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영의전은 경천문 광장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장의 서쪽으로 가면 외전 건물 옆으로 기다란 회랑이 있는데 그 회랑을 지나면 나오는 곳이 영의전이었다. 영의전 앞쪽으로는 서쪽 각루로 통하는 서희문(西喜門)이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우녕궁(旴寧宮)과 우녕궁 화원이 있었다. 우녕궁 뒤로는 커다란 담과 정자 등으로 둘러싸인 수안궁이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직접 가본 적은 없으나 영의전과 우녕궁은 수안궁으로 가던 중 연서강도 흘깃 보았던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청빈하며 소소한 느낌으로 꾸민 동쪽과 달리 서쪽은 우녕궁 화원과 수안궁이 무척 화려하고 복잡하게 꾸며져 있어 덩달아 영의전까지 수려한 정경을 소지하고 있었다. 때마침 여름이라 갖가지 꽃나무들과 화초들이 저마다의 색을 자랑하며 영의전 뜰과 담을 수 놓고 있었다.
심심하고 따분한 상록수들만 줄지어 이어진 서서원이나 옥문각에 비하면 참으로 일하기 쾌청한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연서강은 잠깐 들었지만 자신의 연락을 듣고 모습을 드러낸 연의진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바야흐로 중하(中夏)였다. 고온다습한 공기에 온갖 전염병과 열사병들이 창궐했고, 남쪽의 어느 지방에서는 영문 모를 병이 발생했다는 상소도 조정에 올라왔었다. 서서원에서도 다습한 기후로 썩기 시작한 책들이 발생해 내심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영의전의 사정에 비하면 참으로 별것 아닌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본 연의진은 그가 의원이 아니라 환자가 아닌가 싶은 정도로 얼굴이 상해 있었다.
둘러쓰고 있던 두건과 장갑을 벗으며 연의진이 연서강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왔구나.”
“.......괜히 온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전염병이 만연하기 쉽다는 것을 제가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분주하실 것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진 형님.”
‘전염병’이란 말에 연의진이 인상을 썼다.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역력해 연서강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헌데 중반(中飯: 점심)은 드셨습니까?”
그 말에 연의진이 더더욱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벌써 정오가 지났더냐?’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해는 중천을 넘은 지 오래였다. 연의진이 입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들리지 않아도 연서강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욕이다.
“.......아직 들지 않으셨다면 함께 하시겠습니까?”
연서강의 질문에 연의진이 불만스레 팔짱을 꼈다.
“헌데 너는 어찌 해서 여태 식사도 하지 않고 있었더냐?”
정작 자기는 일에 쫓겨 제 때 식사도 하지 못하고 넘겼으면서도 역시 의사는 의사인 모양이었다. 끼니를 걸렸다는 이야기를 그냥 넘겨듣지 않고 곧바로 따져 묻는 연의진의 행동에 연서강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실은 제 시간에 식사를 했지만, 아무래도 연의진이 끼니를 거른 듯 해 여태 못 먹은 척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연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함께 먹도록 하자.”
그리고 그가 허락을 받고 오겠다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허락을 받을 수는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연서강은 빠른 걸음으로 작아지는 연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연의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어 온 것은 맞지만, 여름의 영의전이 이리 바쁠 줄 알았다면 무작정 찾아오지 말고 미리 연통을 넣어 언제 방문해도 좋을지 물어보기라도 할 것을 그랬다.
자신이 불쑥 찾아와 영의전은 물론이고 연의진에게도 폐가 된 것은 아닌가, 연서강은 걱정이 되었다. 가급적이면 연의진에게만큼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렵고 무서운 상대가 아닌데도 이상하게 연의진의 앞에 서면 괜히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행여 자신에게 연의진이 실망하게 되거나 서운한 게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이윽고 연의진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영의전을 나왔다. 다시 밖으로 나올 때의 그의 복장은 영의전 안에서 입는 의복이 아니라 평범한 외출복이었다. 솔직히 이리 짧은 시간에 허락을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연서강은 놀란 눈을 해 보였다. ‘허락 해주시던가요?’하고 묻자 연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가 져서 손에 든 것이 약초인지 독초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다 말하니 허락해 주시더군.”
그거라면 아무리 바빠도 허락해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과연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겠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자 연의진이 이어 말했다.
“두시진 정도 밖에 시간을 못 낼 것 같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좀 휴식을 취하겠군.”
그리고 긴 한숨을 폭 내쉬는데, 연서강은 그 말이 진심으로 기뻤다. 자신의 방문에 연의진이 당황하거나 싫은 기색이 없는 것도 좋았다.
-태의령 현감호.
연무강의 말과 함께 장탁(長卓) 위로 우수수 서신과 권자(卷子) 더미가 떨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방금 입에 이름을 올린 자와 주고받은 서신들과 그 자가 연무의에게 몰래 건넨 진단서와 보고서 따위였다.
장탁 앞에 서 있던 연서강은 태의령이란 말에 놀라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태의령(太醫令)이라면 의관 벼슬의 으뜸 벼슬로, 그런 그의 아래에 있는 기관이 바로 영의전이었다. 또 영의전이라하면 연씨 가문의 삼남(三男)인 연의진이 몸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연서강의 얼굴을 보더니 연무강이 픽 웃었다.
-왜 그러느냐? 설마 연의진도 일에 이용되었을까봐? 너처럼 그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정답이었다. 의진 형님은 자신의 상관이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혹여 태의령이 ‘일’과 관련된 심부름을 연의진에게 시켰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일’에 이용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기연조와 친하게 지내게 된 이유처럼.
연무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시키신 일은 없지만, 태의령이 개인적으로 시킨 일이라면 나도 모르지.
-.......
소망컨대 연의진 만큼은 ‘일’에 관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연서강은 생각했다. 연의진 스스로도 정치에 연루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서강이 보아도 연의진은 그저 영의전의 의원으로서 있는 것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신 더미와 두루마리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연무강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지존의 애총(愛寵)을 받고 있는 귀비 비씨이니, 당연 그분의 건강과 그 자식의 건강에 관한 문제도 태의령이 담당하고 있지. 그것들은 그가 아버님께 보내온 진후(診候) 기록들이다.
두루마리에는 귀비와 그 소생 황자의 내밀한 몸 사정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원래라면 결코 밖으로 빼돌려서는 안 될 극비 문서인 것들을, 오늘 이렇게 연무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고 있으니 연서강으로서는 오싹할 일이었다. 귀비는 자신의 진후 기록이 ‘정적’들에게 숨김없이 까발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연서강이 찬찬히 그것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연무강이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원본은 아버님께서 모두 태웠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새로 대필하여 작성한 것이다. 허니 ‘증거’로 쓰고 싶어도 필체, 문체가 모두 다르니 실지로 태의령이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나가던 하인 하나가 상상해서 쓴 것인지 알 길은 없지.
그 말은 즉 ‘증거’로써 기연조에게 가져가봤자 쓸모는 없을 것이다, 라는 뜻이었다. 기연조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순간 의아해 하다 곧 말뜻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큰 형님께서는 내가 기연조에게 이것들을 가져다 바칠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어쩐지 의심을 하고 있는 주제에 너무 허물없이 극비자료를 보여준다 싶었더니, ‘증거’로서는 전혀 쓸모없는 자료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연무강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기는, 딱히 그가 믿어주지 않아도 연서강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태의령을 이용하여 귀비에게 신후를 복용시킬 심산이셨습니까?
-태의령. 그 영감이 간 크게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실제로 태의령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연서강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것들을 제공하였으니 태의령께서 저희 편을 든 게 아닙니까?’ 그 물음에 연무강이 팔짱을 낀 채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일평생 공부만 하다 살아온 영감이라 그런지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내다. 정보를 주기는 했으되 아버님께 원본은 태워 주시고, 모쪼록 사본을 만들어 가직해 달라 요청한 연유가 무엇이겠느냐.
거기까지 말하고 그가 혀를 찬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쏙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이지. 어차피 그 사람에게는 그 외에는 큰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어조나 말하는 태도가 정말 그런 모양으로 보였다.
