 없는데도 버릇처럼 항상 그러했다.
이런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감정을, 연서강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형제애’로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런 것이 ‘가족애’라는 것이 아닐까 어리석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모친을 일찍 여읜데다 냉정하고 혹독한 부친과 냉랭한 친형제의 아래서 자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연서강이 그 감정을 처음 의심한 것은 ‘그런데 왜 새삼?’이란 의문이 들었을 때부터였다.
연서강와 기연조는 소위 말하는 죽마고우였다. 연서강과 기연조는 항상 함께 있었고, 연서강은 늘 그런 기연조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니 새삼 기연조의 일거수일투족이 애틋하게 느껴질 이유로 ‘형제애’는 합당치 못했다. 언제나 함께 있는 기연조를 새삼 그리워하는 이유에도 맞지 않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되었다.
-실은, 내게 중신이 들어왔다네.
그리고 그 연유가 대체 뭐였는지 연서강이 정확히 알게 된 것은 기연조가 연서강에게 중매가 들어왔다며 투덜거렸을 때였다.
-중신이 들어왔다고?
-그래. 나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내 집안을 꾸려야 하지 않겠냐면서. 아버님과 아는 어르신께서 상당한 곳에 소개를 해주겠다며 찾아오셨다더구먼.
원, 어른께 드릴 말은 아니네만 무슨 오지랖이 그리 넓으신지. 기연조가 농을 섞어 투덜거렸지만 연서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몹시 크게 놀란 탓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 챘는지 기연조가 의아하게 물어왔다.
-자네 낯빛이 왜 그러나?
-아니.......
아무 것도 아닐세. 기연조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면서 연서강은 가까스로 웃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혼란스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기연조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서강은 기연조가 자신의 곁에 언제까지고 있어줄 거라 믿고 있었다. 소리를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앞으로도 죽.’하고 마음속으로 소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척 잘못된 생각이란 것을 연서강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각했다.
나란 놈은 인적이 드문 녹우당에 처박혀 있으려니 정말로 세상의 시간이 가지 않는 것이라 착각하기라도 했는가. 기연조의 나이는 이미 약관(弱冠)을 넘겼다. 이미 나이가 찬데다 당당한 한 가문의 장남인 그는 당연히, 머지않아 혼례를 올리게 될 것이다.
녹우당에서 신선놀음하는 연서강과 달리 그는 이미 과시(科試)를 치러 당당한 관리가 되었고, 우수한 재능과 가문의 보살핌으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우수한 재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느 묘령의 여인과 혼인해 가정을 꾸릴 것이란 당연한 가능성을 연서강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는 연서강을 보고 기연조가 웃으며 ‘거절했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연서강은 쉽사리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란 건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연서강은 진심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그와의 사이가 앞으로 변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가 기연조의 곁에 설 미지의 여인이 연상된 탓이었다. 연서강은 기연조가 어느 한 여인과 혼례를 올릴 때,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지독한 상실감과 함께 머릿속이 서늘해질 만큼의 아찔한 두려움이 그를 찾아왔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 품고 있던 감정이 정말로 ‘형제애’였다면 연서강은 기연조가 좋은 여인을 만나 무탈하게 살기를 기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자신이 기연조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저절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관리로 임용된 이후 바쁜 업무에 시달려 상대적으로 연서강에게 소홀하게 되었다고 기연조는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건 비단 기연조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연서강도 기연조의 바쁜 업무를 핑계 삼아 그와의 만남을 미루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친우가 함께 놀고 싶어 일찍 일을 마치고 찾아온 걸 눈치 없게 저녁이나 하시게. 하고 돌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눈치 없고 둔하다 소릴 곧잘 듣는 연서강이지만 그렇게까지 미련퉁이는 아니었다. 제 자신이 품은 연정이 그다지 반길만한 것이 아니기에 기연조와의 만남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정말로 눈치 없고 둔한 사람이 누구인지,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바로 어젯밤까지는 그런 생각으로 기연조와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신세만 졌던 고운 상대에게 더 이상 자신의 일로 마음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이, 몇 월 며칠이더라?”
연서강의 질문에 기연조가 가볍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세상일 모두 잊고 녹우당에 박혀 산다지만, 그래도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겠나?”
해서 연서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래, 고운 봄 꽃잎 지고 녹록이 피기 시작한 것을 보니 초여름인 건 알겠고. 자네가 어젯밤에 내게로 와 밤늦게 놀 수 있다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고도 하니 대충 오월 스무일경인가?”
“대충이 아니라, 정확히 오월 초엿새날이란다. 강아.”
