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요새 따라 형님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라고 연무진은 생각했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귀비의 행패에 황후마마께오서 변을 당하시고, 수확제 준비 기간이라 일은 일대로 바쁘니 말이다. 듣자하니 연서강도 녹우당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하였다.
연무진은 연무강이 며칠 전 자신에게 ‘연서강의 얼굴을 보러 간 적이 있느냐?’라고 물어봤던 것을 기억해냈다. ‘전혀 아니올시다. 얼굴을 마주 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 눈치인지라 포기했소.’라고 답했더니 연무강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무어라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으나 전에 철딱서니 없게 ‘형님은 서강이 일만 되면 유독 유난을 떠는 것 같소이다.’라고 말했다가 그를 화나게 한 적이 있어-참고로 연무강은 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참고 있었다.
무강 형님이 저러고, 연서강 또한 그러하고, 부친인 연무의의 기분마저도 요새 따라 저조해 보이니 집안에 뭔 일이 일어났기는 난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은근슬쩍 연서령에게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그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부인인 안계영을 부추겨 귀동냥이라도 할까 했는데, 안계영은 자신의 등짝만 세게 후려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입도 벙긋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귀비의 아이가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하니 그냥저냥 그러한가 보다, 연무진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다지 서운할 것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무진은 치밀하지 못한 성격 탓에 종종 부친인 연무의에게 훈계를 듣곤 했었다. 연무의가 무강 형님만을 믿어 일을 맡기고 자신에게는 그 일을 비밀로 한 적은 이전부터 종종 있어왔던 일인 것이다. 연무진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을 그다지 신뢰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기대 역시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연의향과 연의진, 연서령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연의향과 연의진의 입장은 연무진과 좀 달랐다. 연의향과 연의진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부친에게 딱 못을 박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진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런 듯 했다.
어설프게 지내다 부친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큰일을 도모함에 배제되어 버린 자신과 달리 그들은 스스로 거기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그리 말했을 적 부친께서 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계셨기에 연무진은 그저 웃고 말았었다.
연서령마저도 연무진과 입장이 달랐다. 연무진과 비슷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서령이는 막내였고 여성이었으며 또 아직은 어렸다. 큰 집안의 둘째와 막내란 위치는 그 취급이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험한 일은 모르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라는 부녀의 소원대로 막내 연서령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났다. 즉, 일부러 주변에서 안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연서령은 연무진, 자신과 같았지만 못미더워서 안 가르쳐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야기였다.
종종 연무진은 연서령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우리는 집에서 버림받았나 보다. 집에서 우릴 따돌림 시키나 보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지만, 그러면서도 연무진은 연서령과 자신이 판이하게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난 형님을 두면 그 바로 아래에 있는 동생이 참 힘들어지는 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연무강에게 가려져 그 그림자에서 볕도 못 보고 커왔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무진은 잘난 형님이 그리 밉고 싫지는 않았다. 연무진이 봐도 연무강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서 때론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 맞기는 한가 의심조차 될 정도였다. 몇 번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자신은 형님처럼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연무진은 연무강에게만 쏟아지는 연무의의 관심과 신뢰를 딱히 부러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분수 넘치게 탐내지 않게 되었다.
부인인 안계영은 한 번 제대로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졌소-하고 누워 있는 꼴이 다 무어요?, 하며 혀를 쯧쯧 찼지만 그건 안계영이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라고 연무진은 생각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 형님 곁에서 지냈던가. 서른 해 남짓의 시간 동안 형님이 이룩해내는 것을 곁에서 보기만 해도 나는 밥버러지인가, 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어찌 길고 짧은 걸 대볼 만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사람이 할 의욕도 생기는 법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또한 어렵고 힘들고 곤란한 일을 전부 형님에게 맡기고 자신은 편히 사는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감히 형님을 대신하겠다는 생각도 품지 못했다. 이대로 사는 게 연무진에게는 편했다. 적당히 무시당하고, 가볍게 취급되어지고, 그래서 아무 일도 맡지 않은 채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게, 생각 없고 적당 적당히,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둘째, 그게 연씨 문중 내에서 연무진의 위치였다.
.......그랬던 것이 요즘 들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올 늦봄부터였다.
“무술 교관 거승주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것을 형님께선 알고 계시오?”
하고 붇자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힐끔 쳐다보는 시선뿐이었다.
연무진은 한숨을 푹 내시며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오. 나야 원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놈 아니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말이 아니라 시선이 전부다. 그 시선에서 ‘그럼?’, 이란 뜻을 능숙하게 읽어 낸 연무진은 연무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 거승주를 알고 지내던 자들이 관아에 실종 신고를 낸다 하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요새 수확제 준비 기간이다 보니 따로 무관들의 훈련시간이 없지 않소이까. 해서 다른 일로 차출되어 나가는 교관들이 많아 그간 그가 제대로 금륜관에 출타하지 않았어도 다들 그러려니 했다 하더이다. 그러다 근래 들어서야 비로소 그 어디에도 거승주의 모습을 본 이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그의 자택을 방문하였지만 자택은 텅 비어 있었고, 주변 이웃에게 물어보았지만 소식을 아는 이가 없어 결국 관아에 신고를 한다고 하오. 신고하기 전에 내게 와서 아는 소식이 없는가 물어들 보던데 혹시 형님께도 와서 물어보았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었다.”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춘 보람도 없이 연무강은 간단히 대꾸하고 말았다.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이 없어 연무진은 긴 한숨을 또 내쉬었다. 아마도 거승주의 실종 역시 집안과 관계된 일인 듯 했다.
자신에게는 딱히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연무강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병사들과 군관들이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불시에 살피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 없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리 귀찮은 벌레 대하듯 행동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쓴웃음을 삼키며 연무진은 연무강의 뒤를 따라 붙었다.
걷다보니 이상했다. 연무강이 그 일에 대해 자신에게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왜 고집스레 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의아하게 여기자마자 답이 바로 나왔다.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더 묻고 싶었는지.
주변에 사람이 없나 살핀 다음, 연무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서강이도 알고 있는 일이오?”
순간 거짓말처럼 연무강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상 쓴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연무강을 보자 연무진은 간담이 써늘해졌다. 요새 형님은 연서강에 대한 말만 꺼내도 표정이 바로 싸늘해지곤 했다.
“연서강은 왜.”
“아니, 요새 서강이가 난전 마마도 뵙고....... 그 외 여러 가지 많은 일도 맡아 하는 듯 하기에, 그래서 그냥 한 번 물어 봤소이다.”
혹시 이번 일에도 관련이 있는가 싶어서. 이어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연무진은 문득 무안해져서 괜스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연무진에게 연무강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연무진은 거승주의 실종을 연서강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형님께서 딱 잘라 부정을 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중간에 위치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눈치뿐이었다.
“.......”
요즘 온 집안사람들의 관심과 흥미가 연서강에게 쏠려 있음을 연무진은 느끼고 있었다. 까다로운 성미의 부친은 물론이고, 그 무뚝뚝한 형님까지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녹우당에서 조용히 지내며 아무 의욕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내던 한량 놈이 갑자기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가족들 중 가장 감정 표현이 적은 연의진 놈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으니, 어지간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다섯째가 세운 공은 놈이 아예 다른 놈으로 뒤바뀐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연무진은 연서강이 본채로 돌아온 이후, 그가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비교적 연무진은 다른 사람의 성격에 대한 파악이 빠른 편이었다. 해서 연서강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성격이 대충 어떠하겠다, 짐작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연무진은 연서강이 자신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얼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서강이 어렸을 적, 특히 그 애가 본채에 지낼 적에 자신은 얼마나 그를 꼴 보기 싫어했었던가.
