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 정도는 아녜요.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고 힘들어서, 엄살 좀 부려 봤어요.”
“음, 그래? 그럼 이거부터 해 볼래?”
솔은 지금껏 그래 왔듯.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했던 거짓말이라 무척이나 능숙했다.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올라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솔의 웃음에 은겸은 눈썹을 찡긋해 보이고는 두 팔을 벌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팔을 쭉 뻗고 천천히 손끝부터 팔꿈치를 거쳐, 어깨 관절까지 파도치듯, 부드럽게 움직여 보였다. 흔히 웨이브라고 하는 기본 동작이었다. 솔이 손쉽게 따라 하자 은겸은 관절 마디마디에 힘을 넣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매끄럽게 움직이던 조금과 달리 힘 있게 팔마디가 딱딱 튀어 올랐다. 흔히 팝핑이라고 부르는 움직임이었다. 은겸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솔은 금세 움직임을 파악하고 따라왔다.
이런 식으로 움직여 본 것은 처음이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니 솔은 손목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이내 가슴을 비롯한 무릎 관절까지 각기 움직이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은겸은 솔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동작은 맨 처음 연습생이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기초 중의 기초였다. 그 몇 번의 움직임에서 은겸은 솔에게 그런 기초 따위는 필요 없음을 금세 깨달았다. 본격적인 원곡 센터의 속성 강의의 시작이었다.
눈이 부신 미스터리
미로같이 깊은 밤은 이제 시작해
너는 분명 길을 잃게 될 거야.
신비로운 Trick 비밀스러운 Trap
YOU, YOU, YOU, YOU, YOU, Gotcha
경쾌한 기타 리프와 상반되게 묵직한 베이스가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일레트로 팝이 자그마한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녹음된 은겸의 목소리 위로 조금 허스키하고 기교라곤 없는 목소리가 얹어졌다. 우선적으로 춤에 집중하기로 했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후렴구가 귀에 익어 솔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격한 안무를 소화하며 따라 부르다 보니, 숨이 차올라 음절 중간중간이 끊겼지만 못난 노래 실력은 아니었다.
대형견 같은 지금 은겸의 이미지와 달리 그의 데뷔곡은 가죽 재킷을 입은 반항아 컨셉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화려한 와펜이 잔뜩 붙은 가죽점퍼나 점프 슈트 같은 활동적인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었다.
안무에 유난히 스텝과 뛰는 동작이 많아 비교적 움직이기 편한 탄성이 있는 의상이었음에도 데이블락 멤버의 바지가 찢어진 적이 있었다. 점프 후에 깔끔한 턴, 조금 전에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히 소화했던 솔이 이번에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쉬이 잡지 못했다.
“잠깐 멈춰 봐.”
넘어질 듯 비틀거리던 솔이 중심을 고쳐 잡자 은겸이 그를 멈춰 세웠다. 음악이 중단되었는데도 귀에 완전히 익어 버려 환청처럼 멜로디가 잔류했다. 은겸은 무언가가 불만스럽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거울에 비친 솔과 눈을 마주쳤다.
“왜? 왜. 이렇게 뚝딱거리는 거지…?”
“어….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이해가 안 돼서 그래.”
긴장은 무슨. 은겸의 말에 솔은 눈에 힘을 주었다. 흐리멍덩하게 풀어졌던 눈이 잠깐 또랑또랑해지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초점을 잃었다. 기본 동작을 소화하는 데에 무리가 없음을 확인한 은겸은 본격적으로 안무 숙지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본래 안무 영상을 반복해서 보려 했던 솔은 제 눈앞에서 라이브로 재생되는 완벽에 가까운 은겸의 동작에 감탄을 자아냈다. 쉽게 바닥나는 집중력을 걱정했지만, 솔은 제 생각보다 빠르게 안무를 숙지했다. 옆에서 알려 주던 은겸조차 놀랄 속도였다. 하기야 한평생을 이렇게 안무를 따고 숙지하는 일을 했는데 고작 몇 년 놀았다고 그 공든 탑이 무너질 리는 없었다.
오래된 칼날은 무뎌지기는 해도 폐품이 되지는 않았다. 은겸의 감탄도 잠시,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금의 상황이 시작되었다.
“분명 아직 디테일까지 필요할 수준은 아니지만 동작을 다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삐거덕거리는 걸까?”
“많이 이상해요?”
“아니, 많이 이상한 게 아니라서 더 이상한 거야.”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의 활성화로 춤 능력치가 2단계 하락합니다.]
은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솔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알림창을 노려보았다. 능력치 2단계 하락의 효과를 지금 솔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이었다. 본래 솔의 춤 능력치는 ‘S’. 하지만 두 단계 하락하여 ‘A-’가 되자 동작 간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미묘한 어색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은 학점으로 쳐도 A-면 고학점 아니냐는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A-’라는 수치가 무색하게 두 단계 저하된 춤 실력은 영 문제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A-’는 못 추기는커녕 춤을 잘 춘다고 표현할 수치였지만, S 등급일 때 솔의 춤이 너무도 뛰어났던 나머지 상대적으로 더 못나 보였다.