‘그렇군.’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연서강은 시선을 모로 흘려 녹우당의 꽃담과 짙푸른 잎으로 덮인 청매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의 붉은 동백나무도 또한 짙은 녹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아랫바닥은 금어초가 붉고 노란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다. 그 옆, 옆으론 또 한련이 자라고 있다. 꽃은 아직인 듯 보였다. 연서강이 묵고 있는 녹우당은 사시사철을 대표하는 꽃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피어오는 꽃들을 보며 지금 어떤 계절인지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영락없이 초여름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시기인가 보다. 하긴 이번 년은 유달리 날씨가 포근하여 봄꽃도 일찍 피었었다. 다소 안심하며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군.”
“어디 점쟁이가 겨울에 고운 내님이 오신다, 그랬어? 갑자기 겨울은 왜.”
연서강은 고개를 저으며 ‘그냥 날수를 따져 본거네.’하고 대답했다. 덧붙여 ‘나이 먹는 건 싫으니까.’하고 비교적 합당한 이유를 덧붙이며. 나이를 먹는다 하니 기연조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요새 부쩍 중매를 선다는 사람이 많아 골칫거리라고 말한 적도 있는 그이니 나이 먹는다는 소리가 썩 즐겁게 들릴 리 없었다. 예전엔 그런 그의 반응에 연서강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다지 아무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때, 녹우당의 꽃담에 달린 작은 문이 삐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예전에 일찍이 폐쇄된 홍월정으로 통하는 샛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어제 오찬을 마친 후에 연서강이 종종 땋아주었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이파리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연서강이 새로 사준 꽃신도 어디를 뒹굴었는지 진흙과 먼지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아이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 연서강은 ‘저런.’하고 탄식하며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리는?”
아리는 여자아이가 기르는 늙은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여자아이가 말하기를, 아리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니 둘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요즘 아리가 부쩍 자신을 떠나 홀로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 걱정이라고, 여자애가 연서강에서 그렇게 한탄한 적이 있었다.
지저분한 꼴로 나타난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묻는 연서강을 피해 그의 뒤에 선 기연조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의 머루같이 시꺼먼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기연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러나 기연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입술만 조금 더 비틀었다. 여자아이가 그런 기연조에게서 얼굴을 돌려 이번에는 연서강 쪽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녹우당 오라버니.......”
여자아이는 늘 연서강을 녹우당 오라버니라고 부르곤 했다. 연서강을 다른 가솔들이 녹우당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이후의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진짜 여동생이 있어도 그녀는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러주지는 않았는지라 연서강은 여자아이의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배가 고파요.”
“아,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하얗게 밝아져 있었다. 연서강은 여자아이의 치맛자락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은 잎사귀도 떼 주었다. ‘가서 모씨 아줌마에게 밥 다라고 하련. 우리들 것도 함께.’ 말하며 연서강은 여자애의 등을 두드렸다. 겨우 10살 남짓 되 보이는 여자애는 연서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서강의 귀에 속삭였다.
“.......아리는 어디 있는 줄 알아요.”
마치 중대한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는 그녀에 연서강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하고 대답하며 연서강은 두 번째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어서 가련.’ 종종 걸음으로 여자애가 녹우당을 지나쳐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뒤를 눈으로 쫓으며 이제껏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기연조가, 여자아이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강아. 저 여자애는 언제까지 보살펴 줄 생각이지?”
이름도. 출신도 모를 저 여자아이를 연서강이 발견한 건 홍월정에서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홍월정은 관리를 못 받은 버들과 연화로 인해 마치 오래 버려진 산사(山寺)처럼 낡고 기괴해져 있었다.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던 기둥에는 미끄러운 돌이끼가 끼고 기둥밑동에서는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으며, 정도를 모르고 자란 버드나무도 마치 여귀의 머리카락처럼 휘어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연화가 자라는 못에서는 어둡고 칙칙한 빛이 났으며 축축하고 습한 냄새까지 났다. 연잎이 펼쳐져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과연 꽃이 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싯누렇게 변해 있었다.
녹우당을 부활시켰으니 내친 김에 홍월정도 한 번 깨끗이 치워볼까 생각하며 간 참이었다. 그러나 귀신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을 만치 폐가로 변해버린 홍월정의 모습을 보며 연서강은 ‘이거 안 되겠네.’하고 얼굴을 찌푸렸었다. 옛날의 아름다웠던 모습이 완연히 퇴색되어버린 홍월정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도 음습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으스스한 곳으로 변해있었다. 도저히 한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라가 본 홍월정 마루에서, 연서강은 그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지저분한 고양이를 안고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잠깐 비를 피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여자아이의 얼굴과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 이후 무섭지도 않은지 여자아이는 홍월정에서 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라는 고양이와 거기서 잠을 자고 구걸해서 받아온 음식을 먹었다.
그에 보다 못한 연서강이 그녀를 거두기로 한 것이다. 연서강은 자신의 몫으로 오는 음식을 그녀에게 주고, 그녀의 옷을 사서 입히고 계집종을 시켜 그녀를 씻기게 했다. 그 정성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처음엔 연서강을 마냥 경계했던 여자아이는 이제 끼니때가 되면 알아서 녹우당을 찾아올 정도가 되었다.