당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연무진은 잘난 형님에게 눌려 사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아버님이 자신에게 실망해가는 것도 느껴져서 그것에도 얼마나 속상했었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모두 포기하고 분수에 맞게 적당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는 넘쳐나는 혈기와 속상함을 어찌할 줄 몰라서 괜스레 애꿎은 연서강을 괴롭히곤 했었다.
당시 연무진은 소심해서 형제들의 눈치를 살피며,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연서강이 마치 형님과 부친에게 기가 눌린 자신처럼 느껴졌었다. 더군다나 괴롭혀도 집안에서 아무도 훈계하는 이가 없다니 얼마나 좋은 화풀이 상대인가. 지금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별의별 핑계를 다 대가며 연서강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던 것 같다.
그랬던 과거기 있으니 연서강이 자신을 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연무진으로서는 그가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복수를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가정과 추측을 깨고 연서강은 본채에서 마주친 자신에게 다정히 말을 걸었었다. 심지어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비난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무진은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괜히 연서강에게 시비를 걸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도 연달아 생각이 났다. 그때보다 몸도 마음도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었는데, 먼저 연서강에게 말을 걸어 사과할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홧홧해졌다. 몸만 컸지 마음은 그때 그대로인 듯 했다. 과거 일은 괜찮다고 말하는 다섯째의 대범함이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과연 정말 어릴 적의 그 연서강이 맞는가.
“.......형님은 서강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하고 물어보며 연무진은 연무강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질문의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무강의 얼굴에는 희미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이쯤하고 물러나야 한다 머릿속에서 경고하는 듯한 불빛이 반짝인다.
허나 그와 동시에 묘한 오기도 생겼다. 거승주에 대해서는 물어도 대답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똑똑히 들어야겠다는.
‘과연 정말 어릴 적의 그 연서강이 맞는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연서강은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의 일, 그가 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고작해야 몇 달이었다.
그런데 둘째인 자신에게도 쉬쉬하는 일이 집안의 다섯째에게는 알려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난전 마마를 뵙고 부친께서 하시는 일까지 거들게 된 것처럼 보였다. 녀석이 맡은 일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 자신이야 매일 본가에 있는 게 아니니 알 수야 없지만, 집안에 별 다른 우환이 생긴 것 같지는 않으니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 듯 했다.
연무진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괴상 쩍은 감정이 들어 마음 한 구석이 살짝 불편해졌다. 나보다 못한 놈이 어찌 나도 못한 일을 맡아 하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이지만 참으로 장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좀 더 친하게 지내지 못 하였나 아쉬움이 들 만치.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기감도 함께 들었다.
이 위기감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연무진은 계속해서 고민하고 고민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연서령이 집으로 돌아오고, 그 아이로부터 연의향이 공치식에 연서강을 추천해준다는 소리를 들었을 대 비로소 연무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서강이 좋겠구나, 축하를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이리도 옹졸한 사람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고 불편해졌다.
“.......연서강이.”
하고 연무진은 말을 꺼냈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해도 절로 긴장이 되는 것을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형님도 서강이가 쓸모 있다고 생각되시오?”
지금까지 집안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한심하고 별 볼일이 없던 이는 바로 연서강이었다. 때때로 연무진의 위를 욱신거리게 만들던 그 위기감은 그, ‘형제들 중 가장 한심하고 별 볼일 없는 이’가 어쩌면 이제 연서강이 아니라 자신이 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흘러나온 위기감이었다.
“.......”
그래도 무강 형님은 예전부터 연서강에게 냉정하고 엄격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 않았나.
임시방편일지 모르나 형님은 ‘두고 봐야 알 일이지.’라는 식의 대답을 한다면 이 불편함이 조금은 사라질까 연무진은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질문에 연무강은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귀찮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형님?”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불쾌한 듯 낯만 찌푸리고 있는 연무강이 연무진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대답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연서강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허나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한참 후에야 연무강은 마치 쓰고 맛없는 것을 뱉듯 대꾸했다.
“.......차라리 쓸모가 없었으면 좋겠군.”
“그러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어 연무진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매사에 무심하고 엄격하진 형님까지도 그리 생각하시는구나. 당연한 대답인데도 왠지 홀로 덩그러니 자리에 남겨진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칙칙한 기분에 다만 입속의 혀만 굴릴 뿐 무어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그는 연무강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건가 싶어 연무진은 ‘왜 그리 보오.’하고 물었다.
잠시의 틈을 두고 연무강의 입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툭 내던져지듯 말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해괴한 내용이었다.
“만약에 안계영이 너를 못미더워 하고 네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느냐?”
“뭐라 하시었소?”
연무진은 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했다. 살과 뼈가 아닌 금속과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님이 왜 저리 해괴한 것을 물어보시나.
진실로 해괴한 일은 한 번 만에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꼴을 보고도 연무강이 짜증조차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는 같은 말을, 심지어는 연무진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해주었을 뿐이었다.
“만약 안계영이 더 이상 너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그 신뢰를 되찾겠냐고 물어보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황망한 기분에 연무진은 방금 연무강의 대답을 듣고 느꼈던 씁쓸함과 서운함이 온데 간 데 없이 휙 사라지는 걸 느꼈다.
거듭, ‘방금 내게 질문을 한 게 정녕 형님이 맞소?’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연무강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연무진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얼굴표정에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박력이 느껴져서 연무진은 여전히 당황해하면서도 무작정 입을 열었다.
“......그야.”
“그야?”
저렇게 무게 있는 ‘그야?’는 난생처음이었다. 형님께서 진짜 왜 이러시나.
“.......일단 계영이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예쁜 비단 옷이나 맛있고 귀한 음식을 사준다던가, 아니면 가보고 싶어 하던 여행지에 데리고 가는 것도 좋겠고.”
연무진의 대답을 듣는 연무강의 표정이 점점 미묘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대체 누구에게 적용을 해보고 저런담.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앞서 말한 예를 머릿속으로 하나씩 실행을 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무강을 보는 연무진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바뀌었다. 대체 누구지?
“또, 계영이가 평소에 눈 여겨 보았던 보석 반지나 비녀 같은 걸 선물해주기도 하고.”
그 대답은 영 이상했는지 연무강이 인상을 쓴다.
“네 부인이 칠보 장신구 장인인데 보석 반지나 비녀를 선물해줬다고?”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목소리에 연무진이 ‘아이고.’ 소리를 절로 냈다.
“유명 요리점의 점주도 때로는 다른 요리점의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지 않소. 어디에서 산 것이든 예쁘고 값 비싼 거라면 좋아라 한다오. 선물인데 싫을 리가 없지 않으오.”
물론 선물을 받기 전 안계영은 ‘당신은 내 직업이 뭔지 알고 이런 걸 사오나요?’하고 약간의 타박을 연무진에게 주기는 주었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가 눈 여겨 보았던 장신구들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직업이 칠보 장신구 장인이다 보니 장신구를 보는 눈이 여간 깐깐하지 않아서 그녀는 웬만한 장신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잘만 선물하면 세 달은 부부사이가 화평한 것이 또 장신구 선물이었다.