-태의령께서는 신후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할 대상도 아니지.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허면 어째서 제게 이 사람에 대해 알려주십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태의령이 한 일이라고는 귀비 비씨와 귀비 소생 황자의 진맥 정보를 빼돌린 것이 전부인 듯 했다. 그러니 그가 ‘일’에 대해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알고 있을까 의문이었다. 헌데 오늘 자신이 연무강을 보는 것은 그에게서 ‘일’에 대한 전반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배신자를 추측해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자신이 배신자라면 태의령처럼 한 발만 웅덩이에 담근 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 연무의에게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달라 요청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배신자라면 그보다는 좀 더 내밀하게 ‘일’에 접근해서 연무의의 신임을 쌓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태의령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었다.
-전혀 수상하지 않은 자이지 않습니까.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지.’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이 자는 어떠냐. 소부에 소속된 민울이란 낭중이다. 귀비마마의 의복과 식사를 책임지는 자들 중 하나이지. 귀비에게서 그렇게 신뢰를 받는 인물은 아니지만 귀비의 식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사 끌어들인 여인이지. 연무진의 부인인 안계영의 외가 쪽 먼 친척이기도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별로 없어.
-그녀에게는 무슨 일을 시켰습니까?
그러자 연무강이 장탁자 위에 놓인 종이들을 뒤져 그 중 한 장을 연서강 앞에 놓으며 대답했다.
-귀비와 그 아들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음식을 찾아보라 하였다.
그 종이에는 귀비가 이러저러한 음식을 먹고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였더라, 또는 습진이 생겼더라, 그런 종류의 글들이 적혀 있었다. 이것저것 많이도 시도해 보았는지 그 음식의 종류가 찬 타락(: 우유)와 생굴 등 대여섯 가지는 족히 되었다. 허나 그것은 전부 자잘한 증상들일 뿐이었고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음식은 없었다.
-참고로 이걸 조사하라 몰래 명을 내린 것은 태의령 현감호로 되어 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보내는 서신이 태의령에게 가는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울이란 낭중도 태의령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명령한 자가 궁중 어의이니 딱히 의심할 것도 없지 않은가. 또한 ‘일’이 틀어져 의심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태의령이 귀비의 체질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부탁한 것이라 둘러대면 충분히 화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제야 연서강은 연무강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람의 이름만을 댈 리가 없는 것이다. 정말 그들이 의심이 가서 연무강이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테다.
-.......효기교위 문도학이란 자는 무얼 하는 자입니까?
해서 어쩔 수 없이 연서강은 자신이 먼저 물어 보기로 했다.
자신이 수안궁을 찾아갔다는 사실도 알아낸 이이니, 자신이 연무진에게 효기교위에 대해 물어 보았다는 사실도 능히 알아낼 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자는 내전 마마와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까. 가끔 저희 집을 들리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연무강이 탁자 위에 늘어놓았던 서류들을 한 데 모으며 대꾸했다.
-연후정이 수상하다 여겨져 몰래 뒤질 정도이니 집에 효기교위가 드나드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
그리고 그 효기교위란 자가 연무강과 함께 ‘자신’을 죽였던 자라는 것도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태연한 척 하며 연서강은 새로이 입을 열었다.
-허연 복면을 쓰고 다닌 자라면 알고 있습니다. 헌데 그런 자가 한둘이 아니던데, 그들은 또 누구입니까?
기연조가 죽었을 때 있었던 자들이, 아니, 자신을 납치했던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음을 연서강은 기억해냈다. 뒤늦게 도착한 기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처음에 괴한들은 여러 명이었다.
헌데 그렇게 묻기가 무섭게 연무강은 인상을 썼다. ‘한 둘이 아니다?’ 그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누가 또 있단 말이더냐?
그에 연서강은 뒤늦게 아차, 했다. 그제야 자신을 납치했던 괴한들은 연무강이 그때 가서야 급히 돈 주고 구한 인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연조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약했으니 그랬을지도 모른다. 실수다. 그렇지만 이미 말을 하고 난 뒤였다. 연무강이 짐짓 수상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연서강은 애써 모르는 척 했다.
그러나 곧 연무강은 여유를 되찾고 웃었다. ‘아무 말이나 마구 던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서강아.’ 마치 다 큰 어른이 한참 자라야 하는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다. ‘의심받기 딱 좋으니.’
-효기교위는 아버님의 잡 심부름을 담당하고 있지. 나도 있지만 위사직이 그렇게 한가한 직이 아닌지라 내가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효기교위야 말로 절대 배신할 리가 없는 인물이다. 너는 황후마마와 사사로이는 사돈 어르신이 되는 자가 문주인인 것은 알고 있느냐? 황후마마의 매제(妹弟)가 되는 사람이 문주인의 자식이지, 문도학은 그의 동생이다.
-.......
-또한 문주인과 아버님의 관계는 무술 쪽으로 사제 관계가 되니 아주 오랜 옛날부터 두 집안은 깊이 이어진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이어 연무강이 말했다.
-아버님은 나와 효기교위를 통해서만 서신을 전달하시고 또 정보를 거래하신다. 내 아래 쪽 사람들이라고 해 봤자 무슬 교관 몇 명과 차관 몇 명 뿐.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그들 또한 신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들을 제외하면.......
-무진 형님은.
-연무진 또한 신후의 존재를 모른다. 그 놈이야 고작 해봐야 아버님께서 귀비를 폐위시킬 무슨 좋은 수가 있으신 거겠지, 정도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겠지.
-그럼 난전 마마께옵서는.
-마마라.......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황후 쪽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서였다. ‘현현각에서 보았던 사람들은 거의 마마와 생명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또한.......’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연무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신후를 쓰기 위해 사전에 조사를 함은 물론 그를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것은 사실이나, 반면에 마마께서는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만약 꼬투리가 잡혔을 때, 아버님이 대신 다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하고 마마의 옥체는 보전하기 위함이지.
역시 의심이 가는 인물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하고는 연서강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하면 효기교위 문도학 쪽은 어떠한가. 그리 물어보니 연무강이 또 고개를 저었다. 근위기병단의 단장직인 효기교위는 위사의 아래에 있는 직함이었다. 즉, 연무강의 부하가 효기교위이니 효기교위의 부하도 또한 연무강의 부하가 되는 것이다.
그의 대답에 연서강은 인상을 썼다. 너무 이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무강이 기연조를 처치했을 때는 바야흐로 늦은 겨울, 여름인 지금과 무려 여섯 달이나 차이가 났다.
연서강이 전해들은 바로는 지금은 아직 ‘일’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도 잡히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 시행을 할지 결정이 나야 구체적인 계획이 짜이고 그래야 배신자도 기연조에게 무어라 전할 거리가 있을 터인데, 그런 게 전연 없었다. 심지어 ‘증거’로 삼을 만한 것도 없었다. 태의령이나 낭중의 사례처럼 의심을 받아봤자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허나 있었다.
‘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기연조에게 연씨 문중이 귀비마마께 해가 되는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린 배신자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막막했지만 그것만은 틀림없다.
기연조는 그래서 자신에게 녹우당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그도 윤곽을 잡고 싶어서. 때문에 자신을 통해 연무의를 부추긴 것일 터이다.
-하나 물어 보도록 하마.
연무강의 말에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기연조는 신후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알 수 없지만, .......
연서가은 좀 더 생각해보고 입을 열었다.
-아마 모를 거란 생각이 듭니다.
-허면, 이번 일로 기연조도 신후에 대해서 알게 되겠군.
자신이 기연조에게 가서 고자질할 것이 분명하다는 식의 말에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할까 하다가 연서강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전처럼 연무강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무리도 아니다. 자신이 연무강이라 해도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리라.
그래서 연서강은 변명하는 대신 쓰게 웃으며 이리 대꾸했다.
-그러지 못하도록 형님이 감시할 예정 아니었습니까.
연무강이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렇지.’하고 대답했다. 연서강이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대답이 연무강의 허를 찔렀나 싶어 연서강은 살짝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기연조를 위해 집안을 배신할지도 모르는 놈으로 연무강에게 남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배신할 생각이 없으니, 자신이 끝끝내 배신하지 않고 있으면 연무강이 얼마나 당황할까. 그런 꿍꿍이에서였다.