은혜를 입은 주제에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며 그녀를 돌본 계집종이 불평을 토했지만, 연서강은 그냐가 자신을 ‘녹우당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나를 오라비라고 부르는 여동생은 저 아이가 처음이지 않느냐.’하고 불평을 토하는 계집종에게 연서강이 말하자, 그녀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긴 한숨만 내쉬었다. 농담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연서강더러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붙여 대우해주는 여동생은 연씨 집안에 없었다.
“그 아이는 왜?”
연서강이 의아한 얼굴로 기연조를 바라보자,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녹우당 도련님이 웬 거지 계집을 주어다 홍월정에 가둬놓고 녹우당에서 그 계집을 내킬 때마다 취한다는 세간의 풍문이 아직 네 귀에는 안 들어갔나 보군.”
끔찍한 내용의 소문에 연서강이 얼굴을 다소 찌푸렸다.
“하지만 가여운데 가만 둘 수도 없.......”
그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며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관청에 신고하면 입양을 보낼 수 있어. 네가 그런 추한 소문 들어가며 저 계집을 돌볼 필요는 없단 말이지.”
덧붙여 기연조가 중얼거렸다. ‘자네가 신고하기 귀찮다면 내가 대신 해줄 수도 있네.’
연서강이 알았다, 대답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 관청에 신고할 기세였다. 대대로 문신만 배출해왔던 기씨 문중의 도련님 주제에 어찌 그리 행동력이 출중한지. 연서강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비록 문관이라고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종종 장수와 같은 기운을 내뿜곤 했다. 그리고 그 기운에 진짜 무관 가문의 도련님인 연서강이 때때로 기가 눌리기도 했다.
“괜찮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연조가 자신을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 알았으나 연서강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자신은 혼인을 할 것도 아니니 그런 지저분한 소문이 너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난처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평판이 수복할 수 없을 정도로 땅바닥을 내리치고 있다는 것을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답답하고 깐깐한 여씨 가문 안에서도 자신이 이리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은혜를 갚아야 할지도 모르고.”
연서강이 불현듯 중얼거린 말에 기연조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설명을 해줄 마음은 들지 않아서 연서강은 기연조의 손에서 호미를 건네받으며 ‘자, 우리도 조찬이나 하러 가세나.’하고 말했다.
* *
오월 초엿샛날, 아침.
길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던 불량배가 정오가 다 된 시간에서야 겨우 수포(搜捕)되었다.
중앙 큰길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라 보통 시장거리에서 일어나곤 하는 난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아주 정신을 놓았던 것인지 모를 남자가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흉기를 꺼내 무작위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최초 피해자인 두 명은 출혈과다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후에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팔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 만든 남자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지만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관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수도의 중앙 거리 한 복판, 그것도 조정의 많은 관리들도 이용하는 대로에서 벌어진 일이라 사람들은 한동안 경악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라고, 연서강에게 기연조가 말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간 지 오래라 하늘은 완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서재에 들려 여러 서책들을 뒤적이고 있던 연서강은 갑자기 찾아온 기연조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었다. 기연조의 한 손엔 술 한 병이, 또 한 손엔 그 안주거리로 보이는 떡과 과일이 들려 있었다. 서재에 오기 전에 부엌에 먼저 들렸다가 온 모양이었다.
아마 주안상을 차린다 부산을 떠는 모씨 아주머니를 말리고 다짜고짜 저리 들고 온 거겠지. 듣지 않아도 어찌된 일인지 눈에 선하여 연서강은 들고 있던 서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 기연조가 가져온 술병과 접시가 놓였다.
“안색이 어찌 그런가?”
기연조의 얼굴빛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연서강이 묻자, 기연조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일로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하나가 팔을 다쳤어. 부상이 심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내가 오늘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대신 일하게 된 사람이라, 마음이 편치 않더군. 사과를 했더니 괜찮다, 웃기는 했지만 그래도 편치 않아.”
“해서, 술인가?”
“해서, 술이지.”
술병을 들어 흔들며 기연조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 눈썹을 구겼다. ‘술잔이 없군!’ 탄성처럼 중얼거리며 기연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모씨 아줌마가 자꾸 날 붙잡더라니.......’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그를 보고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허나, 자꾸만 내가 평소대로 출근했다면 그가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네.”
그 말에 연서강은 기연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는 걸 각별히 싫어하는 친우이긴 했다. 어디 그뿐만 인가. 학문의 길을 진지하게 탐독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마음매무새도 단정하고 똑발랐다. 뭔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흐리멍덩한 자신과는 달랐다. 연서강은 책 속에 등장할 것만 같은 친우의 대쪽 같은 성품을 매우 아끼고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착잡한 기분에 잠긴 연서강은 생김새만큼이나 속도 청렴한 눈앞의 사내를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다친 것은 내 탓이란 말이 되겠군.”