연무진의 대답이 영 미심쩍은지 연무강은 아무 대답 없이 이마를 찌푸린 채 제 턱을 손가락으로 문질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보니 또 연무진은 입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좀 전과 달리 이번에 그는 참지 않았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오?”
연무강이 이런 걸 물어봤다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그런 걸 해줄만한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 연무진은 더 놀라웠다. 형님이 현재 만나고 계신 여성분이라도 계신가? 하지만 딱히 그렇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요 근래 자주 출입한 본가의 아랫것들조차 무어라 수군거렸던 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가에 말이 퍼졌으면 제일 먼저 연서령이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와 일러바쳤을 것이다. 소문난 마당발인 자신의 부인조차 무강 형님이 누군가 만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연무진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안 돼.”
“.......”
하지만 상대는 그 무강 형님이었다. 형님의 성미로 보나 뭘로 보나 그런 이가 생겼다고 해도 자신에게 허물없이 털어놓을 리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거절하니 연무진은 되레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형님이 요새 좀 이상했던 것은 연서강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던가. 어찌 납득이 갈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아마도 자신이 형제들 중 유일하게 연애를 하고 있는 놈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물어본 모양인가 보다. 그리 추리하며 연무진은 힐끔 연무강의 얼굴을 보았다. 연무강은 여전히 연무진의 말에 고뇌하고 있는 듯 했다.
“.......”
참으로 신기했다. 형님의 저런 면이, 그간 자신이 봐 왔던 자신의 형님이 아닌 것 같았다.
중매가 들어온 여인과 선을 볼 때도 대뜸 ‘집안을 위해 죽어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여인에게 경악과 분노를 안겨 주었던 형님이 아니셨던가. 왜 그리 물어보았느냐고 자신이 따져 묻자 ‘연씨 문중의 맏며느리로 들어올 여인인데 그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라고 대답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 그 대답을 들으면서 연무진은 솔직히 형님이 평생 누구를 사랑할 수는 있기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일과 집안의 위신 밖에 몰라 가끔은 인간미가 없게 느껴지기도 하는 형님인데.
그 형님이 현재 자신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의 대답들은 전부 나와 집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들이고.......”
몇 달 전, 연서강이 자신에게 여인의 장신구에 대해서 물었던 날들이 생각나 연무진은 어깨에 빡 힘을 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애’에 관련해서는 형제들 중 자신이 단연 으뜸이 아니겠는가. 무려 유부남이니 말이다.
“보통의 경우 일단 어떤 일로 그 사람의 신뢰를 잃게 되었나부터 따져 보아야 하지 않겠소. 신뢰를 잃게 된 사건이 있지 않소? 일단 원인을 파악하면 그 후에 그 여인에게 가서 두 번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싹싹 빌어야 할 거요. 그리고 앞으로 그 맹세를 절대로 어기지 않고 지켜가면서 여인의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려야 하지요. 절대 조급해 하거나 안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다려 주는 게 좋으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소? 사랑한다면 기다려 달라는.”
“.......”
이번 말은 썩 그럴 듯하게 들렸는지 연무강이 침음을 흘리며 입을 다문다. 여전히 심각한 연무강의 얼굴에 연무진은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난생 처음 그 잘나신 형님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항상 모든 일을 쉬이 처리하는 형님이 이리 곤혹스러워 하는 것을 보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참으로 재미났다.
“.......그렇군.”
마침내 연무강이 어렵다는 듯 그리 대답했을 때, 연무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요. 암암.’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던 형님이 모처럼 따뜻한 온기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감상도 연무강이 다시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 자신을 보았을 때 바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건 그렇고 나중에 혹시 아버님께 들릴 일이 있느냐?”
설마 형님께서 자신이 웃는 얼굴을 보신 건 아니겠지, 바짝 긴장하며 연무진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오? 아, 있소이다. 아버님께서 마침 나를 보자고 했소. 나도 아버님께 전할 말이 있기도 하고.”
하고 대답하자 연무진은 새삼 다시 자신이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원인을 떠올리게 되었다. 앞으로 어찌될지 생각만 하면 걱정부터 앞서서 한숨이 폭 나왔다. 잘 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전할 말?”
연문진이 무슨 말을 부친께 전할지 신경이 쓰였는지 연무강이 되묻는다. 물어보는 속셈이 형님답지 않게 빤히 보여서 연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내, 가서 형님 이야기는 한 단어도 안 꺼낼 테니 걱정 마시오. 내 이야기하기도 바쁠 텐데.’ 그제야 연무강이 연무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둔다.
거참, 매정한 사람. 속으로만 툴툴거리며 연무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러 가는 참이니 어차피 늦어도 내일 즈음이면 가족들 모두가 알게 될 일이기는 하지만, 남의 일에 관심을 좀 가져주면 어떤가 싶었다.
“나중에 이걸 아버님께 전해다오.”
그때 품속에서 파란 비단 끈이 매인 서신을 꺼내 연무진에게 주며 연무강이 말했다. 받고 두께를 보니 별로 두껍지도 않아서 연무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이게 무엇이오?’ 물어봤자 ‘알 것 없다.’란 대답만 날아왔다.
여전히 냉랭한 대답에 오기가 생긴 연무진은 다소 건방지게 물어보았다. 그에게는 아직 연무강이 거승주에 대해 알려주지 않아 생긴 앙금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걸 중간에 몰래 열어보면 어쩌려고, 내게 이런 심부름을 시키는 거요. 뭘 믿고?”
연무강이 그야말로 쓰레기에 꼬인 파리를 보는 듯 귀찮음과 한심함을 담뿍 담은 눈으로 연무진을 바라보았다.
“네 살배기 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네놈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라는 믿음으로.”
역시 형님에게 어설픈 반항은 예나 지금이나 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 *
연무진은 성헌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헛기침을 몰래 몇 번 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에게 있어 부친 연무의는 어릴 적과 똑같이 대하기 어렵고 힘든 상대였다. 연서강이 변방으로 가기 위해 부친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했을 때, 연무진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었다. 자신이었다면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감히 그 아버지와는 시선도 맞추지 못할 것이다.
“.......”
성헌당 주변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오며 가며 연무진을 힐끔힐끔 훔쳐본다. 참 이상타. 서방님이 어찌 저러고 계신고. 그리 생각하는 것이 뻔한 얼굴들이라서 연무진은 더 이상 성헌당의 앞에 서서 방황을 할 수도 없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하인들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십니까?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어볼 판이었다.
결국 연무진은 성헌당 문에 목소리를 쥐어짜 고했다.
“아버님, 연무진입니다.”
“들어오너라.”
답은 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무진은 또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역시 망설인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지라 그는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해가 져 거무스름해진 성헌당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문을 열었다.
성헌당 방안은 벌써 호롱불이 환히 밝히고 있었다. 호롱의 심지가 거뭇해진 정도를 보니 불을 켠지가 제법 된 것처럼 보였다. 막 해가 져서 땅거미가 뻗고 있는 참인지라 굳이 불을 켜서 안을 밝힐 정도로 그리 어둡지는 않았는데도 불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니 아버님께서 글자를 읽으시기 위해 미리부터 켜놓은 불인가 보다.