더불어 계속해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도 한몫했다. 처음보다는 참을 만했지만 불편함이 없을 수는 없었다. 제 다리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허상뿐인 통증이라고 스스로를 가라앉혀 봐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덕분에 불안한 솔의 시선 처리나 겁을 집어먹어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더욱 괴리감을 크게 만들었다.
사정을 아는 솔이 보기에도 이상했는데, 사정을 모는 은겸의 입장에선 납득이 되지 않는 듯했다. 분명 훨씬 더 잘 출 수 있고, 좀 전까지만 해도 잘 췄는데 갑작스레 뚝딱거리는 솔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멋지게 창공을 날아다니던 새가 갑자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족보행을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새가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딘지 뒤뚱거리고 나는 것보다 부자연스러운 그런 느낌.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21%]
[현재 피로도 35/100]
[피로도 관리에 유의하세요! 피로도가 70 이상일 경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솔은 손등으로 땀을 훔쳐 냈다. 그는 긴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땀을 범벅 할 정도로 열정적인 연습을 해서는 아니었다. 그의 몸을 적신 땀은 모조리 식은땀이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쳐 내는 손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떨려 왔다. 피로도는 처음 보는 알림 창이었다. 버스에서 그랬듯이 시야 구석에서 계속해서 +1이 떠오르더니 피로도가 쌓이는 것이었나보다. 솔은 또다시 벌칙이라는 단어에 스트레스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자신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연습해서 퀘스트를 통과하라고 하면서, 정작 연습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주질 않았다. 시스템의 심보가 정말 더러웠다.
“힘들면 좀 쉴래?”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얼굴이 상기되기는커녕 창백하게 질린 솔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확인한 은겸이 물었다. 노래까지 부르며 안무를 소화한 것치고 숨도 고른 편이었지만 솔은 무척 지쳐 보였다. 반복되며 흘러나오던 데이블락의 핫 트릭이 중지되자 솔은 그제야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솔조차 신경 써서 집중해야 느껴지는 그런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거 아니야? 체력 좀 길러야겠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이렇게 움직이는 거라….”
그런 종류의 힘듦이 아니었지만, 솔은 오히려 떨리는 손가락을 더욱 등 뒤로 숨기며 은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잘하잖아? 어제부터 시작했다 해서 사실 좀 걱정했거든.”
“하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어림없겠죠?”
“아니, 음정도 크게 떨어지는 부분 없고 안무도 금방 따라오고. 이 정도면 진짜 금방 센터 먹을 수 있을지도.”
“과대평가예요.”
“진짜야. 근데 욕은 좀 먹겠다.”
“어쩔 수 없죠.”
“재수 없다고, 타고났다고 욕먹겠다고.”
은겸은 몸을 휙 돌려 솔을 바라보고 크게 웃음 지었다. 마치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상쾌한 웃음이라 솔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따라 웃었다. 은겸의 말처럼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사실 상황은 닥쳐 봐야 아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좁은 방에서 은겸과 단둘이 연습하는 거지만 평가 때는 필시 지켜보는 눈이 많을 거다.
저번처럼 또 영문 모를 통증을 느끼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게 될지도. 아니, 평가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조금 뒤 오후에 다른 멤버들과 연습, 레슨을 받는 것부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 봐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불안한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좀 쉬었다가 해. 점심시간이야.”
은겸의 말에 솔은 핸드폰 화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느지막이 시작하기는 했지만, 어느새 시곗바늘이 1시를 넘어 있었다.
“같이 먹자 하고 싶은데, 점심에 선약이 있어서.”
“괜찮아요. 딱히 배 안 고파서 그냥 조금 더 연습할게요.”
솔은 숨을 고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도 안 먹었지만,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태로 뭘 먹었다간 단단히 체해 고생할 것 같았다. 차라리 빈속인 편이 나을 거 같아 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솔의 모습이 식사도 거르고 연습에 매진하는 열정 과다로 보였는지 은겸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너무 욕심부리는 거 아니야?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어. 너.”
“다른 애들한테 폐는 끼치지 말아야죠.”
“폐? 그만하면 됐지. 너희 조에 누가 있는데?”
“어…. 윤태오?”
“아, 태오랑 지호. 걔네?”
“네.”
“음. 욕심부려야겠네. 완벽주의자 모임이잖아. 좀 미안하네.”
“뭐가요?”
“너희 일정 지연돼서 이렇게 주말 평가 돌리는 거. 아마 나 때문일 거야.”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라는 듯, 은겸은 멋쩍게 웃으며 눈썹을 매만졌다. 딱히 솔로 활동에 큰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욕심이 생길 만한 노래가 손에 들어오고 말았다. 딱 듣는 순간 그룹이 아니라 홀로 온전히 소화해 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이제 5년 차,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 이른 솔로 활동이었다. 사실 그 유명한 ‘은겸’이기에 얻어 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데이블락 내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그였고 명실상부한 블루칩이었다. 데이블락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할 때도 은겸은 개인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팀과 분배했고 그 덕에 지금의 데이블락이 있을 수 있었다.
이번 솔로 활동은 그런 고생을 감내한 은겸에게 팀과 회사가 주는 선물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던 은겸도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반겼다.
“A&R 팀 다 나한테 붙어 있거든. 내가 갑자기 솔로 활동한다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