그에 기연조가 얼굴을 살풋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게 무슨 소린가.’하고 묻기에 연서강은 접시 위의 떡을 집어 입안에 넣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녁을 배불리 먹지 않고 그냥 물렀더니 벌써 시장기가 돌았다.
“내가 아침 일찍 자네를 불러 시답잖은 일을 시키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이 다칠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자네가 아침에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자네는 평소 시간대로 집을 나섰을 것이라고.”
그 말에 기연조가 입을 다물었다. 입안의 떡을 씹으며 연서강은 슬쩍 기연조의 얼굴에서 시선을 치웠다. 떡을 넘기는 소리에 묻어 그가 중얼거렸다.
“허나. .......그 사람에겐 못 할 말이지만. 나는 자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네. 자네가 다칠 바엔 그 사람이 다치는 게 차라리 나으니까.”
진심이었다. 다친 사람에겐 무척 미안하지만 기연조가 다치느니 차라리 면식이 없는 타인이 대신 다치는 편이 나았다. 물론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난다면 더욱 좋겠지만. 꼭 둘 중 하나가 다쳐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전의 연서강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우물쭈물하며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좀 달랐다.
“.......”
상대로부터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그 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인 기연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연서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은근히 날카로워서 연서강은 슬쩍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왜 그러지?’하고 묻자 기연조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설사 정말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강아.”
그렇게 차갑게 충고하며.
거기서 연서강은 자신을 향한 상대의 실망을 읽었다. 그럴 법도 했다. 기연조답다. 생각하며 연서강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하네.’하고 연서강이 사과했지만 기연조의 얼굴에 서린 미미한 서운함과 분노는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 않고 금방 풀릴 감정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저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잘 보이고 싶은 상대라, 그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는 일이 생기면 냉정한 머릿속과 달리 우둔한 가슴은 욱신욱신 고통을 호소해왔다.
그때, 모씨 아줌마가 뒤늦게 제대로 된 주안상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에 계셨는지도 모르고 다른 데 갔다 왔네요.’라 말하며 그녀는 탁자 위에 기연조가 미처 들고 오지 못한 젓가락과 술잔, 그리고 다른 안주거리를 놓았다. ‘감사합니다.’하고 연서강이 말하자 서재 안의 서늘한 기운을 읽지 못한 그녀가 ‘이 먼지 풀풀 날리는 곳에서 담소를 나누지 마시고 나가셔서 좋은 경치도 좀 보시고 그러시지.......’하고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물러서자, 연서강은 기연조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
그리고 제 술잔을 기연조의 앞에 내밀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미동도 없던 기연조가 할 수 없이 긴 숨을 내뱉으며 연서강의 손에 들린 잔에 술을 따랐다.
“.......빨리 나으실 거야.”
이어 연서강이 말하자 기연조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랬으면 좋겠는데.’하고 중얼거렸다. 연서강은 ‘정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빨리 나을 것이다. 기연조도 5일 만에 괜찮아졌었으니까.
* *
어느새 달이 기울었다.
기연조는 두 시진 정도 연서강과 담소를 나눈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어지러운 서재를 대충 치운 다음 연서강은 녹우당 뒤편으로 나왔다. 밤이 깊어 별빛과 달빛만 밝은 녹우당 후원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홍월정 깊숙한 곳의 나무와 바위를 뒤덮은 이끼들이 달빛을 받아 바로 그렇게 빛났었더라, 연서강은 추억했다.
“여기에 있었구나........”
그리고 시선이 닿은 곳에서 연서강은 한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자아이는 예의 늙은 잿빛 고양이와 함께 연서강이 아침에 뽑아놓은 잡초의 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연서강이 바로 뒤까지 와서 섰지만 그저 잿빛 고양이만 연서강을 흘깃 바라볼 뿐, 여자아이는 몸을 움찔거리지조차 않는다.
연서강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설명해줄 수 있겠니.”
그래도 여자애는 연서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 새로이 땋아준 여자애의 머리가 다시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대체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기에 머리가 항상 저리 엉망이 되는지 의문이었다. 여자아이이니 사내아이들만큼 험한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러나 곧 연서강은 전에 자신이 들어갔었던 홍월정을 떠올리며 ‘그럴만 해.’하고 중얼거렸다. 폐허나 다름이 없었던 홍월정. 거기를 쏘다니다보면 옷이 찢어져도 모를 것이다.
여자아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연서강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을 뿐이었다. 잿빛 고양이가 연서강을 피해 잡초더미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여자아이가 움직였다.
“녹우당 오라버니.”
여자애의 까만 머루 같은 눈을 바라보며 연서강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가, 한 짓 맞지?”
조용한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묻자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강은 ‘역시.’하고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구나.’하고 주억거리면서 그는 잿빛 고양이가 올라탄 잡초더미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자애가 본격적으로 어찌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연서강은 연차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좀 어리둥절하더구나.”