그리 생각하면서 연무진은 조심스레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그는 바로 연무의가 아닌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형님 오셨습니까.”
“......서강이. 너는 언제 여기에 왔느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묻는 연무진에게 연서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되었습니다. 이제 막 나갈 참이었습니다.”
예사로운 대답에 연무진은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연서강을 보았다.
몸이 좋지 못해 녹우당에 틀어박혀 있단 소리에 방문을 청했다 거절당한 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연서령 또한 그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불만을 토했을 때, ‘기다려 보자.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라고 자신이 대답한 것도 그 엇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후로 내도록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오랜만이라면 오랜만, 또 아니라면 아닌 얼굴이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얼굴빛이 별로 좋지 못한데 이리 나와도 되는 것인가? 연무진이 그리 묻지 못한 것은 불현듯 귓가에 연무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거라.”
“!”
그 목소리에 연무진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를 깨달았다. 성헌당의 안. 아버님, 아버님의 앞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당황한 연무진은 재빨리 연무의에게로 몸을 돌려 문안 인사를 올린 뒤 굳은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히, 힐끔 훔쳐 본 연무의의 얼굴에서는 자신을 향한 노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푹 놓이지 않아 연무진은 속으로 계속 ‘멍청하긴, 성헌당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버님께 인사를 올렸어야지.’하고 중얼거렸다.
연무의는 연무진이 실수로라도 이렇게 사소한 예를 갖추지 않을 때면 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가문의 위신이 깎인다며 불 같이 노하곤 했었다.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이후에는 제법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얼굴을 발견한 탓에 순간적으로 예를 잊고 말았다. 하필이면 아버님 앞에서 이런 실수를 할 게 무어람. 이 때문에 부친께서 또 ‘저 놈은 나이가 들어도 어째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나.’라 생각하실까봐 연무진은 신경이 쓰였다.
“어인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한층 신중해진 어조로 연무진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연무의가 연무진 쪽을 보았다. 제법 나이를 먹어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박혀 있는 눈과 눈빛만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형형했다.
그런 연무의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자 연무진은 순간적으로 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뱀 앞의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가급적 빨리 용무를 마치고 안계영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참, 무강 형님이 아버님께 전하라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용무. 하니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그거였다. 연무진은 품속에서 파란 비단 끈이 매어진 서신을 꺼내 연무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안에 적힌 내용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연무의가 빙그레 웃으며 ‘그것을 네가 가져왔구나.’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서신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것을 그대로 연서강의 앞에 서신을 툭 던져 놓았다.
“네가 필요하다고 한 게 그것이니라.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연서강이 서신을 챙기는 것을 보며 연무진은 의아해했다. 무강 형님이 아버님께 전하는 서신이 결국은 서강이에게 가다니? 그럴 거면 무강 형님이 직접 서강이에게 전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나 언뜻 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과정에 자신은 모르는 중요한 의미가 있나 싶어서 그 의문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부러운 것은 연서강은 그 서신을 챙기는 것으로 성헌당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연서강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연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님은 대하기 어려운 분이니 내심 연서강이 계속 옆에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허나 그런 연무진의 속을 짐작할 수 있을 리 없는 연서강은 이어 ‘그럼 무진 형님, 나중에 뵙겠습니다.’하고 말하며 연무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래, 나중에.’, 붙잡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추고 대꾸하며 연무진은 미끄러지듯 성헌당을 빠져나가는 연서강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절로 따라 나가고 싶어지는 등이었다. 오랜만에 보았으니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는데 그런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서령이에게 들었다. 무진이, 너도 서강이와 부쩍 친해졌다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무진은 고개를 돌려 연무의가 자리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나 차마 부친과 시선을 맞추지는 못하고 바닥으로 눈을 내리깐 뒤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저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 그저 안부 차 꺼낸 말일수도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부친께서 뭔가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어 하시는 말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연무진은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예전보다 낫다라.......’ 연무의가 연무진의 대답을 듣고 끌끌 소리를 내며 웃는다.
“형제들끼리 사이가 좋은 건 참으로 복 된 일이지, 암.”
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저런 운을 뗀단 말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묘하게 서늘하게 들려서 연무진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앞으로 모은 두 손의 손가락 끝이 방안에 가득 찬 불편한 공기 때문에 저릿저릿했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말로 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연무진은 연무의가 왜 자신을 성헌당으로 불렀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심부름 같은 것이 아니고서야 연무의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던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 잔심부름마저 연서강이 하고 있는 듯해서, 더더욱 연무진은 연무의가 자신을 왜 성헌당으로 불러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부친이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만 할 뿐이다.
“.......그래. 무진이 네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다. 내게 전할 말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일단은 네 놈의 목적부터 말하라는 소리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연무진은 숨을 죽이고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아버님. 제 안사람과 관련된 일입니다.”
겨우 말의 서두만 꺼냈을 뿐인데 돌연 연무의가 ‘알겠다. 알겠구나.’라고 대꾸했다. 예? 놀란 연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랬다가 그는 바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한 손에 장죽(長竹)을 쥔 부친께서 연무진 쪽을 보며 부드러이 웃고 계셨다. 오랜 시간 버릇처럼 지어 온 미소 때문에 유난히 깊이 팬 입가 주름이 그의 얼굴을 참으로 인자하게 꾸며주고 있었다.
“며늘아기가 홑몸이 아니게 되었단 이야기를 하러 온 것 아니더냐.”
“어찌 아셨습니까?”
진심으로 놀라 연무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안계영에게 임신 소식을 들은 지도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혹여 임신을 한 게 아닌가 의심한 지는 꽤 되었지만 확실치 않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근래 의원에게서 임신이 확실하다는 진단을 받고 자신에게 겨우 말을 하게 되었다고 안계영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잘 됐다, 정말로 기쁘다, 집안의 홍복(洪福)이다, 갖가지 덕담을 안계영에게 해주며 연무진은 동시에 ‘아버님께는 언제 말씀을 드리지.’하고 고뇌했었다. 요새 때가 좀 좋지 않은 듯 하여 언제 말을 꺼내면 좋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안계영도 마찬가지였던지, 당장 말씀을 드리지는 말고 조금 기다렸다가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연무진에게 제 의견을 밝혔다.
그리하여 약 일 주 간의 시간을 유야무야 보내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연무진은 연무의를 찾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결심을 했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좀 더 시간을 끌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침 연무의 쪽에서 그를 부른 탓에, 아버님의 얼굴을 뵙고도 그 중요한 일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는 없어 겸사겸사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해치우기로 마음먹은 것에 가까웠다.
긴 곰방대를 느릿하게 돌리던 연무의가 불현 듯 입술로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못난 녀석.’, 그러면서 그가 불시에 내뱉는 말에 연무진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에다 목소리 또한 모난 곳 없이 마냥 보드라웠지만, 자신 쪽을 보는 그 시선만큼은 한심하다는 빛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이 정확히 자신의 어떤 면을 질타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연무진은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늦게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연무의가 끌끌 혀를 찼다.
“못난 놈. 마냥 태평한 네놈 때문에 며늘아기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누. 암만 기다려도 네가 말할 것 같지 않았는지 벌써 사흘도 전에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었단다. 혹시나 네놈이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 언급을 한 게 있었는지 조심히 묻더니, 한참 머뭇머뭇하다가 결국 털어놓더구나. 새 생명을 잉태한 것은 마땅히 축하 받아야 할 일인데, 흡사 죄인처럼 구는 모습이 참으로 가엽고 마음이 아파서 이 애비가 맛난 것 좀 사먹으로 돈 몇 푼 안겨주었다.”