겨울의 끝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그 정도쯤은 남겨두는 것도 좋으리라.
-허면, 형님. 수상한 아우는 이만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장탁 위에 있는 서신 몇 개만 주워서 챙기고 연서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연무강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연무강과 그런 대화를 나눈 것도 벌써 사나흘 전.
연무의는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또 무얼 하고 있는지 며칠 동안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또 집으로 이전보다 활발하게 손님들이 드나들 것이라 여겼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효기교위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출입이 끊긴 것은 연무강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연서강은 연무의가 다만 조용히 칩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연무의가 어떤 일을 연무강에게 따로 명령했기에 그가 바빠져 집에 미처 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일 테다.
허나 덕분에 오래간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해서 연서강은 이참에 연의진이 있는 영의전에 한 번 들리자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연의진이 영의전으로 돌아간 이후, 단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보고 싶기도 하거니와, 또 연무강에게서 태의령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걱정도 되었다.
허나 진짜 신경 써야 할 것은 태의령 쪽이 아니라, 과도한 업무 쪽이었던 것 같다.
이러다가 의진 형님, 과로로 말라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가, 그런 걱정이 되어 연서강은 힐끗힐끗 연의진을 훔쳐보았다. 두어 시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웬만하면 계속 먹는 가게만 들러서 연의진의 배를 채워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준 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느냐?”
허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연서강 쪽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말없이 걷고 있던 연의진이 돌연 질문했다. 연의진이라면 분명 그런 질문부터 하겠지, 싶어 연서강은 그를 만나러 오기 며칠 전부터 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해서 자연스럽게 ‘네,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깨는?”
“좋습니다.”
연무강이 누른 것 외에는 딱히 무리한 적이 없으니, 이 대답 또한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서강이 자신 있게 대답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연의진이 안도하기는커녕 살짝 인상을 쓴다. 그리고서 다음 순간 연의진이 던진 질문에는 연서강도 결국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나를 보러 온다고 이제껏 미룬 약을 한꺼번에 먹은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잘 먹고 있어요.......”
사실은 영의전으로 오기 바로 직전에 ‘약이 제법 많이 남았네.’ 싶어 삼 일치 약을 한꺼번에 먹고 온 참이었다.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말끝이 누가 들어도 수상하게 느낄 정도로 흐려졌다. 그러니 연의진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해도 남용하게 되면 오히려 독이 된다, 서강아. 약 성분을 해독하느라 신장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 알고 있느냐. 너는 가뜩이나 몸도 좋지 못하면서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
“저, 그렇게 나쁜 몸은.”
“허면 만세도 제대로 못할 몸이 좋은 몸이란 말이냐? 또 삼시 세끼 잘 챙겨 먹는다는 애가 어찌 이리 바짝바짝 말라간단 말이냐. 그게 과연 좋은 몸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따가운 훈계에 연서강은 합, 입을 다물었다.. 과다한 업무로 연의진이 지친 것은 사실이나. 연무진이 딱 질색이라던 잔소리는 그대로인 듯 보였다.
억울했다. 그러는 의진 형님은 제 몸을 잘 보살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 따졌다간 연의진이 혹여 자신을 못되게 볼까, 싶어 연서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연서강은 ‘잘못했습니다.’하고 연의진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항복을 해도 연의진의 훈계는 계속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연서강은 괜히 연의진을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형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연서강이 자신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돌연 질문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연서강이 자신에게 질문할 만한 것이 무얼까 생각하는 것인지 연의진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게?”
마침내 그들은 경천문을 나와 금천이 흐르는 금천교 거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점심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기 때문에 혜문으로 향하는 길목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혹여 태의령께서 근래 어디로 출타를 하셨는지 아십니까?”
어째 질문이 수상타, 싶었는지 연의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쓴 소리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인 듯한 그 얼굴에 연서강은 재빨리 두 손을 내밀어 저었다. ‘아닙니다.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이더냐, 서강아.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허튼 짓이다. 무강 형님과 아버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 관심을 주지 마라. 거기는 고약한 곳이란 말이다.”
“그게 아니라, .......”
어물어물하며 연서강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태의령과 서신을 주고받는 듯 했습니다. 태의령께서는 영의전에 머물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여 의진 형님이 걱정되어.......”
그리 말하며 슬그머니 연의진의 눈치를 살피자, 연서강의 말에 연의진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현감호 어르신이 어찌 해서?”
전혀 관련이 없다, 여겼던 곳이 어쩌면 집안에서 꾸미는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도 영의전은 그가 일하는 곳이 아니던가. 개인이 암만 관련이 없다고 주장해도 그가 소속된 단체의 장이 관련 있으면 다 같이 엮여 들어가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다.
급속도로 흙빛이 되어가는 연의진의 안색을 보고 놀란 연서강이 ‘어쩌면.’하고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쩌면 아버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태의령과 서신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허나 혹시라도 태의령께서 개인적으로 무강 형님이나 아버님을 만나신 거라면 ‘일’에 관련될 확률이 높지 않나, 여겨져......., 그래서 근래에 태의령께서 어디로 출타를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던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연세가 있으시니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계신 탕약이 있긴 하시다. 허나 그에 관련해 현감호 어르신을 사적으로 부를 필요는 없으실 게다. 내가 있으니.......”
연의진이 고민하며 턱을 쓸었다. 그런 그를 연서강은 말없이 훔쳐보았다. 과연 의진 형님은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하지만 아닐 것이다.”
이윽고 그리 대답하며 연의진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연서강은 재빨리 얼굴표정을 밝게 치장했다. ‘그렇습니까?’하고 맞장구까지 치며.
“근래 영의전 일이 바빴던 탓에 현감호 어르신께서 출타를 하신 곳은 몇 되지 않는다. 황상과 후비 마마들을 제외하면.......”
연의진이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혜문 너머의 문현당(文現堂)과, 그래, 구릉벽(九陵壁) 너머에 있는 금륜관(金倫館)이 전부겠구나. 문현당은 현재 국경 문제로 경(傾)의 사신이 와 계시지 않으냐, 사신 중 하나가 풍토병을 앓고 있다하여 다녀오셨다.”
경의 사신이 수도에 와 있는 것은 연서강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초여름에 경과 맞닿아 있는 변방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가. 변방에서의 일은 아직까지도 종종 꿈을 꿀 정도로 연서강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경의 사신이 국경 문제로 하제국을 방문한 것은 벌써 시간이 꽤 지난 일이었다. 연서강이 말한 대로 연의향은 인질을 넘기는 대신, 경국 조정에 국경 너머의 땅까지 불태울 수 있게 허락해 달라 말한 것 같았다. 이에 경국 조정이 흔쾌히 허락하기에 앞서 하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즉, 의례적인 방문과 다름없었다. 하제국에게 ‘땅을 불태울 수 있게 허락한 것이지, 경을 침략해도 좋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온 거였다. 경국의 사정이 급하니 분명 반대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경국 사신이 일을 마치고 경국으로 돌아가야 연의향도 본격적으로 국경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겨울까지는 의향 누님의 일이 끝나지 않겠구나, 하고 연서강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연의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금륜관에서는 무술 교관 하나가 다쳐서 잠시 출타하셨지. 늦봄부터 지금까지 어르신께서 외무를 보신 것은 그게 전부다.”
“무슬 교관 말입니까?”
“누구였더라....... 이런 건 무강 형님이 더 잘 아실 텐데. 활과 승마를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다. 아, 그래. 거승주란 사람이었다.”
“한낱 무술 교관이 입은 부상임에도 태의령께서 직접 가셨단 말입니까?”
연서강이 묻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연의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무강 형님에게 소속된 자인지라....... 형님께서는 무인이 훈련 중 몸을 다치는 것을 몹시 싫어하신다. 해서 무강 형님에게 소속된 교관들은 무강 형님께 훈련 도중 몸이 다친 걸 들키지 않으려고, 종종 부상에 효과 좋은 약을 태의령께 여쭈러 오신단다. 고통 없이 빨리 나아야 한다고 야단들이었지.”