마치 아득한 옛일을 추억하듯 그는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아니, 가위에 눌러 끙끙거리다 불현듯 눈을 뜬 새벽에 그는 제 방 풍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절로 목구멍에서 ‘헉!’ 소리가 나왔었다. 이불을 꽉 쥔 손은 이미 땀이 흥건했었다.
“괴이한 꿈이거니, 생각했는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파악한 다음 연서강이 확인한 일은 제 몸의 무사함이었다. 칼에 찔려 피를 뿜고 있었던 곳을 더듬고, 그 외에 땅을 구른다고 부딪친 몸의 여기저기를 매만졌다.
하지만 옷은 피 대신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몸엔 상처는커녕 오돌돌한 소름이 돋아 있을 뿐이었다. 거듭 제 몸의 안전을 확인한 뒤 연서강은 덮쳐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가슴속은 여전히 방금 제가 겪은 일 때문에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몸이 찢길 듯 저리고 심장이 울렸다.
끔찍한 꿈을 꾼 거라 생각했다. 너무도 무섭고 서글퍼서 연서강은 이불을 부여잡고 아직 남아있는 꿈의 여운에 몸서리쳤다. 소름이 끼쳤다. 꿈을 꿨다고 여기고 연신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무서운 생각은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연서강은 계집종을 불러다가 기연조의 집에 기별을 넣었다. ‘급한 일이 있으니, 어서 빨리 오라.’고
역시 꿈이었는지 기연조는 연서강의 기별을 받고 졸린 눈을 비비며 녹우당을 찾아왔다. 녹우당에 들린 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몹시 피로해보였지만 그 외엔 무사해보였다. 연서강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맨발로 달려 나가 기연조를 맞이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다행이다.’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대신 ‘잡초 좀 뽑아 주시게.’라고 말했다. 기연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연서강의 말에 응해주었다. 기연조가 등을 돌리고 ‘정말이지.’하고 여느 때와 같이 대꾸했을 때, 연서강은 몰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 속으로 되뇌며.
“.......”
오늘 새벽에서 아침까지 있었던 일을 잠깐 회상하던 연서강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연서강이 선물해준 예쁜 색깔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연서강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서강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 시선에 이끌리듯 연서강은 내내 여자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냈다.
“꿈이 아니었던 게지?”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뛰던 가슴이 무사한 기연조를 보면서 진정되고, 머릿속이 착 가라앉아 비로소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되자 깨졌다. 이어 기연조에게 질문을 던져 그 답을 받으면서 연서강은 새로운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
여전히 여자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잡초 더미에 올라간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어 ‘아리야, 아리.’하고 제 고양이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연서강의 말에도 별반 관심이 없어보였다. 고양이가 느릿느릿 움직여 마지못해 여자애가 내민 손가락 끝을 혀로 핥았다. 그에 여자애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졌다.
“말해 다오. 난, .......죽었던 거니?”
몹시도 평화로운 장면이었지만, 연서강의 속은 울렁거렸다. 안정된 얼굴 표정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연서강을 다시 보았다. 머루 같이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엔 별 다른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인형 같은 눈동자였다. 언젠가 기연조가 그녀의 그 눈을 보고 ‘기분 나쁜걸.’하고 별로 좋지 못한 소리를 속삭였던 적이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던 지라 ‘그래?’하고 반문하고 말았지만, 이제야 왜 기연조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연서강은 알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큰일’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법한 일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아리도 죽고, 녹우당 오라버니도 죽었었어요.”
너무 무미건조해서 차갑게 들리는 그녀의 대답에 연서강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품고 있었던 불안이 찢어 발겨져 평온이 찾아왔지만, 가슴속과 머릿속이 차게 식어 내려앉았다.
꿈이라 믿었던 마지막에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죽어가는 연서강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요.’하고. 그 전에 돌아간다는 말도 했었다. 고양이 아리가 죽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돌아간다’고.
돌아간다.......
연서강은 잡초 더미 위에서 꼬리를 말고 몸을 웅크린 늙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저 고양이는, 마지막 봤을 때 분명 여자아이의 품에서 죽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살아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건 비단 고양이뿐만이 아니다.
연서강은 무심코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용케 지탱하고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두 발이 보였다. 나는, 살아있다. 나 또한 살아있다.
“.......살려줘서, 고마워.”
“그냥, 돌아온 것뿐이에요. 아리가 죽어서. 아리가 살아 있었던 때로.”
여자애는 작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연서강은 여자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 온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연서강이 죽었던 겨울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변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연서강은 오늘 아침에 있었다던 난동을 통해 깨달았다.
연서강은 그 난동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놀자고 했던 기연조를 연서강이 저녁이나 제대로 챙겨먹으라고 돌려보냈었다. 그런 연서강의 행동에 몹시 실망한 기연조는 오후 늦게 출근해도 되는 것을, 정시에 제대로 출근했다가 그날 아침 큰길에서 일어난 난동에 휘말려 팔을 다치게 된다. 5일 만에 다친 팔은 나았지만 연서강은 자신이 제 연정 때문에 괜히 기연조를 꺼려해 그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내 끙끙 앓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지금은 좀 달라졌다. 연서강이 기연조를 정시에 출근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다칠 예저이었던 기연조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다치게 되었다.