“그, 그러셨습니까.”
연무진은 금시초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당연했다. 안계영이 최근 연무의를 찾아왔던 것은 자신이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연조가 민울에게 장한궁의 식단을 보고자 청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일’과 관련된 용무로 방문을 했던 것이니 안계영은 연무진에게 아버님을 만나 뵙고 임신 소식을 알렸다고 털어놓지 않은 것이다.
어째서 안계영이 연무진에게 그런 말들을 전하지 않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연무의였지만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암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 내가 그랬었다. 과연 무진이가 언제쯤 소식을 알리러 올까, 그것이 궁금하니 한 번 날수를 세어가며 기다려 보자고. 며늘아기는 일주일, 나는 이틀을 걸었었다. 허나 둘 다 예측이 틀려 버렸군.”
끌끌 혀 차는 소리를 섞어 웃은 뒤 연무의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골려주기 위해 꺼낸 말이라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지만, 연무진은 전혀 그 가벼운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습니까.’하고 바짝바짝 말라가는 목구멍으로 연신 침만 삼켜 넣었을 뿐이다.
연무진에게 있어 부친 연무의의 농담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가시가 돋은 조롱으로 느껴졌다. 연무진이 자신의 농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자 연무의는 이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어째 있는 자식들이 죄다 이리 진지하고 심심한 성격일꼬.’
“그래, 며늘아기의 몸은 어떠하냐. 잘 지내고 있느냐? 하던 일은 어찌 되었고?”
“아, 네. 주기적으로 의원에게 진료를 하고 있고, 또 무리를 하지 말라는 의원의 말에 따라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가게를 보고 있습니다. 다만 칠보 유약이 산모와 아기에게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에, 제작하는 일은 아니 하고 도안만 그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연무의가 중얼거렸다. ‘그래, 초기에는 조심을 해야지.’ 그가 흘리는 말도 허투루 넘길 수 없어 연무진은 거듭 ‘네. 조심에 조심을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헌데 무진이 네 놈 요새도 밤 나들이를 하느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네 아이를 가진 부인의 수발을 네놈이 안 들면 누가 들꼬. 아이를 배면 때로 아무 이유도 없이 서럽거나 성이 나기도 하는 법이니 네가 가서 아이 칭얼거리는 것도 들어주고 하여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연무진에게 있어 지금 안계영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그의 첫아이였다. 허나 연무의의 입장에서 봐도 그 아이는 연무의의 첫 손주였다. 이후 연무의의 입에서 이런저런 말이 길게 흘러나왔지만 죄다 안계영과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에 대한 염려와 충고라 연무진은 “네, 네.‘ 대답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연무의가 ‘무강이 그 놈도 고집을 꺾고 어서 성혼을 치러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을 때는 참으로 오랜만에 부친이 부친답게 느껴져서 괜히 연무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어색했다.
“네 어미가 살아있었다면 매우 기뻐하며 며늘아기를 이리저리 잘 챙겨주었을 텐데......., 야무진 아이이니 혼자서도 어련히 잘 하겠냐마는, 그래도 며늘아기가 서운하지 않게 잘 챙겨주고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집을 나간 이후 부친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연무진은 처음이었다. 안계영의 임신 소식을 이렇게 늦게 알리러 와서 잔뜩 혼만 들을 줄 알았었는데, 연무의는 딱히 그를 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는 뭔가 생각이 많은 눈으로 먼 곳을 보면서 곰방대만 빨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말씀드리러 올 것을 그랬다. 지레 겁을 먹고 뒤로 계속 미뤘다고 연무진은 생각했다. 무서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부친인데, 그러니 자신과 자신의 아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 리는 없을 텐데.
“헝제들 중 제일 칠칠맞던 네가 가장 먼저 아버지가 되다니.”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의는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고.’
“너도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니 좀 더 행동거지를 차분히 하고 매사에 아이와 며늘아기를 생각하며 책임감 있게 굴어야 할 것이야. 행동하기에 앞서 늘 신중하게 생각하거라, 무진아.”
“말씀 새겨듣고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딱히 연무의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이미 연무진은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참으로 신기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이가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다. 허나 자신의 피와 안계영의 피가 섞인 조그마한 생명이 앞으로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밀조밀 생긴 아이의 얼굴에서 자신과 닮은 부분이 발견되면, 그 심정이 과연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신비롭고 신기하여서 연무진은 하루라도 빨리 안계영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만나보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날 일을, 또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맛볼 일들을 상상하면 너무도 행복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의 존재는 연무진으로 하여금 수심에 잠기도록 만들었다.
.......이리 한심하고 무책임한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도 되는 것인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못된 아버지의 전형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존재했다. 인격자라고 해도 그것이 ‘좋은 아버지’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또한 아비 하나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일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게 되는 참혹한 경우도 숱하게 봐왔었다.
그러다보니 걱정이 행복감보다도 앞서서 연무진의 심장을 찔러댔다. 과연 자신이 안계영과 아이를 잘 부양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책임질 사람이 안계영 혼자였을 때와는 또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을 ‘아버지’라 믿고 따르는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 그 아이를 자신은 과연 잘 양육할 수 있을까. 또 모범이 될 만한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까. 혹여 한심하다고 아이에게 경멸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그런 망상이 가슴을 짓누르는 걱정이 되어 꿈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어쩌면 형제들 중에 가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자가 자신일지도 모르는데.
“........해서 무진아. 그러니 너도 이만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 아비가 오늘 새삼스레 너를 부른 것이다.”
상념을 가르고 날아드는 연무의의 목소리에 연무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면서 바라본 부친의 얼굴에는 여전히 인자함이 그득했지만 그 가운데에 진지함도 분명 깃들어 있었다.
방금 아버님께서 무어라 하신 것이지? 뜻밖의 말을 들은 듯도 해서 연무진은 얼른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연무의는 슬며시 웃으며 발그스름한 불꽃을 담고 있는 곰방대의 대통 부위를 응시했다.
“간죽(竿竹: 담배설대)가 좀 더 길었으면 좋겠건만. 연기가 맛있었던 곰방대가 분명 있었는데, 피운지 너무 오래 되어 어디에 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방이 이전 이야기를 거듭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연무의가 잘 쓰는 화법 중 하나였다. 그 화법에 말려드는 것은 연무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혹, 저에게 집안일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까?”
“허면, 달리 들었더냐?”
잘못 들은 구석이 어디 있어서, 흘깃 연무진에게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연무의가 가볍게 묻는다. 그러나 연무진은 쉽사리 대꾸를 하지 못했다.
“허나.......”
연무의가 말하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것이 바로 황후마마나 정치에 관련된 일이란 것을 연무진은 직감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들은 것이 정말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을 ‘일’에서 배제시키지 않았던가. 헌데 갑자기 왜 자신을 끌어들인다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
그 이유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연무의의 입으로 들을 수 있었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 설사 잘못 되기라도 하면 네놈 가족들도 무사하지 않을 것 아니냐. 혈혈단신인 다른 형제들과 너는 당연히 그 어깨에 얹어진 무게가 다르지. 암. 자칫 일이 잘못 되면 네 부인은 물론이요, 이제 막 생긴 아이까지도 변을 당할 수가 있는데, 그럼에도 네게 아무런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너무한 처사이지 않으냐.”