연무강이 그렇다니 그 아랫사람들이 부상에 유난스러워질 만도 했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연의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맹수와 같은 상관을 만나 그 아랫사람들이 참으로 고생이다. 백의궁이 자랑하는 철벽 방어는 연무강에게 시달리는 아랫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아랫사람으로 두면 고용한 보람이 느껴질지 모르나 상관으로는 절대 만나도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교관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 아마도 네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연서강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혹여 모르니 태의령께서 무언가 영문 모를 심부름을 시키시면 조심하십시오.’라고 덧붙이는 말도 그는 잊지 않았다. 연의진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연의진이 웃으며 연서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대도.’
“.......”
연의진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거두어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연서강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아마도 연의진은 알지 못할 것이다. 연서강이 ‘거승주라.......’하고 다시 한 번 그에게서 들은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단순히 연의진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태의령에 관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물론 순수하게 연의진이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대화의 주안점은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연무강과의 대화로 연서강은 배신자가 꼭 ‘신후’의 존재를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후’의 존재를 몰라도 연씨 문중에서 귀비마마를 상대로 무언가 수를 쓰고 있구나, 그 정도만 알아도 괜찮은 것이다. 허면 범위는 대폭 축소된다.
난전 마마께서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자가 대상이 아니면 ‘일’에 대해 아예 침묵하고 계시니, 거기서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연무의와 연무강은 예의 그 낭중의 경우처럼 아예 일을 하는 사람이 수상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교활한 수를 쓰니, 그 쪽에서도 말이 새어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허면 남은 것은 효기교위와 태의령 뿐.
그러나 효기교위는 아닐 것이다. 효기교위는 일에 관여된 정도를 보아 ‘신후’에 대해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만약 그 쪽에서 말이 새어나갔다면 ‘신후’에 대한 정보까지 함께 새어나갔을 터.
허나 연서강은 기연조가 신후에 대해서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후에 대해 기연조가 알았다면 그는 자신을 떠보는 말을 하는 게 아닐, 당장 민울이라던 낭중을 의심하며 그녀를 추궁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실수라고는 하지만 몇 번이나 귀비나 그녀의 아들이 소화하지 못할 음식을 올린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하게 보였다. 그 때문에 귀비가 낭중을 심하게 호통 쳤다는 내용도 태의령이 보낸 서신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태의령도 귀비에게 무어라 한 소리 들은 듯, 서신에는 연무의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 정도의 소심한 불평과 불만도 적혀 있었다.
최근까지 날아온 서신에서도 그런 비슷한 소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민울이란 낭중은 그저 ‘일 못 하는 낭중’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고, 아직 별 다른 의심은 받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신후는 무려 ‘독’이다. 그것도 음용을 해야 효력이 나타나는 ‘독’이었다.
귀비마마와 그녀의 아들이 먹는 음식에 의심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기연조가 아직 ‘신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기연조가 신후에 대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말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는 곳은 태의령 뿐인 것이다.
해서 연서강은 연의진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혹시 태의령이 근래에 누군가를 따로 만난 적이 없는지. 늦봄부터 지금까지 태의령이 외무를 나간 적은 단 두 번. 외국의 사신이 기연조와 결탁했을 가능성은 없고 의심이 되는 사람은 역시나 그 무술교관 뿐이었다. 하물며 그 무술교관은 연무강의 하관이라고 하지 않은가.
“무얼 먹고 싶으니.”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하고 반문하니 그의 옆에서 연의진이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다시 묻는다.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게 있느냐? 내가 사도록 하마.”
온정과 상냥함으로 뭉친 그 목소리가 따스한 봄볕 햇살과도 같다. 가족들에게 외면 받았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현재 연의진의 태도는 연서강에게 생소하지만 포근하고 온유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연서강의 대답에 연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뭘 그런 것을 다 죄송하다고.’ 그러나 연서강은 정말로 연의진에게 미안했다. 연의진이 ‘일’에 관련되기 싫은 마음을 그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놓고선 그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을 했다. 그것도 그가 알아챌 수 없게.
하지만 지금 죄책감을 느끼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기연조에 의해서 연의진이 다치는 것 보다야. 자신은 이제 녹우당에서 소요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연의진 만큼은 영의전에서 별일 없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했으면 좋겠다.
웃으며 연서강은 대답했다.
“형님이 사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정말로 뭐든지 괜찮았다. 가족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사주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 *
거승주는 평민 출신으로 이십 년 전 봄에 무과(武科)에 합격한 사람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그는 지방 군사지휘관인 도위에 임명 되어 십여 년을 지냈다. 그 후 동맹국과 타국 간의 전쟁에 지원군으로써 출전했다가, 승마와 활쏘기 능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뒤 무술 교관으로 추천을 받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온 동맹국의 사신으로부터 ‘하에서 보내 준 지원군 중 거승주라는 장군이 무척 말을 잘 타고 활쏘기가 출중하여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쏘아 떨어뜨리더라.’라는 칭찬을 들은 황태후가 그 칭찬을 대단히 흡족히 여겨 변덕을 부린 덕이었다.
사실 평민 출신 무관 중에는 직위가 무술 교관까지 오르는 경우가 잘 없었기 때문에, 거승주의 승진은 무척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평민 출신 무관을 무술 교관으로 임용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극히 단순했다. 지방군과 달리 중앙군에는 평민이 아닌 중앙 귀족들의 자제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이 평민 출신 교관에게 훈련을 받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평민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귀족으로서의 위신을 깎아먹는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해서 이례적인 특급 진급으로 무술 교관에 임해졌다고 하더라도, 귀족 자제들의 속사정 때문에 거승주의 마음고생은 무척 심했던 모양이었다. 자연히 그는 무술 교관이란 자신의 직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그리고 무술 교관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거승주를 보다 못한 연무의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그 조치는 바로 제 아들인 연무강의 밑으로 그를 배정시키는 것이다.
물론 연무강의 밑에도 귀족 출신은 많았고 다른 귀족 출신 무관들과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을 은근히 깔보고 있었다. 허나 연무강은 그런 귀족들의 속사정을 이해해주는 무른 성미도 아니었거니와, 엄연히 상관인 무술 교관을 깔보는 병사나 군사들을 가만히 두고 보는 사람도 아니었다. 때문에 귀족들이 암만 거승주에게서 훈련을 받는 걸 고깝게 여긴다 하더라도 연무강의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연무강의 밑에 와서야 비로소 거승주는 무술 교관으로서 제 소임을 충분히 해내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연무강을 따르는 것도 당연했다. 또 그런 사연이 있으니 아무도 그를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연무강 또한 그를 가까이 두고 신뢰했다. 무엇보다 연무강이 거승주에게 ‘일’에 대해 무어라 언급한 적도 없으니 당연히 그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연서강이야 그런 과거의 이야기들을 그저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니, 거승주가 연무강을 배신할 리가 없다는 세간의 인식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현재로선 그 말고는 딱히 의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위사님의 아우 되시는 분께서 금륜관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무관들이 훈련을 하는 금륜관은 저녁 가까이가 되어서야 좀 한산해졌다.
여름날 곰팡내가 나기 시작한 서적들을 보수하는 일로 근래 서서원도 바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기관들에 비하면 한가한 것은 사실이었다. 바빠져 봤자 오후 일찍 끝났던 일들이 오후 늦게 끝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마쳐야 할 일을 끝내자마자 연서강이 향한 곳은 금륜관이었다.
오후의 금륜관은 오후 훈련을 하는 무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당장 교관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힘들어 보여서, 연서강은 금륜관이 한산해질 때까지 금륜관 밖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앞을 오가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거꾸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 거승주란 자가 대체 어떤 자인지 그 대답을 듣기도 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나게 된 거승주는 무술 교관이란 직함에 맞게 온 몸을 덮은 근육이 돌처럼 탄탄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연무강보다는 연상이지만 연무의보다는 한참 연하로 보였다. 가늘고 긴 눈과 유난히 큰 입이 인상적인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지내온 세월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갑작스럽게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지라 한가합니다. 허니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 위사께서 무언가 제게 전하라는 이야기라도 있었습니까?”