연서강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한 남자가 난동을 일으켰다는 일은 변치 않고 그대로 일어났다. 결과는 좀 달라질 수 있어도 타인이 일으키는 ‘사건’은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대로 있다간 겨울이 왔을 때 내가 또 다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지?”
아리의 수명이야 정해진 것이라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여자아이는 그 이치를 이미 납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에 아리가 죽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연서강을 향해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아리가 죽는 건 어찌할 수 없지만, 녹우당 오라버니가 또 죽는 건 싫어요. 녹우당 오라버니가 죽고 싶어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때 제가 보기엔 오라버니가 무척, 무척이나 슬퍼보여서.”
“.......”
“죽기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함께 돌아왔어요. 하고 여자아이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평범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연서강의 귀에만큼은 세상의 어떤 누구의 것보다 고결하고 자애롭게 들렸다. 마치, 신의 음성처럼.
연서강은 여자아이의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저 어린아이의 눈이라 까맣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이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이질적이면서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구나. 대체 너는 어디에서 온 아이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연서강의 질문에 여자애가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대꾸했다. ‘저도 몰라요.’
“그냥 알았어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진지한 아이의 얼굴과 눈이 결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연서강은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매만졌다.
“너는 신의 아이니? .......신의 기적 같아.”
그에 여자애가 작게 웃었다.
“녹우당 오라버니께서 제 머리를 땋는 것도 신의 기적이라고 모씨 아줌마가 그랬는데.”
* *
연서강은 덜덜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가운데 나무와 바위 위를 덮은 이끼만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수없이 많은 버들가지들이 서로 부딪혀 타다닥, 소리를 냈다. 짐승의 메마른 뼈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사물이 무엇인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둠 속에서 연서강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에 바빴다.
홍월정. 그래, 녹우당에서 홍월정까지 왔던 것은 기억난다. 하지만 그 이후는 정신을 잃은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충. .......홍월정 너머로 있는 숲인 것 같긴 했다.
홍월정 너머로 빽빽하게 대나무가 자란 곳을 지나면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버려진 숲이 나왔다. 돈이 될 만한 지형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쓸 만한 나무도, 약초도 나지 않는 곳이었지만 수도에 자리 잡은 탓에 땅값만 하늘을 찌르는 곳이었다. 덕분에 땅이 가진 실질적인 가치에 비해 세금만 무시무시하도록 높아 5년 전인가, 10년 전인가 주인이 소유권을 포기한 숲으로 알고 있었다.
정신을 잃긴 했지만 아주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홍월정 너머로 있는 그 숲이 맞으리라.
두려운 눈으로 간신히 자신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파악한 연서강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괴한 두 명을 바라보았다. 눈을 제외한 얼굴 대부분을 검은 천으로 칭칭 감아 대충의 윤곽만 가늠할 수 있을 뿐 그 자세한 생김새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을 보자, 호리호리한 데에 비해 탄탄한 근육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세속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녹우당 도련님이라지만, 그래도 이름난 무장을 대대로 배출한 명문 무가(武家)인 연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잘 훈련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정도는 비교적 쉬이 구분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연서강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괴한들은 비록 호리호리한 몸을 가졌지만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연서강은 그리 가늠하며 미간을 좁혔다.
위험하다.
무의식중에 스쳐지나간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혼절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긴장으로 인해 입술과 혀가 바짝바짝 말랐다. 그 말라 오그라들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연서강은 반복해서 ‘침착하자, 침착하자, 제발.’을 되뇌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자신을 녹우당에서 납치해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그 목적을 알 수만 있다면 여길 타파해 나갈 길이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목적’이 뭔지 쉽게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연서강도 연씨 문중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를 만치 가문 일에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연씨 가문이 이 나라 안에 손꼽히는 권세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연서강의 아버지 연무의는 연서강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타인이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만은 참지 못하는 자였다. 그러니 연서강이 여기서 무슨 해를 입는다면, 연서강에게 가진 개개인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감히 연씨 가문을 얕잡아보고 손을 댔다는 사실만으로 연서강을 납치한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이들이 모를 가능성은 적다. .......그러니 그 후환을 감수할 만큼의 중요한 뭔가가 이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보복? 아니면 돈인가?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자신보다는 다른 부유한 가문의 아가씨가 나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연서강은 자신이 납치 포박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강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퍼뜩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
괴한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들은 연서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연서강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연서강은 괴한들이 어째서 자신을 납치했는지 비로소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목표물은!
이어 연서강은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향해 울부짖었다. 기연조였다.
-강아!
괴한들의 목표는 바로 기연조였던 것이다.
