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호와 은겸은 연습생 시절부터 꽤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심지어 지호와는 본래 같은 데뷔조에서 함께 데뷔할 날을 기다리던 동료였었다. YC에서 6년, 10대 시절을 보낸 태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태오가 형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아이돌이란 꿈 하나로 어떻게 버텨 왔는지 은겸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그 두 사람과 좁은 방에서 부대끼며 살았었다. 그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형들에게 치대느라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훤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가 겪었을 좌절의 순간들도. 그래서 그런지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은겸은 멋쩍게 눈썹을 매만지며 솔을 흘깃 곁눈질했다.
제삼자로서 평가할 때 솔은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딱히 꾸미는 취미가 없는지 방치하고 있는 얼굴이, 보는 사람이 아까울 정도로 그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모르긴 몰라도 방송국을 다 뒤져도 그보다 뛰어난 외모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몸을 쓰는 센스도 있고 무용을 오래 해서 근육을 쓰는 이해도도 높았다. 거기다 무용 특유의 감정 전달과 연기도 몸에 배 있었다.
왜 무용을 그만두고 여기에 와 있는지 의뭉스러울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노래도 나쁘지 않았다. 기교 없이 퍽 순진해 빠진 발성이었지만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갖추면 메인 보컬까지는 무리더라도 서브 보컬은 충분했다. 선배인 은겸마저도 솔의 가능성과 재능 앞에선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미래를 염두에 둔 평가였다.
안타깝게도 태오와 지호 모두 당장에 데뷔할 수 있는 갖춰진 멤버를 원했을 것이다. 벌써 몇 번이고 데뷔가 무산되었기에 여유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데뷔조 구성원의 이름을 듣고 나니 솔이 저리 말을 하는 것도 내심 이해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정황상 자신 때문에 더 늦어지는 것도 사실이니 은겸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정을 몰랐더라도 도와줬을 테지만, 앞으로도 틈틈이 솔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의 연습에 데뷔 초의 기분도 낼 수 있어 즐거웠고 솔의 모습이 어딘지 안쓰러워 퍽 눈에 밟혔다. 겸사겸사 태오와 지호에 대한 죄책감도 덜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은겸이 짧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솔은 약속이 있다며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솔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슬쩍 웃음 지은 그는 시계를 확인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팽개쳐 두었던 노트북을 챙겨 들고 연습하며 거추장스러워 접어 올렸던 바짓단도 정리했다. 황급히 연습실을 뛰어나가던 은겸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 솔의 어깨를 두들겼다. 손에 잡히는 둥그런 어깨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밥 먹고 연습해. 체력도 좀 키워야겠다. 이거 했다고 벌써 이렇게 힘들어하면 어떻게. 너무 말랐어.”
“신경 쓸게요.”
“이따 시간 나면 다시 한번 들를게.”
“괜찮아요.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었어요.”
“나야말로 진짜 괜찮아. 오랜만에 데뷔 때 생각나고 재미있었어. 아무튼, 이따가 보자. 화이팅!”
“네, 감사합니다.”
“친구 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지 말아. 어색하잖아. 그리고 꼭 밥은 먹고 해!”
얼마나 오래 알았다고, 은겸은 끼니를 거른다는 솔의 말에 잔소리를 한 다발 토해 냈다. 어색함이 남아 있는 솔과 다르게 은겸의 행동거지는 예전부터 쭉 알았던 것처럼 친밀했다. 뒤늦게 그와의 거리를 벌리려 솔이 손사래를 쳤지만 은겸은 더 크게 웃으며 귀염성 있게 응원까지 해 보였다.
점점 멀어지는 은겸의 발소리조차 연습실에 남지 않게 되자 정적이 찾아왔다. 좁은 연습실이 갑자기 넓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비로소 혼자가 되자 솔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한 앞머리로 아무리 가려 봐도 가릴 수 없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 은겸의 말대로 썩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완벽히 혼자가 되자,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손이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봐야 언뜻 보일까 말까 했던 미세한 떨림은 약물 중독자라도 된 것마냥 벌벌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몰려왔다. 너무도 춥고 몸이 무거워 솔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연습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누웠다. 거칠고 먼지투성이인 바닥이 뺨에 닿았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에까지 닿자, 솔은 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댄스 플로어 아래의 빈 공간에 바람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났다.
무용을 할 때에도 이따금 하던 행동이었다. 점프나 테크닉적인 동작을 할 때 발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댄스 플로어 아래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탄성이 있는 소재의 나무를 사용해 그 공간 위에 바닥을 만들면, 착지할 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닥에 이렇게 귀를 대고 있으면, 누군가가 플로어 위를 걷는 소리나 그 위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통로를 따라 바람이 흘러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익숙한 소음은 솔에게 약간의 안정감을 선사해 주었다.
떨림과 추위가 조금 잦아들자 솔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지 걱정이 들었다. 구석진 자리에 반짝이는 퀘스트 창이 두려워, 일단은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저 억누르고 참기만 하는 이런 방법이 언제까지 먹힐지 확신이 없었다. 곧 잠들 것처럼 한껏 웅크린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며 솔은 아주 잠시만,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만 쉬었다가 다시 연습해야지 생각했다. 눈물을 하도 흘려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이 퍽 무거웠다.