평민 출신이라고 하지만 중앙군에 서관된 지 오래되어서인지 말하는 방식이나 단어 선택 따위에서 다른 귀족들과 별 차이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험상궂은 느낌이 있는 생김새에 반해 말하는 목소리는 무척 공손하고 선 태도는 반듯해서 다른 이들보다 잘 배운 사람처럼도 보였다.
이 자가 정말 기연조와 내통하고 있는 자인가.
과거나 그 주변에 떠도는 이야기, 심지어는 용모나 말하는 목소리까지 도저히 ‘배신’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자였다. 만약 이 자가 정말 기연조와 내통하고 있는 자라면, 대체 자신의 형님은 이 자가 수상하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를 챘단 말인가. 그 경위와 방법이 지금의 연서강으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상담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허나 지금 현재 거승주의 앞에 있는 사람은 연무강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또 지금 거승주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도 자신이지, 연무강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거승주가 배신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든 해서 알아봐야 할 사람도 자신이었다.
자신이 해야만 했다.
연서강의 말을 들은 거승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담? 위사님의 아우 되시는 분께서 처음 보는 제게 무슨 상담을 할 게 있습니까.”
“별 것 아닙니다만.”
하고 말한 연서강은 잠시 입을 다물고 주변을 몇 번 돌아보았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사람이 많군요.“
그렇게 말하니 덩달아 거승주도 주위를 둘러본다. 오후의 금륜관에 비하면 사람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궐내의 다른 곳과 견주어 봤을 때 금륜관은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금륜관이 근무지인 거승주는 몰라도 이곳 사람이 아닌 연서강으로서는 충분히 사람이 많다고 느낄 만한 인원수였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거승주가 아주 잠깐 고민하더니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하고 연서강을 금륜관 내부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여러 가지 연습용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 근처였다. 훈련시간이 종료된 탓에 과연 창고 근처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거승주가 묻자 연서강은 약간 고민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별로 큰일은 아니고......., 제가 일전에 변방에 다녀왔었는데 그 일에 관하여 혹시 전해 들으신 바가 있으신지요?”
“알다마다요. 아, 그러고 보니 변방에서 입은 부상은 다 나으셨습니까?”
그리 묻는 것을 보니 자신이 변방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하기 쉽겠지, 싶어 연서강은 이어 말을 하려고 했다. 거승주가 말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한 때 행방불명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안 그런 척 해도 위사님께서 마음을 쓰시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예?”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상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때문이었다. 고개가 절로 모로 기울어졌다. 방금 참으로 괴이한 말을 들은 듯 한데.
헌데 그런 연서강의 반응에 거승주가 더 의아해했다. ‘아니.’하고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당시 연위사님의 상태가 얼마나 이상하고 불안정하였었는지 직접 보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겁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위사님과 함께한 시절이 몇 년인데요, 저희들이야 알지요. 특히나 아우님께서 절명하였다는 소리가 나돌았을 때는 정말.”
거기까지 말하고 거승주가 잠시 말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말하는 목소리가 방금 전과 달리 어두웠다.
“.......지금도 대체 무얼 잘못해서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흠씬흠씬 두들겨 맞아서.”
“.......”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너무 두려워서 부당하다는 생각은커녕 의문이나 억울함조차도 떠올리지 못하는 절대적인 공포였다. 당시 일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살이 떨린다는 투로 거승주가 중얼거린다.
“연장군님도 괜히 저희들 편을 들어주었다가 위사님께 몽둥이세례를 당하시고.”
‘연장군’이란 말에 연서강은 반사적으로 연의향과 연서령을 생각했다가, 곧 둘째 형인 연무진 또한 장군직에 임하고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거승주의 단편적인 말에서 간신히 연서강은 교관들이 연무강에게 혼이 났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던 연무진도 덩달아 함께 혼이 났다는 사실을 조합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연무강이 그 성격에, 제 밑 교관들을 혼낸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는가. 무술 교관으로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연서강이었지만, 평소 연무강이 무술 교관들을 엄격하게 다루었을 것이란 사실 정도는 어렵잖게 추리할 수 있었다. 허나 혼도 많이 났겠지. 생각해보니 이상한데서 의진 형님과 똑같군....... 시답지 않은 감상이 곧바로 이어진다.
허나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연서강은 어째서 그 일이 자신과 관련이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거승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상하게 대답한다.
“그야 소제의 소식이 묘연하니 심기가 불편해져서 그러시지 않았겠습니까. 자기 동생이 절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태연해할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다. 반사적으로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연서강이 소속되어 있는 연씨 문중은, 아니, 연무의와 연무강만큼은 그럴 리가 없다. 태상경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나. 자신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태상께 연서강의 소식을 알아 봐 달라 부탁한 사람은 기연조 뿐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사람은 왜 이리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건가.
일순 마음이 심란해져 연서강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것을 거승주가 무어라고 착각했는지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 절대로 아우님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변방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쁘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습니다. 참말로 아우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위사님도 아우님께서 무사하신 것을 확인하신 후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으셨으니 말입니다.”
마음을 놓으라고 한 말에 오히려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연서강은 그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참 괴이한 말이라 느꼈는데 끝까지 괴이한 말이었다.
자신의 행방이 묘연한데 어째서 큰 형님의 심기가 불편해진단 말인가. 차라리 기분이 좋았으면 좋았지. 자신이 막 변방에서 돌아왔을 때를 떠올리면 더 그랬다. 그때, 그 자리에 거승주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말은 절대 하지 못했으리라. 돌아오자마자 멱살을 잡히고 무어라 큰 소리를 들었는데......., 말도 안 된다. 또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또 어땠었던가. 아예 죽어버리란 소리까지 듣지 않았던가. 그런 큰 형님이, 그럴 리가.
헛웃음조차 되지 못하는 농이었다. 거승주의 말은.
“아우님?”
연서강이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지 거승주가 연서강을 불렀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하고 말했다. ‘잠시 생각을 좀.’ 그리고서 연서강은 역시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결론을 짓고 원래의 화제로 다시 넘어가려고 했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거승주가 과연 배신을 했나 안 했나, 이지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연무강이 보인 일련의 행동이 아니었다. 허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흐름이 뚝 끊긴 머릿속은 이미 백짓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아무 생각도, 지어(至於) 이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어서 생각을, 거승주가.
“.......”
나는 대체 무얼 말하려고 했더라?
연서강은 순간 당황했다.
후두둑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심장이 녹아 거꾸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충격을 시작으로 쿵쾅쿵쾅 거칠게 가슴이 요동쳤다.
뭐였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온 것은 아니었다. 분명 거승주와 기연조가 연락을 취하고 있는 사이란 것을 밝히기 위해 온 것이었다. 자신이 기연조의 절친한 벗이었던 사실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거승주의 말문을 열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우님?”
눈앞에서 거승주가 다시 자신을 부른다. ‘아니요.’ 연서강은 그 부름에 간신히 방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상담하려고 했던 것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겨우 거승주를 그런 말로 속여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그랬지. 그랬다. 그러니까 이 다음에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더라.
긴장을 했는지 손가락 끝이 차가워진다. 지난 날. 연무의가 지방으로 자신을 내보내려고 했었을 때도 생각이 이리 꽉 막혔었다. 허나 그때도 무어라 대꾸할 정신 정도는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할 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헌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기억을 해야 한다. 거승주가 기연조와 연관이 있는지 그것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것도 거승주가 자신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래서 자신이 어떤 계획을 세웠더라. 무슨 수로 그것을 알아내려고 했더라. 모처럼 떠올린 생각들이 마치 물속에 빠진 소금마냥 사르륵 녹아 사라져 버렸다. 빠뜨린 소금이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니요.”
그래, 그것.
똑바로 말할 수 있는 대답은 아까부터 이것 하나 뿐이었다.
“아니요.”
연서강은 거승주를 정면으로 보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그래선 안 된다.
자신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던 사람은 수도에, 기연조 하나면 충분했다. 기연조 하나면 족했다. 기연조 밖에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그는 .......그래선 안 되었다.
도망치듯 금륜관을 빠져나와 연서강이 걸음한 곳은 청다관이었다.