“그, .......렇기는 합니다만.”
순간 머릿속으로 가족들이 죽는 모습이 스쳐지나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연무진은 비로소 ‘내 아이’가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무엇이든 자칫 잘못되면 사라지는 목숨이 자신 하나뿐만이 아니라 두서넛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자신을 아비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네 부인이야 무강이에게 들어 일의 전반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지만, 네 아이는 대체 무슨 죄이더냐. 그저 아비, 어미를 잘못 둔 게 죄이지. 허니 무진아. 앞으로 아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잘못 된 행동 하나로 이제 막 세상에 내려온 선량한 아이가 험악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니.”
“.......”
연무진은 이제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한 것을 넘어 차디차게 얼어 아려왔다. 죽는다, 내 아이가.
문득 연무진은 부인인 안계영이 환하게 웃으며 ‘당신! 이리 와서 들어봐요!’라고 자신에게 손짓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아이가 생긴 사실을 그에게 고백한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왜?’하고 가까이 다가간 자신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고 안계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가 생겼어요.’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영롱하고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여자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여자 아이라면 내가 만든 장신구로 잔뜩 머리와 옷을 치장해 줄 터인데. 남자 아이라면 어떻게 하지? 남자 아이라면 당신이 잘 놀아 주어야 해요.’ 안계영이 아직까지는 납작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보드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었다. 그 광경을 연무진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무진아.”
흠칫 놀라 연무진은 고개를 들어 부친을 바라보았다. 연무의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볼 수 있는지, 연무진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 하나로 집안 식구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판국이라지 않았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볼 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역모’란 단어가 지니는 무게가 지금 연무진의 등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너도 아이가 생겼으니 알 것 아니더냐. 어찌 내 잘못으로 집안 식구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전부 소중하고 곱고 사랑스러운 이들인데.”
이어 연무의는 연무진의 얼굴을 말그러미 바라보았다.
“너 또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지 않으냐.”
“아버님.......”
“그간 내가 네게 소홀히 했다면 용서해다오. 내 너를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두 어깨에 얹어진 생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신중하게 행동하느라 그런 것이었단다.”
마치 홀린 듯 연무진은 연무의가 말하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타닥, 호롱불이 불똥 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연무의가 들고 있는 곰방대 대통의 불티도 벌겋게 탔다. 담배 잎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성헌당 안에 가득 들어찬 지 오래다. 계속해서 그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연무진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흔들리는 연기에 몽롱해져 있다가, ‘아, 아닙니다.’ 간신히 정신을 챙겨 대답하니 연무의가 기틀하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이런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연무진이 그리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연무의가 돌연 얼굴을 찌푸리며 ‘헌데,’하고 어조를 바꾸어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몹시 차갑다. 갑작스레 온도가 내려간 듯한 부친의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무진은 황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연무의가 곰방대를 탁탁 털며 말을 잇는다.
“연서강, 그 놈이.”
“서, 강이 말씀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연무진을 연무의가 힐끗 바라봤다. 그 시선에 어린 차갑고 무미건조한 빛을 보니 방금 그토록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절로 오금이 저릴 만치 무섭고 매서운 얼굴과 표정이라 연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서강이 그 놈이.’ 하려는 말을 시원하게 이어하지 않고 계속 중간을 뚝뚝 끊어먹는 연무의로 인해 방안의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놈이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지.’ 연무진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무래도 수상해.’ 다시 한 번 ‘수상해.’라 연무의가 중얼거린다.
그에 이끌리듯 연무진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연무의가 입을 다물고 방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 연서강이 문을 열고 사라진 곳이었다. 방문을 바라보는 연무의의 눈이 계속해서 차가워질 뿐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것을 보며 연무진은 신음을 흘렀다. 부친께서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이러시는 건가 두려웠다. 어떤 말이든 연서강에게 있어 좋은 말은 아닐 듯 했다.
“무진이 너도 알다시피 서강이는 네 친형제가 아니지 않으냐.”
“.......네.”
연우비 고모가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연서강이 본가로 들어온 것은 연무진이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그랬기에 연무강만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무진도 처음 연서강을 보았을 때를 기억하고는 있었다. 형제들을 불러 연서강을 비록 연우비 고모의 아이지만 이제부터는 너희들과 형제이니 부디 사이좋게 지내라 말씀하신 어머님의 모습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머리로만 알았지, 평소에는 잘 떠올리지 않는 사실이기도 했다. 연서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 형제와 함께 했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씨 문중의 기연조와도 친했었지.......”
“허나 서강이도 이제 알지 않습니까. 기연조가 더러운 뜻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었다는 것을.”
연무의의 말에 연서강에 대한 의심의 빛이 서려있다는 것을 깨달은 연무진은 그리 대답했다. 또한 연서강은 변방에 가서 여동생들을 위해 힘껏 애를 쓰지도 않았나. 심지어 이번 귀비마마와 그 소생 황자의 일에 관여하기까지 했었다.
귀비마마의 아이가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하니 일이 잘 풀렸으면 잘 풀렸지,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무의가 의심하는 것처럼 정말로 연서강이 삿된 뜻을 품고 있었다면 이미 연씨 문중 사람들은 벌써 황제의 앞에 끌려나와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을 것이다.
“서강이는.”
거기서 더 말하려는 연무진을 연무의가 써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부친의 낯에 깃든 냉기에 연무진은 합 입을 다물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연무의가 연무진을 향해 비교적 다정한 투로 묻는다. 허나 방금과 달리 연무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당장에라도 ‘못난 놈! 역시 생각이 짧구나!’하고 노호성이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무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비로소 연무의가 원래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진아. 나도 이유 없이 서강이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허나 사람 감정이 칼로 무 자르듯 확실히 자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더냐? 또한 연서강은 지난날 본채에 있기 괴롭다며 녹우당으로 한 번 도망도 쳤었던 놈이 아니냐. 가족들이 싫어 녹우당으로 도망친 주제에 그 긴긴 세월을 기연조와 가까이 지냈었던 놈의 과거를 떠올려 보아라. 네놈 같으면 새삼 가족들이 좋아져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서겠느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허, 허나....... 기연조가 어떤 사람인지 서강이도 이제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서강이가 그에 충격을 받고 본채로 돌아왔다고 알고 있.”
“어허, 무진아.”
연무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부친의 목소리에는 아직 노기가 어려있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연무진은 두려웠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나았다. 자신을 어리석고 한심하다고 여기는 것보다는.
‘아, 아버님.’하고 연무진은 흐린 목소리로 연무의를 불렀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연무의가 불쾌하다는 듯이 연무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였을 텐데.”
그 말에 연무진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연무진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연무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연서강이 말로야 기연조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고 그에 실망하여 본채로 돌아왔다고 이야기 했지만, 그 속내까지 그런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기연조와 뒷말로 공모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또 지금은 정말로 기연조에게 실망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기연조가 잘못했다고 하면 돌아설지도 모를 일이 아니더냐. 무진이 너라면 어쩌겠느냐.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던 이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았더라도, 그렇게 바로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그 이를 방해하고 해치겠느냐?”