‘오지 마!’하고 연서강은 절규했다. 그러나 입을 가로막힌 것 때문에 그 비명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불분명한 괴성이 되어 숲에 퍼졌다. 기연조가 이내 괴한들과 맞부딪혔다. 문무 모두가 우수한 재원답게, 기연조는 능숙한 솜씨로 괴한들을 베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한 팔을 다치기는 했으나 그에 마치길 다행이었다. 괴한들은 기연조의 솜씨에 눌러 주춤했다. 마침내 괴한들이 모두 쓰러졌다.
기연조가 연서강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괜찮아?’하고 연서강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과 천을 풀어주었다.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연서강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기연조를 향해 외쳤다.
-도망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숨어 있던 또 다른 괴한 한 명이 나타나 기연조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기연조가 기척을 눈치 채고 뒤돌아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기연조의 왼쪽 가슴에 검이 꽂혔다. 푸슉, 하고 어둡게 빛나는 피가 허공에 튀었다. 아, 아. 풀썩 쓰러지는 기연조의 모습에 연서강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괴한들의 목표는 연서강이 아니라 기연조였다. 이것은 함정이었다. 기연조를 없애기 위한 함정! 그의 절친한 벗인 자신을 이용한 함정!
연서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연조를 찌른 괴한을 바라보았다. 괴한이 연서강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칼날을 품고 있는 듯 냉혹하여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괴한이 혀를 찼다.
그때, 괴한의 뒤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괴한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흰색으로 꽁꽁 사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찌할까요?
새로이 나타난 사람의 질문에 괴한이 기연조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며 다시 연서강을 내려다보았다. 괴한이 입을 열었다.
-.......목격자가 없어야, 후에 조작하기 편리하겠지.
그 말고 동시에 연서강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그렇지 않으면 기연조가 누구에게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증명할 사람이 아무도 알 수 없게 된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대체 저자들은 누구인지 연서강은 이 일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기연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알려야해. 기연조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연서강은 도망쳤다. 홍월정 뒤편의 숲도, 홍월정도 매우 지형이 험하고 여기저기에 멋대로 자란 수목이 우거져 있어 그는 계속 굴러 떨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반복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괴한들은 연서강의 뒤를 곧바로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허겁지겁 도망치는 연서강의 등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연서강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녹우당까지 도망쳐왔다. 녹우당, 녹우당까지만 도착한다면 안전할 것이다. 녹우당에는 홍월정과는 달리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어서, 어서 녹우당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기연조가 죽었다는 걸 알려야 한다.
저 멀리 녹우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서강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악!
그러나 연서강은 녹우당에 도착하자마자 등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괴한들이 연서강보바 더 일찍 녹우당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대체 어떻게? 하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풀썩 쓰러지는 그 몸을, 이미 그의 몸에서 흘러 땅바닥에 고여 있던 피웅덩이가 껴안았다.
-어... 떻게.
괴한을 가까스로 올려다보고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기는 연서강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괴한은 이내 그 자리를 떴다.
홀로 연서강만 그 어둠 속에서, 바닥을 기었다.
칼에 찔린 등도, 바닥에 갈아붙인 얼굴도 타는 듯이 아팠다. 그러나, 그 고통 이상으로 가슴이 아팠다. 기연조. 연서강은 울면서 녹우당으로 기어들어갔다. 사람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이 따가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그 울부짖음조차 듣고 이리 와주는 이가 하나 없었다. 어둡고 칙칙한 색조로 물든 녹우당은 오로지 매화향만 가득 고여 있을 뿐, 인적 하나 없이 스산했다.
.......도움을 요청할 이 하나 없었다.
그 사실에 연서강은 절망했다.
어서 가서 기연조가 죽었다는 걸 알려야 했다. 조작을 할 것이라고 기연조를 죽인 남자가 말했었다. 조작, 무슨 조작을 할 심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못하게 막아야 했다. 자신 때문에 기연조가 죽었다. 왜, 왜, 왜 어째서? 누구보다 곱게 바른 사람인데. 그 심성에 맞는 보답을 받으며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왜 그를 죽여야만 하지? 기연조가 죽었다. 누구 없어요? 왜, 왜 그가 죽었지? 사람을 불러야......! 왜, 왜......!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머리가 아팠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이윽고,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기연조, 기연조가...! 연서강은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왜, 그가 죽어야만 하지?!
간신히 연서강이 청매화와 동백꽃 아래까지 기어들어갔을 때,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하늘하늘 아름답고 힘없는 눈송이였다.
“.......”
연서강은 청매화와 동백꽃 나무 앞에 섰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었다. 피비린내와 매화 꽃내음이 배인 흙냄새를 맡으며 자신은 절명했었다. 그게 연서강이 기억하는 가장 가까운 과거, 내지는 올 겨울에 일어날 미래였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그의 기억 속의 그 자리는 그 자리인지라, 연서강은 녹음이 우거진 청매화와 동백을 보면서도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직까지 제 얼굴에 와 닿았던 차가운 눈송이를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전신을 휩쓸었던 그 비참하고 서러운 감정도. 분노도, 울분도, 절규도, 절망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연서강은 꾹 주먹을 쥐고 두 눈을 감았다.