일전에 태상과 함께 왔을 적 그곳이 무척 고요하고 적막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온 것이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해서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대충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향이 좋은 매화차를 한 잔 주문한 다음에, 연서강은 제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따끈따끈한 것이 열병이라도 단단히 걸린 사람 같았다.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눈으로 봐도 마찬가지였는지, 청다관의 점원이 ‘저어.’하며 얼음이 든 산수유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산수유가 몸에 열 내리는 데에 좋으니 한 잔 드세요.’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연서강은 산수유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것이 속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몸속의 열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시, .......가면 안 되겠지?
조금 정신이 돌아오고 나자 그 생각부터 들었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또 가서 말을 붙이기는 힘들다. 암만 정신이 없어도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허나 후회해봤자 이미 지난 일.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었다. 그것도 거승주가 알아차리지 못할 방법으로.
차가운 산수유 찻잔 겉면에 송송 물이 맺혔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연서강은 대체 무엇이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무엇일까. 거승주가 기연조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그렇다고 직접 태의령을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의령을 찾아간다는 것은 즉, 영의전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의진을 다시 보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대체 뭐라고 둘러대고 태의령을 뵙길 간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매화차가 나왔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원이 연서강의 앞에 당초문양 백자 개완(蓋碗: 뚜껑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과 같은 문양이 그려진 백자 차관(茶罐)도 그 옆에 내려놓았다. 찻잔의 뚜껑을 여니 노르스름한 매화차가 담겨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백매(白梅)와 홍매(紅梅)가 한 송이씩 동동 떠 있어 운치가 상당했다. 따뜻한 것을 쥐고 향긋한 차향을 맡고 있으려니 소란스럽던 마음이 그제야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정신도 차렸고 혼란스럽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시켰으니 연서강이 다시 해야 할 일은 생각이었다.
거승주와 기연조가 아는 사이라면,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서로 연통을 주고받았다면 연통을 주고받은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흔적만 찾아내면 거승주가 배신자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허면 그 둘은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았을까.
돌연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조금 전 보았던 거승주의 얼굴이었다. 화난 연무강이 무서웠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방법으로 기연조와 연락을 취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연무강은 백의궁의 위사였다. 그가 지키는 백의궁 내에서 거승주가 기연조와 몰래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백의궁 내에서 기연조와 단둘이 만났더라면 연무강이 그것을 놓쳤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연무강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와 별 접점이 없는 연서강도 아는데 연무강과 함께한 세월이 몇 년에 달하는 거승주가 모를 리가 없었다.
“.......”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승주와 기연조가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을 거라는 추측이 성립하기에는 무리한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거승주는 평민 출신의 무관이었다. 허나 기연조는 귀족 출신의, 심지어는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명문가 출신의 무관이다. 두 사람은 출신도 다르거니와 일하는 영역도 달랐다. 심지어는 연령대도 달랐다. 거승주가 중년의 남자임에 반해 기연조는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청년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사적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대체 어떤 접점이 있어서?
너무 다른 두 사람을 잇는 접점을 억지로라도 만들려 한다면 접점은 하나뿐이었다. 황태후가 거승주를 무술 교관에 임명시켜 주었다는. 허나 그것도 까마득하게 옛날 일이었다. 그때 일이 연이 되어 거승주가 황제 쪽 편을 들 수도 있겠지만 기연조와 개인적으로 알게 될 계기로는 모자랐다. 무엇보다 황태후 마마께오선 거승주를 무술 교관으로 임명할 당시 기연조는 어린아이였다.
그럼 무엇일까. 그 둘의 접점. 그리고 큰 형님 몰래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방안.
“.......”
아는 게 적어서인지 아무리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도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자 연서강은 괜히 차만 연거푸 마셨다. 백자 차관을 들어 빈 찻잔에 새로이 물을 채우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에 공백이 찾아왔다.
침묵이 흐르는 건물 안에서 연서강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슬슬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이라선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쌀 익는 냄새가 난다.......
“차.......”
석양에 젖은 거리를 내려다보다 연서강은 문득 지난 봄에 기연조와 녹차를 사러 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되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홍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한참 동태를 살피던 중이기도 했다.
그때, 연서강은 누이동생에게 저렴한 녹차 잎을 가득 사 달라 부탁을 받은 기연조와 함께 거리로 나왔었다. 평소 기연조의 누이동생은 차를 즐겨 마셨는데, 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찻잎을 넣은 베개까지도 만들어서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베개를 만들 저렴한 녹차 잎을 사러 나오게 되었노라는 말을 기연조에게 전해 듣고서 연서강은 과연 부잣집 아가씨의 취미라 그런지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취미?
그때 연서강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쳐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현재 상황이 확실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차 한 잔, 추억 하나 되새김질 할 시간도 주지 않으니.
“취미라.”
출신 배경도 다르다. 활동하고 있는 분야도 다르고, 소속되어 있는 곳도 다르다. 살아온 방법 또한 다르거니와 나이 차이도 심했다. 사는 곳마저도 다른 두 사람의 접점. 그 접점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지 그 방법 또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취미 생활이라면 암만 서로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이라도 공통적인 부분이 능히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승주의 취미를 연서강은 당연히 몰랐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술 교관이라니 그쪽에 관련된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 정도만 가능했다.
허나 기연조는 달랐다. 허울만 좋았던 친구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기연조가 무엇을 즐기고, 어떤 것을 향유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작점을 거승주가 아니라 기연조로 정하고 추리해 나간다면 어쩌면 거승주의 조건과도 들어맞는 공통된 취미가 있을 지도 몰랐다.
문제는 기연조가 즐겨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차, 는 아니야.”
허나 일단 차는 아닌 듯 했다. 누이동생을 따라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기연조의 차 취향은 무척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기연조의 기씨 문중 또한 명문가라 굳이 밖에 나와서 차를 마시지 않아도, 집안에서 충분히 향기 좋고 품질 좋은 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 기연조의 사정에 평민 출신인 거승주가 맞춰 차를 즐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시작(詩作)? 서예? 바둑?”
이어 연서강은 기연조가 평소에 즐겨 했던 것들을 줄줄이 생각해냈다. 문관이라 그런지 기연조의 취미도 문예 쪽에 맞춰져 있었다. 시작, 이라니 그것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서예? 아니, 서예도 무관인 거승주가 즐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둑. 바둑이라면 능히 그럴 만도 했지만 바둑 역시 기연조는 집안 어른들과 두는 것이 전부였다. 어르신을 상대할 때는 바둑만한 것이 없다고 기연조가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 그림은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음악, 음악은 즐기기는 했지만 일부러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작곡 역시 취미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허면, 허면 무엇일까.
“.......독서?”
기연조는 책을 읽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옛 성현들의 말씀이 적힌 고서부터 시작하여 옛날 역사서까지, 연서강과 마찬가지로 즐겨 책을 읽었던 것이다. 물론 거승주가 어려운 고문이 적힌 고서를 읽는 취미를 가졌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책, 시중에 필사본으로 유통되는 소설책들은 어떠할까.
남녀 간의 연애나 민간 설화 등 잡다한 소재들로 구성된 이야기책들이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연서강도 익히 아는 바였다. 쉬운 문체로 간결하게 쓰인 소설책은 당연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인기 있는 작가의 새 책을 가장 먼저 필사해 가져다 놓은 세책점(貰冊店)은 사람들이 터져나갈 듯이 많았고, 예약도 한 달 뒤며 두 달 뒤까지 이어지곤 했었다. 책이 모자라 가끔 돈을 받고 책을 베껴 주는 임사(賃寫)를 하는 문인들도 다수 있을 정도였다.
기연조가 임사라면 자신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던 것을 연서강은 기억하고 있었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라고 물으니 기연조가 대답하기를 그 책의 결말이 다소 미흡한 듯하여 자신이 필사할 때 약간 수정을 보았다고 말까지 했었다.