***
끝을 맞이한 노래가 아주 잠시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금 재생되었다. 간신히 숨을 고를 시간을 두고 반복 재생되는 노래는 <데이블락>의 <핫 트릭>이었다. 반항아 컨셉 탓일까, 핫 트릭의 후반부 안무는 도망치는 듯 달리는 동작이 많아 어지간하면 흔들림이 없는 태오에게도 조금 버거웠다. 가람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잠시도 쉬지 말고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노래를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꺼 버렸다.
“형, 배고파요.”
“밥 먹고 하자.”
“짜장면 먹고 싶어요.”
“영호 형, 중국집 앞에서 잠복근무하고 있을걸?”
“그럼 아이스크림….”
“득용아…. 근데 그건 나도 먹고 싶다.”
득용이 후드 티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판판한 제 배를 두들기며 구시렁거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득용이는 신인 개발 팀 팀장님의 닦달에 못 이겨 식단을 하는 중이었다. 닭가슴살과 샐러드만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마냥 짠한 눈으로 쳐다보기엔 너무 많은 양을 먹었다. 늘 멤버들의 식사를 살뜰하게 챙기는 지호가 제한을 두는데도 득용은 배가 안 찬다며 앉은 자리에서 닭가슴살을 서너 개 먹고는 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든든히 먹겠다고 시리얼을 한 사발을 먹고 온 득용은 입을 열 때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을 하나씩 말했다. 그런 득용의 옆에 나란히 앉아 발목을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지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식단 때문에 홀로 힘들어하는 득용을 배려해서 멤버들도 되도록 야식이나 군것질을 자제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호도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 지가 아득했다. 맞장구치는 지호의 모습에 태오는 시계를 확인했다.
“배? 배고파, 배고파, 꼬르륵, 꼬르륵.”
노래하는 걸 원체 좋아해서 잠시도 소리가 비는 걸 용납 못 하는 지호가 어린이들이 부를 법한 노래를 불러 댔다. 만화 캐릭터들이 부르는 노래였는데 멤버들 모두 만성이 되어 대수롭지도 않았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득용이 특유의 걸걸하고 강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성량이 좋은 지호의 목소리가 연습실 밖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성솔 데리고 올게요.”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
“그냥 같이 나가.”
“됐어. 1분이라도 쉬어.”
“너도 쉬어.”
“쉬고 있어, 데리고 올게.”
늘 조용하고 느른한 가람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조금 날카로웠다. 힘든 시기였다. 모두 다 살짝만 건드려도 터져 버릴 것처럼. 애써 내색하지 않지만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도지호도 저 우습지도 않은 동요를 부르고 앉아 있는 거였다. 어떻게든 처지는 분위기를 막아 보려고,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여유를 주려고. 거듭되는 연습과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자책하는 청춘이 지하 방 한 칸, 이곳 연습실에 모여 있었다.
태오는 2번 연습실의 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굳게 닫힌 문에 기댄 태오의 어깨가 처져 있었다. 아주 잠깐 지친 표정을 드러내었던 태오는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다시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태오는 타이밍을 잘 맞췄다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광이 형.”
“어, 윤태오네. 너 아직도 있었냐?”
“안녕하세요. 6번 연습실 저희 멤버가 쓰고 있는데 금방 정리해 드릴게요.”
“아냐, 나 그만뒀어. 인마.”
“네?”
“짐 정리하러 온 거야.”
성광의 대답에 태오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썩 편안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떠난다는 말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YC에서 가장 오래된 연습생이 성광이었다. 태오가 YC에 들어왔을 때 성광은 숙소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제일 맏형이자 제일 오래된 연습생으로 은근한 텃세를 부렸었다. 그럴 때마다 늘 눈치를 봐야 했던 건 막내였던 가람과 태오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엔 득용이었고.
나이가 어린 친구들은 그를 늘 불편해했었다. 특히나 어린 나이에 월등한 비주얼과 피지컬을 가지고 숙소에 들어왔던 태오는 그의 주된 괴롭힘 표적이었다. 일종의 질투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태오가 그를 무시하지 않았던 건 성광이 늘 제 입으로 ‘나는 절대로 그만 안 둬. 회사에서 절대로 내 발로 안 나간다.’라고 말하는 그 악착같은 끈기 때문이었다.
성광은 정말로 꿋꿋했다. 연습생 숙소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좁고 작은 숙소에는 매일같이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성광은 나이도 많았고 춤도 사실 그리 잘나지 않았으며 노래나 외모도 기껏 해 봐야 보통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가 날엔 늘 동네북처럼 깨지기 일쑤였는데 모두가 모진 평가를 듣고 속상해 칭얼거릴 때도 성광만은 눈에 독기를 품고 이를 악물었었다.
제 발로는 절대 회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던 성광의 입에서 연습생을 그만둔다는 말이 나오니 기분이 참 묘했다. 결국 이리되는구나 싶으면서도 그런 성광의 모습이 태오는 꼭 제 미래같이 느껴졌다.
“연습생 그만두시는 거예요?”
“어.”