왜인지, 누구인제, 어째서인지 연서강은 그로부터 약 하루 정도가 지난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연시 가문의 도련님이긴 하나 동시에 ‘녹우당 도련님’이었다. 가문의 천덕꾸러기, 마치 없는 사람처럼 숨어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패배자. 그래서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현재 자신의 가족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기연조가 무슨 직책을 가진 관리인지조차도.
너무 관심이 없었다, 주변에.
일이 이리되니 녹우당에 처박혀 평생 없는 것처럼 평화롭게, 고요하게 지내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이 얼마나 어리석고 사치스러운 일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한가로이 지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서강은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청매화와 동백이 눈앞에 있었다. 원래 있는 나무가 새삼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연서강의 머릿속에도 그 ‘일’이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녹우당 오라버니.”
옆에서 여자아이가 연서강을 불렀다. ‘그래.’하고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조가 죽는 걸 내버려둘 수 없구나.”
새벽에 잡초를 뽑는 기연조의 등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뭐라 할 수 없는 애잔함을 느꼈다. 그가 혼례를 올릴 때 진심으로 축복해줄 수 없을 것 같다며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눈앞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나서야 연서강은 깨달았다. 자신은 늘 그랬다. 자각이 늦고, 그 자각조차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기연조가 ‘선’ 운운했을 때 제 연심을 깨달았을 때처럼, 기연조가 죽었을 때 연서강은 제 안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그 녀석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가 이 세상에 살아서 존재했으면 하는 것.
“누구와 있어도 좋으니 부디 살아서, 행복해졌으면.”
쓰게 웃으며 연서강은 그 뒷말을 삼켰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으니.“
기한은 이번 겨울, 그 비참했던 날이 다시 오지 않기 위해 자신이 발버둥 쳐야 하는 시간이었다. 저 여자아이가 어떻게 그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연서강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찰과 무신경이 불러온 비극을 고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는 것, 그것뿐이다.
어제처럼 기연조에게 닥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다면....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겨울날의 그 비극을 막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그렇게 이번 겨울을 무사히 지낸다면 기연조는 그에게 어울리는 어여쁜 여인을 반려로 맞이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죽는 걸 막고 싶어.”
연서강의 굳은 목소리에 여자아이가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굳이 입을 열어 속에 있는 말을 내뱉진 않았다. 대신 여자아이는 잡초 더미에 올라가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를 불렀다. ‘아리야, 아리.’ 그 소리에 잿빛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것을 보며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야말로 녹우당에서 함께 살지 않으련.”
아리야. 여자아이는 그런 연서강의 말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고양이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면 꼬리를 치며 달려오는 개와는 달리 고양이는 그저 고개만 힐끔 돌렸을 뿐, 소리를 내어 부름에 대답하거나 여자아이에게 다가 오지는 않았다. 여자애의 성미도 그 고양이와 닮았다. 어떻게든 여자애에게 보답을 하고팠던 연서강은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조급함을 느꼈다.
“은혜 정도는 갚게 해주련, 홍이야.”
“홍이?”
재촉의 말에 여자아이가 반응한 것은 정작 말의 내용보다는 그 뒤에 붙은 낯선 호칭에 대한 것이었다. 좀체 동요가 없던 여아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연서강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자신이 괜한 짓을 했나싶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하고 연서강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녹우당 도련님이니까, 너는 홍이. 홍월정에서 봤잖니.”
제 이름도 모른다고 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저 부모님과 헤어진 다음 무작정 떠돌다가 홍월정이 마음에 들어 머문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계획도 없다고 들었다. 다만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고양이 아리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아리와 함께 사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라 했다.
그런 여자아이가 새삼 돈과 명예를 탐할 리가 없었다. 어여쁜 비단옷과 꽃신을 사다주어도 시큰둥하지 않았던가. 고양이 아리 외에는 세상 어떤 곳에도 관심이 없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연서강은 알 수가 없었다. 해서 무안한 짓을 한 번 해 보았다. 더구나, 은인을 언제까지고 ‘너’라든가 ‘저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홍이.”
그때, 한 번 더 그 이름을 여자아이가 속삭여보는 것이 들렸다. 동시에 잡초 더미 위에 있는 고양이가 야옹, 울었다. 여자아이가 활짝 웃었다.
“아리가 마음에 든대요.”
“아, 그래?”
여자애가 연서강을 향해 즐겁게 입을 열었다.
“홍이! 좋아요!”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지만 연서강은 그녀를 따라 웃지 못했다. 녹우당에 같이 사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에는 그녀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며 연서강은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곧 아무렴 어때, 싶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