실지로 누가 필사했느냐에 따라 원본과 필사본은 내용이 조금씩 달라, 누가 필사했느냐에 따라서 그 인기가 나누어지기도 했었다. 때문에 같은 제목의 소설책을 보더라도 그 책에 대해 전부 안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필사한 것들까지 모두 읽어봐야 비로소 그 책을 전부 읽어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사본의 이런 묘미 때문에 세책점에서 책을 빌려보는 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필사를 한 여러 문인들의 개성 있는 문체와 저마다의 내용 전개에 흥미를 느끼고 책을 빌려보았다. 연서강 또한 마찬가지에서 세책점에서 몇 번 책을 빌려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기연조도 틈틈이 신간이 나오면 책을 빌려 보곤 했던 것이다. 둘이 만나면 공통된 책에 대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들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하니 세책점의 소설책들은 기연조의 취미 중 유일하게 거승주도 즐길 만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소설책의 대부분이 필사본이라 대여해 간 누군가가 책 중간 중간 첨삭을 할 수도 있었고, 감상을 적어 놓을 수도 있었다. 또한 책 끝에 있는 몇 장의 백지(白紙)에다가 이런 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이어 적어놓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세책점의 주인들은 책이 돌아올 때마다 새로 기록된 감상이나 여타의 여러 글들을 다른 곳에 옮겨 두었다가 원본을 쓴 사람에게 전달해주곤 했다.
“.......”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차관에는 매화차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다 마시고 일어섰다간 도성 내의 세책점이 모두 문을 닫을 판이었다. 이미 바깥은 석양은 물론이요 석음(夕陰)까지 저물어 슬슬 밤의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앞으로 몇 시진 뒷면 늦은 밤이 되어 세책점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될 듯 했다. 허니 서둘러야 했다.
도성 내의 세책점은 모두 열 세 개.
오늘 안에 그 모두를 돌아봐야 했다. 그 세책점의 책들 중에는 분명, 기연조는 물론이요 거승주가 빌린 책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책 안을 뒤져보면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 *
호롱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주홍 불빛에 비친 연무의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문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서신을 보고 있었다. 유려한 글씨체로 쓰인 서간을 모두 읽고 연무의는 얼굴을 구겼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진노했음을 그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비록 그 색이 탁해졌지만 여전히 예리한 기운을 품은 연무의의 두 눈은 서신을 모두 읽은 후에도 한참 동안 서신 안에 묶여 있었다. 기어코 부들거리던 입매가 풀리고, 그 사이에서 ‘고얀, 놈들.’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버님.”
반사적으로 그리 물었지만, 사실 연무강은 답을 듣지 않아도 왜 연무의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편지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그리고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지 추측하면 당연히 나오는 결과였다.
저 서신에는 아마 명년(明年: 내년)이 되면 귀비 비씨의 소생의 황자를 새 황태자로 삼을 예정이라는 말이 진실인 듯 보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다.
연무의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라의 정당한 황태자가 누구인지는 빤하거늘, 어찌 황상께선 그런 허튼 생각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참으로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도 못하고 계집질에 빠져 황제로서의 본분도 잃었단 말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무의의 손안에 있던 서신이 와작 구겨졌다.
“기연조가 연서강에게 했던 말이 참말이라.......”
연서강이 기연조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을 때, 연무의는 불같이 진노하였다. 허나 그 순간조차 연무의는 냉정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연무의는 계산했다. 연서강이 한 저 말은 과연 ‘진실’인가. 정확히는, 기연조가 연서강에게 ‘진실’을 말했을 것인가. 자신이 기연조로부터 기밀을 빼낼 목적으로 연서강을 이용했던 적이 있는 만큼 연무의는 그 반대의 경우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기연조가 연서강을 이용할 가능성을 말이다.
그래서 연무의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력인 연무강을 시켜 연서강이 전한 그 말의 신빙성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조사에 돌아온 결과물이 바로 지금 연무의의 손 안에 있는 서신이었다. 서신에는 기씨 문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대답과 함께, 황제가 명년에 황태자를 바꾸기 위하여 믿을 수 있는 몇몇 신하들에게 이미 귀띔을 넣은 상태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조회(朝會) 때 백관들 앞에서 계획을 밝히면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할 것이 뻔하니 아예 비밀리에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내년에 신하들에게 선포만 할 작정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어사대(御史臺)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보였다.
“그 놈이 마마를 알현하게 해 달라 부탁 한 것이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던가.”
연무의가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연무강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본질적으로 보면 연무의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말만을 하기 위해 황후마마를 알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아직 연서강이 황후마마를 알현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연무의는 혀를 쯧쯧 찼다. ‘대뜸 마마를 만나서 무얼 할 작정으로.’ 연서강이 무얼 할 작정이었는지 연무강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역시 침묵했다.
다시 한 번 방안의 호롱불이 출렁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연무의가 문득 한 쪽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헌데 어째서 그놈이 저번에 왔을 때는 바로 ‘말’하지 않고, 마마를 알현케 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꼬. 말하려면 좀 더 일찍 말하는 게 좋을 성 싶은데.”
연무의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그냥 놓아두면 분명 며칠 안에 연서강을 직접 불러들여 이유를 물을 것이 분명했다. 연서강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무의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쓸데없는 충돌은 피하자 싶어 연무강은 비로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말씀드려도 아버님께서 믿지 않으시고 허투루 보고 넘기실까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
그 대답에 연무의가 힐끗 연무강을 쳐다보았다.
“요사이 정말 서강이와 사이가 좋아졌느냐? 말하는 것이 예전과는 퍽 다르구나.”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묻는 말에 연무강은 간단히 대답했다.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하신 분은 아버님이 아니셨습니까? 가급적 아버님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연무강은 연무의를 잘 알았다. 이렇게 떠보는 듯한 질문에 조금이라도 당황하거나 대답이 막히면 곧바로 공격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가끔 연무강은 연무의의 이런 끈질긴 성미가 사냥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물리면 맞아 죽을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은 사냥개. 상대가 지쳐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한 번 문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연무강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납득하지 못할 것은 아니란 생각을 했는지 연무의가 ‘뭐,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만.’하고 중얼거린다.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무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께 말씀드리시겠습니까?”
‘황후마마’에 대한 이야기는 연무의에게 아주 좋은 화젯거리였다. 황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연무의가 다른 생각을 한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연무강의 태연한 질문에 연무의가 엉망으로 구겨진 편지를 책상 위에 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암. 그래야지. 마마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것 아니냐.”
황후마마께서도 이미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셨다.
“아버님께서 직접 말씀드리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이런 일을 누가 전하겠느냐. 들으시면 분명 충격이 크실 터이니 내가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을 보니 연무강은 어째서 황후가 연무의를 속이는 것을 망설였는지 알 듯도 했다. 자신을 진실로 걱정해주시는 이를 속여야 하니 황후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것도 당연했다. 허나 연무강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허면 내일 여린전에 미리 연통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연통에는 ‘모쪼록 아버님께서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행동해 주십시오.’란 말도 함께 전해야 할 것 같다. 황후마마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연무의가 보통 인물이 아닌지라 혹여 눈치를 채지는 않을까 연무강은 염려되었다.
“그렇게 하여라.......”
말을 마치고 무언가 생각할 것이 많은지 연무의가 두 눈을 감는다. 내일 여린전에 가서 무어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황후마마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아버님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버님께서 여린전을 다녀오시면 드디어 무언가 확실히 결정 나겠군.
적당한 때를 노리며 지루하게 기다렸던 것도 이제 끝인 듯 싶었다. 실행할 때가 정해지지 않았다 분이지 일을 진행할 준비는 이미 모두 마친 상태라, 연무의가 여린전을 다녀오더라도 따로 또 뭔가 준비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다만 계획에 어디 못 보고 허술하게 넘긴 곳은 없는지 돌아보기만 하면 될 듯 했다.
.......배신자라.
허술한 곳, 하니 떠오르는 단어가 그거여서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소자는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연무강의 말에 연무의가 어서 가보라는 듯 휙휙 손만 내저었다.
연무강이 성헌당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하인이 하나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불붙인 초롱을 들고 있기는 했으나 고작 연무강을 안내하기 위해 옆에 붙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과연 그 짐작이 맞는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연무강을 열심히 쫓아가며 하인이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막내 도련님께서 세책점에서 책을 잔뜩 빌려오셨습니다.”
“세책점?”