연무진이라면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혀 당분간 두문불출할 것이다.
“안 그러느냐? 나는 갑자기 녀석이 황후마마의 일에 관심을 갖고 돕겠다며 나선 것이 너무도 수상하게 보인다. 변방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 돌아와 벼슬을 얻고, 또 난전마마를 뵌 후 이번 일이 잘 풀리도록 돕다니.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분노로 일을 저지른 것이라 하기에는 참으로 단계적이지 않으냐. 차라리 기연조의 뒤를 캐 알아낸 것들을 그 정적에게 이르는 편이 좀 더 손쉽고 편한 복수법이 아니지 않겠느냐.”
“.......”
“나는 서강이가 이렇게까지 하는 연유를 도통 모르겠구나.”
연무의의 말을 들으니 그런 듯도 하였다. 그러나 아니다. 아닐 것이다....... 머리를 들려는 의심을 꾹꾹 짓누르며 연무진은 인상을 썼다. 그것은 본채에서 다시 자신을 마주했을 때 연서강이 보인 호의와 대범함에 바치는 경의이기도 했다. 그런 이를 어찌 의심할까.
또 이런 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간 연서강에게선 남을 속이거나 이용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연무진을 대하는 연서강의 태도는 약간 어색한 사이의 형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예우를 다해 자신을 형님으로 대해주는 연서강이 연무진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자신이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번뜩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아, 그렇다. ‘그때’ 연서강이 무어라 했었던가. 떠오른 것은, 과거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연서강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렇군요. 이번 일에 무진 형님은 동참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거기에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더라?
“.......”
연무진은 입을 한 일자로 꾹 다물었다. 갑자기 차가운 얼음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 했다.
허나 연무진은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저었다. 그럴 놈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사모하는 여인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그 여인을 위하여 자신이 팔찌를 골라준 것에 감사하기도 했고, 막내인 연서령과도 곧잘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또 형수님께서는 잘 계시냐고 종종 안부도 물었던 착한 동생이지 않은가. 거짓으로 그리 행동할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이 계속하여 엎치락뒤치락해서 연무진은 도무지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닌 게 당연하지 않나, 싶으면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 어쩌면, 이라고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해서 연무진은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한 번 확인이나 해보자 싶어 입을 열었다.
“아버님.”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자신을 부르는 연무진을 연무의는 조용히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라는 재촉이 없어도 연무진은 연무의가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무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에 대해 아버님께서 연서강에게 말해준 게 언제 적 일입니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집행관처럼 연무의가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연무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송 맺혔다.
가르쳐준 적이 없다고? 허면, 허면 그때의 대화는 어찌된 것인가.
몇 달 전, 연서강과 나눴었던 대화를 선명하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연무진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네가 어찌 그걸 아느냐?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네게 말을 했다고?
-허나 아버님께서 모두 말씀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간단한 심부름 정도에만 저를 쓰실 것 같습니다. 해서 모르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연서강은 분명 그렇게 말을 했었다.
“.......”
때마침 연무의가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의심에 불을 지폈다. ‘어찌된 일인지, 누가 딱히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잘 알고 있더구나. 무강이가 여름에 가르쳐주었다고 하지만 그 전부터 일에 대해서 마치 알고 있는 듯 움직이기는 했지. 헌제 그것을 왜 물어보느냐?’
기이하게도 바로 앞에서 그 무서운 부친이 말하고 있음에도 연무진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때’ 모르는 척 자신에게서 ‘정보’를 캐내던 연서강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연무진의 심장이 큰소리를 내며 뛰었다. 쿵쿵쿵쿵.
물론 당시 연무진도 모르는 척 황후마마에 관하여 가르쳐주기는 했었다. 무강 형님께서 연서강도 이제 우리 집안이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알아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허나 애초에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접근한 것은 연서강이 먼저였다.
연서강이 ‘먼저’였던 것이다.
“.......”
태중에 있는 아이가 여자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안계영의 목소리와 서강이 그놈이 이렇게까지 하는 연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부친의 목소리가 차례로 연무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안계영의 뱃속에 있는 아이, 혹시라도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 짐을 함께 지게 될 내 아이.
연무진은 꽉 주먹을 쥐었다. 차갑고 딱딱한 손톱이 연무진의 손바닥에 박혔다.
“아버님.”
표정을 굳힌 연무진은 연무의를 응시했다.
“제가 무얼 하면 됩니까?”
연무진의 그 말에 연무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허면 문도학을 불러 붙여줄 터이니 그와 함께 일을 처리하도록 하여라.
부친 연무의의 말에 연서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친께서는 당연히 연무강을 자신에게 붙여놓으시리라 여겼던 탓이었다.
‘무강 형님은.’하고 연서강이 말을 꺼내자 연무의가 빠끔 곰방대를 한 번 빤 후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강이 그 녀석은 따로 할 일이 있느니.’ 그 말이 마치 연무강은 너와는 달리 바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연무의의 입가에 띤 미소가 비릿한 것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 표정이더냐? 무강이가 있었으면 하느냐?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었단 말인가?
순간 깜짝 놀라 서둘러 부정을 표했지만 그 말을 연무의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듯 보였다. ‘물론 무강이만큼은 든든하지 않겠지만 문도학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자란다. 이번 기회에 안면을 트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연무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제 황후마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게 되었으니 같은 편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알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며 연서강은 일단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불안감은 아무리 해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부안감이 연서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작 무강 형님과 함께 일할 적에는 빨리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빌어 놓고서는, 그래놓고서는 연무강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일하게 되었다고 불안해지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지는 못할망정.
마음이 불안한 것을 단순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연서강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내가 문도학을 내일 네게 보내도록 하겠다.
-잘 알겠습니다.
성헌당으로 연무진이 당도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연서강은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연무진을 떠올렸다. 그리고 짧지만 분명히 걱정의 빛이 스치는 그의 눈을 보고 잠시 미안해하는 마음을 품었다.
저자의 소녀가 죽은 이후, 마음이 괴로워 녹우당에 틀어박힌 채 다른 사람의 방문이라곤 일절 거절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가 거절했던 사람들 중에는 가족인 연서령과 연의진, 연무진도 당연히 있었다. 잔뜩 걱정만 끼친 주제에 비교적 멀쩡한 꼴로 성헌당에 와 있었으니 연무진이 얼마나 기가 찼을까 싶었다. 나중에라도 제대로 얼굴을 보고 걱정해주어서 고맙다고 연무진과 연서령, 연의진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헌당을 나오니 벌써 날이 저물어 사위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하인 하나가 초롱을 손에 들고 ‘녹우당으로 가실 거면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냈으나 연서강은 손을 저었다.
녹우당으로 갈 생각이기는 했으나, 초롱불을 앞세워 걸을 만큼 주변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끌고 가봤자 괜히 정신만 사나워질 듯 하여 따라붙는 자들을 모두 뿌리치고 연서강은 혼자 녹우당으로 뚫려 있는 길 위를 걸었다.
녹우당이 가까워지자 아마도 홍월정 뒤쪽 숲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나면 뚝 끊겼다가 이내 잠잠해지면 다시 귀뚤귀뚤 우는 소리는 녹우당과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점점 커져, 마침내 녹우당에 이르렀을 때에는 길거리에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소리만큼 커졌다.
제대로 뜰을 관리하지 못한 탓에 잡초들이 우거져 귀뚜라미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 된 모양이었다. 죽기 전 가을에 들었던 것보다 확연히 커진 소리에 연서강은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귀뚜라미라도 이전보다 살기 좋아져서 다행인가.
주변이 완연한 암흑으로 휩싸이기 전에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 호롱에 불을 밝혔다. 화륵 타오른 불꽃은 등잔에 담긴 기름의 양이 얼마 되지 않는지 지나가는 바람에도 거세게 흔들릴 만큼 약했다. 등잔에 채울 기름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그는 한참을 녹우당 안을 뒤져야만 했다.
녹우당의 살림을 맡은 모씨 아줌마를 불러 물어봐도 될 일이었지만, 홀로 녹우당에 처박히면서 모씨 아줌마까지 본채로 보낸 지 오래였다. 자기 좋을 대로 아무도 녹우당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만든 벌을 이제야 받는가 싶었다.
약 두 시진쯤 지나서야 찬장 구석에서 기름을 찾아내고 연서강은 마악 꺼지려는 호롱불에 서둘러 기름을 부어넣었다. 희미하게 타오르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불꽃이, 거짓말처럼 화악 타올랐다.
“.......”
그제야 연서강은 방금보다 확연히 밝아진 방 내부를 여유를 갖고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간 내도록 틀어박혀 있었던 곳이기는 했지만 그저 숨만 쉬며 멍하게 있었을 뿐, 뭔가 행동을 한 적이 별 없었기에 녹우당 안은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바닥에 탑을 이루고 있었고, 무언가를 찾는다고 어지럽게 꺼내놓은 자질구레한 물품들도 그대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집안으로 멋대로 들어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떠돌다 수명이 다해 죽은 작은 곤충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기까지 했다. 장마철이 지난지가 언젠데 방안에서는 장마철에서만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정리가 안 된 방안은 마치 죽어 있는 생물체의 복부와도 같았다. 내부의 것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수습될 기미도 안 보이고 과거의 찌꺼기들이 내부에 흡수도 되지 않은 채 널려있어 그 안에 존재하는 생물까지도 함께 부패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참으로 아늑했었던 공간의 이런 변모가 연서강은 못내 씁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할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이 신기했다. 허나 이미 연서강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후유증과 비슷했다. 허탈함과 허무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메워져 어떤 의욕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른 곤충들의 사체와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안에, 자신 역시 그 틈바구니에 끼여 그대로 부스러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 된다.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겉옷을 벗어 적당한 곳에 놔둔 다음 연서강은 찬장과 서탁의 서랍을 뒤졌다. 눈에 익숙한 생활물품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허연 편지봉투까지도 방바닥 밑으로 떨어져 눈처럼 쌓였다.
연서강이 찾던 것이 바로 이 편지들이었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었는지 손때가 묻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연서강은 무덤의 봉분처럼 쌓여있는 편지들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오래된 종이가 주는 특유의 느낌이 손가락 끝으로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려고 모아둔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의 위로가 될 만한 편지 몇 개를 소중히 품고 본채로 갔던 것도 벌써 몇 달 전의 일이다. 저자의 사람에게 책갈피를 받았던 것도 그 즈음에 있었던 일인 것 같았다. 그때의 일이 참으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까슬까슬한 편지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든 종이를 펼친 뒤 연서강은 그 위로 박혀 있는 검정 붓글씨를 확인했다. 붓에 준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로획의 마무리는 어찌 하였는지, 세로획의 삐침 정도는 또 어떤지, 점은 그리고 어떻게 찍어놓았는지.
세세한 것까지 찬찬히 뜯어보며 연서강은 머릿속으로 기연조가 거승주와 주고받았던 책의 글씨를 떠올렸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연조의 서체가 특징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손안에 든 편지를 바삭 구겨 뭉치며 연서강은 자신의 주변에 눈처럼 새하얗게 가라앉아 있는 종이들을 둘러보았다. 사귀어온 햇수가 길었던 만큼 쌓인 편지들도 역시 많았다. 기연조는 자신이 이것들을 이용할 작정을 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조적인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자신이 기연조를 보고 정녕 그 사람이 맞는가, 외쳤듯이 기연조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겨우 남아 있는 이 고운 추억들에게까지 흙 뿌릴 짓은 차마 하지 못했을 테지.
그러나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연조야.
손에 든 종이뭉치를 호롱불 가까이에 가져다 태우며 연서강은 숨을 삼켰다. 새빨간 화염이 순식간에 새하얀 종이를 가맣게 태워, 아무것도 아닌 재로 만들었다. 꺼먼 재가 연서강의 손바닥 안에서 부스러져 날렸다. 온기를 띤 재는 이제 차갑게 식어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편지는 서체를 보고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의 양뿐이다. 이렇게까지 많은 편지는 필요치 않았다. 남겨 두어봤자 앞으로 쓸 곳이 없을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뒤가 잡혀 증거품이 될 수 있으니 나머지 양은 모두 태워서 없애버리는 게 좋았다.
단문의 편지부터 하나씩 호롱불에 태우며 연서강은 앞으로의 행동을 방해하는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정리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시끄러웠고, 방안은 종이 타는 냄새와 잿빛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로 눈이 따갑고 흘러나오는 숨이 모래알처럼 버석거렸다.
* *
“그 놈이 수상한 짓을 하면, 네가 그놈을 처리하여라.”
연무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탈이 없게 연서강을 죽이란 말이다.”
동생을 죽이라는 매정한 부친의 말에 연무진은 굳은 얼굴로 하염없이 부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나 반발할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연속된 충격으로 아직까지도 머리가 멍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무진이 간신히 ‘죽이는 것은.’하고 입을 열었을 때 연무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무진아. 이 아비가 그 놈이 수상한 짓을 하면, 이라고 단서를 붙이지 않았느냐. 서강이 놈이 전혀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야 굳이 그 놈을 없앨 이유가 뭐가 있겠누.”
“.......”
“이후로 서강이가 기연조를 만나는 일이 없다면 내가 공연히 그놈을 의심한 것이니,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찌륵 찌르륵, 고요한 가운데 퍼지는 풀벌레 소리는 향수를 자극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산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찌르르륵, 한 밤 내도록 이슬을 주워 먹으며 연명하다 그 다음 날 해가 뜨면 절명하는 풀벌레들의 노래였다.
“후에 만약 그 놈이 기연조와 몰래 만나는 일이 있다면, 분명 기연조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일 테지. 위험 요소는 모두 없애 놓는 게 앞날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느냐.”
“.......”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나 아무 문제도 없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는 게 제일이지. 암, 그렇지 않으냐? 빛도 못 보고 제 모친과 함께 죽어버리면 어쩌누.......”
보드라운 부친의 목소리는 날 선 협박보다도 위험하고 잔혹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무의는 참으로 뛰어난 모사꾼이었다.
연무진이 만 가지의 생각을 해서 말한들 무얼 하겠는가. 연무의는 그에 반박할 수 있는 이만 가지의 생각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자였다. 그러하니 고민을 해 봤자 연무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연무진은 두 눈을 꾹 감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고 눈을 다시 떴다.
“.......알겠습니다.”
연무진의 대답에 연무의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야지, 역시 우리 무진이로구나.”
연무의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을 흡족한 얼굴로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