그가 살짝 인상을 쓰자 하인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기 동문(東門) 근처에 있는 세책점에서 어떤 연유이신지 책을 한아름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들고 바로 방에 들어가시더니 그 후로는 밖으로 전혀 걸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그 놈이 예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또 쓸데없는 책이나 보고 앉았구나, 하고 생각하던 연무강은 그러나 다음 순간 걸음을 딱 멈추었다. ‘아니지, 아니지.’ 저절로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연서강이 책이라면 선서(善書)는 물론이요 온갖 잡학서까지 가리지 않고 읽는다는 것은 연무강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었으니. 과거에, 그런 연서강을 보고 부친인 연무의가 ‘저 놈은 커서 뭘 하려고 저런 것들이나 보고 있단 말이냐.’라고 혀를 차는 것을 연무강은 종종 본 적 있었다.
연무강 또한 그런 연무의의 의견에 동의했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책만 잔뜩 보고 있는 것인지 연무강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이란 것은 학문을 수양하기 위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책만 본다면 그리 한심하다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연서강이 보는 책에는 부녀자나 평민들이나 보는 소설책과 신변잡기 식의 도통 쓸모없는 내용의 책도 있었고, 요리 책이나 괴담, 민담을 모은 책도 있었다. 연무강의 입장에서는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이었다. 녹우당에 박혀 있을 때도 그런 기이한 다독은 여전해서 연서강이 세책점을 다녀왔다고 하면 연무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한심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쓰며 턱을 쓸었다. 무슨 꿍꿍이지, 이놈이? 절박하게 ‘일’에 대한 정보를 바라고 자신에게 매달렸던 게 언젠데, 지금은 태평하게 소설책이나 읽고 있다니. 그러나 암만 해도 한심하다는 생각은 전연 들지 않았다. 그 의도만이 무척 궁금할 뿐이었다. 대체 왜?
“.......”
그러고 보니 저녁에 연서강에 대해 이러한 보고를 듣기도 했었다. 연서강이 무술 교관인 거승주를 찾아갔더라는, 해서 거승주를 불러 물어보니 그는 연서강이 자신에게 무언가 상담을 하러 왔었다고 대답했다. ‘상담?’하고 되묻는 말에 거승주는 ‘그것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덧붙여 대화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연서강이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온 목적도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고도 하였다.
또 며칠 전에는 연서강이 영의전에 갔었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연의진이라도 만나러 갔었나 보군. 그렇게 중얼거리니 병사로부터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이 날아왔다. 연의진을 만나 늦점심을 함께 했다고 한다.
연의진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지금 영의전이 무척 바쁠 시기란 것을 연무강은 잘 알고 있었다. 연의진을 마음대로 불렀다가는 유능한 일손을 빼앗긴 태의령 영감이 분명 울상을 하고 끝도 없이 투덜거릴 것이 뻔했다. 다 늙은 할아범이 징징거리는 소리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다. 거기다, 자신에게 투덜대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그가 멋대로 연무의에게 헛소리를 하면 곤란해진다.
현재 연무강이 연서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황후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었다. 태의령의 말을 들은 연무의가 자신이 왜 그렇게 연서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 곤란했다. 그때, 아버님의 생각이 황후에게까지 미치게 되면 작전은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낱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어찌할까요?”
초롱불을 든 하인이 묻는다. 그 목소리에 연무강은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갔다.
거승주, 연의진, 소설책이라......., 아니,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금륜관가 영의전, 그리고 세책점. 그것들이 대체 기연조와 무슨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생각나는 게 딱히 없었다. 잠시 생각해보던 연무강이 입을 열었다.
“.......자정이 넘어도 방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사람을 시켜 간단한 마실 거리와 과일을 들려 보내거라. 혹시 불을 켜놓고 잠이 든 것이라면 담요로 몸을 덮어 주고.”
연서강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 그것은 자신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연서강이 밤늦도록 자지 않고 있는 것이 연무강은 신경이 쓰였다. 여름 감기가 간신히 떨어진 것 같은데 늦게까지 자지 않고 있다, 또 감기가 들면 어쩐단 말인가. 그것도 기연조를 위해 그리 열심인 것 같아서 더더욱 마음이 편치 못했다. 기연조, 기연조, 저놈은 대체 어디까지 제 몸을 축내면서 기연조를 위할 것인가. 기연조 놈을 하루 빨리 없애지 않는 한 저놈의 멍청한 짓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저절로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곧 연무강은 ‘아니야.’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지, 아니다. 기연조 놈을 위해 그 놈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 노력은 결국 허사가 될 뿐이다. 자신이 있는 이상 기연조는 결코 녹우당에서처럼 연서강에게 쉽사리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연서강이 기연조를 위해 무얼 하든 그 정도쯤은 내버려 둬도 괜찮을 터.
“언제 불이 꺼지는지 지켜보고 후에 내게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연무강의 명령에 하인이 다소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무강 답지 않은 명령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연무강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자 하인도 화들짝 놀라며 초롱불을 들고 연무강의 앞에 섰다. 그제야 어둔 밤에 불을 들고 연무강을 안내한다는 원래의 제 할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 아래로 초롱불의 주홍 불씨만 불안하게 빛나다가 결국 사라졌다.
* *
책장을 넘기던 연서강의 손가락이 멈췄다. 책장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다.
“.......”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서 조심스레 ‘그것’을 책 사이에서 꺼내 손가락 위에 올려두고 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연서강의 눈에는 착잡함과 서글픔이 섞여 있었다. 어찌 해서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발견된 것인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그만.
조여드는 가슴이 비명을 지른다.
.......‘그것’은 찻잎이었다.
보드랍고 연록 빛을 띤 고급 찻잎이 아니라 .......시장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종이봉투에 넣고 한 아름 파는 질 나쁜 찻잎이었다. 연서강은 엄지로 마른 찻잎을 비볐다. 찻잎 부스러기들이 책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식물 특유의 씁쓸하고 풋풋한 냄새가 났다.
-마실 수 있는 멀쩡한 찻잎인데 그리 낭비하다니.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자신이 그때 무어라고 말을 했었는지.
연서강의 말에 기연조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대답했었다.
-어차피 쓰고 맛도 없는걸.
-꿀을 넣어서 마시면 괜찮던데.
그 대꾸에 기연조가 웃으며 대꾸한다.
-꿀을 사먹는 돈으로 차라리 좋은 찻잎을 사는 게 낫겠다, 강아.
“........”
연서강은 시선을 내려 찻잎이 끼어있던 책장의 하단 부분을 보았다. 세필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글자 크기가 작아 판단하기 어려웠으나 계속 해서 보니 역시 익숙한 필체였다. 수려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
기연조의 것이었다.
그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것이, 또 바로 옆에서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본 것이 한두 해 겪은 일이 아닌지라 자신이 그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제까지 그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전부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래도 좋아서 계속해서 들여다보곤 했었기 때문에 착각할 수도 없었다.
연서강은 그 옆에 또 다른 사람이 적어놓은 글을 보았다. 말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한 장, 책장을 넘겼다. 책의 본문 말고 여백에 무어라고 써져 있다. 계속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넘어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연서강은 엄지 손가락만한 두께를 지는 책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여기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이 책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단순한 감상과 의견으로 가장된 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연조와 거승주의 대화가.
보는 사람이 많이 없어야 하고, 찾는 이도 잘 없어 늘 항상 세책점에 꽂혀 있어야만 했다. 빌리는 사람이 몇 없어 여백에 적히는 글도 몇 없어야 했다. 그런 재미없고 지루하며 유명하지 않은 소설책에 있었던 것이다.
연서강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증거’를 찾았음에도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고 자신이 해냈다는 성취감도 없었다. 다만 상처 입은 것처럼 가슴 속에 저릿한 아픔이 번질 뿐이었다.
그저 추측하고 예상하고 생각했던 일들의 구체적인 ‘증거품’이 자신의 손 안에 있었다. 평범했던 지난날을 잔혹하게 찢어발기고, 여기에 있었다.
-동생이 녹차 잎으로 베개를 만들고 싶다, 하더군. 같이 가지 않겠나?
“이제, 그만.”
기연조와 함께 했던 지난 모든 시간들이 설마 전부 이런 것은 아닌가, 연서강은 무서워졌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두려워 할 시간도, 서글퍼할 시간도 없었다.
.......추억할 시간 역시 없어졌다. 오로지 앞만을 향해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